소설리스트

65화 (65/151)
  • “제가 드리려던 말씀은 전하를 위해서 기꺼이 제 평판을 걸 테니, 전하께서도 제게 사소한 친절을 베풀어 주시길 바란단 거였어요. 제가 좀 더 에스페다에 제대로 자리를 잡을 수 있도록요.”

    “…….”

    “저는 욕심이 아주 많거든요.”

    그 말과 동시에 춤곡이 끝이 났다. 이벨린은 드레스를 붙잡고 우아하게 무릎을 굽혔다 폈다. 그때까지 기막힌 듯 그녀를 바라보던 그가 비식 웃음을 물었다.

    “춤을 추는 걸 보면 비센테가 어디서 영 근본도 없는 것을 주워 온 것은 아닌 것 같긴 한데.”

    “또, 그런 말씀이시라면….”

    “네 제안이 제법 재미있게 들리긴 해. 따져 보면 내가 손해 보는 것도 아니고. 안 그래? 고작해야 너와 차나 몇 번 마시는 것으로 얻기엔 과한 이득이지.”

    “그러면….”

    “그 전에, 네가 봐야 할 게 있는 것 같군.”

    그녀의 양어깨를 움켜쥔 그가, 이벨린의 몸을 강제로 어느 방향을 향해 돌렸다. 대체 뭘 보라는 건지….

    다소 짜증스럽게 눈매를 찌푸렸던 그녀는 순간 묘한 위화감을 느꼈다. 연회장의 끄트머리에 파르디타가 웬 남자와 함께 서 있는 것이 보였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풍기는 분위기가 묘하게 익숙했다.

    빛이 너무 강렬해서 순간은 잘 보이진 않았지만…. 이벨린은 이마에 손차양을 만들어 붙인 채 눈을 가늘게 좁혔다가, 그대로 멈칫했다.

    파르디타 곁에 서 있던 남자의 얼굴은 지독하리만치 익숙했다. 그리고 동시에, 그녀가 에스페다에서 마주치지 않기를 간절히 바랐던 남자였다.

    카터 에일레이 윈스포드. 그였다. ‘이벨린’의 약혼자.

    카스트로가 그녀의 어깨를 다정하게 붙잡으며 속삭였다.

    “파르디타가 제법 깜찍한 짓을 했어. 그렇지?”

    파르디타가 장갑을 가져간 이상 언젠가 이런 일이 오게 될 것이라곤 생각했지만, 지금은 시기가 좋지 못했다. 일부러 이날을 골라서 기다린 것처럼, 그녀가 스스로 움직여 카스트로까지 쥐려는 찰나에.

    “대체, 무슨… 말씀이신지.”

    애써 동요를 삼키며 입을 연 순간, 주변을 둘러보던 카터의 시선이 정확하게 그녀에게 닿았다. 놀란 듯 휘둥그레진 얼굴은 어딘지 모르게 얼빠진 것처럼 보였다.

    카스트로의 웃음소리가 조롱처럼 귓가에 진득하게 들러붙었다.

    “저것부터 잘 해명해 봐. 만족할 만한 답을 들고 오면 그땐 네 말대로 하지. 시간이든 무엇이든 네가 원하는 만큼 내게서 얻어 갈 수 있다고 약조해.”

    “…….”

    “그러면 행운을 빌지, 이벨린.”

    ***

    “물론 두 분이서 푸셔야 할 회포가 많다는 건 알지만….”

    “아주 잠시만 자리를 비켜 주시면 됩니다, 비탈리 영애.”

    “목적을 이루셨다고 저를 이렇게 버리실 심산이신가요?”

    “고작 몇 분간만 미루자는 겁니다. 지금 당장은 저도 혼란스럽고, 머릿속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해서요. 이벨린… 그러니까, 로즈 레녹스 백작 영애와 단둘이 대화를 나누어 볼 시간이 필요합니다.”

    “…….”

    “어떤 오해도 있어선 안 되니까요. 잠깐 대화를 하고 나면 숨기는 것 없이 사실대로 공유해드리겠습니다.”

    “…좋을 대로 해요. 단, 20분은 넘기지 말아요.”

    “그러겠습니다.”

    파르디타는 신경질적으로 눈썹을 치켜올리고는 테라스의 문을 쾅 닫고 사라졌다. 잠깐의 침묵이 흘렀다. 고집스럽게 바닥을 바라보는 그녀의 귓가에 카터의 애달픈 음성이 닿았다.

    [이벨린.]

    그녀를 알아본 목소리가 이미 확신에 가득 차 있었다. 그가 다가오는 잠깐 사이에도 이벨린은 강박적으로 주변을 확인했다. 근처에 사람은 없는지, 그들의 대화가 누구에게 들릴 만한 위치는 아닌지….

    테라스 간 간격이 넓어 그럴 만한 장소가 없다는 걸 알면서도, 이런 것에라도 신경 쓰지 않으면 차마 긴장감을 어쩌지 못할 것만 같아서.

    “…….”

    그나마 다행인 것은 아직 그가 이벨린의 정체에 대해서 발설하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설득의 여지가 있을까? 그럴 수만 있다면, 수습할 방법은 얼마든지….

    [이벨린.]

    이름이 한 번 더 불리고 나서야 이벨린은 고개를 들어 카터를 응시했다. 그리고 여태 카터가 저를 어떤 얼굴로 바라보고 있었는지를 그제야 깨달았다. 다감한 갈색 눈이 처참하게 일그러진 채로 그녀를 머리에서부터 발끝까지 훑었다.

    하얗게 분칠한 가슴골이나 훤히 드러낸 어깨, 그 위에 얹어진 흰 털 모피와 짙은 초록색 드레스, 값비싼 에메랄드 목걸이 따위를….

    [저는….]

    [네가 아니라고 말할 생각은 하지도 마.]

    순식간에 거리를 좁힌 그가 그녀의 양손을 절박하게 붙잡았다. 변명은 벌써 무용했다.

    이벨린은 입술을 몇 번 꾹 깨물었다가 속삭이듯 입을 열었다.

    [어떻게… 왔어?]

    비탈리의 손을 거쳐 브리타냐에서 들어오는 배는 모두 다 검열 중이었는데….

    차마 입 밖으로 내뱉지 못한 말을 짐작했는지 침묵이 길었다. 그래, 말문이 막힐 만도 했다. 그는 유독 그녀의 외면을 견디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이렇듯, 전혀 달갑지 않다는 듯한 태도에는 내성조차 없으리라.

    그가 새파랗게 질린 입술을 겨우 열었다.

    [특별 사절로 온 사람이 내 외삼촌의 친우분이셔. 운이 좋았지.]

    “…….”

    [이벨린. 제발, 피하지 말고 나를 봐.]

    기억 속 그대로 다정한 음성이 해묵은 죄악감을 부추겼다. 만약 다른 선택지가 있었다면 카터는 죽어도 이런 식으로 나타나진 않았을 것이다. 철이 든 이후로부터 그는 그녀가 부담스러워할 만한 일은 무엇이든 눈치껏 피해 왔으니까….

    상류층의 우아한 발음을 과시하듯 ‘이블린’이라 부른 적도 없었고, 재력을 과시하거나 수도원의 다른 이들 앞에서 그들의 관계를 드러낸 적도 없었다.

    그래, 그들의 관계는 단 한 번도 당당했던 적이 없었다.

    오로지 ‘이벨린’이 그것을 꺼려 했기 때문에. 카터의 인생에 오점으로 남는 것을 두려워할 만큼 그를 아꼈기 때문에….

    죄책감에 얼굴을 들 수조차 없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