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4화 (64/151)
  • 시선을 조금 내리자 그의 목울대가 일렁이는 것이 보였다. 그녀가 아주 맛있는 것이라도 되는 양, 노골적으로 침을 삼키는 것은 조금 우스웠다. 카스트로는 제 가슴팍을 지분거리는 그녀의 손을 꽉 움켜쥔 채 붙잡아 내렸다.

    그녀의 고통 따윈 안중에도 없다는 듯 부서트릴 듯 구겨 잡힌 손이 아팠다. 이벨린은 내색하지 않은 채 말갛게 웃었다.

    “부탁이에요.”

    “…….”

    기가 막힌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던 카스트로가 이윽고 사납게 그녀를 홀로 이끌었다. 홀의 한복판으로 나서자 역병이라도 된 양 사람들이 원을 그리며 물러서는 것이 보였다.

    이벨린은 제게로 쏟아지는 경악 어린 시선들을 담담히 마주했다.

    ‘황태자에게 먼저 다가가 춤을 청한 2황자의 약혼녀라는 꼴이 보기에 참담하겠지.’

    카스트로는 어떤 것도 신경 쓰지 않은 채 오로지 그녀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정확히는, 곁을 의식할 정신조차 없어 보였다.

    그녀가 누군가의 시선을 느끼고 막 그쪽을 향해 고개를 들었을 때였다. 카스트로가 그녀의 턱을 우악스럽게 붙잡아 제게로 돌렸다.

    “내게 집중해.”

    “…….”

    “네가 원한 거잖아.”

    이윽고 첫 선율이 연주되었다. 카스트로는 겉모습은 그럴듯하게 생긴 사내였고 왈츠는 그가 성년이 된 이후부턴 밥 먹듯이 춰 댔으니 두 사람은 적어도 멀리서 보기엔 제법 훌륭하게 보였을 터였다.

    그가 배려 없이 그녀를 거의 휘둘러 대고 있긴 했지만… 이미 익숙했다. 사실 전생까지 포함하면 하루 이틀 당하던 일도 아니었으니. 이벨린은 웃음을 잃지 않은 채 그를 마주했다.

    ‘만약 카스트로가 정말로 내 몸을 보관하고 있다면…. 일단은 그의 경계심을 어느 정도 누그러트릴 필요가 있어.’

    그리고 아멜리아도. 만약 카스트로와의 관계가 아멜리아의 의지가 아니라고 한다면, 분명히 약점을 잡힌 것일 테니까….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지? 응?”

    “아….”

    그가 예고도 없이 그녀의 허리를 뒤로 젖혔기 때문에, 이벨린은 하마터면 그대로 중심을 잃고 바닥으로 쓰러질 뻔했다. 그녀는 카스트로의 손에 가까스로 매달린 채, 다시 우아하게 상체를 일으켰다. 마치 처음부터 합을 맞춰 둔 동작인 것처럼 자연스럽게.

    그 뻔뻔한 대응에 카스트로가 짧게 혀를 찼다.

    “머리 굴려 대는 소리가 다 들리는군, 그래.”

    이벨린은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사르르 웃었다.

    “티가 많이 났나요?”

    카스트로의 미간이 일그러지려는 찰나에 이벨린이 재차 말을 이었다.

    “전하의 말씀이 맞아요. 긴히 제안을 드릴 것이 있거든요.”

    “제안? 저번부터 주제 파악을 못 하는군.”

    “제가 일전에 전하의 시간을 사고 싶다고 말씀드렸던 것을 기억하세요?”

    이벨린은 카스트로의 반감 어린 태도가 들리지도, 보이지도 않는 것처럼 수줍게 웃었다. 그들의 표정이 보일 정도로 가까운 거리에 서 있던 사람들은 그녀와 카스트로가 아주 근사한 정담을 나누고 있다고 확신할 터였다.

    정작 그녀의 귓가엔 이죽거리는 목소리가 박히고 있는데도.

    “일전이라. 네가 비센테와 짜고 날 엿 먹였던 그날에 대해 말하는 건가?”

    “그렇게 나쁘게만 생각하지 마시고요. 저도 그날은… 당황했었다는 것을 부디, 이해해 주셨으면 해요. 2황자 전하께서 그렇게 오신 것이 제 의사도 아니었고요.”

    “…….”

    “제 새로운 제안은 이거예요. 저를 전하의 사람으로 받아들여 주신다면 전하께서 잃어버렸던 평판을 다시 돌려드릴게요.”

    대체 무슨 꿍꿍이냐는 듯 가늘어졌던 눈 그대로 그가 짧게 코웃음을 쳤다.

    “네가? 무슨 수로?”

    “벨몬테의 사교계는 늘 흥밋거리에 목말라 있죠. 피 냄새를 풍기면 천박한 상어 떼처럼 달려들어 고상한 입들이 너절해지도록 물어뜯고, 흥미가 떨어지면 또 다른 희생양을 세우고.”

    “…….”

    “그러니까 이렇게….”

    춤곡의 선율이 아슬아슬하게 늘어지는 순간에, 이벨린은 카스트로의 크라바트를 잡고 그의 얼굴을 조금 더 제 쪽으로 가깝게 끌어당겼다. 모든 것을 각오했다고 생각했는데, 차마 입술을 완전히 가져다 붙일 수는 없었다.

    그녀는 숨결이 섞이는 지점에서 멈췄다.

    “제가 지금 당장 전하에게 입을 맞추는 시늉을 하기만 해도.”

    “…….”

    “감히 황태자 전하와 2황자 전하 사이에서 저울질을 해 대는 헤픈 여자라는 기사가 내일 신문의 1면을 도배하겠죠. 사람들의 손가락은 즉각 저를 향할 거예요. 저는 에스페다 출신도 아닌 브리타냐 출신의 계집이고.”

    “…….”

    “사람들은 언제나 저와 다른 것에 박하니까….”

    그가 헛웃음을 터트렸다. 이게 뻔한 수라는 것조차 깜박 잊어버린 절박한 낯이었다.

    “시모라로는 만족을 못 하겠어? 그 새끼로 부족하다는 게 이해가 안 되는데.”

    “전하께서 왜 그런 말씀을 하시는지 알 것 같아요.”

    이벨린은 낭랑하게 소리 내어 웃었다.

    “파르디타에게서 이야길 전해 들으셨던 모양이죠? 제가… 음, 설득되지 않는다고요.”

    “잘 아는군.”

    “그때는 에스페다에 온 지 얼마 안 된 시점이었잖아요. 전하께선 제게 진지해 보이시지도 않고… 그러니, 그 당시엔 제가 잡을 수 있는 최선은 2황자 전하뿐이었어요.”

    “그리 확고하던 생각이, 고작 몇 주 만에 바뀌었다?”

    “하루아침에도 바뀌는 게 사람의 생각인걸요.”

    “…….”

    “그리고, 저는 오래오래 평온하고 싶어요.”

    “…….”

    “전하께서 황제가 되시면, 가장 먼저 하실 일을 저는 알 것 같거든요.”

    그녀의 말에 그가 사납게 웃었다. 뒤이어 그녀의 허리를 붙잡아 당기는 힘에 의해 아래가 아프도록 부딪혔다. 이벨린은 입속의 자잘한 신음을 삼켰다.

    “아주 되바라지기가 짝이 없어.”

    “…….”

    “감히, 네깟 게 내 의중을 다 이해하는 척.”

    “괘씸하게… 들렸다면 부디 용서하세요.”

    이벨린은 정말 그럴 의도는 없다는 듯, 말간 눈을 느릿하게 깜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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