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3화 (63/151)

“마지막으로 오늘 우리가 할 일을 짚어 보죠. 저는 오늘 귀족들에게 2황자 전하께서 제게 청혼했다는 소문을 흘리고 다닐 계획이에요. 그러기 위해, 이렇게, 시에나 전하의 티아라도 빌려 왔고요.”

이벨린은 제 머리 위에 얹어진 라 카벨로스의 티아라를 슬쩍 가리켰다. 시모라의 안주인들에게 대대로 이어져 내려온 이 티아라는, 그저 머리 위에 얹고 다니는 것만으로도 2황자의 약혼녀라는 증명이 될 터였다.

시에나는 빌려주는 것이 아니라 아예 준다고 했지만, 귀한 것을 이런 너저분한 계획에 사용하는 것부터가 면구한 일이었다.

“그리고 황태자 전하의 접근을 유도, 적당히 상대하고 있으면 루카스 경이 술에 약을 타서 가져올 거고요.”

“…….”

“자연스럽게 술에 취해 연회장에서 퇴장하면 새벽쯤 황태자께서 저를 겁박하는 것을 보았다는 증인이 나타나겠죠.”

“…….”

“그리고 ‘이벨린’은 황태자 전하의 침실에서 시체로 발견되고요. 우리가 폰페라다 성에서 연습했던 것처럼요. 여기까지가 제가 아는 우리의 계획이에요. 제가 잘못 알고 있는 부분이 있나요?”

“맞습니다.”

순식간에 정리된 흐름에 루카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날을 위해 이벨린은 근 열흘간 내내 사교계의 굵직한 인사들의 살롱에 참여해 사소한 눈도장을 찍고, 쌍둥이 의상실 자매들에게 비센테와 약혼이 임박했다는 소문을 흘렸으며, 대귀족들에겐 선물을 보내며 우호적인 관계를 다져 놓았다.

적어도 표면적으로나마, ‘이벨린’이 변고를 당했을 때 순간적인 동정 여론이 일어나도록.

엔리케와 세부적인 사항을 다듬은 계획은 이미 더없이 완벽했다.

아무것도 모르는 두 사람에겐 미안했지만…. 그녀는 차분히 심호흡을 몇 번 했다.

다시금 반짝 뜬 눈엔 전에 없던 결기가 새파랬다.

“그러면 바로 들어가 보도록 하죠.”

***

“정말… 근사한 티아라예요, 레녹스 백작 영애.”

“감사해요.”

그녀는 몇 번째인지 모를 치하를 우아한 웃음으로 받았다. 이번에 그녀를 둘러싼 것은 이번 연도에 갓 데뷔한 어린 영애들 다섯이었다. 열여덟에서 스물 사이의…. 비교적 사교계의 때가 덜 묻은 순진한 눈들이 질투와 선망을 고스란히 드러내며 이벨린의 머리 위를 바라보았다.

황족, 혹은 그들의 혼약자에게나 허용되는 티아라를 그녀가 공개적으로 쓰고 있다는 건, 사실 하나만을 의미했다.

“황태후 폐하께서 이것을 쓰셨을 때 정말 아름다웠다고, 저희 어머니께서 그러셨는데….”

“막상 제가, 이렇게… 보게 될 줄은 몰랐어요.”

“그것도… 2황자 전하께서… 여인에게 이것을 주실 줄은….”

그들은 하나같이 창백한 낯들로, 말문이 막히면 막히는 대로 돌아가며 겨우겨우 문장을 이어댔다. 울 것 같은 얼굴로 여태 버티는 속셈은 하나였다.

2황자와 약혼했다는 소문이 진실인지 궁금해서. 그걸 있는 그대로 물을 용기도 없으면서.

“그러면… 정말 소문이 사실인 건가요? 백작 영애께서… 2황자 전하와 약혼하였다는….”

겨우 누군가가 쥐어짜 낸 용기에 이벨린은 수줍은 척 뺨을 붉히며 고개를 끄덕였다. 답을 이미 알지만, 그 입으로 기어이 듣고야 말겠다는 오기의 처참한 말로에 영애들 사이에 긴 탄식이 일었다.

겨우 정신을 차린 몇몇이 간신히 축하 인사를 내뱉었다.

“정말, 잘 어울리셔서… 다행….”

“흡… 축하… 드려요….”

하나같이 목이라도 졸린 것 같은 얼굴로…. 몇몇은 거의 눈물을 터트릴 기색이었다. 기어이 터진 사람도 있었고.

“그러면, 저희는… 이만….”

저렇게나 휘청이면서도 예의는 갖춰서 물러나는 것만은 기특하기도, 대견하기도 했다.

그녀는 몇 시간 뒤 이 순진한 영애들이 저를 얼마나 증오하는 시선으로 바라볼지를 떠올렸다. 어쩌면 좋아할지도 모르지. 제게도 기회가 다시 찾아올지도 모른다는 희망이 생길 테니까….

멀어지던 영애들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그녀는 그들에게서 등을 돌렸다. 그러자마자 내내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던 것 같은 핏발 선 눈과 마주쳤다.

카스트로.

근래의 흉흉한 민심을 의식한 듯, 여태껏 술은 한 방울도 입에 대지 않은 멀쩡한 낯짝이 새삼 생경했다.

“…….”

게다가 저 강렬하고, 집착적인 시선이란….

마주하는 것만으로도 등줄기를 타고 엷은 소름이 끼쳤다. 이벨린은 제 불쾌감은 조금도 내색하지 않은 채로 그의 눈을 말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리고 다음 순간, 그를 향해 똑바로 걸음을 내딛었다.

“…….”

처음에는 설마설마하던 사람들의 시선이, 그녀가 연회장의 절반을 가로지를 즈음에는 소리 없는 경악으로 바뀌어 따라붙었다.

“…….”

그녀의 돌발 행동에 연회장의 정 반대편에 있던 루카스와 단테가 당혹스러운 얼굴로 바라보는 것이 느껴졌다.

저들에겐 미안하지만 ‘계획’은 조금 달라져야 했다. 그녀가 어떤 상처도 입지 않고 이 계획에서 퇴장하길 바라는 비센테의 마음을 모르는 것은 아니었지만….

이윽고 카스트로의 앞에 선 이벨린은 고운 웃음을 물었다.

“전하. 제게 춤을 신청해 주시겠어요?”

카스트로는 일그러진 얼굴을 감출 생각조차 하지 않은 채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어쩌면, 감춰야 한다는 생각조차 못 한 채.

그는 도저히 이 상황이 믿기지 않는다는 듯 이벨린의 말간 얼굴과 손을 번갈아 바라보다가 이윽고 헛웃음을 터트렸다.

“이건 또 무슨 꿍꿍이지?”

“그런 건 없어요.”

“거절해야겠군. 지난번 네 세 치 혀에 놀아난 뒤로 퍽 골치 아픈 일들이 이어졌거든.”

그는 말로는 착실히도 거절의 의사를 밝히면서도, 진득한 눈으로 이벨린의 희고 가는 목과 쇄골, 가슴께를 훑었다. 그 녹색 눈동자의 저 아래에 욕망의 불씨가 타오르는 것이 보였다.

이벨린은 입매를 조금 더 매끄럽게 끌어 올렸다.

인내심이 짧고 유혹에는 언제나 지고야 마는 카스트로의 성미를 잘 알았으니까.

한 걸음 더 가깝게 다가선 이벨린은 카스트로의 가슴 언저리를 지나는 휘장을 살짝 쓸었다. 제법 노골적인 암시였다.

“제가 무엇을 꾸미든 겨우 춤 한 번일 뿐이에요, 전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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