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2화 (62/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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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의 군대는 정확히 일주일 뒤에 북부로 출발했다. 2황자는 황제가 직접 위임한 총사령관으로서 그 긴 행렬의 선두를 이끌었다.

평소 수도의 치안을 담당하던 정예군의 절반이 토벌령에 동원되었다. 그들이 떠난 자리를 바섬의 기사들이 빈틈없이 메웠고, 공화주의자들은 물밑으로 숨어들었다.

그리고 나날이 카스트로의 악행에 대한 기사들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신문사들은 앞다퉈 그의 폭력성과 충동적인 성품을 조명했다.

그의 사생아를 배었다는 하녀의 증언부터, 그에게 맞아서 팔이 부러졌다는 시종, 심지어 그가 불온한 무리들과 어울린다는 부두 노동자의 증언까지 나왔다.

황실의 권위는 시시각각 떨어졌다. 세간은 황실 기사단이 각 신문사에 언제 들이닥칠지를 두고 내기판을 벌였지만, 황제의 침묵은 유례없이 길었다.

앞면에서는 황태자에 대한 불온한 말들을 끝도 없이 지껄여 대면서도, 바로 뒷면에는 바섬 부인이 잉태한 ‘새로운 희망’에 대해 부지런히 언급한 덕이었다.

황태자가 아무리 길길이 날뛰어도 단 한 개의 신문도 폐간되지 않았다.

비탈리 가문의 후원을 받은 신문사 몇이 사태를 파악하고 여론을 돌려 보고자 했지만, 효과는 형편없었다. 자극적인 것을 좇는 사람들에겐 진실 여부는 중요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던 도중 ‘황제께서 황태자를 제 아들로 인정하지 않으시는 것 같다’는 기사를 낸 신문사가 하룻밤 사이에 불태워졌다. 방화범으로 붙잡힌 자는 제가 황태자의 사주를 받았노라고 순순히 인정했다.

그 비천한 신분대로라면, 황태자는커녕 황태자가 부리는 하인조차 만나지 못했을 텐데도.

그리고 그다음 날, 북부로부터 첫 승전보가 도착했다.

***

“늦었어.”

이벨린은 마차에서 내리다 말고, 제 손을 낚아채듯 잡은 사내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곧은 눈썹이 슬쩍 치켜 올라갔다.

“단테. 존댓말을 하든, 반말을 하든 제발 하나만 해 줄래요?”

“습관처럼 자꾸 튀어나오는 걸 어쩝니까.”

그는 툴툴거리면서도 이벨린이 마차 아래로 쉽게 내려올 수 있도록 손을 단단히 받쳐 주었다. 부쩍 가을로 접어든 날씨가 유난히 쌀쌀했다.

어깨와 쇄골까지 훤히 드러내는 짙은 초록빛 드레스를 입은 터라 더 그렇게 느껴지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녀는 흰 짐승의 털로 만든 숄을 추켜올렸다.

“그런데, 아가씨. 루카스 경은 어쩌고 혼자 오십니까? 그놈이라면 아예 집 앞에서부터 대기했을 텐데.”

“아, 그러고 보니… 엔리케를 만나러 비야톨레드의 저택에 다녀오느라 길이 엇갈렸나 보네요.”

“엔리케를 보고 오셨다고요? 바빠서 오늘 참석조차 못 한다던 놈을요?”

“글쎄요. 별로 바쁜 것처럼 보이진 않던데.”

“하여간… 그놈은 죽어도 이런 자릴 피한다니까요. 말이 머릿속 생각을 따라가지 못한다나 뭐라나.”

이런 자리. 단테의 말에 이벨린은 잠시 멈춰 서서 그녀가 선 지점을 돌아보았다. 황궁에서 가장 큰 연회장으로 가는 거대한 복도의 중간이었다.

화려하게 갖춰 입은 사람들이 드문드문 모여 선 채 부채를 흔들고, 이야기를 나누고, 발작적인 웃음을 터트려 댔다.

올해의 서임식을 연회로 갈음하겠다고 선포한 황제의 뜻에 따라, 사교 시즌의 끝물에 유례없이 성대하게 열린 무도회였다. 이 연회 자체가 황제 자신의 건재함을 드러내기 위한 수단이었으리라.

‘공화주의자들의 총에 놀라 애첩의 치맛자락에 숨었다는 소문은, 듣기에도 좀 저열했지.’

칩거하던 황제가 간만에 공식적인 자리에 모습을 드러낸단 소식에 각국의 대사들은 물론, 국경을 맞댄 우호국의 귀족들도 특별 사절이란 시답잖은 지위를 달고 대거 에스페다로 유입되었다.

근래 벨몬테 길거리를 돌아다니는 고급 마차의 수만 해도 평년의 서너 배를 훌쩍 넘어서는 실정이었다.

“저 인파들 좀 봐요.”

이벨린은 그 모든 왁자지껄한 소란들과 선을 긋듯 우아한 고갯짓을 했다.

단테는 묘한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이 여자가 이런 식으로 행동할 때면, 고작 몇 달 전까지만 해도 브리타냐 출신의 고아라는 사실이 거짓인 것만 같다.

“엔리케는 사람 많은 곳을 원체 싫어하잖아요. 그가 이런 자리에 올 리가 없죠. 오늘만 해도 얼굴 보여 줄 기분이 아니라고 해서 내내 필담이나 하다 온 참이라고요.”

“필담?”

“정말이지, 이럴 거면 전서구라도 한 마리 들여야겠어….”

이벨린은 투덜거리며 잉크 얼룩이 묻은 장갑을 벗었다. 그녀의 손을 보고 단테가 알 만하다는 듯 혀를 찼다.

“장갑이 아니라, 손까지 아주 잉크투성이신데.”

그가 품을 뒤적거리더니 손수건을 한 장 꺼냈다. 조금 구겨지긴 했어도 고급품이었다. 평소 그의 행실을 생각하면 죽어도 그가 가지고 다닐 것 같은 물건은 아니었다.

그가 그녀의 손을 대강 문질러 닦는 동안, 이벨린은 그저 신기한 듯 바라보았다.

“어쩐 일이에요? 이런 걸 다 챙기고.”

“루카스가 또 뭐라고 뭐라고… 하여튼 걔가 보통 까다로워야죠. 아, 말하니까 오네.”

그들을 발견하고 가까이 다가온 루카스가 곧장 그녀에게 납작한 상자를 내밀었다. 이벨린은 활짝 웃으며 상자를 받아 열었다. 팔뚝까지 감싸는 하얀 벨벳 장갑이었다.

루카스는 단테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이 정중한 어조로 말했다.

“메리가 부탁하더군요. 아가씨께서 별도로 준비를 요청하셨다고요.”

“맞아요. 고마워요.”

“언제 이런 것까지 다 요청했대요?”

단테는 감탄하듯 말했지만, 도리어 더 민망했다.

계획의 실행이 가까워지면 가까워질수록 엔리케는 점점 더 곤두서고 예민해졌다.

어지간한 사람과는 대면조차 하지 않고, 지도와 신문을 벽마다 덕지덕지 발라 놓은 제 서재 밖으로는 한 걸음조차 옮기지 않았다. 누굴 그 안으로 들이는 것도 극도로 경계했고….

그러니, 애써 챙겨 간 장갑이 잉크투성이가 되리란 건 쉬운 짐작이었다.

그때, 활짝 열린 연회장의 문 안쪽에서 바이올린 선율이 가늘게 울렸다. 오케스트라가 악기의 조율을 마무리한 모양이었다. 곧 무도회가 시작된다는 뜻이라, 복도에서 한껏 여유를 부리던 귀족들마저 서둘러 연회장으로 들어가는 것이 보였다.

“잠시만….”

이벨린은 주변에 사람이 없는 것을 확인하고 단테와 루카스를 가깝게 끌어당겼다. 한껏 목소리를 죽인 채 속삭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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