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래도 올해 서임식은 이대로 넘어갈 판국인가 봐요. 폐하께서 최근, 신변에 큰 위험을 겪으시기도 했으니….”
“아, 들었습니다. 공화주의자들이 감히 폐하를 겨누었다고요. 시엘로께서 도우셔서 존체는 상한 곳 없이 옷자락만 스쳤다고 들었습니다.”
“어쨌든 우리 폐하께선 그 뒤로 외부 활동은 극도로 자제하고 바섬 백작 부인의 치마폭에나 감싸여 계신다더군요.”
한 차례 웃음.
“아무래도 자존심에 입으신 상처가 크시겠지… 그걸 더 아파하실 분이시고.”
“신문에 의하면 그 레폴리까노(공화주의자)의 뒷배를 봐주는 사람이 있다던데요. 그것도 우리 귀족 중에서요.”
숨죽인 채 떠들던 목소리가 이벨린을 발견하고 순식간에 가라앉았다.
이벨린은 앞다투어 인사하는 그들을 향해 흐리게 웃으며 눈으로 인사했다. 근래 비센테가 흘린 기사대로 신문에 약혼설이 몇 번 났더니, 이제는 숫제 예비 황자비 취급이었다. 부쩍 공손해진 시선에 입맛이 썼다.
이벨린은 천천히 그들을 지나쳐 테이블 앞에 섰다. 작은 잔에 담긴 레몬수를 집어 들고 한 모금 머금었을 때였다. 저들끼리 무슨 이름을 공유해 대는지 한껏 숨 막힌 목소리들이 부채와 손수건 틈으로 새어 나왔다.
“…라고 하나 봐요.”
“근거로 드는 것들이 다….”
“신문에서 헛소리를 늘어놓는 게 어디 하루 이틀 일입니까?”
토막토막 끊어지던 말들 사이로 순간 명료한 문장이 들렸다. 이벨린은 그들과 조금 더 가까우면서도 그들을 주시하고 있는 게 티 나지 않을 만한 창가로 자리를 옮겼다. 커튼 사이에 몸을 숨긴 채 바람을 쐬는 척 귀를 기울였다.
“아무리 그래도 공화주의자들의 뒷배가 타라소나 남작이라니. 그자는… 비탈리 후작가의 가신이지 않습니까?”
“당시 잡혔던 레폴리까노 중 한 명이 오늘 새벽 자백했다고 합니다.”
“그게 사실이라면 적어도 타라소나 남작이 가담한 것만큼은 확실하겠네요.”
“누명일 가능성이 아예 없진 않죠. 어쨌든 폐하께선 그 증언을 상당히 신뢰하시더군요.”
“어떻게 알죠?”
“측근에게 근래 황태자 전하의 행보를 의심하는 듯한 발언을 하셨다고 합니다.”
순간 싸한 침묵이 일었다. 누군가 손뼉을 치며 상황을 정리했다.
“정말 타라소나 남작이 가담했다고 해도 꼭 비탈리 후작과 연관되어 있으리란 법은 없죠.”
“그래요. 확실하지도 않은 이야기는 여기서 그만합시다.”
그 말을 끝으로 모여 있던 사람들은 저마다 다른 생각에 잠긴 얼굴로 삼삼오오 멀어졌다. 이벨린은 들고 있던 레몬수를 마저 홀짝이며 시선을 창문 너머로 돌렸다.
커튼 뒤에 숨어 있어야 할 이유는 사라진 셈이었지만, 지금 곧바로 나간다면 분명히 눈에 띌 터였다.
잔을 다 비워 갈 즈음 가까이 다가오는 발소리가 있었다. 바로 근처에서 멈춰 섰다.
“이벨린 아가씨.”
“…….”
“거, 커튼 뒤에 계시는 거 다 보입니다.”
익숙한 목소리에 멋쩍게 커튼을 젖히자, 남자가 그녀를 향해 제법 우아하게 허리를 숙였다. 이벨린의 눈이 못 볼 꼴을 보듯 가늘어졌다.
“갑자기 왜 이래요?”
단테가 어깨를 으쓱하며 대꾸했다.
“여긴 침대가 아니라서요.”
…대체 언제 적 농담을 하는 건지. 그녀의 얼굴이 떨떠름하게 구겨지자 단테가 어깨를 으쓱했다.
“나름대로 말조심을 한다고 한 건데, 듣기 싫으면야 마시고.”
“싫다고는 안 했어요. 갑자기 존대를 들으니까 소름이 조금 끼쳐서 그렇지….”
“그거 차별입니다. 루카스 경한테는 안 그러시잖아요.”
“루카스 경은… 루카스 경이니까요.”
“하긴. 걔가 좀 고지식한 면이 있어서 그런지, 원체 말투가 애늙은이….”
“둘 다 대체 무슨 이야길 하는 겁니까?”
시답잖은 만담의 끝은 루카스가 합류하며 끝이 났다. 단테와 동급으로 묶여 한심하다는 시선이나 받고 있자니 비참했지만, 뒷말을 하다 걸린 형국이니 변명의 여지조차 없었다.
이벨린은 헛기침을 하며 대화의 주제를 돌렸다.
“그나저나 두 분 다 제가 여기에 있는 줄 어떻게 알았어요? 누구에게 들킬까 봐 메리도 잠시 저쪽에 떼어 두고 왔는데.”
“뭐…. 비센테 전하께서 오늘부터 아가씨에게서 죽어도 눈을 떼지 말라고 해서요. 들어오실 때부터 지켜보고 있긴 했죠.”
“오늘부터요?”
“예. 죽 호위를 맡을 예정입니다. 전하께서 따로 맡기신 일을 하느라 제가 자릴 비우면 단테 중위가, 단테 중위가 자릴 비우면 제가.”
“이거 때문에 아까운 제 휴가가 몽땅 털렸다는 점을 우리 아가씨께서 아시려나 모르겠네. ‘경’이라 예쁘게 예의 갖춰 불러 주는 건 고맙지만, 나는 루카스처럼 진짜 ‘경’도 아니라 개인적 충정은 어림도 없거든요.”
이벨린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잠시만요. 두 분 모두 제 호위를요? 전하께서 출정하시는데 따라가지 않고요?”
“뭐… 전하 휘하 소속의 부대원이 저희만 있는 것도 아니니까요.”
단테가 그녀의 질문을 여상하게 받아넘기다 아차 하고 입을 다물었다. 그 꼴을 한심한 눈으로 바라본 루카스가 이어 입을 열었다.
“아직 공식적으로 발표 난 사안이 아니니 모르는 척 넘기십시오.”
“그러면 정말, 출정한다는 소문이 진실이었나 보네요….”
“해마다 흔히 있는 토벌령입니다. 위험한 일도, 오래 걸리는 일도 아닐 테니 걱정 마십시오.”
“그렇군요….”
이벨린이 상심한 척 어깨를 늘어트리자, 루카스가 곤란한 얼굴을 했다. 팔꿈치로는 이걸 대체 어떻게 책임질 거냐는 듯 단테의 옆구리를 쿡 찌르면서. 이벨린은 금세 옥신각신하기 시작한 두 사람을 보며 표정으로만 웃었다.
근래 벨몬테에서 카스트로에 대한 여론은 급격하게 나빠지고 있었다. 황제가 암묵적으로 인정한 황태자의 3황자 시해 혐의, 2황자에게서 여자까지 빼앗았다는 지저분한 추문, 그리고 하필이면 공화주의 사상을 가진 자들과 얽혀 있을지도 모른다는 의심으로 시시각각 깎여 나가는 귀족들의 신뢰와 평판들….
하나만 얽혀도 최악인 것을 줄줄이 세 개까지 달고 있으니, 그저 그런 과장된 소문처럼 들릴 지경이었다. 카스트로에겐 그나마 행운이었다. 저 추문 중 하나에만 얽혔다면 진작 터졌을 여론이, 여태까지 잠잠하게 유지되고 있다는 게 그 반증이었다.
어쨌든 그녀에겐, 혹은 그들에겐 지금보다 더 적절한 시기는 없었다. 머릿속으로는 점점 더 구체적인 그림이 그려지고 있었다. 더는 그 계획이 적당한지, 아닌지를 따질 만한 여유는 남아 있지 않았다. 비센테를 위해서가 아니라, 그녀 자신을 위해서라도.
“넌… 따듯하군.”
‘그것’을 언급하던 카스트로의 억양과 표정을 한 번이라도 본 사람은 오래도록 그 얼굴을 곱씹어 보았을 터였다. 쉽게 잊히지 않을 것이다. 그만큼 인상적인 순간이었다. 마치, 죽었다가 다시 살아 돌아온 연인이라도 보듯, 애틋한 환희로 가득 찬 그 얼굴.
그 순간 이벨린은 확신했다. 카스트로에겐… 숨겨진 무엇이 있었다. 그를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구역질이 치밀었지만, 그녀 앞에 놓인 선택지는 단 하나뿐이었다. 그리고 그 하나를 선택한 결과로 무언가를 얻어 낼 수 있다면, 그게 무엇이든 최상의 결과를 이끌어 내야만 했다.
이제는 차라리 비센테가 출정하는 것이 잘된 일처럼 느껴지고 있었다. 그는 죽어도 그녀의 계획을 허락하지 않을 테니까….
그는 끝내 ‘엘레나를 닮은 것’에게만큼은 잔인해질 수 없는 남자였고, 목적을 위해서 한낱 수단처럼 그녀를 쓰지도 못했다.
고작 닮은 것만으로도 그렇게 아까워서. 이벨린은 지끈거리는 머리를 짚었다.
“둘 다 그만해요.”
장난처럼 이어지던 투닥거림은 그녀의 말 한마디에 바로 멈췄다. 끝없이 뻗어 나가던 생각 때문에 해쓱하게 질린 안색에 단테가 걱정스럽게 물었다.
“뭐야, 갑자기 얼굴이 아주 창백하신데?”
“엔리케를 봐야겠어요.”
“…지금? 이 밤에요?”
“네. 지금 당장.”
***
그녀는 말없이 얇은 종잇조각을 펼쳤다. 내용은 단순했다.
그대로 진행하십시오.
-당신의 신실한, E-
***
이벨린은 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하녀의 안내를 받아 조심스럽게 쪽문으로 들어섰다. 저택의 불은 한참 전에 꺼진 듯했다. 부쩍 새벽에 가까워진 시간이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애초에 연회장을 나설 때부터 늦은 시간이었던 데다가, 엔리케를 만나느라 비야톨레드의 별저까지 들렀다 온 참이니….
코트를 받아 든 어린 하녀는 연신 하품을 해 대며 먼저 2층으로 올라섰다. 이벨린은 문 근처의 난롯가에서 몸을 조금 녹인 뒤에야, 조심스럽게 발걸음을 옮겼다. 괜히 부산스럽게 움직였다가 누굴 깨우는 불상사를 일으키고 싶진 않았다.
온 저택이 고요해서 디디는 발소리 하나까지 크게 들렸다. 시에나는 진작 잠들었을 테고, 오늘따라 유난히 밤새서 일하는 하녀들도 보이지 않았다. 긴 복도를 지나 막 계단으로 올라가려는 찰나에, 응접실 쪽에서 엷은 불빛이 새어 나오는 것이 보였다.
“…….”
누가 있는 것은 확실한데, 아무리 생각해도 이 새벽에 응접실을 이용할 만한 사람이 없었다. 단 한 명, 비센테를 제외하고는…. 그녀는 홀린 듯 문간으로 다가갔다. 문고리까지 잡고 나서야, 지금은 그를 만나서는 안 된다는 것에 간신히 생각이 미쳤다.
이벨린은 눈매를 살짝 일그러트리며 주춤 물러섰다.
‘…돌아가자. 괜히 얼굴을 보면 결심이 무뎌질 테니까.’
조심스럽게 문고리마저 놓으려던 찰나였다.
“이벨린.”
“…….”
“거기서 머뭇거리지 말고 들어와.”
어떻게 그녀인 줄 알았을까? 아주 살금살금 움직인 데다가 문틈이 좁아서 모습은 보이지도 않았을 텐데. 이벨린은 멋쩍은 기분으로 방문을 열었다.
들어가자마자 보인 것은 그의 옆모습이었다. 의자에 편안하게 걸터앉아 책을 읽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곁에 놓인 사이드 테이블엔 물이 담긴 크리스털 잔과 시가 상자가 올려져 있었다.
그녀는 쭈뼛거리며 손바닥을 가볍게 맞잡은 채 몇 걸음 다가섰다.
“밤이 늦어서… 전하께서 여기 계실 줄은 몰랐어요.”
그녀의 말에 그가 읽던 책을 테이블 위로 밀어 두고 등받이에 상체를 기댔다. 긴 손가락이 깊은 눈두덩이의 끝을 짚었다. 묻어 있던 피로를 걷어 내려는 것처럼 엄지로 느릿하게 제 눈가를 쓸었다.
“확실히 시간이 늦긴 했군. 피곤한가?”
“아뇨…. 그렇지는 않아요.”
이벨린은 제 목소리에 너무 희망이 깃들지 않도록 주의하며 대답했다.
하기야 달리 뭐라고 답할 수 있었을까? 어쩌면 그가 출정을 나가기 전에 같이 보낼 수 있는 마지막 시간일지도 모르는데.
“그러면 잠시 앉지.”
그가 눈짓으로 제 앞에 놓인 빈 의자를 가리켰다. 그녀가 못내 주춤거리자, 근사한 농담처럼 말을 이었다.
“우리 그동안 조금 어색했잖아. 대화를 좀 할 필요가 있는 것 같아서.”
“대화를요.”
“그래. 읽기만 하는 것도 슬슬 지치던 참이라.”
“무얼 읽고 계셨는데요?”
“<고독>.”
그녀는 반사적으로 테이블 위에 펼쳐 둔 책의 표지를 바라보았다. 에스페다어로 쓰인 초판이 아니라 브리타냐어로 번역된 판본이었다. 그러니까 첫 페이지의 첫 문장부터 끝 마침표까지 모두 그녀의 손을 거쳤던….
당혹스러워 둥글어졌던 이벨린의 눈이 조금씩 불안에 젖어 들었다.
번역 일을 할 때면 항상 남성 이름으로 된 가명을 썼고, 출판소장이었던 발머 씨는 ‘귀부인’이 잘 빼돌려 행방조차 묘연했다.
꼬리가 잡힐 만한 증거는 하나도 남겨 두지 않았다.
비센테가 갑자기 왜 저 책에 관심을 갖는지는 모르겠지만, 지극한 우연의 산물일 가능성이 컸다. 그럼에도.
“이벨린?”
이벨린은 긴 잠에서 부스스 깨어나는 것처럼 시선을 들었다. 빳빳하게 굳은 입술로 애써 미소를 지었다.
“<고독>이라면… 원래 에스페다어로 쓰인 책이지 않나요?”
“그렇지.”
“제게 브리타냐어는 하나도 모른다고 하셔 놓고.”
[그대도 그랬지, 이블린.]
미약한 책망에 돌아온 것은, 너도 나를 속이려 들지 않았느냐는 대답이었다. 그것도 완벽한 브리타냐 상류층의 억양으로.
비센테의 얼굴은 농담을 건넬 때처럼 부드럽게 이완되어 있었지만, 말속에 담긴 뼈는 분명했다. 이 화제는 더 이어지지 않는 편이 나았다. 그녀는 못 당하겠다는 듯 웃으며 의자에 앉았다.
“안 그래도 드릴 말씀이 있어 찾아뵈려고 했어요. 곧 출정하신다는 소문을 들었거든요.”
“단테가 이야기했겠군.”
“제가 떠본 것이니 크게 질책하시진 마세요. 정확히… 언제쯤 떠나시나요?”
“일주일 뒤.”
그녀는 그 날짜가 생각보다 가깝다는 것에 사소한 절망을 느꼈다. 그리고 언제나, 마음과 반대되는 표정을 짓는 것은 쉬웠다. 이벨린은 자신만만한 미소를 지었다.
“돌아오실 즈음이면 일은 완벽하게 마무리가 되어 있을 거예요. 엔리케가 사소한 몇 가지를 도와주기로 했거든요. 말씀드렸던 대로 황태자 전하의 하녀에게 접근할 방법을 찾고 있어요. 황후의 시녀 중 한 명을 통하면 더 자연스러울 것 같아서 그쪽도 고려 중이고요. 일이 끝나면… 왜 그렇게 보세요?”
비센테는 이걸 웃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모르겠다는 얼굴로 입매를 매만졌다.
“이렇게 대뜸 일 이야기부터 할 줄은 몰랐거든.”
“제가 만약 실수했다면….”
“너는 지금도 충분히 잘해 주고 있어, 이벨린.”
“…….”
“그래, 사실… 기대하지 않았던 성과까지 가져왔고.”
“인장을 말씀하시는 거군요.”
그가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난 네 요구를 적당히 거절할 필요가 있었고, 엔리케는 애초부터 불가능에 가까운 조건을 들이밀었지. 그리고 너는 그걸 보란 듯이 해냈고.”
“그게 필요하셨던 게 아닌가요?”
“필요하긴 했지만, 절실한 정도까진 아니었지. 인장이 있다면 서부에 좀 더 요구할 수 있겠지만, 서부가 아예 이 판에 끼어들지 않더라도 계획엔 지장이 없었을 테니.”
천천히 가라앉기 시작한 비센테의 얼굴에서 점점 미소가 사라지는 게 보였다. 내 계산이 너를 실망하게 했느냐고, 그의 눈이 그렇게 묻고 있었다. 이벨린은 고개를 저었다.
“그건 상관없어요. 만약 그 인장이 전하의 계획에서 큰 비중을 차지했다면, 도리어 제가 더 불안했을 거예요.”
이벨린은 머뭇거리다 말을 마저 이었다.
“그리고… 해낼 수 있었던 건 정말 운이 좋아서였어요. 전하께서 안배해 두신 분이 아니었다면 실패로 돌아갔을 거예요.”
“그 여자는 내게 빚이 있어.”
어느 종류의 빚인지는 궁금했지만, 누군가의 약점을 함부로 말할 만한 사내는 아니었다. 머릿속으로 수많은 가능성을 생각하는 동안 대화가 잠시 끊겼다. 그녀만큼이나 복잡한 상념에 잠긴 청보라색 눈동자가 느릿하게 그녀의 얼굴을 훑었다.
이윽고 그가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웃었다.
“아마도 난 오늘 널 기다렸는지도 모르겠다.”
이리저리 복잡하게 쏟아지던 세상이 그대로 얼어붙었다. 널 기다렸을지도 모르겠다는 그 단순한 문장에. 보고 싶다거나 사랑한다는 대단한 고백을 들은 것도 아니면서.
“…….”
속눈썹조차 깜박이지 못한 채로 그를 바라보고만 있자, 비센테가 긴 다리를 포개 꼬며 의자의 팔걸이에 제 팔꿈치를 가져다 괴었다.
우아한 손가락이 거짓을 말할 때처럼 입술을 가렸다.
“출정에서 돌아오는 건 아무리 빨라도 2달에서 3달은 족히 걸릴 예정이야. 그때쯤이면 사교 시즌도 끝나 있겠군.”
“…계획대로 그즈음에는 실종된 척, 전하께서 마련해 주신 안전 저택으로….”
“아니. 그럴 필요 없어.”
그가 품에서 두툼한 봉투를 하나 꺼냈다. 현금 다발과 각종 권리서, 찰스턴항까지 가는 배표, 이름란이 빈 또 다른 위조된 신분증이 들어 있었다.
“내가 돌아오기 전에 브리타냐행 배를 타. 찰스턴 항에 도착하면 널 기다리는 사람이 있을 테고, 그 사람이 널 네 동생에게 안내해 줄 거야.”
“…….”
“약속했던 것보다 조금 더 값을 넉넉히 넣었어. 이벨린 베네딕트는 죽은 사람으로 남아야 하니까. 이름은 네게 의미 있는 것으로 직접 짓도록 해.”
“…….”
“그래서 비워 두었어. 당분간 부동산은 처분하지 말고.”
…이토록 부드러운 단절이 또 있을까. 이벨린은 봉투를 아주 움켜쥐지도 못한 채로 입술만 짓씹었다. 목소리가 조금 떨렸다.
“…이걸 미리 줘도 돼요?”
“카스트로의 하녀와 접촉하고 나면 네 할 일은 끝이 나. 오페라에서도 그렇잖아. 무희가 퇴장하고 나면 그 뒤는 야만의 시대가 도래하지.”
“…….”
“그러니 그 전에 에스페다를 뜨도록 해.”
그제야 이벨린은 시선을 들어 비센테의 눈을 올곧게 마주했다. 묻고 싶은 게 많았다. 그가 돌아오면, 돌아온 뒤에도 내가 있다면, 내가 몸을 되찾지 못한다면… 우리는 어떻게 흘러가게 될까.
이토록 불완전한 사람도 사랑이라 받아들여 줄까? 아니면 너는 이 몸을 나처럼 욕망할까?
이율배반적인 감정이 치받는 동안 이벨린은 무력하게 그를 바라보았다.
지금이 아니면 영원히, 두 번 다시 그를 볼 기회조차 없는 것처럼.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지?”
“…새삼 제가 전하를 잘 모른다는 생각을 했어요.”
“…….”
“전하께선 제게 궁금한 것 따윈 없으시겠지만, 저는 사실 전하께 궁금한 게 아주 많거든요.”
그녀는 포기하듯 눈을 내리깔았다. 오늘은 너무 긴 하루였다.
꼿꼿하게 힘이 들어갔던 허리에서, 어깨에서, 목에서 조금씩 힘이 빠졌다. 상체가 살짝 앞으로 기울었다.
원래 계획대로라면 ‘엘레나’의 죽음에 대해서 물을 작정이었다. 하지만 그런 이야기로 지금 놓인 시간을 망치고 싶지 않았다.
“저는, 그냥….”
그때, 그가 상체를 앞으로 살짝 움직였다. 이벨린은 제 턱 아래를 받쳐 드는 손에 조금 놀란 눈을 했다. 근사한 청보라색 눈동자가 벽난로의 불빛을 받아 타오르는 것 같은 색으로 물들었다.
낮고, 깊으며, 푸른 목소리.
“나도 네가 궁금해.”
그는 오늘따라 다정했다. 이별을 앞두고 그녀가 듣고 싶은 말만 해주기로 작정한 것처럼. 이벨린은 눈매를 설핏 일그러트렸다가 이내 연하게 웃었다.
“…이제 와서요?”
“그래. 이제 와서.”
“…….”
“그러니 부디 고개를 들고, 네가 좋아하는 것들에 대해 말해 봐.”
“…제가 좋아하는 거요?”
이벨린은 멍하니 그의 말을 되짚어 읊었다. 아주 낯선 문장이었다. 그러니까, ‘엘레나 데 카스타야’가 좋아하는 것. 한때 아끼고, 소중히 여기며, 애착했던 것. 그녀는 이내 고개를 저었다.
“예전엔 뭘 좋아했는지 잘 모르겠어요. 뭔가를 선택할 때 제 의지가 들어갔던 건, 정말 드문 일이어서.”
“고아원에서의 삶이 버거웠나?”
“아뇨. 오히려 반대예요. 그때는 오히려 자유로웠어요. 선택지가 많지 않긴 했지만요.”
하나도 선택할 수 없었던 삶을 살던 자에겐 두 개 중 하나를 선택하는 일조차 더할 나위 없는 자유처럼 느껴지곤 했다. 그 선택지들이 하나같이 형편없는 것일지라도.
“그래도, 최근에는 조금… 이것저것 생긴 것 같긴 해요.”
이벨린은 잠시 호흡을 끌었다.
“저는 아마도 비 오는 날을 좋아하는 것 같아요. 새벽 공기가 좋고, 이슬이 맺힌 풀도, 젖은 냄새가 나는 동굴도 좋아요. 한밤도 좋아해요. 벽난로 앞에서 누군가가 저를 기다리고 있는 것도, 소소한 대화를 나누는 것도요.”
“…….”
“그리고….”
그의 눈에는 사람의 시선을 앗고, 정신을 미혹하는 힘이 있는 것만 같았다. 수많은 시선과 에두른 표현, 표정, 태도, 암시들…. 가끔은 그것만으로도 충분했으나, 아주 가끔은 막막한 현실에 짓눌린 감정이 답답함을 호소했다.
머릿속으로 생각하기도 전에 심장이 불쑥 다음 말을 뱉었다.
“전하를 좋아해요.”
이런 말을 누구의 앞에서 내뱉는 건 단연코 처음이었다. 그녀의 전생과 현생을 전부 통틀어.
이렇게 솔직하게 말할 수 있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심장을 몸의 바깥으로 내보낸 듯 두려웠다.
금방이라도 숨이 멎을 것 같다가도, 잠깐 사이엔 별것 아닌 것 같다가도, 그가 눈매를 일그러트리기만 해도 덜컥 주저앉았다.
어차피 무엇도 기대할 수 없는 관계라는 걸 알면서도.
그녀는 쓰게 웃으며 비센테의 당혹해하는 얼굴에서 시선을 돌렸다.
“한 번쯤은 말해 드리고 싶었어요. 그러니까, 제게 미안해하지 않으셔도 된다고요. 모두 제 선택이었으니까….”
“…….”
네게 죽음을 애원한 것도, 하녀의 일을 자원했던 것도, 반역에 가담한 것도, 그래서 카스트로의 앞에 스스로 나선 것도…. 상황에 내몰렸다고는 하지만 결국 전부 자신의 선택이었다. 그러니 처음부터 비센테, 네가 미안할 일은 결국 하나도 없다.
이벨린은 오른손으로 눈가를 한 번 꾹 덮었다. 손을 내리며 드러난 것은 애써 웃는 얼굴이었다.
“제 이야긴 재미가 없었네요. 이젠 전하의 이야기를 듣고 싶어요.”
그는 그녀의 발목 부근을 바라보고 있다가, 눈을 느리게 깜박였다. 이야기를 놓친 사람이 어떻게든 되짚어 따라오기 위해 애쓰려는 것처럼.
“…내 이야기?”
적당한 환기가 필요했다. 이벨린은 눈짓으로 협탁 옆에 있는 시가 상자를 가리켰다.
“시가를 피우시는 줄은 몰랐거든요.”
“아.”
그는 그제야 그 시가 상자를 눈치챈 듯했다.
“오늘은 쓸 일이 있어서 꺼냈어. 물론, 필 줄 모르는 건 아니지만.”
“정말요? 하지만… 저는 전하께서 시가를 피우시는 걸 본 적이 없는걸요.”
“끊었어.”
대답은 짧았다. 이유를 물어볼까 말까 망설이는 사이에 어색한 침묵이 내려앉았다. 이대로 영영 대화가 단절될 것 같다는 불안이 치밀 즈음 그가 다시금 입을 열었다.
“목소리가 듣기 좋다고 했거든.”
그 애가. 덧붙이지 않아도 선명하게 들릴 것 같은 목소리였다. 그의 입에서 나오는 ‘그 애’는 늘 저토록 애틋하고 다정하게 들렸다. 그는 아주 쉽게도 그녀를 바닥으로 처박았고, 동시에 아주 쉽게도 구원했다.
여전한 의문으로 남는 것은 그녀에게는 그런 말을 한 기억이 없다는 것이다. 가끔씩 그와 기억을 맞추어 보면 묘하게 어긋난 톱니가 한 번씩 껄끄럽게 거슬렸다.
“엘레나 데 카스타야.”
“…….”
“그분의 이름이죠?”
“…그래.”
확답이라도 받듯 기어이 이름을 듣고 나서야 그녀는 제 모순을 가까스로 인정할 수 있었다. 양가적인 감정이 목을 짓눌렀다. 그가 저를 알아봐 주기를 바라면서, 죽어도 알아보지 않기를 바랐다. 가질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무엇보다 가지고 싶었다.
그의 육체든, 정신이든, 미래든.
어떤 것도 제 것이 될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그녀는 파르르 떨리기 시작한 눈꺼풀을 내리떴다. 자책은 숨처럼 흘러나왔다. 비센테. 내가 왜 너를 몰랐을까. 그저 돌아보기만 했어도, 네가 그 자리에 서 있는 것이 보였을 텐데….
“가끔은 제가 뵈었던 전하가 아닌 것 같아요.”
가끔은 그가 변한 것이 사무쳤다. 이렇게 망가지고 만 것이 사무쳤다.
“폰페라다 궁에서?”
“네. 폰페라다 궁에서.”
그녀의 말에서 비워 두었던 것을 그가 채워 넣었다. 무심코 고개를 저었던 이벨린은 서둘러 고개를 주억거리며 따라 했다. 이상하게 보였을까 싶어 뒤늦게 변명하듯 몇 마디를 덧붙였다.
“폰페라다 궁에 계셨을 때와는 다르게 요즘은… 술도 잘 안 드시는 것 같고요.”
“내가 그렇게 많이 마셨던가? 며칠 입에 안 댔다고 걱정씩이나 할 정도로?”
“걱정까지는 아니고요.”
“아니면.”
“…궁의가 전하께서 약과 술 없인 잠도 못 잔다고. 그런 이야길 공공연히 떠들고 다녔었거든요. 그리고 제가 본 바대로라면… 네, 꽤 드셨고요.”
“추궁인가?”
“…조금은요.”
그는 기막히다는 듯 웃고는 다시금 의자에 등을 느슨히 기댔다.
“이런 걸 물을 줄은 몰랐는데. 네게 솔직하게 대답하겠다고 맹세한 게 후회되는군.”
“…설마 지금 이거, 제가 그때 얻어 낸 질문이라고 생각하시는 건 아니죠?”
“안 되나?”
“맙소사, 당연히 안 되죠. 그건….”
이벨린은 말을 다 맺지도 못한 채 입술을 깨물었다. 그 질문은 ‘그녀’의 죽음 이후에 대해서 묻기 위해 얻어낸 잘문이었다.
힐다의 말처럼 그녀의 육신이 영혼도 없이 살아 숨 쉰다면, 누군가는 그것을 보관하고 있을 테니까….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적어도 그가 보란 듯이 <고독>을 읽고 있을 때만큼은. 안 그래도 그녀에 대한 의심을 완전히 거두지는 않은 터라, 엘레나에 대해서 묻는 것만으로도 그가 어디까지 짐작할지 예측조차 어려웠다.
게다가 비센테는 어쩌면 아무것도 모를 것이다. 만약 엘레나의 몸이 여태 살아서 어딘가에 숨겨져 있다는 걸 알았다면, 그가 짊어진 죄책감의 크기는 이보다 작았을 테니까.
‘아직은 카스트로라는 실마리가 있기도 하고….’
거듭 생각할수록 비센테에게 당장 ‘엘레나’를 언급하는 위험을 감수할 이유는 없어 보였다.
이벨린이 좀처럼 말을 잇지 못하자 그가 부드럽게 재촉했다.
“그건?”
이벨린은 그가 의심하지 않도록
“사실은 맞아요. 그게 제 질문이에요.”
“…정말로?”
“네. 정말로.”
“이상하군. 고작 이게 전부일 리가 없을 텐데.”
“이유는 묻지 않겠다고 약속하셨으면서….”
“아, 그랬지.”
비센테는 잠시 그 사실을 깜박했다는 것처럼 미소 지었다. 그때의 대화를 전부 기억하고 있으면서, 그 사실만 기억하지 못하는 척 구는 건 사소한 가증이었다. 그가 잠시 과거를 되짚듯 눈꺼풀을 반쯤 내리떴다.
“그때는… 글쎄, 그럴 수밖에 없었어. 제정신으로는 못 견딜 지경이었거든. 의존도 심했고, 주면 주는 대로 마셨지. 황제께서 그 예산만큼은 아끼지 않았고.”
“…….”
“그리고 카스트로는 내가 맨정신으로 지낼 수 없도록 그야말로 온갖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고.”
“그러면 지금은 왜 끊으셨어요?”
“출정을 앞두고 있잖아. 최전선에 서야 할 군인이 술에 의존하는 건 위험하지. 결정적인 순간에 손을 떨게 되니까.”
“아, 그래서….”
조금 이상한 밤이었다. 대화의 주제는 더 깊어지지 않고 그 부근에서 빙빙 돌았다. 최근 좋았던 오페라들, 새로운 흥밋거리, 사교계에 떠도는 가벼운 가십들….
비센테는 어느 때보다도 끈기 있게 그녀의 말을 들었고, 대답할 수 있는 질문은 최대한 대답을 해 주었다.
그건 더없이 친절한 태도이면서도, 동시에 그녀를 서서히 경계 밖으로 밀어내는 것만 같았다. 마치, 긴긴 작별 인사를 하는 것처럼.
“…….”
문득 정신을 차렸을 땐 창문 밖으로 푸르스름한 동이 떠오르고 있었다. 비센테는 그제야 시간이 이렇게 흘렀다는 걸 눈치챈 것 같았다. 오늘의 대화가 그에게도 무척 흥미로웠다는 것처럼, 혹은 그런 암시를 주려는 노력의 일환이었겠지만 그마저도 다정했다.
“내가 너무 붙잡고 있었군.”
“시간이 이렇게 지나는 줄도 몰랐네요.”
이벨린은 그제야 그를 따라 시간을 눈치챈 것처럼 놀란 눈을 했다. 이야기하는 내내 이 시간을 최대한 길게 끌고 싶어 시계를 흘끔거려 놓고도,
“이만 가보도록 해.”
기적이든, 동정이든. 그가 잠시 내주었던 시간은 결국 끝이 났다. 그 사실에 아쉬움을 느끼는 건 그녀 혼자뿐인 것 같았다. 긴 밤을 같이 지새 놓고도 그는 조금도 지치지 않은 것처럼 멀쩡해 보였다.
그가 빈틈없는 태도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가 돌아왔을 때 양은 이미 브리타냐행 배에 탄 뒤겠군.”
다시는 볼 수 없으리란 뜻이었다. 혹은, 다시는 보지 않겠다는.
“그럼, 이벨린. 부디 잘 돌아가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