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0화 (60/151)
  • 입을 맞추기라도 한 듯 하나같이 자극적인 단어들만 골라 쓴 기사들은 미래의 황제가 될 카스트로의 잔혹한 성정에 대한 우려로 글을 맺고 있었다. 기사의 형식은 익명의 투고로서, 정치적 중립의 입장에서 단순히 기고한 바를 명시하면서.

    평소라면 황태자가 여자 한둘 정도 제 침대에 눕힌다 해도 아침나절의 화젯거리조차 되지 못했으리라. 하지만 지금은.

    계속된 전쟁으로 황가에 대한 반감은 최대치를 찍었고, 전선의 일선에서 활약하는 군인들에 대한 에스페다인들의 자부심은 날이 갈수록 고취되어 있었다. 더구나 2황자인 비센테는 부당한 유폐를 당했다는 동정까지 얻고 있는 마당이었다. 그가 십수 년간 국가를 향해 보여 줬던 애국심을 고려하면, 고작해야 반역자의 딸을 처단하는 것에 지나친 책임을 물었노라고.

    기껏 신문사들을 매수해서 동정표나 요란하게 모은다 싶었는데, 이런 뒤통수를 칠 줄이야.

    “그 브리타냐 출신의 계집.”

    가브리엘라가 진저리 치며 입을 열었다. 그 생각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끔찍하다는 듯.

    “정말 그 계집을 건드렸느냐?”

    카스트로는 눈썹을 비스듬히 올렸다.

    “그게 중요합니까? 세간에서도 이미, 황후 폐하께서 생각하시는 것과 같이 믿고 있는데.”

    “돌이킬 수 있다는 게 중요하다, 카스트로.”

    “돌이키고 싶지 않습니다.”

    “지금 너는 2황자를 상대할 여력이 안 돼.”

    그의 잇새가 아득 악물렸다. 그저 비센테의 이름에나 반응하는 투견처럼.

    “…모후께선 지금 저를 자극하고 계십니다.”

    “카스트로. 폐하께서 2황자의 유폐를 끝낸 이유를 정녕 모르겠느냐?”

    분노로 치켜 올라갔던 황후의 목소리가 언뜻 그를 타이르듯 누그러들었다. 애정이라기보다는, 한참은 모자란 자에게 보내는 동정 같았다.

    “바섬의 암캐가 또 새끼를 뱄다. 이젠 그 계집이 폐하를 등에 업고 호시탐탐 우리가 고꾸라지기를 빌어. 네가 이렇게 정신을 빼고 있는 동안 그쪽에 붙은 귀족들이 한 손을 넘어가.”

    “…….”

    “카스타야가 쥐고 있었던 절반의 군권을 이제는 바섬이 쥐고 휘두른다. 지난 십 수년간 폐하의 비호 아래 야금야금 불려온 세가 이제는 엇비슷해. 폐하께선 기회만 닿으면 너와 나를, 나의 비탈리를 제거하려고 들 것이다.”

    “…….”

    “이미 저들은 그 암캐 뱃속의 새끼를 벌써부터 황태자라도 된 양 받든다더구나. 네가, 네가 엄연히 폐하의 장자인데!”

    짐짓 침착하게 가라앉았던 목소리가, 끝에 가서는 새된 비명처럼 올라갔다. 덜덜 떨리는 목소리에서 느껴지는 것은 오랜 강박과 신경증의 증세였다.

    황후의 노성을 무표정하게 듣고 있던 카스트로가 이내 차갑게 웃었다.

    “…다들 물러가라.”

    “하오나, 전하.”

    “말이 말 같게 들리지 않느냐?”

    제 궁의 주인인 양 내리는 명령에 시종이며 하녀들이 안절부절못하며 바닥에서 일어섰다.

    황후가 별다른 저지 없이 핏발 선 눈으로 제 아들을 노려보기만 하자, 눈치껏 엉거주춤 물러났다. 이윽고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인기척이 완전히 사라지고 나서야 카스트로는 움직였다.

    “모후께 묻고 싶은 게 있습니다.”

    황후와 카스트로 사이에는 온갖 파편들이 널브러져 있었다. 카스트로는 그 난장판을 천천히 가로질렀다. 그가 한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발밑에서 파삭거리며 얇은 유리들이 부서지는 소리가 났다.

    “제가 열다섯 살 무렵, 부황께서 제게 그러시더군요.”

    “…….”

    “너는 부정의 소산으로 태어난 짐승이니, 감히 짐을 아비라 부르지도 말라.”

    꼿꼿하던 황후의 표정이 지긋지긋한 것을 보듯 일그러졌다.

    “그에 대해서는….”

    “과거엔 모후의 말씀을 믿었습니다. 부황께서 미쳐서 저러시는 거다, 정신이 온전치 못해서, 별것도 아닌 피부병에 발작을 저지르시는 거다….”

    “…….”

    “하나 날이 갈수록 제 얼굴이 끔찍합니다. 하여 묻습니다. 제가 정말 황제 폐하의 자식이 맞는지.”

    “…….”

    “부정을 저지르지 않았는지. 한 점 부끄럼조차 없는지.”

    “…….”

    “왜 거울을 볼 때마다 부황이나 하다못해 비센테가 아니라, 모후의 오라비인 비탈리 후작의 모습만 징그럽게도 보이는지.”

    가브리엘라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은 채로 제 앞에 선 카스트로를 마주했다. 그녀의 차디찬 얼굴에서는 연민이나 슬픔 같은 부드러운 감정은 찾아볼 수 없었다. 그보다는 고쳐서 쓸 수도 없이 망가져 버린 것이나, 혹은 죽어도 돌이킬 수 없는 일을 보듯 담담했다.

    “…….”

    황후의 하얀 손이 제 아들의 뺨을 살짝 움켜쥐더니, 이윽고 이마를 가린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카스트로는 제 어미의 손길에 눈썹을 움찔 떨었다. 흉터를 가볍게 스치는 손끝에도 급소라도 찔린 것 같은 얼굴이었다. 숨이 거칠었다.

    “가여운 것.”

    그건 차라리 ‘아까운 것’에 가깝게 들렸다. 가엾다는 말을, 저렇게 가엽지 않은 얼굴로 말하는 것도 재주였다.

    애초에 단 한 줌의 진심도 섞이지 않았으니 그러하겠지. 카스트로의 입매가 비틀리는 것과 동시에, 그는 제 어미의 손목을 아프도록 붙잡아 제게서 떼어 냈다.

    “왜 선뜻 답을 못 하십니까?”

    끝내 이어지는 집요한 추궁에 가브리엘라의 눈매가 설핏 일그러졌다. 조금 전까지 물건을 집어 던지며 패악을 떨던 것이 그녀가 아니라 다른 사람이기라도 한 것처럼. 이제는 말끔하기까지 한 눈이 그를 직시했다.

    “제 어미에게 이젠 하다 하다 별 미친 소릴 다 하는구나, 카스트로. 너는 황제의 아들로 태어났다.”

    “황제의 아들.”

    혀의 끝에서 뭉그러지듯 짓씹은 발음은 섬뜩했다. 황후에 흰 얼굴에 대고 비식거리는 웃음이 쏟아졌다. 도통 대화가 통하지 않는 남을 보듯, 시선이 멀어졌다.

    “어머니.”

    조금의 신뢰도 없이 무너진 눈매로 그가 이죽거렸다.

    “정말 제 몸에 황가의 피가 흐르기나 합니까?”

    가브리엘라는 드물게 막막한 숨을 터트리며 눈을 감았다. 당신의 아들이 묻질 않느냐고 울며불며 그녀의 드레스 자락에 매달리던 열다섯 소년의 절박한 낯이 장성한 카스트로의 얼굴 위로 겹쳤다.

    꼬박 10년도 더 된 해묵은 이야기였다. 새파랗게 질린 낯으로 뛰어 들어온 카스트로가 제게 진실을 묻던 것이. 카스트로의 얼굴이 그렇게까지 창백해진 것을, 그녀는 그때 처음 보았다.

    아마도 그때부터였을 것이다. 로드리고의 외면에도 나름대로 꿋꿋하던 카스트로가 완전히 무너진 것이.

    그리고 그날을 기점으로 그녀의 아들은 완전히 비틀리기 시작했다. 카스트로는 날이 갈수록 통제하기 어려워졌고, 가끔은 제 아비의 정신병마저 빼닮은 짓을 서슴지 않고 해댔다.

    그 얼굴에서 로드리고를 읽어 낼 때마다 가브리엘라는 어쩌지 못할 징그러운 혐오를 느꼈다.

    “정말, 지긋지긋하게도 묻는구나.”

    황후의 우아한 입매가 발작적으로 뒤틀렸다. 돌이켜도 반복되는 의심은 지겹다 못해 끔찍했다.

    “결국 너나 네 아비나 똑같은 인간이지. 어찌 이렇게 사람을 의심해 대!”

    “…….”

    “네게 황가의 피가 흐르지 않으면, 대체 누구에게 흐르기에!”

    외침은 거의 발작적이었다. 악을 내지른 황후의 가슴팍이 얕게 오르내렸다. 카스트로의 눈이 로드리고의 것처럼 느껴질 때마다 가브리엘라는 과거의 진창으로 처박혔다.

    갓 태어난 카스트로를 처음으로 그의 품에 안겨 주었던 그날, 남편의 눈에서 최초로 광기를 발견하던 그 시간으로.

    “…….”

    로드리고가 이렇게까지 미친 작자라는 것을 혼약하기 전에 미리 알았다면 좋았을 것이다.

    그녀에게 선택지가 있을 때 차라리 그의 형을 선택했다면, 더없이 좋았을 것이다. 죽은 선황제를 떠올릴 때마다 가브리엘라는 시에나를 향한 미칠 듯한 투기에 사로잡혔다. 적어도 그녀는 아이를 낳자마자 남편의 손에 맞은 적은 없을 테니까….

    후회는 언제나 집요한 미련을 타고 흘렀다.

    “…너까지.”

    가브리엘라는 답답한 숨을 토해 내며 탄식했다. 로드리고의 집요한 의심은 이제 굳건한 믿음으로 자리한 지 오래였고, 이제는 주변까지 집어삼키기 시작했다. 황제는 적극적으로 제 아내의 머리 위로 불명예를 뒤집어씌웠다.

    그녀가 제 형과 부정을 저질러 어쩔 수 없었노라고. 그것을 부정하면 결국 권력에 눈이 돌아 패륜마저 저지른 사내로 전락할 뿐이었으니까. 그 죄를, 도저히 혼자서는 견딜 수가 없을 테니까….

    유약한 사내들이란 이다지도 피곤했다. 그녀는 지친 얼굴로 제 손목에서 카스트로의 손아귀를 떨쳐 냈다.

    “제발, 너까지 이 어미를 의심하지 마라, 너까지….”

    발작적으로 떨리는 가브리엘라의 손을 착잡하게 바라본 카스트로가 그녀의 손을 제게서 잡아뗐다. 그나마 멀쩡한 의자를 일으켜 그녀를 앉히고, 근처의 사이드 테이블로 걸어가 유리잔에 물을 따라 그녀에게 내밀었다.

    “드십시오.”

    드물게도 제정신으로 돌아온 눈이었다. 근래 술이며, 갖가지 독한 것들을 즐긴다는 소문이 무색하게도. 물론, 그중 몇몇은 그녀가 직접 아들의 입에 밀어 넣은 것들이었다. 어차피 그가 황위에 앉게 된다면 그녀에게 명료한 아들은 필요하지 않았다.

    사유하는 황제는, 더더욱 필요 없었고.

    술과 약, 여자에 빌붙어 지금처럼 인생이나 낭비하면 족할 것이다. 그러는 동안 황계는 오롯이 비탈리의 것이 될 테니까…. 미치광이의 핏줄을 절반이나 받은 저 실패작은 치워 버리고, 제대로 된 비탈리의 혈통을 골라 황제로 추대하면 그만이었다.

    로드리고는 이제 점점 더 위험한 선을 밟고 있었다. 카스타야를 희생시키며 빼앗은 군권을 제 애첩의 치마폭에 처박았고, 그렇게 힘을 키우자마자 주요 관직에서 하나씩 비탈리를 제하기 시작했다.

    반대급부처럼 바섬의 사람들을 하나씩 요직에 세우면서, 그를 여태껏 지지하고 받쳐 온 기반이 비탈리라는 것도 모조리 잊은 채….

    이대로라면 다 같이 고꾸라져 죽는 수밖에는 없었다. 가브리엘라는 피로한 눈을 손가락으로 꾹 짚었다.

    “폐하께서 곧 북부 야만족들의 토벌령을 내리신다고 하더구나.”

    “아, 그러고 보니 한동안 군사 명령을 내리지 않으셨군요. 어린 이안이 아깝게 죽은 것으로 제법 상심이 크셨던지.”

    제 손으로 죽여 놓고도 갓 열여섯 된 3황자의 죽음이 아주 아깝고, 아쉬운 것처럼 말하는 뻔뻔한 음성에는 엷은 소름마저 끼쳤다. 가브리엘라는 종종 카스트로에게서 섬뜩함을 느꼈다.

    가끔 로드리고와 나란히 보고 있자면, 똑 닮은 거울 속 인물들을 들여다보는 듯한 피로감이 치밀었다.

    “죽은 애 이야기는 그만두고. 토벌의 총사로 2황자가 거론되고 있어.”

    “총사요? 비센테가?”

    “설산에나 틀어박혀 사는 치들이니 대충 검만 휘둘러도 공적을 쌓기에는 좋겠지. 적당한 우두머리의 수급만 들고 와도 희대의 영웅처럼 치켜세울 테고.”

    “…그래 봐야 항상 있던 일이 아닙니까? 폐하께서 그 새낄 챙기실 리가….”

    “돌아올 즈음이면 대령이든, 준장이든 이미 원하는 대로 진급을 약속하셨다.”

    카스트로는 제 귀를 의심이라도 하는 것처럼 잠시간 미소를 지은 채 얼어붙었다. 눈자위에 순식간에 핏발이 섰다.

    “…그, 새끼에게… 무엇을요?”

    “평생을 경계하며 살던 조카를, 그 미치광이가 이제는 제 검으로 삼으려 들어. 공공연히 새로이 태어날 생명의 대부가 되어 달라 청하셨다지.”

    “…….”

    “로드리고의 미친 머릿속에 있을 다음이 무엇인지는, 상상하고 싶지도 않다.”

    “다음.”

    그의 어미는 우아하게도 말을 골랐지만, 전하려는 의미는 하나였다. 황제가 카스트로의 다음을 준비하고 있다는 것, 아비가 제 아들의 목에 직접 칼을 꽂아 넣을 계획을 세우고 있다는 것.

    그것도 증오스러운 비센테를 앞세워서….

    가끔은 비센테의 그 반반하고 고상한 낯짝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숨이 막혔다. 선황제의 것을 그대로 빼닮은 청보라색 눈을 마주할 때마다, 그에게는 없는 질척한 밑바닥이 제게만 있다는 걸 들키기라도 할까 봐. 못내 두려워서.

    발밑이 훅 꺼지는 것 같은 감각에 카스트로의 상체가 앞으로 꺾였다. 발작이 올 때처럼 부릅뜬 눈에 눈물이 맺혔다.

    “저를 단 한 번도 자식이라 여기신 적이 없으십니까?”

    “자식?”

    여물지 못한 목덜미를 파고들던 우악스러운 손가락들. 목에 매어 두었던 크라바트는 마치 그 시절 황제의 손아귀 같았다. 힘겹게 숨을 삼키다, 이내 감각이 완전히 잠식되었다.

    아주 혐오스러운 것을 마주한 것 같던 그 새파란 눈.

    “직접 손을 더럽힐 필요도 없지. 너처럼 부정한 것을 죽이는 것에는….”

    그는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헐떡이며 크라바트 사이로 손가락을 넣었다. 손톱에 목이 긁혀 핏방울이 맺혔다. 몇 번을 시도하다 결국 실패하고 씩씩거리며 바닥에 놓인 의자를 걷어찼다.

    공격당한 짐승처럼 흥분한 그에게 가브리엘라가 가만히 다가섰다. 그의 등을 쓸어내리는 손길은 조금도 정성스럽지 않았다.

    “…알겠니, 카스트로? 이제 우리는, 정말 무엇도 실수해서는 안 돼.”

    ‘우리는.’ 엮어서 묶는 솜씨가 완벽했다. 그를 제 아들이 아닌 쓸모 있는 물건쯤으로 여태 취급했던 주제에.

    카스트로는 그녀가 제 주먹 쥔 손을 움켜쥐는 것을 덤덤히 바라보았다. 여자의 축축한 손가락은 파충류의 피부 같았다.

    “바섬의 계집이 정말 황제의 아들을 한 번 더 낳는다면 무엇으로도 막을 수가 없어. 폐하께서도 내내 감싸고 도시고, 귀족원들은 이제 그 계집의 말을 신탁처럼 떠받든다.”

    피부 위로 뱀이 기어 다니는 것 같은 환촉이 일었다. 그는 제 어미의 손을 밀어 치웠다.

    “그렇게 태어날 아이가 걱정되신다면 바섬의 계집에게 약이라도 처넣으면 될 일이 아닙니까? 그 계집이 모후께 퍽 정성이었던 것으로 아는데.”

    “…그랬지. 아니, 그랬다고 믿었지.”

    가브리엘라의 예민한 얼굴이 잔혹하게 일그러졌다. 이사벨라 데 바섬이 3황자를 낳은 이래로 가브리엘라는 그 계집에게 달마다 피임약을 밀어 넣었고, 이사벨라는 그것을 한 번도 거르지 않고 꼬박꼬박 먹어 왔었다.

    황제가 징그러울 정도로 이사벨라에게 진심인 것에 반해, 이사벨라는 징그러울 정도로 제 남편만 알았으니까. 가브리엘라가 언젠가 황제의 손에서 저를 구해주리라는 것만을 믿고.

    3황자가 죽어 나자빠진 나이는 열여섯 살이었고, 피임약을 곧이곧대로 10년도 넘게 복용했다면 마흔을 바라보는 나이에 아이를 또 가질 수는 없었을 것이다.

    가능성은 둘 중 하나였다. 약이 들지 않는 몸이거나, 아니면 처음부터 먹지 않았거나….

    “후작께선 뭐라고 하십니까?”

    “네 외숙의 느긋한 성품을 알지 않느냐. 언제나 자중, 자중…. 황궁에 좀처럼 들지 않으니, 이곳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상황조차 모르는 게지.”

    “…….”

    “이젠 정말 시간이 없다. 바섬에 이어 시모라와 그 휘하의 귀족들까지 모조리 폐하의 손에 들어가게 되면, 그날이 너와 내가 형장으로 끌려가는 날일 테니. 폐하께선 우리를 쳐낼 명목으로 사실도 아닌 추문을 진실인 양 능히 꾸며 내실 분이시고.”

    “…….”

    “그 구역질 나는 혐의가 네게, 내게, 그리고 내 오라비의 머리에 드리워질 것이다.”

    “하면.”

    “그 암캐의 아들이 태어나기 전인 지금이 우리에게 마지막 기회다.”

    가브리엘라의 목소리가 건조하게 가라앉았다.

    황좌를 가진 가문으로 역사에 남겠는가, 아니면 온갖 오욕을 뒤집어쓰고 몰락하겠는가. 단둘뿐인 선택지라면 이제는 물러설 수조차 없었다.

    이윽고 다시 정면을 응시하는 황후의 눈이 새파랗게 타올랐다.

    “이젠 황제를 죽여야만 한다, 카스트로.”

    “…….”

    “우리가 계획했던 것보다 더 빨리.”

    ***

    “이쪽에서 기다리시면 됩니다.”

    극진하지는 않아도 깍듯한 대접이었다. 고풍스러운 응접실로 안내된 남자 셋은 하인이 안내한 마호가니 테이블에 앉았다. 권력의 냄새를 좇아 응접실 안을 두리번거리는 고개들이 아닌 척 부산스럽다.

    최고급 가구들, 위스키병이 둘, 크리스털 잔이 넷, 정교한 무늬가 세공된 값비싼 시가 상자가 하나. 어디를 어떻게 둘러보아도 아낌없이 돈을 쓴 흔적이 물씬 묻어났다.

    거래를 처음 시작하기엔 제법 괜찮은 장소였다. 재력과 상류 문화의 기품을 과시하려는 목적에는 더더욱 부합했고.

    “기다리게 했군.”

    그의 등장에 세 남자가 앉아 있던 자리에서 일어섰다. 의자가 밀리며 작은 소음을 냈다. 앞섶을 여미며 양손을 모아 묵례했다. 공손하기보다는 마지못해 차려 주는 예의의 느낌이 더 강했다.

    “전하.”

    “전하를 뵙습니다.”

    “이야기가 길진 않겠지만, 우선 앉지.”

    비센테는 성큼성큼 응접실을 가로질러 그들의 맞은편에 앉았다. 손짓대로 남자들이 앉자, 그는 위스키병의 마개를 뽑고 잔 셋에 정확한 양을 배분하여 따랐다. 얼음 조각을 하나씩 넣어 그들의 앞으로 각각 밀어 주었다.

    “감사합니다.”

    술잔을 받아 드는 남자들의 표정은 하나같이 경직되어 있었다. 그들의 주름진 얼굴 위로 의심과 경계의 감정이 선명했다.

    따지자면, 그만큼 이례적인 일이었다.

    단 한 차례도 황좌에 대한 욕심을 공공연히 드러낸 적도 없는 황자, 그것도 죽은 황제의 장자가 여태껏 어떤 접점도 없었던 서부의 대영주들을 불러 모은 것은.

    그것도 며칠 전, 황제를 향한 불미스러운 암살 시도가 있었던 것을 고려하면 시기는 절묘하리만치 적절했다.

    “부담 없이 들도록 해.”

    비센테의 부드러운 재촉에 사내들은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서둘러 술잔에 한 모금 입술을 가져다 댔다. 감탄은 즉각 터져 나왔다.

    “이건, 정말….”

    “목 넘김이 몹시 훌륭하군요.”

    “맛이나 향도 근래 마셨던 위스키 중 압도적입니다. 생산지가 어디입니까?”

    비센테는 입매를 슬쩍 매끄럽게 끌어 올렸다.

    “갈리시아. 그 고장에서도 1년에 고작 몇십 병밖에 생산하지 않는 술이지. 품질이야 물론 의심할 바조차 못 되지만, 이런 것들은 개인의 선호를 타니까.”

    “…맙소사. 이게 정말 말로만 듣던 갈리시아산 위스키란 말입니까?”

    안 그래도 놀랐던 눈이 조금 더 둥글어졌다. 술이라면 환장하고 달려드는 서부인들답게 분위기가 눈에 띄게 우호적으로 들뜨기 시작했다.

    아르호나, 푸엔테스, 모구에로….

    셋 다 모두 서부, 이야라 지방의 대영주들로서 질 좋은 술을 영지의 창고에 오크통째로 쟁여 두었을 테지만, 갈리시아산 위스키를 맛볼 기회는 흔치 않았을 테니까. 귀족적으로 꾸며진 이 화려한 응접실이 저들에게 익숙하지 않은 것처럼.

    비센테는 제 앞에 놓인 물잔에 입술에 대며 대수롭지 않게 친절을 베풀었다.

    “마음에 든다니 다행이군. 돌아갈 때 한 궤짝씩 들고 갈 수 있도록 준비해 두었거든.”

    사소하고 즐거운 경악이 사내들의 얼굴에 번졌다. 술이면 하룻밤 사이에 원수가 친척이 되고, 가문의 연도 맺어질 수 있다고 믿는 서부인 특유의 호방한 성격 덕이었다.

    닳고 닳은 벨몬테의 귀족들과 달리 받자마자 선물에 숨겨진 저의를 찾느라 바쁘지도 않았다.

    적어도, 순간은.

    “분명 감사하고 송구한 일이긴 하나, 이렇게 귀한 것을 그저 받기만 해도 좋을지….”

    개중 눈치가 빠른 사내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아르호나 변경백을 필두로 들떴던 사내들의 표정이 다시금 이지를 되찾았다.

    이들에게 에스페다의 황제란 건국제 때마다 귀찮게 참석을 강요하는 사람에 불과할 뿐이었다. 낯선 곳에 초대되어 긴장하기는 했고, 질 좋은 선물을 받아 잠시 누그러들긴 했으나 저들은 각자의 지역에서 왕처럼 군림하는 자들이었다.

    충성심도 소속감도 없는 자들에게 접근하는 방법은 하나뿐이다.

    비센테는 생각을 갈무리하며 입매를 끌어 올렸다.

    “단도직입적으로 이야기하지.”

    그가 긴 다리를 포개어 꼬며, 의자의 등받이에 자연스럽게 상체를 기댔다.

    “나는 당신들의 협조가 필요해.”

    비센테가 손짓하자 곁에서 공손히 대기하고 있던 하인이 돌돌 말린 지도를 건넸다. 펼쳐 보니 넓은 책상을 거의 가득 채울 정도로 거대한 지도였다. 그가 손으로 서부에서부터 수도로 이어지는 가도를 몇 군데 짚었다.

    “레리다 가도에서부터 파야레사 다리까지. 이 열세 지점을 내가 원할 때 봉쇄가 가능했으면 좋겠군. 기간은 2주에서, 길면 한 달까지.”

    서부 영주들의 완고한 얼굴에 당혹감이 스쳤다. 황자가 요구하는 바는 얼핏 사소했다. 그가 짚은 지역은 군사적으로 중요한 요충지도 아니었고, 물자들이 오가는 큼직한 길목도 아니었다.

    남부에서부터 시작해 서부를 지나 수도까지 이어지고 있긴 했지만… 저것 말고도 이용할 수 있는 가도가 적어도 셋은 더 있었다.

    문제는, 길이 아닌 사람이었다.

    “이건… 가도를 지키는 군을 움직이라는 말씀이시군요.”

    조심스러운 접근은 이랬고.

    “이야라는 에스페다의 황제께 충성을 바칩니다. 이게 황제 폐하의 뜻입니까?”

    조금 더 과격한 반응은 이랬다. 비센타가 마지막으로 쳐다본 푸엔테스 남작은 조금 멋쩍다는 듯 덧붙였다.

    “물론, 전하께서 지니신 정당성을 의심하는 바는 아닙니다만….”

    “아시지 않습니까. 저희는 모두 서부의 증표에 맹약한 것을요. 증표를 쥔 자에게 충성하는 것으로….”

    “증표.”

    길어지는 변명에 황자의 목소리가 재미있다는 듯 나직하게 가라앉았다. 서부의 늙은 대영주들이 자기 보신에나 치중하는 자들이라는 것을, 모르지 않다는 것처럼.

    “한낱 쇳조각에 불과한 것에 여태껏 진심이라니. 신기하군.”

    “…맹약은 이야라 님의 이름으로 선언된 것입니다. 서부는 저희의 여신을 배반하지 않습니다….”

    천주 시엘로가 아닌 그를 오른쪽에서 보좌하는 여신 이야라를 국교로 삼은 서부는, 기실 에스페다인이라기보다는 지역 토착 원주민의 성향이 더 짙었다. 그들은 여전히 삶의 모든 것을 여신이 내려 주시는 것이라 믿고, 대부분의 시간을 넓고 삭막한 평야를 농지로 개간하는 것에나 힘썼다. 자연스럽게 발전이나 변화에는 무뎠다.

    한때는 제국과 동등했던 무력으로, 에스페다의 초대 황제로부터 얻어 낸 자치권에 안주한 뒤로는 더더욱.

    “서부는 서부의 이름을 건 맹약을 어느 순간에도 지킬 겁니다.”

    불과 백 년 전까지만 해도 비등비등했을 관계는 이제 오로지 에스페다의 손에 기울어진 채로 흘렀다. 저들이 정교한 태엽 시계에도 놀라서 동그란 눈을 뜨는 동안, 시대적 발명에서 조금씩 멀어진 삶을 사는 동안….

    “가도를 지키는 서부군을 임의로 퇴각시키면 그 즉시 맹약의 효력이 소멸할 겁니다. 그러면 서부는 최소한의 방벽조차 잃게 되겠군요.”

    과열된 대화의 흐름을 늦출 필요가 있었다. 비센테는 여유로운 낯으로 제 앞에 놓인 물잔을 기울였다. 느긋하게 한 모금을 마시는 동안 그의 일거수일투족에 사내들의 시선이 붙었다.

    “그대들의 불안은 이해해.”

    “하면….”

    “그리고 내가 이 거래의 대가로 약조할 수 있는 것도 하나뿐이지. 이제 고작 30년쯤 남은 자치권에 대한 연장.”

    순간 절박하게 숨넘어가는 소리가 들렸다.

    “자치권의 연장이라니. 그를 보장할 수 있는 건….”

    “에스페다의 위대한 폐하뿐이시지. 그리고 폐하의 의중은, 이미 움직이기 시작했고.”

    비센테는 깜박 잊기라도 한 것처럼 안쪽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내 테이블 위에 올려 두었다. 손바닥 크기의 청동색 메달이었다.

    늙수그레한 남자들의 투실한 얼굴에 자잘한 떨림이 일었다. 순수한 놀람과 당신이 대체 어떻게 이걸 가지고 있을 수 있냐는 호기심이 절반씩 뒤섞인 눈이 그와 증표를 번갈아 살폈다.

    “이건….”

    황위 계승권을 지닌 남자가 서부의 증표를 가지고 있다는 건 하나만을 의미했다.

    황제의 의중이 눈앞의 사내에게로 완전히 기울었다는 것.

    “이야라, 맙소사.”

    비센테는 그들의 충격이 가라앉기를 느긋하게 기다렸다.

    “나는 폐하의 뜻에 따라, 이야라 여신의 이름 앞에 새로운 맹약을 계승할 생각이야. 명분도 그대들이 연연하던 증표도 이것으로 확실해졌지.”

    “…….”

    “이제, 선택은 그대들의 몫이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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