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8화 (58/151)

***

박람회는 근래 들어 가장 큰 규모로 열린 만큼 볼 만한 것들이 많았다. 이벨린은 비센테의 손을 붙잡은 채로 천천히 회랑 안을 돌았다. 그러는 동안 비센테는 틈 없이 우아하고 완벽한 예법대로 그녀를 수행했다.

박람회장의 입구 앞에서 그들이 요란한 입맞춤을 했다는 것을, 이 넓은 홀 안에 모르는 사람이 없는데도. 한껏 부러워하는 여인들의 시선이 이벨린에게, 그보다 조금 더 황홀해하는 시선이 비센테에게로 향했다.

어쩐지 그의 완벽한 금발이 오늘따라 다소 흐트러진 것이, 조금 전의 상황이 얼마나 격정적이었는지 알 것만 같았다. 보지도 못한 침대 위의 그의 모습까지도….

이벨린은 그 욕망이 자글거리는 눈빛들을 적당히 흘려보내며 비센테의 손끝을 잡아끌었다. 그가 그녀를 흘끗 내려다보았다.

“조금 쉬고 싶어요.”

“피곤해?”

“그것도 그렇고….”

이벨린은 티 나지 않게 주변을 슬쩍 둘러보았다.

규모가 규모이다 보니 전시장으로 꾸며 둔 수 개의 홀 외에도, 사람들이 마시거나 쉴 수 있는 작은 방들이 곳곳에 마련되어 있었다. 물론 본래의 목적보다도 조금 더 사특한 목적으로 사용되는 경우가 태반이었지만.

이벨린은 그런 더러운 것은 모른다는 것처럼 말갛게 웃었다.

“이제 둘러볼 만큼 둘러본 것 같아서요.”

“아! 비센테 전하.”

누군가 그들을 발견하고 요란하게 알은체를 하며 다가왔다. 근래 벨몬테 사교계에서 가장 유명한 인사 중 한 명인 반데라스 백작이었다. 이벨린은 요 근래 신문들이 그에 대해서 얼마나 호의적으로 떠들어 대는지를 상기했다.

그가 여태껏 얼마나 많은 금광을 성공적으로 발굴해 냈으며, 얼마나 많은 부를 축적했는지, 신대륙에서 새롭게 진행할 다이아몬드 광산 사업이 얼마나 가능성이 넘치는지에 대해서…. 요즘 에스페다 사교계에서 반데라스 백작을 빼놓고는 대화가 통하지 않았다.

초저녁부터 거나하게 오간 술잔 덕에 안 그래도 벌겋던 반데라스 백작의 얼굴은 이제는 위험할 지경으로 시뻘겋게 변해 있었다. 기분 좋은 취기에 휩싸인 자 특유의 쾌활함이 투실한 그의 얼굴에 번들거렸다. 벌써 이 박람회장에서도 순진한 귀족들의 돈주머니를 제법 뜯어먹은 것 같았다.

이벨린은 연인들만의 경계가 침범당한 게 못마땅하다는 듯 눈매를 일그러트렸다. 반데라스 백작이 그들에게만 보이도록 살짝 웃고는 뻔뻔한 얼굴로 말을 쏟아 냈다.

“이거, 제가 건국제 때 해외에 나가 있었더니 두 분을 아주 오랜만에 뵙습니다. 백작 영애께서는 역시 오늘도 아름다우십니다.”

일단 한 번 이벨린을 치켜세우고.

“그나저나 혹시 두 분의 좋은 소식은 언제쯤 들을 수 있을까요? 온 에스페다 사교계의 눈과 귀가 두 분을 향해 쏠려 있다는 걸 아실는지.”

보란 듯 주변 사람들의 관심을 끌 화제를 고르고.

“아, 전하. 그런데 잠깐 시간을 좀 내주실 수 있겠습니까? 영애께는 죄송하지만 전하께는 긴히 드릴 말씀도 있어서요. 남자들의, 그, 사업에 관련된 이야기라.”

결국은 사업 이야기로 귀결되는 수순이었다. 이벨린은 조금 질려하는 낯으로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저는 신경 쓰지 마세요. 이제 사업 이야기에는 진력이 나서. 근처에서 쉬고 있을 테니, 두 분 말씀 천천히 나누세요.”

“혼자서 괜찮겠어?”

“그럼요.”

“멀리 가지 마. 곧 돌아올 테니까.”

“다녀오세요.”

비센테가 그녀의 손등에 우아하게 입을 맞추고, 반데라스 백작과 몸을 돌려 응접실로 사라졌다.

이벨린은 몇몇 여성들이 눈을 빛내며 그들의 뒤를 따르는 것을 보며 여유롭게 부채를 흔들었다. 예전에야 비센테가 여자라면 덮어놓고 거리를 두다 보니 접근조차 힘들었겠지만, ‘이벨린’을 가까이하는 모습에 용기를 얻은 모양이었다.

물밑에서는 외국인보다는, 말이 자유자재로 통하는 내국인이 낫지 않겠냐는 계산도 심심찮게 나오는 판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황족이신데 어디서 굴러먹다 왔는지도 모를 여자가 가당키나 하겠냐면서. 셈이 빠른 자들은 벌써부터 제 딸의 초상화를 들이미는 실정이었다.

근래 황제께서 2황자를 대놓고 총애하는 모습을 보인 것이 주효했던 모양이지.

그래, 여기까진 그녀가 들었던 계획대로였다. 이벨린은 시선을 들어 전시장의 반대편에 루카스가 있는 것을 확인했다. 그녀는 눈이 부시기라도 한 것처럼 눈매를 가늘게 좁혔다가 반대편으로 몸을 돌렸다.

“…….”

모르긴 몰라도, 반데라스 백작의 접근도 처음부터 비센테의 계획하에 있었을 터다.

반데라스 백작이 기존에 벌였던 금광 사업으로 제법 큰 이윤을 남겨 먹었다는 것을 에스페다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었고, 정치적으로는 황제와 황태자 중 어느 쪽에도 공개적인 지지를 표명한 적이 없었다. 연회장의 어디에나 있어도 자연스러울 사람을, 보다 더 자연스럽게 둘 사이를 갈라놓는 목적으로 사용한 것이다.

반데라스 백작은 사기꾼이었지만, 돈이 아닌 보다 높은 목적을 위해 움직이는 사기꾼이었다. 박람회장을 한 바퀴 도는 동안 그녀는 반데라스 백작에게 큰 투자금을 약속한 사람들의 면면을 주의 깊게 살폈다. 파악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하나같이 상기된 얼굴로 그들이 얼마나 특별한 행운을 누리게 되었는지 떠들어 댔으니까.

마치, 황금의 땅으로 가는 특급 선박의 마지막 티켓이라도 움켜쥔 것처럼.

유서 깊은 가문들의 가주며 장자들이, 그 매끄럽게 기름칠한 혓바닥에 속아 투자금을 얼마나 쏟아부었는지…. 그렇게 속아 넘어간 치들이 하나같이 카스트로와 친분이 깊은 귀족이라는 건 결코 우연의 일치가 아닐 것이다. 차라리 처음부터 모종의 의도대로 움직이고 있다는 게 더 정확한 판단일 것이다.

그가 비센테를 위해 일한다는 것쯤은 이제 알 것 같았다.

‘다이아몬드 광산은 거짓이었고, 카스트로의 돈줄을 끊어 놓으려는 목적으로 무리하게 투자금을 요구한 거겠지. 신대륙 발 광산 인증 서류는 발레아레스 총독을 매수했겠고….’

총독은 아주 오래전부터 황태자의 사람이었으니 서류가 가짜로 작성되었다고 생각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카스트로에게 충성스러우면 충성스러울수록 투자금을 쉽게도 내주었으리라.

‘저러다 반데라스 백작이 도망이라도 가면, 손해가 제법 크겠네.’

이벨린은 대수롭지 않게 평하며 지나가던 하인의 쟁반에서 부드럽게 샴페인 잔을 낚아챘다. 손바닥에 올린 잔을 천천히 굴리며 회장을 두 바퀴째 돌았을 무렵이었다.

“영애.”

“…….”

이벨린은 듣지 못한 척 전시된 그림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그녀가 아는 척은커녕 곁눈질조차 하지 않자, 그제야 시종이 조금 더 가까이 다가섰다. 도저히 외면하려야 외면할 수조차 없는 거리까지.

“레녹스 백작 영애 되십니까?”

“네. 제가 레녹스예요.”

겉으로야 태연한 척 굴고 있었지만, 그녀는 내심 놀란 상태였다. 카스트로가 부러 시종을 보냈다는 의미는 단둘이서 따로 보겠다는 의지였다.

“황태자 전하께서 찾으십니다.”

목울대를 타고 구토감이 일렁였다. 본능이 보내는 경고는 선득했다. 따라가면 분명 위험할 것이다. 하지만 조금 더 그럴듯한 그림을 뽑아낼 수 있을 테고, 그게 기사로 나간다면 비센테에게 좀 더 유리해지겠지.

어차피 루카스가 기자들과 함께 그녀를 따를 테니, 위험한 순간까지는 가지도 않을 거고….

‘그리고 비센테에게 뭔가를 더 해 줄 시간이, 이제는 많이 남지 않았으니까.’

습관처럼 초조함을 씹어 삼키자 순간 심장이 콱 조이는 것 같은 조급함이 치밀었다.

“…영애?”

그녀가 어떤 반응도 없자 시종이 미심쩍은 듯 한 번 더 불렀다. 이벨린은 사람들의 호기심 어린 시선이 적당히 모여들 때까지 기다렸다가 가련한 척 시선을 떨어트렸다.

“네. 앞장서세요.”

***

앞장서서 걷던 시종이 멈춘 곳은 사자가 양각된 목문 앞이었다. 일반적인 응접실의 위치가 전시장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은 것에 비해, 그들이 멈춘 곳은 대단히 구석진 위치였다.

“이곳은….”

“황태자 전하께서 일반 귀족들이나 드나드는 응접실을 쓰실 수는 없는 노릇 아닙니까.”

그가 귀찮다는 듯 건성으로 대꾸하곤, 목문의 안쪽을 향해 목소리를 높였다.

“전하. 레녹스 백작 영애를 모셔 왔습니다.”

“들어와.”

문이 열리자 덥고 습한 공기가 먼저 느껴졌다. 몇 걸음을 떼기도 전에 누군가가 연약하게 끙끙거리는 소리가 먼저 들렸다. 뒤이어 눈앞에 펼쳐진 건 역겨우리만치 익숙한 광경이었다.

“아, 전하…!”

소파의 등받이에 가려져 제대로 보이지는 않았지만, 카스트로의 아래에 깔려 있는 것은 분명 여자였다. 새하얀 다리가 공중으로 들어 올려진 채 흔들거렸다.

이벨린은 소파에 가련하게 처박힌 여자를 한 번 바라보고, 그대로 시선을 들어 올려 카스트로와 눈을 마주했다.

“…….”

그는 허리를 움직이면서도 집요하게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마치, 이벨린의 얼굴에서 어떤 징조를 찾아내려는 듯이. 여자가 건조한 비명을 지르는 주기가 점점 더 빨라지고 있었다.

“아, 아아!”

그 순간, 이벨린은 모든 상황을 파악했다. 이 모든 게 그녀를 자극하기 위해 꾸며진 일이었다. 시종장이 노크조차 없이 문을 열어젖힌 것도, 여자를 깔아뭉개고 있는 것도. 그가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너도 이런 처지로 끌어내릴 수 있다는 걸 보여 주기 위해서…. 이벨린이 얼어붙어 있는 사이 카스트로가 나른한 숨과 함께 몸을 떼어냈다.

“하….”

그가 잡고 있던 여자의 발목을 놓아주자, 여자가 허겁지겁 옷매무새를 정돈했다. 이벨린은 몸을 일으킨 여자의 얼굴이 익숙하다는 것을 깨닫고 충격을 받았다. 아멜리아 데 모라, 한때 그녀의 시녀였던….

레베카와 아멜리아는 이름만 황태자의 약혼녀였던 엘레나가 가졌던 유일한 좋은 것들이었고, 한때는 진심으로 마음을 나눴던 친구들이었다. 무도한 카스트로의 손아귀에서 필사적으로 지켜내기 위해, 한때 그녀가 무엇까지 했었던가.

옷을 추스르는 아멜리아의 손길은 이런 일에 익숙한 듯 지극히 담담해 보였다. 까맣게 죽은 그녀의 눈빛은 그들의 관계가 오로지 황태자의 욕심으로 지속되고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

부르튼 입술과 옷가지 사이로 언뜻언뜻 보이는 오래된 순흔은 그들의 관계가 하루 이틀 이어진 게 아니라는 것을 증명했다. 과거의 기억대로라면, 심지어 아멜리아에겐 진심으로 사랑하던 약혼자까지 있었을 텐데.

“…….”

이벨린은 아멜리아가 걸치고 있는 옷이, 황후의 시녀들에게 지급되는 드레스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 그때도 저런 옷을 입고 황후의 뒤에 서 있었다. 이벨린이 그녀를 처음으로 오페라 극장에서 보았을 때도….

“그럼 전하. 저는 이만….”

피로와 수치심으로 새파랗게 질린 아멜리아가 우아하게 고개를 숙였다. 카스트로는 아멜리아 쪽은 쳐다보지도 않은 채로 고갯짓을 했다.

“가 봐.”

아멜리아는 이벨린에게도 무릎을 굽혀 인사하곤 빠르게 그녀를 스쳐 지나갔다.

“…….”

“앉지.”

어느새 시가를 입에 문 카스트로가 그녀에게 소파를 권했다. 조금 전까지 아멜리아가 처박히듯 깔려 있던 소파였다. 닿는 것조차 끔찍했으나, 이벨린은 내색하지 않고 앉았다. 그녀는 떨리는 눈동자를 감추기 위해 순진한 척 눈을 내리깔며 입을 열었다.

“저를 찾으셨다고요.”

“말은 바로 해야지, 이벨린. 네가 날 찾았잖아.”

“…….”

“아주 보란 듯이 시끄럽게 굴어 놓곤.”

오늘 그녀가 입은 드레스는 ‘카스타야 영애’가 자주 입던 단순한 형태의 드레스였다. 어깨를 감싼 소매에 자수와 보석을 박아 심심하지 않게 했고, 머리도 이런 옷을 입을 때마다 자주 했던 방식대로 꾸몄다. 진주가 박힌 머리핀에 진주 귀고리와 목걸이….

이 꼴을 하고 내내 비센테와 찰싹 붙어 있었으니, 보자마자 거슬렸으리라.

“…무슨 말씀인지 모르겠네요.”

카스트로는 아주 가소로운 이야기를 들었다는 양 눈매를 좁혀 떴다.

“그걸 믿으라고? 비센테의 곁에 찰싹 붙어서 발정 난 암캐처럼 굴더니.”

발정 난 암캐. 이벨린은 흐리게 웃었다. ‘엘레나’의 몸으로 누구에게 잠깐 웃어 주기만 해도 득달같이 쏟아지던 폭언을 이렇게 다시 듣게 될 줄이야. 정말이지, 징그럽게도 제 앞에 있는 사람이 누구인지 알아본 것처럼….

이벨린은 역겹게 치미는 속내를 감추며 그림처럼 웃었다.

“어느 누가 감히 전하의 의중을 짐작할 수 있을까요?”

카스트로가 뻔한 이야길 한다는 투로 코웃음을 쳤다. 네 가증스러운 속내를 이미 다 파악했다는 듯 입매가 비스듬히 기울어졌다. 그가 땀에 젖어 들었던 머리카락을 이마 위로 쓸어 올리며 시가를 한 모금 빨았다.

“너무 뻔한 대답이라 지겹군.”

“…….”

“네 그 얕은 속이야 그렇다 치고. 비센테가 널 왜 내 눈앞에서 끌고 다니는지, 그 뻔한 수를 내가 모를 것 같아? 머리며, 화장이며, 향유며, 어떻게든 닮을 옷을 주워다 입은 꼴이며….”

“마음에 안 드시나요?”

“애초에 그 새끼가 나한테 밀어 넣은 창녀가 한둘도 아니고. 너 같은 것 하나 없었을까?”

“…….”

“그리고 난 계집들이 옷을 입고 있는 걸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아.”

이벨린은 순하게 눈을 내리깔며 웃었다.

“참고할게요.”

물고 있던 시가에 불을 붙인 카스트로가 한 모금 깊게 빨아들이며 그녀를 응시했다. 황태자가 아니라 뒷골목의 건달이라도 되는 양 불량한 눈이 그녀를 위에서부터 아래로 훑었다. 그녀는 그의 시선이 제 얼굴에서 한 번, 그리고 가슴께에서 조금 더 오래 멈춰 있던 것을 눈치챘다.

“제법 순순하게 구네. 저번과 달리.”

“…….”

“지난번에는 있는 대로 딱딱하게 굴더니, 무슨 바람이 들어서 이렇게 웃지?”

“제가 웃는 것이 마음에 안 드신다면….”

“그건 예쁘니 그대로 웃고 있고, 대답이나 해.”

“그때는… 긴장하고 있었어요. 너무 갑자기 마주하게 되어서….”

“아하, 긴장?”

되지도 않는 소릴 지껄여 댄다는 듯 그가 시가를 쥔 채로 웃음을 터트렸다. 뿌옇게 번져 가기 시작한 연기가 매캐하게 숨을 찔렀다. 이벨린은 갑갑한 듯 눈매를 살짝 찡그리며 대답했다.

“사실 아직도 조금 긴장되긴 해요. 그래서 전하께서 제게 조금만 더 상냥하게 대해 주시기를 바라요.”

“네게? 내가 왜?”

“저를 보다 더 완전하게 가지실 수 있다면요. 그래도 내키지 않으실까요?”

“완전하게.”

그가 이벨린의 말을 따라 하며 짧게 웃었다. 한 모금 깊숙하게 빤 시가 연기를 이벨린의 얼굴을 향해 조롱하듯 뱉었다.

“브리타냐 계집 주제에, 에스페다의 황태자비의 자리라도 노리려고?”

일순 서늘해진 눈빛이 흉흉했다. 오롯이 황후만을 닮은 초록색 눈동자가 그녀를 직시했다.

카스트로가 ‘엘레나’를 알듯 그녀 또한 카스트로를 알았다. 그는 제 앞에서 덜덜 떠는 자는 기껍게 여기지 않았고, 공손히 고개를 숙이면 숙일수록 발로 머리를 짓밟는 자였다. 정도를 넘은 시건방은 기꺼워하지 않으며 특히 제가 눕히려고 드는 계집에게는 어느 정도의 선까지는 친절을 가장했다.

일전에 그녀에게 그랬듯, 비센테의 행동거지나 화법을 적당히 흉내 내며….

그런 관점에서 지금의 카스트로는 조급함조차 숨기지 못할 지경으로 몸이 달아 있었다. 이벨린은 조금 더 뻔뻔하게 웃었다.

“그러면 안 되나요?”

“…건방지긴. 넌 비센테의 비 자리를 노리는 게 아니었나?”

“사실, 에스페다 행을 결정한 그 순간부터 계속 전하를 만나 뵙고 싶었어요.”

카스트로의 여유를 가장한 낯짝 뒤에 숨겨진 성마른 얼굴이 일순 드러났다 사라졌다. 짙은 갈망과 경계심이 절반씩 어린 눈이 이벨린의 얼굴을 느릿하게 훑었다. 이윽고 그가 픽 웃으며 입매를 뒤틀었다.

“처음부터 목적이 나였다? 듣기에는 좋네.”

“제가 2황자 전하의 곁에 있지 않았다면… 전하께서 제게 눈길이라도 주셨을까요?”

“그렇게 날 잘 안다니 내가 이제 뭘 요구할지도 알겠고.”

그가 물고 있던 시가를 사이드 테이블에 눌러 끄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벨린은 순간적으로 400년도 더 된 사이드 테이블을 걱정하듯 바라보았다가, 그가 제 앞에 서서 그림자를 드리우자 흠칫 고개를 들었다.

그가 그녀가 앉아 있는 소파의 등받이를 손으로 짚으며, 이벨린의 다리를 제 무릎 사이에 가두었다. 그러고는 그녀의 턱을 우악스럽게 붙잡아 들어 올렸다.

“지난번엔 사색이 되어서 도망갔었지. 방금 전 계집이 당한 꼴을 보고도 여태 앉아 있는 걸 보면 각오는 진작 했겠고.”

이벨린은 애써 침착한 얼굴로 그를 마주했다. 덜덜 떨거나, 눈물을 보이거나, 꼴사납게 소리를 질러서도 안 된다. 카스트로의 흥미를 이끌어 내야 그의 집무실에 드나들 권한을 얻을 수 있을 테니까….

무엇을 꾸미는지, 누구와 결탁했는지, 비센테의 반역을 어디까지 눈치채고 있는지, 혹은 그가 지닌 군대의 규모가 어느 정도인지…. 그 모든 것이 ‘엘레나’가 알던 그대로인지 확인하기 위해서.

끔찍하던 기억들이 서서히 밀려나며 목표가 다시 분명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이벨린은 파르르 떨리는 손을 애써 다잡으며 그의 가슴팍을 조금 밀었다.

“부디 고정하세요. 문도 여태 열려 있었던 데다가, 오며 가며 제가 여기 있는 걸 본 사람이….”

“지금 그게 문제가 될 거라고 생각해?”

그녀가 반항을 하면 할수록 카스트로의 호흡이 점점 거칠어지고 있었다. 순간적으로 문 너머를 애절하게 바라보았지만, 여태 루카스는 코빼기도 비치지 않고 있었다. 이벨린은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가 카스트로의 눈을 바라보며 섬약하게 웃었다.

“제가 전하에게 안기게 되는 그 순간은 제 의지였으면 좋겠어요. 그때까지 기다려 주실 수 없나요?”

“선택지를 주지.”

뱀의 독과 같은 초록색 눈에 불티처럼 욕정이 자글거렸다. 그가 이벨린의 턱을 쥐었던 손을 그대로 옮겨 그녀의 머리채를 휘어잡았다. 그대로 목이 뒤로 젖혀졌다.

“여기서 얌전히 다리나 벌리든가, 아니면 그 입을 벌리든가.”

“…….”

애써 밀어두었던 과거의 기억이 조금씩 현재를 좀먹었다. 이벨린은 덜덜 떨리려는 턱을 진정시키려 이를 한 번 세게 악물었다.

서쪽 탑에 감금되어 있을 당시에 카스트로는 그녀에게 여러 차례 비슷한 일을 시켰었다. 이는 대체로 여태 아껴 놓고도 제대로 ‘즐기지’ 못한 분풀이였고, 그녀가 거부하면 폭력도 불사했다. 비록 황제의 명령 덕에 끝까지 이어지지는 못했지만.

그러니 태를 망치는 약을 먹기 시작한 순간부터 제정신이 아닐 수밖에.

둘 중 하나라면 선택지는 명확했고 따지자면 못 할 짓도 아니었다. 첫 번째 문제는 이 몸의 주인이 그녀가 아니라는 점이었고, 두 번째는 곧 루카스가 들이닥치리란 점이었다.

어떻게든, 시간을 조금만 벌 수 있다면….

이벨린은 짐짓 사납게 눈매를 치켜떴다.

“제가 그렇게 하면 전하께서는 제게 무엇을 주실 건데요?”

“뭐?”

“저를 몸이나 파는 여자처럼 취급하시니 드리는 말씀이에요. 당연히 값비싼 화대를 내어 주시겠죠? 전하의 말대로라면, 전 에스페다의 명예로운 멍청이들에게 제 처음을 아주 비싼 값에 팔려고 왔으니까.”

“…….”

“적어도 안드라데 정도는 되어야 족하겠어요.”

이벨린이 새치름하게 덧붙인 말에, 카스트로는 일순 말문이 막혔다가 이내 헛웃음을 터트렸다.

“안드라데 공작의 장남을 거론해, 지금?”

“제 재산이 얼마인지를 아시니 제겐 돈이 필요 없다는 것쯤은 아시겠고… 하니 얻어야 할 것이 있다면 명예뿐인데.”

“…….”

“정말로 제게 에스페다를 주실 작정이 아니시라면야, 제 가치를 지켜 주세요.”

“아하….”

기막히다는 듯 얼어붙어 있던 그가 이벨린의 머리를 조금 더 우악스럽게 틀어쥐었다. 뒤로 꺾이듯 젖혀진 이벨린의 뺨에 대고 그가 으르렁거리는 분노를 토해 냈다.

“대체 네 앞에 있는 사람이 누구라고 생각하나? 감히 에스페다의 황태자를 앞에 두고 대가를 입에 올려?”

이벨린은 유순해 보이는 눈을 부러 더 새치름하게 떴다.

“제가 전하의 말에 두려워하고, 움츠러들고, 울고, 따르면 만족하시겠어요? 그래서는 전하께 조금의 즐거움을 드릴 수도 없을 텐데.”

“…….”

“전하께서도 저와의 놀이를 조금 더 즐기셨으면 좋겠어요. 제가 전하께 조금 더 진심이 될 수 있도록… 조금만 더 시간을 주시면 안 되나요?”

“네가 그때 다리를 벌리는 것과 지금이 무엇이 다르기에.”

“전하의 마음이 달라지겠죠. 사내들이란 갖지 못했던 여자에게 열광하잖아요.”

“…….”

그는 길지 않게 침묵했다. 그녀의 말이 진심인지 아닌지 가늠해 보려는 것처럼, 눈매가 뱀처럼 가늘어졌다.

“비센테가 네게 퍽 진심인 것 같던데.”

“그분의 마음까지 제가 알아야 하나요?”

“여태껏 그저 이용만 한 것이라?”

“보기 좋잖아요. 명예는 없고, 혈통은 고결하고.”

“…….”

“그리고 그분과 붙어 있으면, 전하께서 이렇게 안달 난 눈으로 저를 바라봐 주시고.”

역한 속이 치밀었다. 말이 아니라 구토를 뱉고 있는 것만 같았다. 비센테를 두고 제가 저딴 말을 말이라고 했구나, 아무리 카스트로를 속이기 위해서라지만, 저딴 것을 감히 말이라고…. 이벨린은 스스로에 대한 혐오감을 억누르며 간신히 미소를 머금었다.

손을 뻗어 카스트로의 뺨을 지나 관자놀이를 살짝 매만졌다.

“어차피 에스페다의 모든 영광은 전하의 머리 위에나 있으니.”

묘한 표정으로 한참 동안 이벨린을 바라보던 그는, 이내 드물게 가라앉은 기색으로 입술만 몇 번 달싹거렸다. 이윽고 그가 마침내 쥐었던 그녀의 머리카락을 놓아주었다.

“…….”

한껏 젖혀졌던 목이 욱신거렸다. 이벨린은 무엇도 내색하지 않은 채 옷차림부터 정돈했다. 머리카락을 다시 핀으로 고정시키고, 흐트러졌던 치맛자락의 주름을 툭툭 폈다. 허리를 곧게 펴며 고개를 들자마자, 조금 더 짙어진 카스트로의 눈과 시선이 마주쳤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