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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때 돌아가지 않으면 아가씨는 그대로 소멸할 거예요.”
이벨린은 피로한 눈 사이를 짚으며 마차의 창틀에 팔꿈치를 올렸다. 이 상황을 조금 더 명확하게 이해하기 위해 힐다를 만나고자 했는데, 도리어 이해하기 힘든 수수께끼만 잔뜩 떠맡은 기분이었다.
그렇게 죽을 고생을 했는데 확실한 실마리는 잡지도 못했다니. 무력감이 지독했다. 엷은 한숨을 내쉬기 무섭게 맞은편 좌석에 앉아 있던 비센테가 입을 열었다.
“힘들면 무리하지 마.”
“아….”
이벨린은 눈을 깜박이며 정신을 다잡았다. 생각에 골몰하다 보니 그가 앞에 앉아 있다는 것조차 잊고 있었다. 그들이 박람회에 함께 참석하기 위해 마차에 올랐다는 것조차. 이벨린은 제 화려한 상앗빛 드레스를 잠시 망연한 눈으로 내려다보았다.
같은 재질의 장갑에 감싸인 손이 무릎 위에 놓인 채로 떨리고 있었다. 마치, 술에 취한 중독자처럼….
그가 걱정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이벨린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힘든 것은 아니에요.”
“얼굴이 창백해.”
그가 상체를 숙이며 제 큼직한 손을 뻗어 이벨린의 이마를 짚었다. 커다란 손이 눈두덩이를 덮어 뺨의 윗부분까지 뒤덮었다. 그런 배려가 자연스러워 보였다.
그가 평생을 여자를 멀리하고 살았던 것을, 아는데도. 이윽고 비센테가 손을 떼며 좌석의 등받이에 다시 제 몸을 기댔다.
“열은 없는데.”
“조금 피로해서 그래요. 잠시 쉬면 괜찮아질 거예요.”
못 들을 것을 들었다는 듯 그가 한쪽 눈썹을 슬쩍 치켜올렸다.
“…잠시?”
“그럼요. 게다가 이번 일은 꼭 해야만 하는 거고….”
“그게 굳이 오늘일 필요는 없어.”
청보라색 눈동자는 여전히 오만하도록 냉담했지만, 이벨린은 이제 그 속에 담긴 염려를 읽어 낼 수 있었다. 저것이 제법 진심에 가까운 빛으로 변질되기 시작했다는 것도.
이사벨라로부터 비센테를 믿지 말란 소리를 전해 들은 직후부터는 그를 피해 다니기 바빠 보이지도 않았던 것이, 힐다로부터 마법이니 저주니 하는 뜬구름 잡는 이야기를 들은 뒤로는 의식조차 되지도 않았다.
그저, 피로했다.
“염려는 감사하지만 저는 정말 괜찮아요. 열이 없는 것도 확인하셨으면서.”
“…….”
“우리에게 남은 시간이 얼마 없다는 걸 아시잖아요.”
남은 시간. 정확히는, 그녀가 그를 위해 일할 수 있는 시간. 힐다를 만난 뒤로 이벨린은 내내 초조했다. 그게 비센테에게 도움이 되지도 못한 채 사라질 것을 염려해서인지, 아니면 다른 무엇 때문인지는 종잡을 수 없었지만….
이벨린의 말에 비센테가 제 코트 속에서 회중시계를 꺼내 시간을 확인했다. 그가 마부와 연결된 창문을 두어 번 두드리자, 마차의 속도가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
“그래도 ‘오늘’ 우리에게 남은 시간은 있지.”
“…….”
“말해 봐. 뭐가 문제인지.”
그녀의 이상한 기류를 기민하게 감지한 듯 그가 재차 캐물었다. 이벨린은 차마 뭐라고 이야기를 시작해야 할지 갈피조차 못 잡은 얼굴로 혼란하게 입술을 깨물었다. 비센테와 진지한 이야기를 나누기에 더없이 좋은 기회였지만, 정말 캐물어야 할까? ‘엘레나’가 죽고 난 이후의 이야기를?
그는 한때 황태자의 약혼녀를 죽인 죄로 유폐까지 당했던 사람이었다. 세간은 의심조차 하지 않고 비센테가 곧이곧대로 떠벌린 그 정황을 믿었다. 그녀의 부탁으로 독을 건네준 것이 진실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은 세상에 둘뿐이었다. 문제는, 그다음이었다.
그녀가 엘레나라는 것을 밝히고 난 뒤에 비센테가 여전히 이성적일 수 있을까?
확신할 수 없었다. 그가 엘레나를 두고 어디까지 무너졌는지를 생각하면, 그가 가진 죄책감의 깊이를 생각하면….
비센테가 제 손으로 세웠던 모든 계획과 계산들을 차례로 어그러뜨리는 꼴이 눈앞에 훤히 그려졌다. 그는 그녀를 쥐는 것에 급급해 서서히 비틀릴 것이고, 그녀는 비틀려 가는 그를 어쩌지도 못한 채 끌어안기나 할 터였다.
그게 서로가 서로의 목숨을 갉아먹는 것인지도 모른 채, 그들의 머리 위로 카스트로의 칼날이 드리워진 것을 애써 외면하면서, 언제든 황제가 된 자의 손에 쉽게도 죽을 수 있는 아이들을 낳고….
그나마도 얼마 남지 않았다던 시간이, 그때까지 버텨주어야 가능한 일이겠지만.
모든 것이 양손 사이로 그저 흘러 지나는 것 같았다. 애써 움켜쥐려고 발버둥을 쳐 봐도, 어떤 것도 잡을 수 없는 채로….
이벨린은 파르르 떨리는 눈꺼풀을 가만히 감았다가 다시 떴다. 비센테는 여전히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지금 대화하고 싶지 않다면….”
“바섬 백작 부인이 제게 한 말이 있어요. 전하를 믿지 말라더군요.”
충동적으로 튀어나온 말에 비센테의 입이 다물렸다. 그가 묘한 표정으로 그녀를 직시했다. 이벨린은 어색한 침묵이 길어지기 전에 서둘러 입을 열었다. 스스로의 귀로 듣기에도 온도는 서늘했다. 앞으로는 계속 그래야만 했다.
그에게 주었던 정을, 이제는 떼야만 했으니까.
“그 여자를 어떻게 설득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보내 주신 건 감사해요. 덕분에 쉽게 빠져나올 수 있었어요.”
“이벨린, 그 여자는….”
“제게 구구절절 설명하실 필요는 없어요. 그때나 지금이나 상황은 달라지지 않았고, 전하께선 제가 그 부분까진 굳이 알지 않아도 될 문제라고 판단하셨던 거겠죠. 엔리케가 이번 일이 전하의 뜻이 아니라고 저를 속였듯.”
이벨린은 비센테의 무표정한 얼굴이 당혹스러울 때 드물게 나오는 버릇이라는 것을 이제는 알았다. 우아한 눈매가 미세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제가 다루던 칼에 지레 찔리기라도 한 것처럼.
“차라리, 바섬 백작 부인을 보내지 마시지. 그랬으면 정말 몰랐을 텐데. 하긴. 처음부터 수상했어요. 전하께서 그런 쪽지를 함부로 흘리실 만한 분도 아닌데.”
“…….”
“엔리케에게서 서부의 증표는 받으셨나요?”
“…그래.”
“그러면 됐어요.”
이제는 정말 상관없었다. 오해가 있든, 말든. 더는 그런 쪽으로는 신경을 쓰고 싶지도 않았다. 어차피 덤으로 얻은 생이었다. 그가 저를 어떻게 이용해 먹었든 도움이 되었다면 궁극적으로는 그녀의 목적과도 일치했다.
가끔은 단순하게 생각할 필요도 있는 법이었다. 적어도, 앞으로 이사벨라가 뿌린 의심의 씨앗은 그녀를 좀먹지 못할 테니까. 어차피 다 지나서 쓸모도 없어진 일로 감정 소모를 할 바에는 조금이라도 유리하게 사용하는 편이 좋을 테고.
이벨린은 그의 눈을 똑바로 마주했다.
“제게 미안하세요?”
“…그래. 당혹스럽게도.”
“그러면 제게 좀 약해지셨을까요? 어떤 부탁이든 들어줄 마음이 들 만큼은?”
비센테의 입매가 느른히 올라갔다. 이번에는 명백하게도 미소였다.
“어쩌면.”
사람마다 저마다 침범해서는 안 되는 영역이 있었다. 그리고 비센테에게 ‘엘레나의 죽음’은 명확하게도 그 영역의 안쪽에 있었다. 그의 고요한 눈을 바라볼 때마다 그것을 막무가내로 들쑤시고 싶다는 충동은 시시각각 강해졌다.
‘그날’의 진실에 그렇게 접근해서는 서로에게 상처만 남으리라는 것을 알면서도.
생각을 거듭해도 결국 처음 떠올린 결말이 최선이었다. 모든 것이 끝난 뒤엔 편지만 남겨 놓고 깔끔하게 떠나는 것. 품위 있게 서로의 거리를 지키자는 말과 지금의 행운은 추억으로 남기고 멀리서 서로를 응원하자는 말을 써두고….
그는 힘들어하겠지만, 결국 그녀의 의사를 존중해 줄 것이다. 그렇게 끝내는 그녀가 사라진 것조차 모를 것이다.
“오늘 일이 끝나면.”
이벨린은 간신히 입을 뗐다. 다시금 그를 마주하는 눈빛에 아주 미세한 날이 섰다.
“전하께 물어보고 싶은 것이 있어요. 그 질문이 아주 황당하더라도 꼭 대답해 주셨으면 좋겠고요.”
“대체 무엇을 물어보려고.”
“왜 그런 걸 묻는지, 그 이유도 물으시면 안 돼요.”
“…….”
“약속해 주실 수 있나요?”
의미를 알 수 없는 시선이 그녀의 소매부터 되짚어 다시금 얼굴로 올라왔다. 이벨린은 그와 눈이 마주치는 순간 말갛게 웃어 보였다. 그가 제 속내를 조금도 눈치채지 못하도록.
비센테는 눈을 깜박이지도 않고 그녀를 바라보다가 이내 픽 웃었다.
“느낌이 안 좋은데.”
“…….”
“무엇을 물어도 이유조차 묻지 말라니. 이런 약속은 한 걸 꼭 후회하게 되거든.”
역시 선뜻 들어주기엔 너무 수상쩍은 제안이었던 게 분명했다. 이벨린이 실망스럽게 입술을 짓씹으려는 찰나에 그가 느긋하게 말을 이었다.
“그리고 살면서 한 번쯤은 후회할 걸 알면서도 선택하는 순간이 있지. 그래, 약속하지.”
“…감사해요.”
이벨린은 긴장으로 꽉 조여들었던 숨을 내뱉었다. 안도하느라 급급해서 비센테가 순간 그녀를 미심쩍게 쳐다본 것도 놓친 채.
마차는 서서히 정돈된 가로수길로 접어들었다. 길의 끝에 박람회와 이후의 연회가 펼쳐질 라구나의 웅장한 성이 보였다. 정문까지 랜턴 불이 드문드문 밝혀져 있었고, 긴 계단에는 삼삼오오 모인 사람들이 웃음을 터트리고 있었다.
이윽고 마차가 멈춰 섰다.
“도착했습니다.”
마부가 공손히 고하는 것과 동시에, 하인이 문을 열어 주기 위해 가깝게 다가섰다. 비센테는 창가에 손을 짚어 하인에게 잠시 기다리라는 신호를 보냈다. 그의 손짓에 따라 하인이 창문을 등으로 막아선 채 뒤로 돌아섰다.
“내리기 전에, 이벨린.”
그가 복잡한 표정으로 그녀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반사적으로 받고 보니 얇은 포장지에 싸인 새끼손톱만 한 알약이었다.
“이게 뭐예요?”
“신경 안정제. 독하고, 약효는 빠르지.”
“이걸, 제게 왜.”
“쓸 일이 없어야겠지만, 혹시 모르니까. 연회장에 총이나 검을 들고 들어갈 수는 없잖아. 오늘은 내가 네 곁에 붙어 있기만 할 수도 없고.”
그의 목소리에는 희미한 불안감이 묻어났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반듯하게 가라앉아 있던 얼굴에 서늘한 날이 섰다. 이벨린은 알약을 숨길 곳을 찾기 위해 소매며 장갑을 이리저리 살폈다.
그 모습을 덤덤하게 바라보던 그가 덧붙였다.
“오늘 박람회에는 수도의 다섯 개 신문사와 인근 근교 지역의 유력 신문사들 열두 곳의 편집장들이 참석해. 그중 절반에 내가 줄을 대고 있고.”
“아, 대충은 짐작하고 있었어요.”
“짐작?”
푸른 눈이 기막히다는 듯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그가 마차의 문을 부드럽게 열자, 기다리고 있던 하인이 멀찍이 비켜섰다. 멀리서 본다면 그들은 하인조차 물린 채 저들끼리의 세상에 골몰한 사람처럼 보일 터였다.
그러는 동안에도 이벨린은 손가락으로 하나씩 꼽으며 말을 이었다.
“요 근래 기사를 쓰는 기조가 바뀐 신문들이 눈에 들어오더군요. 엘 파베스, 바젤, 카냐스, 벨몬테 프렌사가 노골적이고… 몇몇은 좀 의심스러운 수준이었지만요.”
“…….”
“전과 달리 전하께 유독 우호적인 기사들을 쏟아 내고 있잖아요. 전하께서 그간 전쟁에서 얼마나 많은 공로를 세웠는지, 얼마나 에스페다의 국익을 위해 노력하셨는지, 그리고….”
“그래. 내가 얼마나 ‘적당’한지에 대해.”
“…그렇죠.”
구구절절 이어지던 말을 비센테가 적절하게 끊어 냈다. 이벨린은 그가 내민 손을 붙잡고, 조심스럽게 마차 아래로 내려섰다.
“즉, 오늘 밤이 지나면 우리가 바라던 기사들이 쏟아질 거라는 이야기지. 너와 나의 관계에 대해서.”
“…….”
“그리고 카스트로와 너에 대해서도.”
그녀가 땅을 밟고 서자마자, 중심을 잡을 수 있도록 받쳐 주던 손이 그녀의 허리를 조금 더 깊숙이 당겨 안았다. 의례적으로 적당한 예의를 차리는 관계라면 다소 부적절하다고 여길 법한 친밀한 자세였다.
근처의 시선이 따갑게 날아들었다. 삼삼오오 모여 속삭이던 소리와 간헐적으로 터지던 웃음소리마저 일순 멈춘 것 같은 착각이 일었다. 어쩌면, 착각이 아니거나.
“…….”
비센테가 그녀의 눈 아랫살을 엄지손가락으로 쓸어 올렸다. 잔뜩 굽을 높인 구두를 신고서도 뒤꿈치를 조금 들어야 가까스로 시선이 그의 입술께에 닿았다. 그가 이내 제 큼직한 손바닥으로 그녀의 고개를 받쳐 들었다.
오늘따라 완벽하게 보이는 짙푸른 눈동자가 얄궂게도 휘어졌다.
“희대의 추문에 휩싸일 각오는 되어 있어?”
돌이킬 수 없는 추문. 앞으로 몇 주간 수도의 모든 신문사들은 이벨린과 카스트로, 비센테의 삼각관계에 대해 시끄럽게도 떠들 터였다.
그렇게 언론의 주의를 돌린 사이에 비센테는 조금 더 과감하게 움직일 터였다. 카스트로가 이벨린을 힘으로 강제해 빼앗고, 술에 거나하게 취해 정신이 팔려있는 동안. 사람들이 카스트로의 자질에 대해 시끄럽게 짓씹고 떠들어대는 동안.
이벨린은 말간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이제부터 진정한 시작이었다. 그녀는 비센테의 단단한 목에 제 팔을 감았다. 그리고 코끝이 부딪칠 거리에서 활짝 웃었다.
“…네.”
비센테는 순간적으로 움찔 몸을 굳혔으나, 이윽고 나직하게 만족스러운 웃음을 터트렸다. 그녀가 더할 나위 없이 사랑스럽다는 것처럼. 이윽고 더는 참기 어렵다는 듯 고개를 내렸다. 곧장 말캉한 입술이 맞부딪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