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5화 (55/151)
  • 이벨린은 두꺼운 문이 닫히는 동안 그 앞에 얌전히 서 있었다. 바깥에서 신관들이 문에 밧줄을 덧대는 소리가 들렸다. 문의 봉인이 완전히 끝나면, 그때부터 정화 의식이 시작된다.

    “…….”

    문이 닫힌 그 순간부터 이벨린에게는 단 한마디의 말도 허용되지 않았다. 양손을 모으고 있던 시에나가 고개를 끄덕여 신호를 보냈다.

    향로를 열자 안에는 참나무로 만든 석탄이 들어 있었다. 이벨린은 석탄에 불이 붙기 시작하자, 성수에 담근 향초 다발을 향로에 던져 넣었다. 풀이 타오르는 은은한 냄새가 기도실을 가득 채우더니, 이윽고 한 줄기 흰 연기가 허공으로 치솟았다. 연기는 정확하게 뚫린 천장을 향해 빠져나갔다.

    그 뒤부터는 끔찍한 기다림의 시간이었다.

    내일 오전 교황의 안수를 받을 때까지 이 방 안에서 입을 열 수 있는 사람은 시에나뿐이었다. 이벨린은 귀로는 시에나의 부드러운 기도 소리를 듣고, 눈으로는 연기를 헤아렸다.

    다섯 번째 향초 다발을 막 향로에 넣었을 때 자정을 알리는 종소리가 들려왔다. 이벨린은 시에나의 어깨에 가만히 손을 얹었다. 그녀를 부축해서 편안한 의자에 앉히고, 무릎 위에 물컵과 말린 과일 접시를 얹은 쟁반을 내려놓았다.

    이제는 가야 할 시간이었다. 막 불이 붙은 향초가 다 탈 때까지 걸리는 시간은 30분이었고, 시에나는 혼자서 향초에 불을 지필 수 없었다. 그러니 30분 안에 모든 것을 해결하고 돌아와야만 했다.

    “…부디 조심하렴.”

    시에나의 손을 꽉 붙잡으며 당부했다. 이벨린은 시에나의 손을 꽉 마주 잡고는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벨린은 조심스럽게 문을 밀어 보았다. 본래라면 틈 없이 봉인되어 있어야 할 문이 사람 한 명이 지나갈 틈을 남겨 두고 밀렸다. 그녀는 주변에 사람이 없다는 걸 확인하고 문틈으로 빠져나왔다.

    사위가 아주 고요했다. 그녀가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절뚝거리는 소리가 회랑의 둥근 천장을 메아리치듯 울렸다. 이벨린은 대신관이 말했던 기억을 되짚었다. 지나왔던 복도, 작은 나무문….

    쉽게 찾을 수 있으리라 생각했던 것과 다르게 복도는 어둠 속에서 아주 낯설게만 보였다.

    그때였다.

    “야! 거기서 그러면 안 되지!”

    벼락같은 목소리였다. 이벨린은 화들짝 놀라서 멈춰 섰다. 하마터면 비명까지 지를 뻔한 것을 가까스로 틀어막은 채 뻣뻣하게 고개를 돌리자, 뒤이어 껄껄거리는 웃음소리가 한번에 터져 나왔다.

    “치사하게. 이런 식이라면 나는 검은색에 걸겠어.”

    “파란색에 5페세타.”

    “뭐? 너 이 자식, 이번 달은 아예 쫄쫄 굶으려고 작정했구만?”

    “좋아. 나도 파란색에 3페세타!”

    뒤뜰에 기사들 대여섯 명이 모여 있는 것이 보였다. 얼굴이 하나같이 벌겋게 달아오른 것을 보아하니, 다들 어디서 거나하게 포도주 한 잔씩 걸친 것 같았다. 이벨린은 대신관이 저들에게 수고를 치하하며 내린 포도주의 양이 평소보다 넉넉했으리라는 것을 짐작했다.

    잠깐 무언가에 집중하듯 침묵하던 기사들 중 몇이 일제히 환호성을 울려 댔다.

    “그렇지!”

    “이게 이렇게 된다고?”

    “다시 해, 다시!”

    그녀는 그들의 정신이 다른 쪽에 쏠린 사이에 재빨리 기둥 뒤로 몸을 숨겼다. 벽에 등을 바짝 붙인 채 옆걸음으로 슬금슬금 움직였다. 다행스럽게도 누구도 어둑한 회랑쪽으로는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것 같았다. 그렇게 모퉁이에 거의 다 다다랐을 때, 오른쪽 손날에 툭 튀어나온 문고리가 만져졌다.

    “…….”

    문은 잠겨 있지 않았다. 슬쩍 잡아당겨 보니 어둑한 아래로 통하는 계단이 나타났다. 드문드문 횃불이 밝혀 있어 어둡지는 않았지만, 분위기는 음산했다. 이벨린은 기사들 쪽을 마지막으로 한 번 더 바라보곤 재빨리 계단 아래로 내려갔다.

    등 뒤에서 철문이 소리 없이 닫히는 소리가 났다.

    지하실은 예상보다도 더 불쾌한 곳이었다. 쾌쾌한 냄새, 부유하는 먼지, 신화 속 죽은 자들의 땅을 연상시키는 거대한 복도의 벽에는 핏자국마저 점점이 튀어 있었다. 벽마다 드문드문 걸린 횃불이 겨우 발아래를 비추었다.

    ‘지하실이 아니라 감옥 같아.’

    이벨린은 복도에 걸린 횃불 중 하나를 빼 들고 세 번째 방의 앞에 섰다. 오랫동안 사용되지 않아 녹이 슬었는지 자물쇠를 여는 데에도 시간이 제법 걸렸다. 가장 큰 문제는 뒤에 뭐가 걸렸는지 문이 한 뼘 정도만 밀리고 그대로 멈췄다는 점이었다.

    이벨린은 제 어깨로 문을 세게 들이박았다가 소리 없이 아파하며 주저앉았다.

    “…….”

    눈물이 찔끔 났지만, 그나마 틈이 조금 더 벌어졌다. 이벨린은 몇 번 더 몸을 콩콩 부딪쳐 틈을 벌렸다. 어찌저찌 안으로 들어오긴 했지만, 도로 닫을 수가 없어 낭패였다.

    ‘이대로 두면 들킬 텐데.’

    그녀는 문고리를 잡고 낑낑거리다가 결국 포기하고 방 안부터 둘러보기로 했다.

    안쪽은 방이 아니라 나무로 짠 거대한 상자처럼 보였다. 천장, 벽면, 바닥에 이르기까지 온통 나무를 덧댄 형식이었다.

    이벨린은 조심스럽게 횃불로 내부를 밝혔다. 부르는 게 값일 황가의 보물들이 먼지에 뒤덮인 채 잡동사니처럼 굴러다니고 있었다.

    고전적인 풍의 조각상부터, 시대를 종잡을 수 없는 유물, 갑옷, 심지어 녹슨 병장기에 이르기까지.

    천천히 주변을 둘러보던 이벨린의 발걸음이 이내 방의 중앙에서 멈춰 섰다.

    “…이건.”

    돌로 만든 제단 위, 붉은 벨벳 쿠션이 정 가운데에 깔려 있었다. 그 위에 금괴와 오래된 동전들이 수북이 쌓여 있었다. 가까이 다가선 이벨린은 그게 그냥 동전이 아니라, 오래된 메달들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런 게 수백 개도 넘게 쌓여 있다는 것도.

    이벨린은 손가락으로 메달 위에 쌓인 먼지를 가볍게 쓸었다. 고작 그것만으로도 두껍게 앉은 먼지가 허공으로 뽀얗게 떠올랐다.

    100년은 족히 방치되어 있었던 것 같았다. 이벨린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그 뜻은.

    ‘적어도 이 메달 중 하나가 서부의 인장은 아니란 소리지. 황태자가 되자마자 서부의 인장부터 승계받는데, 이건 건드린 흔적도 전혀 없고.’

    애초에 의심 많은 카스트로의 성격상 절대 눈에 보이는 곳에 방치할 리도 없었다. 이벨린은 천천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녀가 만약 카스트로라면 어디에 숨겼을까.

    언제든 손에 넣을 수 있으면서, 사람들이 주의 깊게 살필 만한 장소는 아닌 곳, 그러면서도 어디 두었는지 잊지 않게끔 눈에 띌 만한 특징이 있는 곳….

    그래, 표시. 순간적으로 그럴듯한 깨달음이 그녀의 뇌리를 관통했다. 여기는 먼지투성이의 장소였다.

    이벨린은 횃불을 휙 내려 바닥을 비추었다. 바닥에 뽀얗게 쌓인 먼지 위로 몇 개의 발자국이 어지럽게 찍혀 있었다.

    ‘얼마 전에도 사람들이 왔다 간 것 같아. 먼지가 쌓인 두께가 달라.’

    이벨린은 횃불을 조금 더 구석구석 비춰 보았다. 대리석과 보석으로 화려하게 세공된 조각상의 뒤쪽에서 비교적 깨끗하게 닦인 바닥을 발견했다.

    그녀는 서둘러 그 앞에 쪼그려 앉았다. 주먹으로 그 부분을 콩콩 두드려보자 텅텅 울리는 소리가 들렸다.

    ‘이 바닥 아래 공간이 있다는 건 확실해.’

    뭔가를 누르면 숨겨진 공간이 드러나는 구조인 것 같았다. 횃불을 바닥 위로 조금 더 바짝 비추자 남아 있는 자국들이 보였다. 분명히 열렸던 흔적이었다.

    ‘다른 쪽엔 사람이 건드린 흔적이 없는 걸 보면, 여는 장치도 근처에 있겠지. 바닥만 깨끗하니, 장치도 바닥 쪽에 있을 거고.’

    이벨린은 조심스럽게 바닥에 쪼그리고 앉아 주변을 더듬었다. 이제는 횃불도 주변을 제대로 밝히기 힘들 정도로 희미해져 가고 있었다. 땀이 턱 끝에 송골 맺혀 갈 무렵, 오로지 감각에 의존해 장식장 아래를 더듬어 가는 손끝에 무언가 덜컥거리는 것이 걸렸다. 손으로 돌릴 수 있는 작은 장치였다.

    ‘…함정일까?’

    시간이 조금만 더 여유로웠다면 좋았을 것이다. 하지만, 주변을 더 살펴봐도 다른 것이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혹시 모를 사태에 대비해 목과 몸을 보호하듯 웅크리고 장치를 돌렸다.

    끼이익, 끽, 쿵!

    철이 맞물려 돌아가는 소리 끝에, 바닥처럼 위장하고 있던 널빤지가 위로 젖혀졌다. 가로 세로가 성인 남성의 한 뼘만 한 작은 공간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 속에 지저분한 벨벳 상자가 있었다.

    ‘맙소사,’

    이벨린은 감탄인지 탄식인지 모를 것을 삼켰다. 과거, 황태자 위를 승계받은 카스트로가 의기양양하게 보여 주었던 바로 그 상자였다. 이벨린은 입 안에 고인 침을 삼키며 조심스럽게 벨벳 상자를 열었다.

    그 안에, 그녀가 간절히 찾던 것이 있었다.

    ‘진짜 서부의 인장이다….’

    녹청이 껴 이제는 새파랗게 보이는 메달은 무게부터 문양, 끄트머리가 조금 닳은 것까지 기억 속 그대로였다.

    그때, 누군가 문을 열고 계단을 내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이벨린은 서둘러 인장을 주머니에 챙겨 넣고, 횃불을 밟아서 껐다. 절뚝거리며 조각상 뒤로 몸을 숨기기 무섭게 웬 남자의 걸걸한 목소리가 들렸다.

    “어? 뭐야? 진짜 문이 열려 있잖아?”

    “네가 문단속을 제대로 못 한 거겠지. 또 술 처먹고 실수했거나.”

    “너 저게 혼자 열리는 거 봤냐? 더럽게 뻑뻑하던데.”

    “그러면 설마… 유령의 소행인가?”

    “지랄은. 대신관께서 누굴 보셨다고 했으니 사람이겠지.”

    “그럼 아직 안에 있는 거 아냐?”

    순간적으로 끔찍할 정도의 정적이 흘렀다. 이윽고 가까워지는 발소리가 들리더니, 문을 세차게 쾅 치는 소리가 들렸다. 그녀가 쩔쩔맬 때는 꼼짝도 하지 않던 철문이 쿵 소리를 내며 젖혀졌다.

    기사가 안쪽을 향해 소리쳤다.

    “안에 누구 있나?”

    이벨린은 침착하게 조각상 뒤로 몸을 웅크렸다. 약조된 바대로라면, 오늘 이 구역에 기사들을 모두 물리기로 되어 있었다.

    결론은 하나였다. 대신관의 배신.

    ‘지하 감옥에 침입자가 있다는 이야길 저들에게 슬쩍 흘렸겠지. 추후에 정말로 무언가가 없어졌다고 해도 관리 책임을 묻는 황태자에게서 발을 뺄 작정으로.’

    그 와중에도 여기까지 내려온 기사들이 고작 둘뿐인 점은 다행이었다. 아마도 그녀가 성공했을 때를 대비해 적당히 둘러댈 수 있을 정도로만 보낸 것 같았다.

    하기야, 아직 받아먹을 돈의 절반이 남아 있으니….

    어쩐지 정보상이 추천해 줄 때부터 별로 좋지 못한 직감이 들었지만, 시간이 촉박해 거듭 확인하지 못한 게 실책이었다.

    쾅!

    그녀가 대답하지 않자 재차 문을 내려치는 소리가 요란했다. 뒤이어 한 번 더 우렁찬 목소리가 날아들었다.

    “안에 누구 없나?”

    조각상 뒤에 숨어 있는 이벨린의 눈에 문간에 선 남자들이 보였다. 지금이야 못내 찝찝해하는 얼굴로 미적거리고 있긴 했지만, 곧 본격적인 수색을 개시할 터였다.

    방은 좁았고 사람이 숨을 만한 곳은 한정적이었다. 문간에서야 잘 보이지 않아도 안으로 들어오면 금방 그녀가 숨은 곳을 찾아낼 터였다.

    만에 하나 운이 따라 줘서 발각되지 않는다고 해도 시간 내에 기도실로 돌아가기는 힘들 터다.

    결국, 선택의 문제였다.

    여기서 저들에게 발각되든지, 제때 기도실에 향로를 피우지 못해 신관들이 기도실로 들이닥치든지….

    ‘차라리 옷을 찢고, 누가 이곳에 가두어 둔 척을 해야 할까?’

    범죄에 가련하게도 희생당한 사람처럼…. 마침, 근처에 밧줄이 보였다. 엉성하게 묶어 두기만 해도 통할지도 몰랐다.

    문제는 그 모든 것을 꾸밀 시간이 턱없이 부족하다는 점이었지만.

    기사들은 이제 저들끼리 다시금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조용한데?”

    “네가 먼저 들어가 봐.”

    “미쳤어? 저길 들어가라고?”

    “내가 횃불로 비춰 주잖아. 너 그러다 저기서 뭐라도 없어지면 어떻게 책임지려고. 죄다 오래된 황가의 물건인데.”

    “…어차피 잘 찾지도 않는 골동품이나 들여놓은 것이면서.”

    “빨리 가.”

    툴툴거리긴 했지만, 결국 목소리가 큰 쪽의 의견으로 합의가 끝난 것 같았다. 한 명이 횃불을 좀 더 높게 치켜들자 다른 한 명은 허리춤에 차고 있던 검을 뽑았다.

    스르릉.

    검날이 나직하게 우는 소리에 등줄기를 타고 선득한 소름이 돋았다. 그들이 막 문을 조금 더 열어젖히려던 찰나였다.

    “어머나, 무서워라.”

    누군가의 교태 섞인 말소리가 눅눅한 천장을 울렸다. 이벨린의 시야에서는 누구인지 보이지 않았다.

    문간에 서 있던 기사 둘이 잽싸게 정자세를 취하며 경례를 올려붙였다.

    “백작 부인을 뵙습니다.”

    백작 부인. 신전 소속일 성기사들마저 깍듯한 예우로 대해야만 하는 여자. 그녀가 알기로, 기사들이 저 정도의 경의를 바칠 백작 부인은 온 에스페다를 다 뒤져도 하나뿐이었다.

    “경들 긴장한 모습이 재미있기는 한데.”

    구둣발 소리가 조금 더 가까워졌다. 이벨린은 문틈 사이로 여자의 우아한 얼굴을 볼 수 있었다. 이벨린은 입속으로 신음했다. 그녀는 저 얼굴을 알고 있었다.

    “무슨 일인데 한밤중에 검까지 뽑아 든 거예요? 이 어두컴컴한 지하실에서 위험하게.”

    바섬 백작 부인, 이사벨라. 황제의 징그러운 첫사랑이자 제위에 오른 뒤로 오랜 세월 동안 곁을 지킨 유일한 애첩. 횃불을 든 기사가 뒷머리를 어색하게 긁적였다.

    “아, 원래 잠겨 있어야 할 문이 열려 있어서 수색 중이었습니다.”

    “아, 그거.”

    “한데, 백작 부인께선 이곳에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그 문, 내가 그랬어요.”

    “…부인께서요?”

    이보다 수상쩍을 수는 없다는 듯 기사의 목소리가 조금 올라갔다. 이 상황을 어색하게 느끼는 건 이벨린 역시 마찬가지였다. 대체 뭐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 걸까? 예상이 족족 빗나가고 있었다.

    혼란 속에서 이사벨라는 부채를 흔들며 무심하게 대꾸했다.

    “폐하와 숨바꼭질 중이었거든요. 마음에 드는 루비 목걸이가 있는데, 내가 이기면 선물로 주신다고 해서. 꼭 이기고 싶은 마음에 아무래도 조금 의욕이 과했던 것 같네.”

    “…….”

    “아무래도 문이 아예 망가진 것 같죠?”

    순간적으로 기사들의 얼굴에 망연한 빛이 떠올랐다. 둘 중 가까스로 정신을 먼저 차린 쪽이 정중하게 대답했다.

    “그런 것은… 괜찮습니다….”

    물론, 애초부터 망가져서는 안 되는 것이긴 했다. 그러나 황제의 하나뿐인 애첩의 실책이라면야 말이 달라지기 마련이었다. 괜히 신전의 건축물을 부쉈다고 황실과 애매한 갈등으로 불거지는 것보다 이대로 덮고 넘어가는 것이 최선이었다.

    저 안에서 뭐가 없어지거나 부서졌다고 해도, 어차피 오늘만 안 걸리면 언제 그랬는지 알게 뭐람….

    “아무래도 폐하께 말씀드려서 당장 보수를….”

    “아, 아닙니다!”

    “부인께서 다치신 곳이 없다면요. 아무 문제 없습니다.”

    “그래요? 다행히 난 지극히 멀쩡해서.”

    “아, 정말 다행입니다….”

    “그러면 이만 가보도록 해요.”

    “네…?”

    “내가 여기 있다는 소리는 누구에게도 하지 말고요.”

    이사벨라는 흔들던 부채를 착 접고는, 활짝 웃었다.

    “괜히 근처에서 어정거리다가 폐하께서 여길 발견이라도 하면, 나는 그대들을 용서하지 않을 거거든.”

    “…….”

    그야말로 살벌한 위협이었다. 넋이 나가 있던 기사들은 한순간에 상황 파악을 끝마쳤다. 그들은 서둘러 앞다퉈 경례를 올려붙였다.

    “아, 알겠습니다!”

    “이, 이곳에 두 번 다시 얼씬도 하지 않겠습니다!”

    기사들은 허둥거리며 돌아서서 왔던 계단을 그대로 다시 올라갔다. 이사벨라는 계단 위의 문이 쾅 닫히고, 그들이 완전히 사라지는 그 순간까지 그들이 사라진 방향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이윽고 고개를 돌리지도 않고 입을 열었다.

    “나와요.”

    “…….”

    “이벨린, 당신이 있다는 거 알고 왔으니까.”

    “…….”

    “걱정 마요. 날 여기로 보낸 건 2황자 전하니까.”

    구원일까? 아니면, 지독한 함정일까? 어둠 속에 숨어 이사벨라를 지켜보던 이벨린의 눈이 일순 가늘어졌다. 여자의 얼굴에는 기만이나 위선의 흔적은 없었다.

    그러니까, 정말로 비센테가 보냈다고….

    이벨린은 웅크리고 있던 조각상 뒤에서 천천히 일어섰다.

    “어서 이쪽으로 나와요. 시간 없으니까.”

    “대체 무슨, 말씀이신지….”

    “말했잖아요. 2황자께서 보냈다고.”

    “저는 정말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요.”

    적당히 교태롭던 여자의 얼굴에 순간 무심한 낯이 스쳤다. 이벨린의 필사적인 부정이 조금도 흥미롭지 않다고 생각하는 기색이었다.

    “우선 걷죠, 이벨린. 당신 바쁘잖아요. 그러면서 내 질문에 몇 가지 대답해 줘도 되고.”

    “…….”

    “내가 베푼 호의에 대가로 말이에요.”

    이사벨라의 화법은 교묘했다. 순식간에 대화의 주도권을 앗아갔다. 이벨린은 방어적으로 되물었다.

    “뭐가… 궁금하신데요?”

    “왜 그에게 협력하죠?”

    “협력이라니….”

    “원하는 게 사랑인가요? 아니면 미래의 지위?”

    “…….”

    “그런 것조차 없다면 이런 곳에서 이런 꼴을 감수할 이유가 없어 보여서요.”

    이사벨라의 눈이 미세하게 그녀의 차림새를 위에서부터 아래로 훑었다. 이런 먼지투성이의 옷은 태어나 처음 본다는 것처럼. 계단 앞에서 이사벨라가 양보하듯 손짓했다.

    “난, 영애가 조금 더 영악한 사람일 거라고 상상했거든요. 아, 먼저 올라가요.”

    계단을 올라가는 동안에는 잠깐의 침묵이 있었다. 이윽고 문을 열고 나가자 선선하게 불어오는 바람에 답답했던 숨이 확 트였다. 정원에서 도박판을 벌이던 기사들까지 전부 사라진 걸 보면, 이사벨라의 협박이 제대로 먹힌 모양이었다.

    “어쨌든 영애는 제 생각보다는 좀 더 순진한 편인가 봐요.”

    “…제가 어떤 사람인지가 부인께 중요한가요?”

    “물론, 중요하진 않죠. 어차피 난 대가도 넘치게 받았고….”

    그들은 한동안 말없이 복도를 따라 걸었다. 어느새 기도실의 앞이었다. 이벨린이 멈춰서자 이사벨라도 따라서 멈춰 섰다. 이벨린은 공손히 양손을 모았다.

    “오늘 도와주신 것은 정말 감사해요.”

    “이게 뭐 별거라고요. 아, 대신관은 걱정하지 마요. 이쪽에서 알아서 처리할 테니까.”

    웃을 때는 화사하고 교태롭던 이사벨라의 얼굴은, 표정을 조금 달리하는 것만으로 더없이 공허해 보였다.

    그녀가 표정 없이 덧붙였다.

    “그리고… 한마디 충고는 해 주고 싶네요.”

    “…….”

    “2황자, 너무 믿지 마요. 당신 생각처럼 그렇게 반듯하기만 한 청년은 아닐 테니까.”

    두꺼운 문이 가로막고 있다고 해도, 복도에서 하는 말이 들리지 않을 리가 없었다. 그 말을 할 때 이사벨라는 목소리는 조금도 줄이지 않았다. 기도실 안에 뻔히 시에나가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이 이야기를 시에나가 들어도 상관없다는 듯 보이기도 했고, 어쩌면 시에나에게 제 경계심을 알리고 싶어서 안달이 난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아무튼 더 이상 머뭇거릴 시간이 없었다. 이벨린은 예의 바르게 무릎을 굽혔다. 일정 이해관계로 묶일 수 있는 사람이라면,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는 편이 언제나 현명했다.

    “오늘 도와주셔서 감사해요.”

    “가봐요.”

    이벨린은 기도실의 문을 열고 밧줄이 느슨해진 틈으로 몸을 쏙 통과시켰다.

    문은 제 둔중한 무게에 밀려 손을 떼자마자 서서히 닫혔다. 벌어진 문틈이 미세하게 남았을 찰나에, 이사벨라가 그녀를 불렀다.

    “이벨린.”

    매끄러운 발음은 도리어 더 비밀스럽게 들렸다. 마치, 무언가를 알고 있는 사람처럼.

    “다음에도 또 봐요. 난 처음부터 그대가 몹시 재밌었거든.”

    완전히 닫힌 문 뒤에서 백작 부인의 웃음소리가 작은 종처럼 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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