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차피 여기까지 밀렸으니 그것까지 감수하라고 하실 줄 알았죠.”
본래의 계획대로라면 거기서 그 여자가 무슨 짓을 당하든 그대로 두었어야 옳았다. 여자의 동생은 여전히 그의 손에 있었고, 반역에 얽혀 있다는 것을 밝힌다면 여자의 목숨도 끝이었다. 그는 제법 정교하게 여자를 궁지로 몰아넣었다. 그 외에 다른 선택지는 없도록, 있더라도 모르도록.
그 결과 여자는 그에게 제법 진심처럼 굴고 있었다.
그렇게, 좋을 대로 이득만 취해도 됐을 상황이었다.
“저를 처음 데려오셨을 때 말이에요. 폰페라다 궁에서 황태자 전하를 유혹하라고 말씀하셨을 때.”
“…….”
“그때, 염두에 두신 계획이 있으실 줄로 알아요.”
여자는 그의 복잡한 심상을 모르는 척 충동을 부추겼다. 비센테는 피로에 젖은 눈매를 핏줄이 툭 불거진 손으로 꾹 눌렀다.
“…계획.”
“네, 전하와 전하의 조력자들이 세운 그 계획 말이에요.”
그는 제 손이 떨리기 시작하던 순간을 알고 있었다. 여자에게 달려드는 곰을 본 순간, 그가 늦었을지도 모르겠다고 본능처럼 생각한 순간, 그 뒷모습에 엘레나가 기어이 덧입혀지던 그 순간.
그리고 그는, 저주받을 떨림이 언제 멎었는지도 알고 있었다.
“이미 카스트로는 너에게 적지 않은 관심을 쏟고 있어. 굳이 네가 나서서 그의 정신을 교란하지 않아도 계획에는 차질이 없어.”
고상한 척 말했으나 결국 이유는 하나뿐이었다. 하나뿐일 수밖에 없었다. 여자는 그의 엘레나를 너무 닮았다.
결국 이기적인 심상이었다. 여자가 엘레나와 닮은 모습으로 그의 눈앞에서 고꾸라지는 것이 끔찍해서, 그걸 목도하고 나면 이번에는 어디까지 망가질지 두려워서.
그렇게 원래 세워 두었던 계획을 며칠씩 미루고 비틀었다. 카스트로가 여자를 쉽게 취할 수 있도록 변변한 호위조차 붙이지 않았던 것을, 이제는 루카스를 가져다 붙이고 총까지 쥐여주면서.
어느 기점부터 여자는 쓰임조차 불분명했다. 애써 서류를 조작하고, 사교계에 데뷔시킨 게 무색하게도. 어쩌면 처음부터 실수였다. 저 여자의 눈과 머리카락에서 엘레나의 흔적을 되짚었던 그 최초의 조우부터.
그는 여자가 엘레나일지도 모른다는 터무니없는 희망을 때때로 죽였다. 눈앞의 여자가 그녀라면, 그를 만나러 올 리가 없으니까. 적어도 저런 눈으로 그를 바라볼 리가 없으니까.
“황태자 전하께 접근할 수 있게 자리를 만들어주세요.”
이걸 대체 어떻게 설득해야 할까. 어디서부터 말해야 제대로 이해시킬 수 있을까.
내가 너에게서 다른 사람을 본다고, 그 애와 닮은 네가 편해졌으면 좋겠다고, 네가 다치는 걸 보기가 싫다고, 사지로 몰아넣은 것이 미안해졌다고.
모두 다, 네가 그 애를 지나치게 닮아서….
그는 헛웃음을 물었다. 미치광이도 이렇게까지 미친 짓은 하지 않을 것이다. 여자는 그의 웃음을 무엇으로 받아들였는지 변명처럼 입을 열었다.
“엔리케에게서 받은 일은 제가 멋대로 동의한 일이니까, 그건 알아서 할게요.”
“…….”
“이젠 전하께서 무엇을 시키신다고 해도 잘 해낼 수 있어요. 기껏 저를 상속녀로 만드신 이유가 있으시잖아요. 차라리 제대로 써 주세요. 말씀드렸듯 이건 제 복수이기도 하니까….”
“…….”
“전하께서 도와주세요. 제가 마지막에 웃을 수 있도록요.”
순간, 들릴 리 없는 목소리가 환각처럼 덧씌워졌다.
“비센테, 진짜 수치란 겨우 이딴 게 아니야.”
“…제발, 엘레나. 네가 무슨 짓을 당한 건지 알기나 해?”
“웃음을 팔고, 긍지를 팔고, 내 명예가 아무리 값싸게 팔려도 마지막에 웃을 수 있다면… 고작 이런 걸 내 수치라고 할 수 없어.”
저렇게 엷은 웃음을 띤 얼굴로, 정말 저런 눈으로.
“이젠 정말 각오가 된 것 같아요.”
들리지 않았다. 여자가 무슨 말을 하는지, 전부.
‘언제 잠들었지?’
이벨린은 파르르 떨리는 눈꺼풀을 들었다. 시간이 얼마나 지난 걸까? 모닥불을 피워 두었던 장작은 다 사그라들어 재로 돌아가 있었고, 새벽녘의 푸르스름한 빛이 동굴의 초입에 드리워져 있었다. 곧 동이 틀 모양이었다.
이벨린은 제가 간밤에 둘둘 말고 있었던 비센테의 망토를 추스르며 눈을 느릿하게 깜박였다.
곁을 돌아보니, 비센테는 제 팔을 벤 채 그녀의 곁에 비스듬히 누워 있었다. 깊은 잠에 빠져든 것은 아닌 듯했다. 피로에 지친 얼굴은 금방이라도 잠에서 깰 것처럼 위태로워 보였다.
이벨린은 조심스럽게 옆으로 돌아누워 그의 얼굴을 정면으로 바라보았다. 이렇게 바라보고 있자니 그녀의 세상에 평온한 설렘이 찾아들었다.
새벽의 선득한 공기, 새가 지저귀고 풀벌레가 우는 소리, 맺혔던 이슬이 떨어지는 소리, 그리고 눈을 감고 있는 비센테….
이벨린의 몸으로는, 죽어도 볼 수 없으리라고 포기했던 바로 그 얼굴.
한참을 들여다보는 데도 아무런 미동이 없어서 이벨린은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 그의 코 앞에 손을 살짝 가져다 댔다. 차디찬 손끝에 규칙적인 숨결이 느껴졌다. 그녀는 조금쯤 안심했다.
이벨린은 그제야 비센테가 요 며칠간 제대로 눈을 붙인 적이 없다는 사실을 어렴풋이 상기했다. 제가 그의 방을 차지하고 앓아누워 있던 동안 그가 했다던 미련한 행동들이 누군가의 목소리를 빌어 떠올랐다.
2황자 전하께서는 잠시 눈을 붙이실 때도 연회장 근처의 휴게실에나 머물렀다고, 쉴 때도 기사단의 그 불편한 침대를 이용했고, 연회에도 빠짐없이 참석했다고….
그런 몸으로 당연하다는 듯 사냥제까지 참석한 데다, 밤이슬을 맞고 숲속을 쏘다녔으니 여태 멀쩡하게 버틴 것이 차라리 기적이었다.
“네 말대로 할게.”
“정말요?”
간밤. 끈질긴 설득 끝에 간신히 받아 낸 항복 선언은 달콤하지 않았다. 비센테의 얼굴에는 살아 있는 사람의 생기라고는 좀처럼 찾아볼 수조차 없었다. 마치 끝없는 낭떠러지를 목도한 사람처럼 까마득했다.
그녀는 요즘 들어 부쩍 에스페다에서의 남은 날들을 초조하게 계산했다. 그에게 완벽한 미래만을 남겨 놓고 사라지는 순간을, 내가 엘레나였고 그를 원망하지 않는다고 밝히고 영영 떠날 바로 그 순간을.
“이번 일이 성공하게 된다면… 제게 에스페다에서의 신분을 보장해 주세요.”
과거에 아무렇게나 지껄였던 말은 그의 의심을 누그러뜨리기 위한 방편이었다. 일이 마무리되면 당연히 에스페다를 떠날 작정이었다. 코라를 데리고 에스페다도 브리타냐도 아닌 나라의 시골로 숨어서…. 그렇게 평범한 ‘이벨린 베네딕트’로 돌아가, 평범한 생을 살 작정이었다. 언제든, 이 몸의 주인이 나타나면 흔쾌히 되돌려 줄 수 있도록.
이 일을 성공적으로 해내며 받게 될 상당한 재산으로 ‘이벨린’에게는 사실 카터 말고 다른 대안도 생긴 셈이었다. 여자들이 결혼하지 않고 혼자 늙어가면 큰일이 나는 줄 아는 시대에서, 조금 더 시간을 더 써서 인생을 고민해도 될 정도로는.
그때쯤이면 비센테를 향한 구질구질한 미련도 정리될 것이다. 산 자는 산 자의 영역에, 죽은 자는 죽은 자의 영역에 머물러야 했다. 언제 다시 영혼이 바뀔지도 모르는 이런 불완전한 몸으로 감히 미래를 욕심 낼 게 아니라.
흐트러진 머리카락이 그의 눈가를 가려 불편해 보였다. 이벨린은 뻗었던 손을 그대로 옮겨 비센테의 이마를 가린 머리카락을 조심스럽게 넘겨 주었다.
그러자마자 남자의 눈꺼풀이 열리더니 곧장 짙은 눈동자를 드러냈다.
“…깨셨어요?”
이벨린은 조금 머쓱하게 손을 내렸다. 그는 잠시 말없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어둑한 빛 아래 푸르게만 보이는 홍채, 살짝 커진 동공, 그 위로 그늘을 드리우는 속눈썹. 그가 느릿하게 눈을 감았다 떴다. 꿈을 현실에서 분리하듯 커다란 오른손으로 눈을 덮었다.
“깨어 있기는 아까부터 깨어 있었고.”
“거짓말. 제가 전하 얼굴 앞에서 이렇게 하는데도 모르셨으면서.”
“너 부스럭거리는 소리는 망토 붙잡고 굴러다닐 때부터 들었어.”
“…….”
“비가 그쳤군.”
이벨린은 그를 따라 바닥에서 상체를 일으켰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푸르스름하던 하늘이 어느새 밝아져 있었다.
이벨린은 그가 자연스럽게 내민 손을 붙잡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체중이 실리며 욱신거리는 통증이 일었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말갛게 그를 올려다보는 눈빛에, 미심쩍다는 듯 가늘어진 시선이 그녀의 얼굴에 닿았다.
“발목은 좀 어때?”
이벨린은 조심스럽게 바닥에 발을 굴러보았다. 가벼운 충격에도 통증이 느껴지긴 했지만, 어제 예상했던 것처럼 심하지는 않았다. 이벨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아요. 그냥 겉으로 보기에만 심하게 부은 거예요.”
“아프면 참지 말고 말해.”
그의 목소리는 여전히 다정하게 들렸다. 간밤의 계산적인 대화와는 기억조차 나지 않는다는 듯, 단순한 체스 말에겐 과분한 친절을 아까워하지도 않고.
“돌아가서는 당분간 무도회든, 박람회든 참석하지 말고.”
“하지만….”
“카스트로와 만날 시기는 내가 알아서 조율할 테니까.”
짐짓 가라앉았던 목소리에 싸늘한 기색이 묻어났다. 찰나였다. 이벨린이 황망하게 그를 올려다보자, 이미 감정의 편린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 있었다.
이벨린은 치맛자락을 꾹 눌러 쥐었다.
“…실망하시지 않도록 잘 할게요.”
동굴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 묶어둔 흑마는 얌전하게도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는 그 큼직한 말을 제법 태연한 마음으로 마주할 수 있었다. 어젯밤에는 더없이 끔찍하게만 여겨지던 것이, 주변이 조금 밝아졌다고 견딜만한 것으로 바뀌고 있었다.
“이제 준비됐어요.”
이벨린이 비장하게 고개를 끄덕이자, 비센테가 그녀의 허리를 붙잡아 안장 위로 올렸다. 불편한 곳은 없는지 세심하게 살핀 뒤에 이윽고 고삐를 단단히 붙잡았다. 정말 기사의 종자처럼 고삐를 붙잡고 끌고 갈 모양이었다.
“…….”
이벨린은 일부러 어설프게 자세를 취하며 멋쩍은 표정을 지었다. 상황이 이럴 수밖에 없다는 것은 머리로는 알았지만, 어쩔 수 없이 면구했다.
“저만 이렇게 편하게 가고, 전하께서는 걷고 계시니까 마음이 불편해요.”
그가 별 우스운 소리를 다 듣는다는 듯 그녀를 바라보았다.
“참아. 다른 방도가 있는 것도 아닌데.”
“얼마나 더 가야 해요?”
“별로 안 남았어. 곧 평지가 나올 테니까.”
“그때부터는 전하께서도 같이 탈 수 있고요?”
절박하게 물어보자, 그가 픽 웃으며 대답했다.
“그렇지.”
이벨린은 얌전히 입술을 다물었다. 몇 개의 비탈진 지형을 넘고 나자, 그의 말마따나 조금 더 평탄한 지형이 나타났다. 그때부터는 그가 말 위로 올라탔다. 힘이 센 준마는 너끈히 둘의 무게를 버텼다.
“…….”
등 뒤에 닿는 그의 단단한 가슴이 자꾸만 의식되었다. 이벨린은 새빨갛게 달아오른 고개를 들키지 않으려 푹 숙였다.
그는 능숙하게 말을 달렸다. 처음 와보는 지형일 텐데도 익숙한 곳을 달리는 것처럼 빨랐다. 덕분에 이른 점심을 들 시간 즈음엔 테네리페 성이 보이는 곳까지 도착할 수 있었다. 그가 그녀를 말에서 내려, 걸터앉을 두꺼운 나무쪽으로 부축하며 당부했다.
“여기서부터는 정비된 곳이니 안전해. 잠시만 있어. 루카스를 보낼 테니까.”
아무리 성과 가까워도 어둑한 숲에 혼자 남겨지는 것은 끔찍했다. 조금만 더 계시면 안 되겠느냐는 말이 목 끝까지 올라왔지만, 꾹 눌러 참았다.
이미 시간을 상당히 지체한 뒤였다. 게다가 여태껏 비센테가 그녀의 평판을 지키려고 무슨 짓까지 감수했는지 아니까….
“알겠어요.”
이벨린에게서 망토를 받아 든 비센테는 다시 훌쩍 말 위로 올라탔다. 험한 지형에도 능숙하게 말을 몰더니, 이내 우거진 나무에 가려 뒷모습조차 보이지 않았다.
다행스럽게도 기다림은 길지 않았다. 20분쯤 지났을 무렵부터 사냥개가 짖는 소리가 점점 더 가깝게 들려왔다. 군홧발이 나뭇가지를 짓밟으며 내는 인기척과 그녀의 이름을 요란스레 부르는 목소리가 희미하게 메아리쳤다.
“여기에요! 여기!”
이벨린은 있는 힘껏 소리를 질러 화답했다. 목이 쉬어갈 즈음, 이윽고 풀숲을 제치고 사냥개 한 마리가 그녀의 발치로 뛰어들었다. 뒤이어 무성한 나뭇가지 뒤에서 루카스의 해쓱한 얼굴이 드러났다. 복잡한 눈으로 그녀의 참담한 몰골을 바라본 루카스가 이윽고 큰 목소리로 외쳤다.
“백작 영애께서 여기 계신다!”
***
“이벨린!”
그녀가 루카스의 부축을 받아 말에서 내려서자, 파르디타가 계단을 단숨에 달려 내려왔다. 예쁜 얼굴이 온통 눈물에 젖은 채였다.
이벨린은 그녀가 저를 와락 껴안는 순간을 표정 없이 인내했다. 그녀를 한 번 끌어안았던 파르디타가 이내 제 몸을 그녀에게서 떼고는 양손으로 이벨린의 어깨를 붙잡았다. 떨리는 손끝이 그녀의 옷매무새를 참담하다는 듯 더듬었다.
회색 눈동자에 그득 고인 눈물이 하얀 뺨 위로 쉴새 없이 떨어졌다.
그리고 이벨린은 그 모든 것을 저와는 상관없다는 듯 바라보았다.
“정말 걱정했어요. 어떻게… 이렇게 다시 돌아와서, 제가 얼마나 다행인지….”
떨리는 목소리가 간헐적으로 이어졌다. 멀리서 그들의 감동적인 해후를 지켜보는 기사단과 귀족들은 모두 감격한 얼굴이었다. 수상쩍다는 점을 인지한 사람이 있을 수도 있겠지만, 적어도 겉으로는.
다시금 그녀의 목을 감싸 안는 손이 파충류의 피부처럼 차가웠다. 다정한 말이나 울음을 걷어 낸 목소리가 선득하게 귓가에 속삭였다.
“왜 돌아왔어요? 기껏 자비를 베풀었는데.”
“…자비라고요?”
“당신이 보다 더 고상하게 퇴장할 수 있었잖아요. 구질구질한 치정극 따위 없이, 완벽하게 동정심을 자아낼 법한 서사로.”
“…….”
“그 정도 사리 분별은 할 줄 알았는데.”
짐짓 실망스럽다는 목소리에 기가 막혔다. 이벨린은 이를 악물었다가, 그런 적조차 없다는 듯 환히 웃으며 파르디타를 마주 안았다. 설마 이벨린이 그렇게 행동할 줄은 상상도 못 했던 것처럼 파르디타의 가느다란 몸이 설핏 굳었다.
“하나만 물어도 될까요?”
이벨린의 목소리는 차갑지도, 따듯하지도 않았다.
“왜 그분을 그렇게까지 원하세요?”
대체 무슨 헛소리를 지껄이려는 거냐는 듯 치켜떠진 눈이 이윽고 예쁘게 웃음을 물었다.
“신의 걸작이잖아요. 나는 언제나 최고만 원해요.”
“…….”
“명예도, 재물도, 권력도 간절하지 않죠. 이미 있으니까. 그러니 저런 사람은 나에게나 어울려요.”
저런 사람. 마치 동등한 사람이 아닌 예쁜 장신구처럼 취급하는 말이었다. 그녀가 이벨린을 달래듯 한 번 더 웃었다.
“물론, 당신 같은 여자는 이해할 수 없겠지만….”
“무슨 말씀이신지는 알겠어요.”
이벨린은 구구절절 길어지려는 파르디타의 말을, 말이 아닌 끔찍한 괴물이라도 되는 것처럼 잘랐다.
“덕분에 제 결심은 더욱 확고해졌고요.”
“…….”
“파르디타, 저는 죽어도 제 발로 이곳을 떠나지 않을 거예요.”
“…떠나지 않겠다고요?”
“말 그대로예요. 제가 원하는 걸 얻기 전까진 도망치지도, 브리타냐로 돌아가지도 않아요. 그러니 부디 다음에는 더 정교한 계획을 세우시는 게 좋겠어요.”
“…….”
“이렇게 조잡하고 어설프면 둘 다 고생만 하잖아요.”
기막히다는 듯 일그러졌던 파르디타의 고운 얼굴이 반듯하게 펴졌다. 그들에게 쏟아지는 호기심 어린 시선을 가까스로 의식한 모양이었다.
이윽고 파르디타가 거짓말처럼 환하게 웃었다.
“영애의 시건방진 충고, 언제나 명심할게요.”
***
“난,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구나.”
이벨린은 좁다란 엘 레테아 신전의 창문으로 바깥을 내다보다가, 문득 들려온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헌관의 복장을 갖춰 입은 채로 얌전히 앉아 있던 시에나의 고운 얼굴이 짐짓 엄격해져 있었다.
“네가 숲에서 돌아온 게 바로 어제 아침이야. 발목이 다 낫지도 않았잖니. 그런데 당장 오늘 밤부터 그 고생을 하겠다고?”
“사실 황자께선 이번 일에 대해서는 모르셔요, 시에나. 발에 부목을 덧댔더니 이젠 아프지도 않고요.”
“이벨린. 지금이라도 그만두렴.”
벌써 몇 주 전에 결정 난 일을 이제라도 뒤엎을 수 있을 것처럼 이야기하는 시에나의 말은 퍽 다정했다. 이벨린은 무심코 절뚝거리지 않도록 조심하며 시에나의 곁에 다가가 앉았다. 손등이 새하얗게 질리도록 사제복을 움켜쥔 주름진 손을 부드럽게 당겨 잡았다.
“저는 정말 괜찮아요.”
“차라리 내년에 하면 어떻겠니? 내년에도 내가 헌관을 자처하면 되잖니. 겨우 부목이나 덧댄 발로 네가 이렇게 고생할 것이 아니라.”
“말씀이야 감사하지만, 내년에도 이 고생을 하시려고요?”
“그래도.”
“이미 대신관을 매수해 두었는걸요. 그리고 시에나께서도 아시듯, 우리 ‘계획’은 짧으면 짧을수록 좋고요.”
가짜 상속녀 연극은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위험 부담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다. 언제 그녀를 알아보는 사람이 나타날지 모르는 일이었으니까…. 게다가 파르디타는 여태 장갑에 대해서만큼은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이벨린은 엔리케가 전해 준 비탈리 가문의 소식을 초조하게 곱씹었다.
“브리타냐로 사람을 보낸 것 같습니다. 정확하게 무슨 짓을 꾸미는지는 모르겠지만, 베네딕트 양에 대한 실마리를 잡았을지도 모릅니다….”
"정말 이래야만 하겠니?”
이어지던 생각 위로 시에나의 떨리는 목소리가 우울하게 덮였다.
“차라리 망명을 해 보는 건 어떻겠니? 시페론이나 발레리앙 같은 곳으로….”
“…….”
“나 때문에 발이 묶인 거라면 정말 신경 쓰지 말렴. 신께 종신 서원을 드린 몸이니, 너희가 사라진다고 내 한 몸 건사하지 못할 셈도 아니고.”
파르르 떨리는 시에나의 고아한 입술 위로 차마 말로는 전하지 못할 걱정들이 흘러넘쳤다. 꼭 복수를 하는 것만이 방법은 아니라고, 그만 다 잊고 편해져도 괜찮다고, 부디 스스로를 용서하고 저들을 잊으라고.
절박한 호흡이 흐느끼듯 얕게 이어졌다.
“…….”
저 구구절절한 걱정들이 모두 시에나의 진심이라는 것만은 분명했다.
그래, 잠깐은 그런 꿈을 꿨다.
비센테에게 모든 것을 밝히고 같이 이 나라를 떠나는 망상을. 한적한 시골이든, 바다가 보이는 휴양지든 정착해 오로지 서로를 아끼며 사는 그런 인생을….
이벨린은 긴 속눈썹을 내리깔았다. 잠깐 상상해 본 것만으로도 죄를 짓는 기분이었다.
“…생각을 안 해 본 것은 아니에요.”
물론, 당장 몇 년간은 행복할 것이다. 꿈속에 사는 것 같겠지. 하지만 카스트로는 집요한 자였고, 황제는 제 장자의 손에서 사생아를 지키기에도 벅찰 정도로 늙었다.
꿈을 헤맬 때는 푸른색으로 빛나던 눈동자가 다시금 회색빛으로 가라앉았다. 한층 더 공허해진 눈이 시에나의 텅 빈 동공을 마주했다.
“하지만 시에나. 그게 최선은 아니에요. 생각해 보세요. 그렇게 되면 카스트로는 어떤 방해도 없이 황좌에 오를 거예요.”
“…….”
“그리고 카스트로는 제 황위에 위협이 될 만한 요소를 남겨두지 않겠죠. 기사들에게 평생 쫓기며 언제 죽음이 들이닥칠지 몰라 불안에 떠는 삶을 살고 싶지는 않아요. 적어도 2황자께선 그렇게 살아서는 안 돼요.”
“…….”
“그러니 다른 때가 아닌 지금 해야만 하는 거고, 저는 잘 해낼 자신이 있어요. 제가 할 수만 있다면 정말 무엇이든.”
그 말을 맺는 것과 동시에 빠르게 가까워지는 발소리가 들렸다. 이벨린이 고개를 드는 것과 비슷하게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서서 문을 열었다. 새하얀 사제복을 갖춰 입은 대신관이 보였다.
원래 집도하기로 예정된 사람이 아니라, 그녀가 매수한 대신관이었다. 의미심장한 눈짓을 보낸 그가 입을 열었다.
“지금 기도실로 이동하셔야 합니다.”
“지금 바로요?”
“네. 거동을 도울 사제들을 붙여드릴까요?”
이벨린은 고개를 저었다.
“익숙한 손이 아니면 불편해하실 거예요. 시간이 걸리더라도 제가 모시겠습니다.”
이벨린은 절뚝거리지 않도록 조심하면서 시에나의 팔을 붙잡아 일으켰다.
아치형 기둥이 늘어선 좁은 복도를 지나자, 이윽고 기도실이 모습을 드러냈다. 천장에는 손바닥 크기의 구멍이 뚫려 있었고, 그 아래 세월을 짐작하기 힘들 정도로 오래된 나무 기도대와 큼직한 놋쇠 향로가 놓여 있었다.
“통회 기도는 2시간씩 진행되고 30분씩 휴식합니다. 그때마다 헌관께 충분히 물을 드리고, 마른 과일을 드실 수 있도록 도우세요.”
“알겠어요.”
“그리고 밤새 이 향로가 꺼지지 않게 돌보셔야 합니다.”
“‘꺼지지 않게’라고 하시면….”
“향초 다발이 다 탈 즈음이면 새까만 그을음처럼 연기가 올라오는데, 그때 향초를 잊지 말고 보충해 주세요. 다발의 끝부분을 성수에 담갔다가, 이렇게 헌관의 양어깨에 한 번씩 털어내고 향로에 넣으면 됩니다.”
대신관이 말을 더 보태려는 순간, 신관들이 가까이 다가왔다. 대신관은 재빨리 입을 다물었다.
“대신관님. 저희는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그렇게들 해요. 대예배당에서 뵙죠.”
신관들은 장식해 놓은 꽃들 중 시들기 시작한 것 몇 개를 골라내고는 곧바로 홀을 빠져나갔다. 발소리가 아주 멀어지자, 대신관은 기도대 바로 옆에 놓인 작은 나무 상자를 가리켰다.
“향초를 묶어 둔 다발은 저기에 여분을 더 준비해 두었습니다. 한 번에 딱 한 다발씩만 넣으세요. 그보다 많이 넣어서도 안 되고, 분량보다 적게 넣어서도 안 됩니다.”
“이해했어요.”
“그리고….”
“아.”
대신관의 눈빛이 은근해진 순간, 이벨린은 재빨리 준비해 온 돈주머니를 대신관의 손에 쥐여 주었다. 약속했던 대금의 절반이었다.
그는 슬쩍 주머니를 열어 동전의 개수를 대략적으로 셈해 보더니 품속에 쏙 넣었다. 대신관의 목소리가 한층 낮아졌다.
“자정이 되면 종이 울릴 겁니다.”
그는 연신 손수건으로 이마를 훔쳐대며 문간을 흘긋거렸다. 누가 엿듣고 있지는 않은지 부단히 확인하는 기색이었다.
“기도실에서 나오자마자 우리가 걸어왔던 복도로 되돌아가십시오. 조금 걷다 보면 작은 나무문이 있는데, 그 너머에 지하로 통하는 계단이 있습니다. 지나온 길을 기억하십니까?”
이벨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대충은.”
“두 번째 기둥과 세 번째 기둥 사이로 기사단이 순찰을 돕니다. 그 뒤로는 대예배당이고요. 근처에 황족들이 숙소가 있으니 그쪽으로는 절대 가시면 안 됩니다.”
“누가 머물고 계시는데요?”
대신관은 그런 걸 대체 왜 궁금해하냐는 듯한 표정을 지었지만, 순순히 대답해 주었다.
“황제 폐하와 폐하께서 특별히 요청하신 몇 분, 황후 폐하, 그 너머에는 황태자 전하, 가장 외곽에는 2황자 전하께서 머무십니다. 대예배당에서 자정까지 기도를 올리고 나면 개인실로 돌아가실 테고요. 그러니 제발, 각별히 주의를 부탁드립니다.”
“알겠어요.”
“향로는 한 번 불이 붙으면 정확하게 30분이 유지됩니다. 희든 검든, 연기가 저 천장으로 빠져나오지 않으면 신관들이 내부를 확인하러 들어올 겁니다.”
“기도가 시작되면 헌관과 저를 제외하곤 기도실에 못 들어오는 것 아니었나요?”
“향로가 꺼지는 경우는 예외입니다. 헌관의 몸에 이상이 생겼다고 간주할 테니까요. 저건 바깥과 소통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입니다. 아가씨께서 성서에 쓰인 ‘침묵하는 아가씨’의 역할을 맡으셨다는 것을 잊으신 건 아니겠죠?”
이벨린은 이해했다는 뜻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돈 몇 푼에 값싸게 신에 대한 믿음을 팔아먹은 자치고는 제법 신실한 당부였다.
“그러니 향로를 유지하는 일에 각별한 주의를 기울이시고요. 그리고….”
말을 마친 그가 주변을 둘러보더니, 품속에서 납작한 열쇠를 꺼내 이벨린에게 건넸다. 땀으로 축축하게 젖은 열쇠에서는 비릿한 놋 냄새가 났다. 대신관의 목소리가 더 은밀해졌다.
“황태자 전하께서 한 번이라도 드나든 적 있는 방은 계단을 내려가자마자 세 번째 방뿐입니다. 만약 누구에게 발각되기라도 한다면 저는 영애께서 그 열쇠를 훔쳤다고 증언할 거고요.”
“알겠어요.”
“제가 말씀드릴 수 있는 것은 여기까지입니다. 명심하세요, 종이 모두 울린 뒤에 나오셔야 합니다.”
이벨린은 그제야 대신관의 눈을 제대로 바라보았다. 두툼한 살집 사이에 파묻힌 작은 눈이 파르르 떨리는 것이 보였다. 그녀는 열쇠를 꽉 쥐었다.
“명심할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