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마는?”
“해 본 적 없어요.”
사냥제에는 비센테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녀는 그에게 승마를 배운 적 없다고 둘러댔던 전적이 있었다.
장갑이고 뭐고 모르는 척 몸을 사릴까? 메리에게 미리 언질을 주었듯 그녀의 소유가 아니라 하녀의 것인 것처럼….
어차피 훔쳐 간 물건이니 자랑스레 전시하지도 못할 텐데.
‘그렇다고 해도 저 의기양양한 표정이 마음에 걸려.’
이벨린은 보이지 않게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파르디타의 걸음걸이며 표정, 태도는 그녀를 다시 만난 이래로 가장 자신만만해 보였다. 이미 이벨린의 신분이 거짓일 거라고 절반쯤 확신하는 것 같았다. 대체, 무슨 증거를 어디까지 잡았는지는 몰라도.
여기서 물러난다면 네 의심이 전부 맞는다고 인정하는 꼴이었다. 그리고 파르디타가 무슨 짓을 꾸미고 있는지 알아낼 기회도 영영 사라지겠지.
끌려가듯 걷던 이벨린은 파르디타의 손을 고쳐 잡으며 조금 더 활짝 웃었다.
“그렇게 해요.”
“네?”
“산책로만 따라 천천히 말을 몰면 말씀대로 몸에 무리가 가지 않을 테니까. 그 정도라면 가능하겠어요.”
선선하게 승낙하자 파르디타의 눈매가 일순 가늘어졌다. 네가 말을 탈 수 있을 리가 없는데, 이상하다는 것처럼. 미심쩍어하는 속내가 그대로 읽혔다. 파르디타는 이내 가늘어진 눈매 그대로 활짝 웃었다.
“잘됐네요.”
“말은 어디에 두었나요?”
“하인들에게 미리 지시해 두었어요. 안장도 올려 놓았고요.”
조랑말 위에 얌전히 올라타 있는 정도라면 처음 승마를 배운 사람도 그럭저럭 해낼 수 있을 것이다. 루카스가 비센테에게 전하더라도 위화감은 느낄지언정 해묵은 의심을 불러일으킬 정도도 아닐 테고….
몇 가지 계산을 초조하게 보태는 동안, 그들 뒤로 기사 몇과 하인들 몇 명이 더 따라붙었다. 갑옷의 인장을 보니 ‘비탈리’ 가문에서 보낸 사람들이었다.
성의 뒤편으로 돌아가자 인공적으로 조성된 거대한 공터가 보였다. 흰 캐노피 천막들이 줄지어 놓여 있고, 기둥마다 붙은 가문의 깃발이 너울거렸다. 그 뒤쪽으로 전나무들이 빽빽하게 들어선 트레몬타나 숲이 보였다.
사냥제에 참석할 사람들은 벌써부터 줄지어 말 위에 올라타 있었다. 사냥개들이 짖는 소리가 멀리서부터 요란했고, 미리 날려 보낼 꿩들이 푸드덕거리는 소리가 요란스레 들렸다. 이벨린은 말에 올라탄 사람들을 유심히 살폈다. 잘 보이지는 않아도, 저들 중 비센테도 섞여 있을 터였다.
“우리도 서둘러야겠어요.”
그들이 서둘러 가까이 다가서자 귀족 영애들 몇몇이 살갑게 인사했다. 파르디타는 그들마다 적당한 시간을 할애했다.
다섯 번째로 가까워진 여자에게서 적당히 인사를 받은 파르디타가 상쾌한 듯 이벨린을 돌아보며 웃었다.
“봐요. 나오길 잘했죠? 다들 걱정했다니까요.”
이벨린은 차마 마주 웃지는 못했지만 애써 고개를 끄덕여야만 했다. 영애들은 정말로 그녀를 걱정한 것처럼 보였다. 적어도 겉으로는.
여자들을 마주할 때마다 그 위선적인 얼굴들 위로 내키지 않는 과거가 일렁이다가 사라지길 반복했다. 황태자의 약혼녀로 대우받으면서, 그럴듯한 지위조차 없이 맴돌던 사교계의 유령, 그 애처롭던 시절…. 과거 벨몬테의 사교계는 ‘엘레나 데 카스타야’를 중심으로 아주 뭉치지도 못했다.
황제는 처음부터 카스타야와 황태자의 결합을 마뜩잖아했고, 카스타야 후작은 제 딸의 순결을 결벽적으로 지켰으며, 황후 가브리엘라는 엘레나에겐 별다른 관심조차 없었다. 그리고 카스트로는 답지 않게 모든 육체적 관계를 혼인 후로 미루겠다는 약속을 제법 신실하게 지켰다.
그러면서도 하루가 멀다하고 신분이 낮은 처녀, 하녀, 창녀까지 골고루 제 침대로 끌어들였으니, ‘엘레나’ 같은 석녀가 정말 황태자비가 될 수 있겠느냐는 비웃음을 샀던 것도 어쩔 수 없던 수순이었다. 당시 그녀에겐 그것만이 유일한 행운이었지만.
지금 영애들의 시선은 그 시절과 완전히 다르면서도 얼핏 맞닿아 있었다.
비센테가 그녀를 아주 진지하게 여기고, 아끼고 있다는 것이 시시각각 그녀의 가치를 결정한다. 그의 헌신이 대수롭지 않게 이어질수록, 그가 그녀를 위해 감내하는 수고가 전혀 수고처럼 느껴지지 않을수록….
한 번 유폐당하긴 했지만 비센테는 여전히 시모라의 하나뿐인 후계자였고, 죽은 황제의 아들이었으며, 제2 황위 계승권에서 밀려난 적이 없는 남자였다.
그런 남자가 특별하게 여기는 여자, 그 사실만이 그녀가 얼마나 가치 있는지를 알려 주는 기준인 것처럼….
“아.”
이벨린은 문득 걸음을 멈춘 파르디타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 어느새 가까워진 무리 사이로 비센테가 보였다. 목의 아랫부분을 덮도록 깃이 올라온 사냥복과 견장, 오른쪽 팔꿈치부터 손등까지 감싼 철제 건틀릿이며 검은 망토가 그림처럼 잘 어울렸다.
그가 말 위에 올라타자 엷은 탄성이 여기저기서 흘러나왔다.
여자들은 시선으로 거의 그를 핥을 기색이었다. 말의 등을 누르고 있는 허벅지나, 걷어붙인 소매, 투레질하는 말의 고삐를 당길 때마다 핏대가 서는 팔뚝, 곧게 뻗은 자세. 흐린 구름 사이로 내리쬔 한 줄기 햇살이 그의 금발 위로 찬란하게 비산했다.
제게 쏟아지는 관심이야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듯 고고하던 눈이, 그녀를 발견하고 살짝 무너지듯 일그러졌다.
“이쪽이에요, 이벨린.”
잠깐 넋을 놓고 있었던 이벨린의 팔을 파르디타가 잡아끌었다. 이벨린은 파르디타의 얼굴이 그저 말갛게만 보인다는 것에 조금 섬뜩해졌다. 평소라면 쉽게 드러내던 거리낌이나 분노, 반감조차 없었다. 비센테와 관련된 일이라면 집착적으로 돌변하던 성미를 생각하면 기이했다.
“말들을 꺼내 와.”
파르디타의 손짓에 대기하고 있던 하인들이 잽싸게 말들을 끌고 왔다. 투레질할 때마다 발굽에 챈 땅에서 흙먼지가 부옇게 일었다.
“파르디타, 이건….”
레오넬이 당혹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숙녀들이 타도록 훈련된 조랑말이라기엔 덩치가 지나치게 컸다. 군용으로 유통되는 말들인 게 분명했다. 파르디타가 말 중 하나의 고삐를 잡아, 콧등을 쓰다듬으며 흐뭇하게 이어 말했다.
“저희 가문에는 조랑말 같은 건 없어서요. 여자들도 모두 이런 준마를 타죠.”
“…….”
“귀엽죠? 모두 순한 아이들이니 걱정하지 말아요.”
이벨린은 헛웃음을 뱉었다. 끌려오면서도 뒷발길질을 해 대는 모습의 어디가 순하려고….
변변한 항변조차 못 하는 사이, 시종 중 한 명이 파르디타의 허리를 붙잡아 말 위로 올렸다. 그녀가 능숙하게 말 위에서 중심을 잡으며 웃었다.
“자, 봐요. 생각보다 어렵지 않다고요.”
“실례하겠습니다, 아가씨.”
파르디타를 올려 주었던 나이 든 시종이 이벨린에게 공손하게 고개를 숙였다. 이벨린이 그의 어깨에 손을 얹자, 그가 그녀의 허리를 붙잡아 검은 말의 등 위로 올렸다. 훅 올라간 시야에 그녀는 본능적으로 자세를 잡았다.
침착하게 안장에 엉덩이와 허벅지를 붙이자, 말 근육이 꿈틀거리는 게 느껴졌다.
“…….”
이벨린은 파르디타의 눈매가 일순 가늘어지는 것을 놓치지 않았다. 의아해하는 시선이 달라붙었다. 그럴 리가 없는데, 그렇게 된 것을 보는 것처럼. 이벨린은 보란 듯이 손을 뻗어 말의 갈기를 토닥였다.
엷은 승리감을 만끽하려는데, 파르디타가 제가 탄 말을 몰아 그녀의 말 근처로 가까이 붙였다.
“어때요?”
“오랜만이긴 한데, 괜찮네요.”
“그렇겠어요…. 자세도 나쁘지 않네요. 언제 배웠어요?”
“어릴 때부터 탈 기회는 자주 있었어요. 말씀대로 브리타냐에서는 귀족들에게 승마가 필수 교양이거든요.”
“그렇군요….”
파르디타는 이벨린의 대답을 제대로 듣지도 않았다. 그녀는 고개를 곧추세우고 모여 있는 사내들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곧 시작하려나 보네요. 황태자 전하께서 나오셨어요.”
파르디타의 말대로 시종들을 대동한 카스트로가 갈색 말 위에 올라타는 것이 보였다. 이윽고 나팔이 길게 울렸다. 풀려난 사냥개들이 시끄럽게 짖으며 숲속으로 뛰어들었고, 그 뒤를 따라 말을 탄 사내들이 대여섯씩 짝을 지어 숲속으로 사라지는 모습이 보였다.
“우선… 긴히 영애께 할 말이 있으니 기사들을 물려요.”
“굳이 그럴 필요가 있겠습니까?”
루카스가 서둘러 파르디타의 말을 막았다. 파르디타는 눈썹을 슬쩍 올리더니, 루카스에겐 시선조차 주지 않은 채로 말했다.
“영애의 기사는 좀 주제넘군요. 저야 여기서 떠들어도 상관없어요.”
“…….”
“선택은 이벨린, 당신이 해요.”
“아가씨, 저는….”
“잠시 다녀올게요, 루카스.”
반발하려는 루카스의 말을 이벨린이 잘라 냈다. 루카스처럼 올곧은 자는 예상치 못한 상황이 닥치거나, 당혹스러운 말을 들으면 표정을 다 감추지는 못할 터였다.
파르디타가 그럴 줄 알았다는 것처럼 활짝 웃었다.
“그럼 오붓하게 산책이나 좀 다녀올까요?”
파르디타가 먼저 숲의 초입을 향해 천천히 말을 몰았다. ‘이벨린’의 몸으로는 처음이라 중심을 잡기가 서툴렀지만, 그녀는 곧 기억을 끄집어내 그럭저럭 말을 몰고 뒤따랐다.
밤새 웃자란 풀에 붙은 이슬이 사냥복의 치맛단 아래를 적셨다. 숲과 조금 가까워진 것만으로도 나무들이 시야를 가렸다.
사람들로부터 어느 정도 멀어졌다는 확신이 들자 이벨린이 먼저 운을 뗐다.
“할 말이라는 게 뭐죠?”
“…아, 그거요?”
파르디타는 한 박자 늦게 대답했다. 어떻게 말을 시작해야 할지 신중하게 고르는 것처럼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인 그녀가 소곤거리며 입을 열었다.
마치 대단한 비밀을 알아낸 사람처럼.
“제가 뭔갈 찾은 것 같은데… 혹시 어릴 때 윈스포드에 살았던 적 있나요?”
여기까지는 예상한 범위 내였다. 이벨린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윈스포드요? 기억이 나지 않긴 한데요. 왜 그러시죠?”
“저번에 영애의 방에 들어갔을 때 뭔가를 본 것 같아서요.”
“기억이 나지 않네요. 원체 자질구레한 것은 잘 기억하지 못하는 편이라.”
“글쎄요. 그게 그렇게까지 의미가 없어 보이진 않던데.”
“뭘 보셨는데요?”
“그건 영애가 더 잘 알지 않을까요?”
맥락도 없는 대화가 빙빙 돌기 시작하자, 짧던 인내심이 순식간에 바닥을 드러냈다.
“파르디타. 대체 하고 싶은 말이 뭐죠?”
“본론으로 들어가자면… 이런 거죠.”
파르디타가 회색 눈매를 애교스럽게 휘며 안장에 붙어 있던 홀스터에서 리볼버를 꺼내 들었다. 그녀가 이벨린의 이마에 매끄럽게 총구를 겨누며 활짝 웃었다. 그야말로 미친 여자처럼.
이벨린은 제게 겨누어진 총구를 한 번, 웃고 있는 파르디타의 얼굴을 한 번 번갈아 바라보았다. 파르디타의 얼굴에는 지독한 농담을 하는 사람들 특유의 기색은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마땅히 해야 하는 것을, 당연히 하는 것 같은 뻔뻔함만이 읽혔다.
이벨린은 회푸른 눈을 가늘게 좁혀 뜨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파르디타. 이게 대체 무슨 짓이죠?”
“지난번에 말한 적 있잖아요.”
리볼버의 방아쇠에 검지손가락을 걸친 파르디타가, 조금 더 깊숙이 잡으며 태연하게 말을 이었다.
“기억하죠? 영애와 제 처지에 대해서 나눴던 그 대화요. 그때, 제 마차에서 말이에요.”
일주일은 족히 넘은 일이 마치 어제의 기억이라도 되는 양 제법 선명하게 떠올랐다.
“제가 영애에게 무례를 저지르더라도, 그러니까 가령… 중요한 예법을 무시하거나, 하다 못해 영애의 뺨을 때리고, 무언가를 훔치더라도.”
“…….”
“아무도 영애의 말을 믿지도, 봤다고 나서지도 않을 거예요.”
그 조잡하기 짝이 없던 협박이 순식간에 기억을 거슬러 되살아났다. 순간 흐려졌던 이벨린의 눈빛이 기억을 더듬어 다시 되돌아오자, 파르디타가 잘했다는 듯 활짝 웃었다. 총신의 해머가 돌아가는 소리가 고요한 와중 더 크게 들렸다.
“…….”
같잖다고 치부하기엔 그야말로 눈빛이 맛이 가 있었다. 미친 자들은 이래서 위험했다. 언제 어떻게 돌변할지 모르니까. 카스트로가 늘 그랬던 것처럼….
“아무리 그래도 기사가 외국의 귀족을 죽이는 건 국가적 분쟁으로 번지기 마련이죠. 물론 저희 가문에서 배상금을 치르면 없던 일로도 만들 수 있긴 한데, 그것도 아무래도 이래저래 귀찮아서.”
“…….”
“그래서 제가 직접 하려고요.”
이벨린은 짧은 순간 파르디타와 제 거리를 가늠했다. 저 미친 여자의 손을 쳐서 총을 빼앗을 수 있을까? 허리에 매단 홀스터에서 리볼버를 꺼내거나, 도망가는 것은?
운이 따라서 어떻게 빠져나간다고 해도 근처엔 비탈리의 기사들이 훨씬 더 많았다. 그들이 저와 함께 메리와 루카스까지 죽여 입막음을 시도하기라도 하면….
초조하게 파르디타를 마주하던 눈에 새파란 결기가 어렸다. 전부 제 잘못이었다. 파르디타가 이 정도로 몰렸으리란 것을 짐작했어야 했는데. 이벨린이 짐짓 우습다는 듯 헛웃음을 터트리자, 여자가 미간을 좁혔다.
“왜 웃죠?”
“남자 하나에 평생 따라붙을 꼬리표를 감내하시려는 게 믿기지 않아서요.”
“누가 감히 그분을 ‘남자 하나’로 치부할 수 있을까요?”
“그래서 절 여기서 죽이시겠다고요?”
“설마요. 하지만 불행한 총기 사고는 사람이 아무리 주의한다고 해도 가끔은 일어날 수 있는 일이고….”
파르디타가 이벨린의 이마를 정확하게 겨누던 총구를 아래로 비스듬히 내렸다. 이제 총구가 가리키는 것은 이벨린이 타고 있던 말이었다. 제게 겨눠진 것이 무엇인지 아는 것처럼 말이 거칠게 투레질을 하며 발을 굴렀다.
“그 사고로 영애의 말이 미쳐 날뛰는 것도, 영애가 숲에서 길을 잃는 것도 모두 신께서 안배한 운명일 뿐이죠.”
“정말, 미친 소리를, 다….”
“물론, 죽어서 발견되면 더 좋겠지만요. 몬테페라트엔 곰이나 승냥이도 사니까 가능성을 다양하게 열어 두자면요.”
웃음이 잔인했다. 파르디타는 진심이었다. 정말, 이 모든 미친 짓을 진심으로….
“이제 움직이지 말아요. 제가 사격에 능숙하지 않아서 의도와 달리 크게 다치게 할지도 모르니까.”
그 말이 끝나는 것과 동시에 파르디타의 회색 눈동자가 일순 좁혀졌다. 이벨린은 그다음 순간 무슨 일이 일어날지 깨달았다. 그녀가 고삐를 단단히 잡으며 몸을 숙이는 것과 동시에 파르디타의 총구가 불을 뿜었다.
탕!
말의 한쪽 귀를 뚫고 지나간 탄환이 퍽 소리를 내며 나무에 박혔다. 거대한 나무가 두 갈래로 쪼개지는 소리가 났지만, 돌아볼 정신조차 없었다. 흥분한 말이 긴 울음소리를 내며 앞다리를 위협적으로 치켜올렸다. 겨우, 떨어지지 않도록 붙어 있는 게 고작이었다.
“아가씨!”
급작스러운 총소리에 놀란 사람들이 멀리서부터 달려오는 것이 어렴풋하게 보였다. 그 소란이 다친 말을 더욱 자극했다. 콧김을 거칠게 뿜으며 제자리에서 날뛰던 녀석이, 방향을 바꿔 숲을 향해 미친 듯이 돌진하기 시작했다.
“그럼, 이벨린. 행운을 빌어요.”
숲으로 들어가기 직전 얼핏 그런 말을 들은 것도 같았다. 낭랑한 웃음소리와 함께.
***
이벨린은 말의 목을 끌어안은 채 가까스로 버텼다. 늘어진 나뭇가지들이 빠르게 스쳐 지나가며 온몸을 때렸다. 불행 중 불행인 것은 하필이면 사냥터가 지척이었다. 파르디타가 모든 것을 계산하지는 않았겠지만, 적어도 총소리에 말이 더 흥분하리라는 것은 예상했을 것이다.
그러니 말을 위협할 무기로 총을 골랐겠지.
총소리에 가까워질수록 놀란 말이 미쳐서 반대편으로 날뛰도록, 그녀가 아무에게도 발견되지 못할 숲으로 점점 더 고립되어 들어가도록.
찢어진 말의 귀가 너덜거리며 나부꼈다. 바람에 스친 핏방울이 그녀의 얼굴로 점점이 떨어졌다.
팔에서 힘이 점점 더 빠지고 있었다. 셋 중 하나였다. 이대로 말이 날뛰는 대로 끌려가다 떨어져 죽던지, 짓밟혀 죽던지, 아니면 미친 말과 함께 지척에 널린 절벽 아래로 고꾸라져 죽던지….
탕!
이따금 멀리서 총소리가 울릴 때면 말은 더더욱 격렬하게 날뛰었다. 제가 아까 받았던 통증이 되살아나기라도 하는 것처럼, 제가 죽을 고비를 넘겼다는 사실을 아는 것처럼.
“제발… 좀, 멈춰…!”
탕!
전력으로 뛰는 말의 전신에서 뿜어져 나온 열기가 뿌옇게 눈앞을 가렸다. 뚝뚝 떨어지는 침은 그녀의 손등과 뺨 위로 흘렀다. 어쩌면 말의 눈물일지도 모르겠다. 혹은, 그녀의.
이제는 얼마나 사람들로부터 멀어졌는지조차 감이 잡히지 않았다. 혹은, 얼마나 깊은 숲속으로 들어왔는지조차.
빽빽한 숲길은 방향을 짐작하기 어렵게 했다. 웃자란 나무들은 햇빛마저 가렸고, 축축한 이끼들이 지척에 가득했다. 장갑은 벗겨진 지 오래였다.
얼마나 버텼을까? 문득, 물소리가 들렸다. 계곡이 가까워진 걸까? 몬테페라트 숲에 계곡이 있다는 소리는 듣지 못했는데….
말의 목덜미에 처박았던 고개를 간신히 치켜든 순간, 이벨린은 저 멀리 절벽 아래 계곡물이 흐르는 것을 발견했다. 그리고 말이 그쪽을 향해 전력으로 돌진하고 있다는 것도 깨달았다.
‘마, 맙소사…!’
이벨린은 온 힘을 다해 고삐를 잡아당겼다. 어떻게든 진로를 바꾸려고 안간힘을 써 봤지만, 힘이 다 빠진 팔로는 무리였다. 이미 늦었다. 말은 제 속도를 늦추지 못했다.
‘떨어진다!’
이벨린이 눈을 꽉 감은 것과 동시에, 정신없이 앞만 보고 달리던 말의 앞발이 허공을 디뎠다. 크게 휘청이더니 아래로 푹 고꾸라졌다. 말은 제 몸이 기울어지고 나서야 상황을 파악한 듯 애처롭게 발버둥 쳤지만, 이미 붙은 속도를 이길 수는 없었다.
끔찍한 추락이 시작되기 직전 이벨린은 말의 목을 붙잡고 있던 손에서 힘을 뺐다. 온 힘을 다해 안장을 박차고 바닥으로 굴러떨어졌다. 큼직한 바위는 피했지만, 툭 튀어나온 나무뿌리에 정통으로 맞은 몸이 흙바닥 위로 튕겨 나갔다. 끔찍한 통증이 전신을 관통했다.
“아흑…!”
일순, 시야가 까맣게 점멸했다. 그 자리에서 몇 바퀴 구르다 고개가 흙바닥에 처박힌 순간, 그녀는 의식을 잃었다.
***
이벨린은 시끄럽게도 졸졸 흐르는 계곡물 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살짝 벌어진 입술 사이로 가는 신음 소리가 먼저 흘러나왔다. 고통에 일그러진 눈매가 몇 번 들썩였다. 이윽고 파르르 떨리는 속눈썹을 가까스로 들어 올렸다.
“흣… 으….”
가장 먼저 욱신거리는 통증이 느껴졌다. 온몸이 엉망진창이었다. 옷은 솔기가 뜯어져 있었고, 머리와 얼굴에는 흙과 낙엽이 잔뜩 붙어 있었다. 이벨린은 조심스럽게 제 몸부터 더듬었다. 팔도, 다리도… 다행스럽게도 제대로 감각이 느껴지고 있었다. 비록 멍투성이에 상처투성이가 되기는 했지만.
‘대체 여기는….’
그녀는 주저앉은 채로 고개를 돌려 주변을 살폈다. 사위가 어두웠다. 정신을 잃은 뒤로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모르겠다. 숲에서는 밤이 빨리 찾아온다는 소리를 듣긴 했지만, 막상 어딘지도 모를 곳에 혼자 남겨져 있게 되니 끔찍한 두려움이 엄습했다.
우선은 말부터 찾아야 했다.
이벨린은 무릎으로 기어 지팡이로 삼을 만한 나뭇가지를 하나 잡았다. 제법 두툼한 나뭇가지에 체중을 의지한 채, 이를 악물고 가까스로 몸을 일으켰다. 그러나 몇 걸음을 걷기도 전에 무릎이 푹 꺾였다.
“읏….”
안타깝게도 발목이 조금 삔 것 같았다. 다행히 증상이 심하지는 않았고, 제대로 된 부목을 대면 후유증은 크지 않을 듯했다. 그녀는 기절하기 전 말이 굴러떨어졌던 절벽 쪽으로 몸을 움직여 보았다. 급박할 때는 더없이 깊어 보였던 절벽은, 조금 가파른 비탈에 지나지 않았다.
그 아래에 그녀가 타고 온 말이 보였다. 검은색 말은 다리가 꺾인 채 고통으로 신음하고 있었다. 차라리 말은 즉사하는 편이 나았을 것이다. 다리가 부러진 말은 오래 살지 못하니까.
말은 애처로운 눈으로 그녀를 바라볼 뿐 꼼짝도 하지 못했다. 몇 번이나 도망가려는 듯 앞다리에 힘을 실었지만 번번이 그대로 주저앉았다. 주변을 인지하고 몸부림치기 시작하면 출혈은 더 심해질 터였다. 총이 있었다면, 고통 없이 보내줄 수 있을 텐데….
그래, 총.
이벨린은 황급히 제 허리춤을 더듬어 리볼버를 찾아냈다. 가까스로 가죽 홀스터를 젖히고 막 총의 잠금장치를 풀었을 때였다.
문득, 짐승 우는 소리가 났다.
사냥제 때 몬테페라트 숲에서 가장 많이 잡히는 것은 사슴이었다. 우아한 뿔과 거대한 몸체의 사슴…. 그리고 으레 피식자가 있는 곳에는 그를 사냥하는 포식자가 있기 마련이었다. 예민해진 그녀의 귓가에 나뭇가지가 우드득 꺾이는 소리가 들렸다.
무언가, 수풀을 헤치며 가깝게 다가오고 있었다.
이벨린은 양손으로 리볼버를 단단히 받쳐 든 채 바스락대기 시작한 수풀을 겨누었다. 천천히 경계하며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발목이 욱신거렸지만,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비탈 아래에 있던 말이 흥분하며 가냘픈 울음소리를 냈다. 공기 중에 떠도는 포식자의 냄새를 맡기라도 한 것처럼.
“…….”
그제야 실감이 났다. 숲속의 한복판에 혼자 떨어져 있다는 것이. 고작 총 한 자루와 다 죽어가는 말과 함께.
죽어서 발견되라는 파르디타의 말은 조금도 농담이 아니었다. 수풀이 흔들리는 소리가 점차 가까워지고 있었다. 끝까지 희망을 놓지 않고 기대해봤지만, 아무래도 사람은 아닌 것 같았다. 그림자가 낮았다.
그으어, 우어.
지척에서 그르렁거리는 소리가 들린 것도 같았다. 어쩌면 바람에 나뭇잎이 스치는 소리에 그저 과민하게 반응한 것인지도 몰랐다. 이벨린은 애써 긍정적으로 생각하려고 노력했다.
어쩌면 그녀가 사라진 것을 알고 비센테가 수색대를 편성했을지도 모른다고, 파르디타가 그녀를 쏘았던 아침의 산책로에서 그렇게 멀리 떨어지지 않았을지도 모른다고, 그러니 사냥터를 관리하는 관리인들이 위험한 짐승은 모두 정리해 두었을 거라고….
그러나 다음 순간, 그녀의 기대를 정면으로 배반하듯 검은 형체가 튀어나왔다. 어둠 속에서도 검은 눈동자가 선득하게 빛났다. 곰이다.
이지를 가지지 않는 짐승의 눈동자가 그녀를 응시했다. 그녀의 목을 물어뜯는 그 순간까지 동정심도, 안타까움도 느끼지 못할 미물의 눈.
“…….”
이벨린은 검지손가락을 방아쇠에 깊숙하게 걸치고 천천히 뒷걸음질을 쳤다.
다리가 부러진 말은 죽음을 앞두고 발악하는 것처럼 점점 더 소란스럽게 굴고 있었다.
맹수들은 인간의 코로는 맡을 수도 없는 희미한 냄새도 멀리서부터 민감하게 맡고 찾아온다. 이게 하나가 아닐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순간, 공포가 본능처럼 치솟았다.
“읏….”
창백하게 질린 턱이 덜덜 떨렸다. 그녀는 사격을 곧잘 했지만, 어디까지나 정지된 물체에 한해서였다. 생명, 그것도 살아 움직이는 곰을 맞추라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그나마 다행인 건 크기가 작아. 완전히 다 자란 곰은 아니야.’
곰은 그녀가 겨눈 총이 무엇인지 아는 것처럼 쉽사리 달려들지 않았다. 무엇으로 물든 건지 모를 붉은 혓바닥에서 침이 바닥으로 뚝, 뚝 떨어졌다.
이벨린은 총신을 조금 더 위협적으로 고쳐 잡았다.
리볼버에 장전된 총알은 단 한 발. 정말로 여기서 죽을지도 모르겠다고, 그렇게 생각한 순간 닥친 감정은 놀랍게도 미안함이었다.
‘이벨린’에게 몸을 돌려주지 못하게 된 것도, 시에나와의 약속을 지키지 못하게 된 것도, 그리고 비센테에게도….
그래, 비센테. 이벨린은 막혔던 숨을 간신히 토해 냈다. 그를 떠올리고 나서야, 가까스로 생각이 다음으로 넘어갔다. 생존에 대한 욕구가 본능처럼 치솟았다.
이렇게 죽을 수는 없었다. 그에게 전할 말은 하나도 하지 못한 채, 그의 찬란한 미래를 되찾아 주지도 못한 채, 그를 엘레나의 무덤에 영원히 처박아 둔 채로 이렇게 허무하게 죽어서는 안 된다고.
절박하게 주변을 둘러보는 눈에 사람 하나가 겨우 들어갈 법한 푹 패인 나무 그루터기가 보였다. 그녀가 서 있는 위치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이었다. 저 안까지만 가면 곰의 이빨과 발톱에서 어느 정도 시간을 벌 수 있을 것 같았다.
이 한 발이 빗나가더라도.
‘침착하게.’
그녀는 곰의 눈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로 천천히 옆걸음질을 쳤다. 그녀가 움직이자 곰이 그르렁대는 소리의 높낮이가 달라졌다. 당장이라도 달려들 듯 움찔거리다가도, 그녀가 총신을 재차 치켜들면 뒤로 물러섰다.
이제 그녀는 제 손이 덜덜 떨리는 것을 육안으로도 볼 수 있었다.
발을 더듬어 조심스럽게 한 걸음 더 물러난 찰나, 곰이 무언가를 감지한 듯 흥분했다. 팽팽하게 대치하던 상황이 그것으로 급변했다.
“……!”
곰이 둔중하게 흙을 박차며 그녀에게 달려들었다. 모든 것이 순간적으로 아주 느리게 흘러가는 것처럼 보였다. 쩍 벌려진 붉은 아가리, 치켜 올라간 발톱, 짐승의 불쾌한 숨결.
그녀는 반사적으로 곰을 향해 총을 쥔 팔을 곧게 뻗었다. 방아쇠를 당기는 손길은 놀랍게도 침착했다.
탕!
뒤이어 곰이 내지르는 끔찍한 비명소리가 들렸다. 빗나간 걸까? 푸르스름한 연기 때문에 앞이 잘 보이지 않았다. 이벨린은 아직도 열기가 느껴지는 리볼버를 꽉 쥔 채로 필사적으로 그루터기를 향해 달려갔다. 그때였다.
“악…!”
그녀의 허리를 등 뒤에서 잡아채듯 끌어안는 손이 있었다. 그리고 한 번 더 요란한 총성이 대기를 뒤흔들었다.
탕!
나뭇가지에 앉아 버티던 새들이 이번에는 일제히 어두운 하늘 위로 날아올랐다. 이벨린은 저를 붙잡은 게 팔과 따듯한 품이라는 것을 알고 그제야 안도했다. 숨이, 제대로 쉬어지지도 않았다.
“사, 살았….”
“잘했어.”
귓가에 닿는 목소리는 눈물겹게 익숙했다. 일순, 환청을 듣는 게 아닌가 생각이 들 정도로.
“비, 비센테?”
“제대로 불러야지, 이벨린.”
익숙한 얼굴에 팽팽하던 긴장이 서서히 무너졌다. 뱃속부터 안도감이 퍼졌다. 이벨린은 입술을 꽉 깨물었다가, 그의 옷깃을 구겨 잡은 채로 애써 웃음부터 뱉었다.
“와, 정말… 죽는, 줄 알았어요.”
그는 제 품 안에서 바르작거리는 이벨린을 고쳐 안았다. 그가 가볍게 그녀의 등을 도닥였다. 놀란 아이를 달래 주려는 것처럼.
이벨린은 그녀의 등에 닿은 그의 손끝이 조금 떨리고 있다는 것을 알아챘다.
“그래. 정말, 잘 버텼어.”
뿌연 연기가 가시고 드러난 광경은 생각보다도 더 참혹했다. 곰은 그녀의 서툰 솜씨에 앞다리 한쪽이 날아갔고, 그 직후 뒤이은 사격에 눈을 맞고 즉사한 것 같았다.
“여긴 어, 떻게 왔어요?”
턱이 덜덜 떨리고 있었기 때문에 발음은 계속 뭉그러진 채 나왔다. 이벨린은 비센테의 얼굴이 전에 없이 창백해 보인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가 마른 손으로 제 얼굴을 쓸어내리며 대답했다.
“수색대가 금방 편성되었어. 파르디타가 대단한 짓을 했더군. 토끼를 발견하고 총을 쏴 보려다가 오발 사고를 냈다고.”
뭘, 어쨌다고? 그녀는 황망하게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가 표정 없이 덧붙였다.
“날이 어두워져서 찾지 못할 줄 알았어. 네가 때마침 총을 쏴서 다행이었지.”
“순, 순히 수색대를 꾸리게 두던가요?”
“기사들은 이곳에서 정 반대쪽 계곡을 수색하고 있어. 파르디타가 네가 그쪽으로 갔다고 진술했거든.”
마치 저는 처음부터 파르디타의 검은 속내를 전부 꿰뚫었다는 투였다. 그 결과로 그가 지금 제 앞에 있으니 의심은 불필요했다. 나뭇가지 사이로 새어 들어온 달빛이 그들 위로 내렸다. 비센테는 그제야 그녀의 모습을 확인한 듯했다. 차분한 시선이 그녀를 위에서부터 아래로 훑었다.
엉망으로 솔기가 뜯어진 사냥용 드레스와 헝클어진 머리카락, 핏방울이 얼룩덜룩 묻은 얼굴…. 대단히 엉망인 꼴일 게 분명했다. 그는 말없이 그녀의 어깨에 제 망토를 벗어 둘러주었다.
“움직일 수 있겠어?”
“물론… 문제없어요.”
이벨린이 ‘문제없이’ 걸을 수 있던 것은 딱 다섯 걸음까지였다. 위태롭게 걷는 모습을 바라보던 비센테가 그녀의 허리를 안아 올렸다.
“미안하지만 지금 좀 급해서.”
“……!”
화들짝 놀라기엔 오늘 하루가 너무 길었고, 피곤했다. 이벨린은 그저 높아진 시야가 무섭다는 듯 그의 목을 양팔로 꽉 끌어안았다. 그녀를 고쳐 안는 비센테의 손은 이제는 조금도 떨리지 않았다.
급하다는 비센테의 말은 거짓이 아니었다. 그녀가 잡은 곰은 어린 축에 속하는 작은 개체였다. 갓 어미로부터 독립했거나, 혹은 독립 직전처럼 보이는.
이런 경우 어미가 근처에 있을지도 모르니 한시라도 빨리 이곳을 벗어나는 것이 상책이었다.
그는 성큼성큼 무릎까지 올라오는 수풀을 헤쳤다. 조금 떨어진 곳에 그가 타고 온 말이 보였다. 그는 이벨린을 말 옆에 내려놓았다.
“잠시만 여기에 있어.”
“…어디 가시게요?”
목소리에 스민 불안감에 불현듯 비센테가 그녀를 돌아보았다. 이벨린의 어깨를 다독일 듯 올라갔던 손이, 어디에도 닿지 않은 채 도로 내려가더니 그녀에게 말의 고삐를 건넸다.
“오래 걸리지 않을 거야.”
그는 조금 전까지 헤쳐 온 방향으로 다시 되짚어 돌아갔다. 그가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지자 온몸에 한기가 돌았다. 잊었던 공포가 되살아나는 것 같았다. 그녀는 금세 초조해졌다. 말이 콧잔등으로 그녀의 목덜미를 킁킁거리듯 훑는데도, 비센테가 사라진 수풀만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그때, 머지않아 총소리가 한 번 더 났다. 그와 동시에 기슭 아래에서 거슬리도록 신음하던 말의 소리도 사라졌다. 이벨린은 그가 다친 말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저대로 두었다면 말은 산 채로 곰에게 공격당하면서, 도망치지도 못했을 테니까.
이윽고 그가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이만 이동하도록 하지. 말은 탈 수 있겠어?”
그녀가 탔던 말보다 더 큼직한 흑마를 올려다본 순간, 덜컥 숨이 막혔다.
“당장은, 죄송, 죄송하지만… 무리예요. 조금만, 시간을 주시면 어떻게든 해볼 테니까….”
낙마를 해서요…. 변명처럼 덧붙인 말에 비센테가 그럴 만하다는 시선을 보냈다.
“네 의사는 존중하겠지만, 그 발로 성까지 걸어갔다간 후유증이 오래갈 텐데.”
이벨린은 고집스럽게 입을 다물었다. 혼자서 말 위에 올라탔다가, 또다시 그런 일을 겪는 것은 사양이었다. 비센테가 달래듯 말을 이었다.
“길이 제대로 나지도 않은 숲길이라 무작정 널 내가 안고 탈 수도 없어. 혼자도 위험한데 둘이 타면 더 그렇고. 그러니 네가 타고, 내가 걷는 게 최선인데.”
“…….”
“정 힘들면 근처에 하룻밤 머물 곳을 찾아보도록 하지. 해가 뜨면 두려움도 가실 테니까.”
“…….”
“곧 비도 올 것 같고.”
때마침 그녀의 콧잔등 위로 작은 빗방울이 톡 떨어졌다. 그걸 시작으로 가느다란 빗줄기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산에서 오는 비는 순식간에 굵어지기 마련이다. 그는 위태롭게 따라오는 이벨린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잡아.”
“괜찮아요. 혼자서 걸을 수 있어요.”
그는 기막힌 눈으로 여자를 바라보았다. 여자의 발목은 육안으로 보기에도 심각했다. 저렇게 부은 발목을 하고도, 괜찮다고.
낮이었다면 안은 채로 산에서 내려가면 그만이겠지만, 지금은 비에 젖어 사방이 미끄러웠다. 비구름에 가려 달빛조차 제대로 들지 않았다. 몇 걸음 앞에 나무뿌리가 있는지, 바위가 있는지 시야 확보조차 어려웠다. 이런 상황에서 두 손까지 묶이는 건 자살 행위나 다름없었다.
이벨린이 말을 탈 수 있었다면 좋았겠지. 그는 버릇처럼 최선을 생각했지만, 이내 그 생각을 완전히 지웠다.
멀쩡한 군인들도 낙마하고 나면 한동안 말만 봐도 벌벌 떨며 한동안 피해 다니기 일쑤였다. 심지어, 여자는 당장 말 때문에 죽을 고비를 넘겼다.
비센테는 젖어 들기 시작한 앞머리를 쓸어 넘겼다.
“두 번 말하게 하지 말고.”
“…….”
“이벨린.”
여자는 이상한 것에 가끔 고집을 부렸다. 이를테면, 누구에게 좀처럼 잘 의지하지 않는 엘레나가 부릴 법한 고집들. 엘레나가 기품처럼 두르고 다니던 서늘한 경계심, 침범해서는 안 되는 영역, 그것이 가끔은 저 말간 얼굴 위로 환영처럼 넘실거렸다.
여자는 조심스럽게 그의 손바닥 위에 제 손을 올렸다.
“…그럼 잠깐만 잡을게요.”
그는 조금 더 부축하듯 이벨린을 붙잡으려다가 그만두었다. 버틸 만하니 저런 고집도 부릴 수 있는 것일 테니까. 고작 몇 걸음이나 걸었다고 발을 헛디딜 뻔한 이벨린이 울상을 지으며 그의 손을 조금 더 꽉 잡았다.
“오늘 진짜, 운 너무 없어….”
비센테는 쓰게 웃었다. 우습게도 이 비가 그들에겐 최고의 행운이었다. 빗물이 그들의 흔적을 남김없이 지울 테니까. 곰이든, 다른 짐승이든 추적이 어렵도록 충분한 혼란을 심어 줄 수 있을 것이다.
야트막한 구릉처럼 느껴지는 산비탈을 완전히 내려왔을 무렵부터 빗방울이 조금씩 굵어지기 시작했다. 다행스럽게도 여자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리기 전에 적당한 동굴을 발견할 수 있었다. 내부는 깨끗했고, 조금 더 깊숙이 들어가자 불을 때거나 잠자리를 살폈던 흔적이 있었다. 사람들이 비를 피할 때 사용하는 공간 같았다.
“…….”
이벨린 역시 그 위화감을 느낀 듯했다. 비에 젖은 옷을 툭툭 털며 동굴 안으로 들어온 여자가, 컴컴한 내부를 한 바퀴 둘러보며 말했다.
“몬테페라트 숲은 모두 황실 소유가 아닌가요?”
“그렇지.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생계를 유지하기 어려운 사냥꾼들의 피난처일 테고.”
“세상에….”
황제의 사냥터에서는 허가 없이는 토끼 하나를 잡아도 군법으로 다스린다.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사는 사람들이나 이런 짓을 하겠지. 그러다, 아주 법을 어기고 산적으로 변질되기도 하고….
다행스럽게도 마지막으로 사용한 시기는 아주 오래된 것처럼 보였다.
비센테는 동굴 내부를 살핀 끝에, 비에 젖지 않은 장작더미를 발견했다. 낙엽과 칼로 깎아 낸 톱밥으로 불쏘시개를 만들고, 불을 피우자 이윽고 따듯한 온기가 동굴에 가득 찼다.
그의 망토를 두른 채로 추위에 덜덜 떨던 여자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쩌면 그렇게 잘하세요?”
“최전선에서는 고립되기 쉬우니까. 숲에서 야영할 일도 많았지.”
그는 마른 나뭇가지 몇 개를 모닥불에 던지며 대답했다. 여자는 순간적으로 그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가 뒤늦게 놀란 눈을 했다. 그가 군에서 오래 복무한 사실을 그제야 떠올린 눈치였다.
말문이 막힌 듯 입만 벙긋거리던 여자가 그의 시선을 피하며 덧붙였다.
“…몰랐어요.”
“…….”
“저, 다른 누구도 아닌 전하께서, 그렇게 위험한 위치에 계셨을 거라고는….”
그래. 당시 군에 복무하거나, 황가에 연이 있던 사람이 아니라면 누구도 몰랐을 것이다.
출정이라고 해도 적당히 자리보전이나 해대는 귀족의 장자들과 달리 그는 언제나 목숨이 위태로운 경계에 서 있었다. 황태자에게 또 다른 황자는 황위를 위협하는 불필요한 존재였고, 카스트로는 비센테가 가진 것은 남김없이 빼앗아야 만족하는 종자였다.
그것이 목숨이든, 혹은 목숨보다 귀한 것이든.
황제는 가끔은 그에게 무관심했고, 대체로 경계했다. 그 까닭으로 귀족의 차남만 되어도 가지 않는 최전방에서 그는 몇 년씩 굴러야 했다. 그가 세운 업적이라면 깎아내리기부터 하는 황제조차 차마 공개적으로는 건들 수도 없는 전공을 세우면서. 그렇게 화려하게 세운 전공으로 한낱 목숨이나 요란하게 부지하면서.
그는 달갑지 않은 주제로부터 화제를 돌렸다.
“발목은 어때?”
“조금 부어서 그렇지 정말 괜찮아요.”
“어디 좀 봐.”
여자는 주저하는 듯했지만, 이내 조심스럽게 망토와 드레스 자락을 걷었다. 그는 손을 뻗어 여자의 발목을 한 손으로 감싸 쥐었다.
“…읏.”
그 가벼운 접촉만으로도 여자는 잘게 신음했다. 핏줄이 터져 아파 보이긴 했어도, 뼈까지 다친 것 같지는 않았다. 그는 여자의 발목에서 손을 떼며 굽혔던 허리를 반듯하게 폈다.
“성으로 돌아가면 사혈부터 받아.”
“그럴, 게요.”
그는 짧은 침묵 끝에 입을 열었다.
“승마를 배운 적 없다고 했던 것 같은데 용케 여기까지 버텼더군.”
“…….”
“그것도 네 비밀인가?”
여자는 느릿하게 눈을 깜박이더니 이내 대답했다.
“마부들에게 말 위에서 자세를 잡는 법만 배웠어요. 정말… 겨우 버텼고요.”
“대단하군. 고작 그것만으로.”
여자는 곤란한 얼굴을 하면서도 완고하게 입을 다물었다. 이것에 대해 더 추궁해도 답이 돌아오지 않으리라는 것은 명확했다.
그는 모닥불에 마른 장작을 좀 더 던져 넣으며 물었다.
“앞으로는 어떻게 할 생각이지?”
“앞으로라고 하시면….”
“비탈리 영애가 네 목숨을 노렸잖아. 이번에는 실패했지만, 다음에도 그러리란 보장은 없고.”
그가 냉정하게 평하자, 여자의 회푸른 눈동자가 그를 곧게 직시했다.
“하지만… 여기서 물러날 수 있는 것도 아니잖아요.”
“물러나지 않으면.”
그는 무표정하게 되물었다.
“정말, 그 여자의 손에 죽기라도 하려고?”
“…….”
“이벨린. 너 오늘 정말 죽을 뻔했어.”
여자는 눈치가 빠르고 모든 상황을 대체로 정확하게 판단했다. 카스트로의 방으로 끌려들어 가려는 여자를 구했을 때, 그 위화감을 단번에 알아차렸던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