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2화 (52/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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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간밤에 떨어질 듯했던 열은 좀처럼 떨어지지 않았다. 고작해야 5분 남짓 바람 좀 쐰 게 뭐라고 문제가 된 모양이었다. 요 며칠 중에서는 가장 상태가 좋은 편이었지만, 몸은 여전히 무거웠고 머리는 지끈거렸다.

    오늘까지 그냥 드러누워 있을까….

    이벨린은 미련이 뚝뚝 떨어지는 눈으로 침대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흔들었다. 오늘까지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면, 그녀가 죽을병에 걸렸다는 소문이 온 사교계를 휩쓸지도 몰랐다.

    이벨린은 거울 속에 비친 제 모습을 무심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며칠 아팠다고 그새 살이 좀 내려서 전보다 더 유약한 인상이 되었다. 그나마 화장으로 생기 없는 얼굴을 가리긴 했지만, 전반적으로 부실한 티가 나는 것을 아예 감출 수는 없었다.

    “옷은 좀 어떠세요?”

    메리가 헐렁한 상체의 뒤편을 접어 핀으로 고정하며 물었다. 움직이기 편하도록 몸에 맞춰 재단된 사냥복이 그새 헐렁했다. 이벨린은 팔을 이리저리 움직이며 대답했다.

    “괜찮아. 움직이는 것도 편하고.”

    “체중이 줄어서 급히 수선해 보았는데, 만약 불편하시면 중간에라도 다시 손봐드릴게요.”

    귀부인들이라고 해도 사냥에 직접 참석하거나, 남자들과 나란히 말을 달리는 게 활발함의 척도처럼 여겨지는 작금의 세태였지만 언제든 예외는 있는 법이었다.

    앓아누웠던 것이 고작해야 며칠 전이니, 오늘 말을 타지 않는다고 해서 흠이 잡힐 이유는 없다는 뜻이다.

    그러니 적당히 눈치나 보다가 슬쩍 빠져나와도 괜찮겠고, 아니면 카우치에 조금쯤 늘어져 있어도 괜찮겠고….

    이벨린은 하녀들의 꼼꼼한 시중을 받아 머리카락을 땋아 올렸다. 그 위로 사냥용 모자가 고정되었다.

    “아가씨. 이건 어떻게 하시겠어요?”

    메리가 조심스럽게 길쭉한 상자를 꺼내 보였다. 조금 전 비센테의 시종이 전해 주고 간 총이었다.

    총신이 긴 리볼버였고, 허리에 찰 수 있게끔 하얀 가죽으로 만들어진 총집은 얼핏 보기엔 무기라기보다 장신구에 좀 더 가까웠다.

    이벨린은 거절하려다가 생각을 바꿔 고개를 끄덕였다.

    “애써 보내 주신 것이니…. 사냥제에 참석한 기분을 내서 나쁠 건 없겠지.”

    “옷과 잘 어울릴 거예요.”

    메리가 씩 웃으며 그녀의 허리춤에 총집과 시곗줄을 매달아 치장을 마무리했다.

    “루카스 경은?”

    “15분 전부터 대기하고 계셔요.”

    “지금 나간다고 말씀드리렴.”

    “네, 아가씨.”

    그녀의 말에 하녀 한 명이 얌전히 고개를 숙이고 방에서 물러났다. 새벽같이 도착한 시에나가 득달같이 붙여 준 하녀 세 명 중 한 명이었다. 본래도 하녀 한 명으로 어찌 그 많은 연회를 감당하겠냐며 더 데려가라고 우겼던 것을, 메리면 충분하다며 거절했었던 것이니 이제 와 당연한 듯 부리는 것은 조금 면구했다.

    그때는, 메리에 대한 의심으로 좀 더 가까이에 두고 면밀하게 살펴볼 요량으로 그랬지만….

    “레녹스 백작 영애.”

    문을 열고 몇 걸음 떼기도 전에 이름이 불렸다. 이벨린은 부드럽게 뒤로 돌다가 정면으로 받은 햇살에 눈매를 찡그렸다. 손차양을 만들 새도 없이 성큼 가까이 다가온 사내가 빛을 가렸다.

    이벨린은 조금 당황스럽게 사내의 준수한 얼굴을 마주했다.

    “발데페르 영식.”

    “다시 인사드리게 되어 기쁩니다. 부디 레오넬이라 불러 주십시오.”

    이벨린이 손을 내밀자 그가 부드럽게 붙잡아 입술을 가져다 댔다. 곧장 걱정스러운 눈으로 그녀를 살폈다.

    “그동안 아프셨다고 들었습니다. 지금은 좀 괜찮으십니까?”

    “많이 좋아졌어요. 그런데 영윤께서 여기는 어떻게?”

    “아, 근처에 볼일이 좀 있어서 지나던 길이었습니다.”

    “그렇군요.”

    웃으며 대답하기는 했지만, 이벨린은 그의 태도에서 미묘한 괴리감을 느꼈다.

    이 회랑 근처에는 기사들의 숙소밖에 없을 텐데.

    “사실, 근처에서 기다렸습니다.”

    그녀의 의문이 표정을 통해 그대로 전해졌는지 레오넬이 머쓱한 얼굴로 말했다. 뒷머리를 쓸어내리는 손이 미세하게 떨렸다.

    “기억하실지는 모르겠지만, 지난 연회 때 에스코트를 요청드렸었는데….”

    “아.”

    고작 그것 때문에 이 아침부터 그녀가 나오기만을 기다렸다고? 이벨린은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여전히 미심쩍은 눈으로 레오넬을 바라보았다. 그때의 말은 아무리 긍정적으로 들어도 ‘고려해 보겠다’에 그쳤던 것 같은데.

    행간에 그녀가 기억하지 못하는 맥락이라도 숨겨져 있었던 게 아니라면….

    “오시지 않아 걱정했습니다.”

    레오넬의 낯은 진지했다. 원래도 진중한 성품이니 걱정했다는 말도 거짓 한 점 없는 절절한 진심일 게 분명했다. 농담이라고는 모르는 올곧은 눈매가 대답을 기다리듯 그녀를 바라본다.

    만약 그녀가 정말로 남편감을 찾아 에스페다의 사교계에 온 거라면, 레오넬은 더할 나위 없이 좋을 선택지였다. 적당히 준수한 얼굴, 명예로운 가문, 먹고 살 걱정은 없는 재산과 사교계에서의 적당한 입지.

    그의 뒤에 파르디타가, 비탈리가 있다는 것을 몰랐다면, 그리고 그녀에게 다른 목표가 없었다면 그야말로 최선의 선택지였을 터다.

    ‘하지만 그에겐 조금의 이윤도 남지 않는 장사지.’

    몰랐다면 웃으며 넘어갈 수도 있었던 것을, 알기 때문에 수상쩍게 느껴졌다. 순수하게 느껴지면 느껴질수록 더더욱.

    관찰하는 시선과 말간 눈이 마주치자 레오넬이 낯을 붉히며 고개를 돌렸다. 누가 봐도 첫사랑에 빠진 풋내기의 모습이었다.

    ‘저번에 인사나 나눈 사이인데 그 사이에 이렇게 감정이 깊어졌다고?’

    처음 레오넬이 제게 접근했을 때는 진지하게 고민할 필요도 없었지만, 앞으로의 얼굴을 마주칠 때마다 내내 이런 식이면 말이 달라진다.

    레오넬이 집적거리는 것을 한두 명이라도 목격하면 당장 소문이 날 테고, 그런 소문들은 사람 두셋만 건너뛰어도 추문으로 변질되기 마련이었다. 비센테의 손을 잡고 기껏 연회장에 입장해서 레오넬에게 웃어주기만 해도 저녁 즈음엔 2황자를 두고도 별식을 즐긴다느니… 그런 소문이나 돌 게 뻔했다.

    그녀에게 레오넬이 아직도 코흘리개로 보이는 것과는 별개로.

    에스페다 사교계에서는 결혼을 진지하게 생각하는 관계에선 서로를 존중하는 모습을 보이는 것이 관례였다. 미혼의 몸으로 남자와 단둘이 있는 것도 가끔은 추문의 대상이 되었다.

    물론, 이벨린의 위치는 조금 특수하기는 했다. 죽을 때까지 갑갑하게 에스페다의 사교계에 갇혀 사는 대귀족의 딸들과는 달리, 외국에서 온 ‘상속녀’의 신분은 어느 날 훌쩍 이 나라를 떠날 수도 있다는 인상을 주기 마련이었다.

    조금 문란한 소문이 함께 돈다고 한들 어차피 떠날 사람이니 어쩌겠느냐는 식이다. 뒤에서는 제 여동생들에게 어울리지 말 것을 부단히 단속하면서도, 앞에서는 어떻게 한번 꼬여내고 싶어 안달 내면서.

    이벨린의 회청색 눈동자가 서늘하게 가라앉았다.

    ‘아마도 저들끼리 내기라도 했겠지. 그게 아니라, 정말 저게 진심이라고 해도 누구에게 충동질을 당했겠고.’

    결국 ‘그들’이 노린 것은 이런 것이다. 에스페다에서는 행실이 헤픈 여자의 말은 신뢰할 수 없다는 풍조가 여태 만연했고, 그건 다시 말하자면 어느 남자가 그녀를 어떻게 강제하든 ‘그럴 만했다’고 여겨질 수도 있는 것이다. 그녀의 평소 행실이 어땠느니, 남자를 밝혔느니 멋대로 가져다 붙이면서.

    비센테하고만 붙어먹는다고 생각했을 때는 앞으로 황자비가 될지도 모르는 어려운 사람이었겠지만, 여러 남자와 염문을 뿌리고 다닌다면야.

    이 와중에 레오넬이 지닌 얼마간의 진심이 저들에게 값싸게 이용당한 것만큼은 안타까웠지만, 그녀가 책임져 줄 수 있는 부분은 아니었다. 저들이 ‘이벨린 로즈 레녹스’의 빈약한 평판을 이렇게나 적극적으로 이용하려고 드는 와중에는.

    이벨린의 눈매가 새치름하게 올라갔다.

    “발데페르 영윤. 우리가 그날 다음을 약속했던가요?”

    “춤을 고려해 주신다고 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그것도 긍정적으로요.”

    “바꿔 말하면 제가 거절할 수도 있다는 뜻이고요.”

    “…그러실 겁니까?”

    레오넬의 준수한 얼굴이 흐려졌다. 이벨린은 눈매를 가늘게 좁히며 입매를 끌어 올렸다. 웃음인 척했지만 관찰하는 시선이 매서웠다.

    “제가 몸이 좋지 않아 아무래도 무도회에 참석하는 건 어려울 것 같아요.”

    “아…. 아무래도 그러실 거라고 생각은 했습니다.”

    “그런데, 제가 이곳에 머무는 것은 어떻게 아셨을까요? 영윤이 머무시는 곳과는 다소 거리가 있을 텐데.”

    “그건….”

    레오넬은 순식간에 목덜미까지 벌겋게 물들인 채로 더듬더듬 입을 열었다.

    “사실 비센테 전하께서 영애에게 침실을 양보했다는 소문을, 어떻게 건너서 듣게 되어서….”

    이벨린의 눈이 조금 더 가늘어지자, 지레 찔린 듯 줄줄이 뱉어 내는 정황은 기가 막혔다.

    “무, 물론 영애의 순수함을 의심하는 것은 아닙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저는 정말로 그런 생각은 조금도 하지 않았고….”

    뒤에서 제 순결을 의심해 대는 상황이라는 것은 아주 잘 알겠고.

    “이런 상황에 놓이셨다는 것 자체가 불쾌하실 순 있겠지만, 복도는 기사들이 돌아가며 지켰으니 추문은 걱정하실 필요가 없고….”

    기사들이 돌아가며 지키는 것조차 소문이 날 정도로 관심이 지대하며.

    “2황자 전하께서는 잠시 눈을 붙이실 때도 연회장 근처에 휴게실이나, 기사단의 숙소에서 쉬셨으니까요. 연회에도 빠짐없이 참석하셨고요.”

    이벨린은 헛웃음을 간신히 뱉었다. 이 촌극에서 가장 기막힌 점은 눈앞의 예비 스토커가 아닌 비센테였다. 사흘 밤낮으로 제대로 쉬지도 못했다고. 이제야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짐작이 갔다. 비센테가 어떻게 그녀의 명예를 지켜 냈는지도.

    물론, 그 모든 수고로움은, 그가 가진 상품의 가치를 보존하기 위한 것에 더 가깝겠지만.

    비센테가 그녀에게 진심인 것처럼 보이면 보일수록 카스트로는, 사교계는 더욱 안달이 날 테니까.

    “그런 것을 모두 알기는 하지만 영애가 걱정되는 마음에 급히….”

    “누구와 내기를 하셨나요?”

    이벨린은 물 흐르듯이 이어지던 레오넬의 말을 예고도 없이 툭 잘랐다. 기사들이 근처에 있고, 바로 뒤에는 루카스까지 있긴 했지만 이 남자와 이것 이상으로 얽히고 싶진 않았다.

    어릴 때 귀여웠다고 다 자라서까지 귀여우리라는 법은 없었다. 하물며 이렇게 징그럽게 접근하는 이상에는.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내기가 아니라면 영윤께서 제게 이러셔야 할 이유가 없는 것처럼 보여서요. 영윤에게는 저 말고도 더 좋은 선택지들이 있으실 테고, 발데페르 백작께선 외국인을 며느리로 들이는 것을 좋아하지도 않으실 테고요.”

    “…….”

    “제가 너무 앞서 짚었나요?”

    “그런, 그런 자들과 제 감정은 아무 상관 없습니다.”

    “그런 자들이 있기는 하단 소리군요.”

    “영애께서 믿지 못하는 것도 이해하지만 부디 제 마음만은 곡해하지 말아 주십시오.”

    진심을 모욕당한 사람처럼 레오넬의 낯이 파르르 떨렸다. 벌겋게 달아올랐던 얼굴은 이제 창백하게 질린 채였다. 이벨린이 몇 마디 덧붙이려는 찰나에, 낭랑한 목소리가 둘 사이를 가르고 들려왔다.

    “무슨 이야기를 그렇게 재밌게 나누고 있어요?”

    흘긋 뒤를 돌아보자 하녀 셋을 대동한 파르디타가 회랑의 나지막한 계단을 올라오고 있었다. 이벨린은 한숨처럼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파르디타.”

    “아팠다고요, 이벨린. 사냥제에는 참석할 수 있을지 궁금해서 직접 와 봤어요. 지금은 좀 괜찮아졌어요?”

    승마용 드레스를 갖춰 입은 파르디타가 자신만만한 미소를 지으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전혀 살갑지 않을 사이에, 살갑게도 안부까지 물어가면서.

    “소문대로 이 근처엔 볼 게 없긴 하네요.”

    레오넬은 가엾게도 굳어 버렸고, 이벨린은 파르디타가 등장한 그 순간부터 전투 의지를 상실한 채였다. 불청객을 맞닥트린 것 같은 침묵에도 파르디타는 아랑곳하지 않고 기쁘다는 듯 양 손뼉을 마주쳤다.

    “그나저나 마침 잘되었어요. 두 분, 저와 함께 가요. 말을 빌려 드릴게요.”

    “…파르디타. 사냥제에 직접 참석하려고요?”

    내내 입을 다물고 있던 레오넬이 그제야 한마디를 보탰다.

    “당연히 그래야죠. 이벨린, 당신도 참석할 거죠?”

    “저는 몸 상태가 좋지 않아서요. 오늘은 폐하의 개회 선언만 보고, 다른 귀부인들과 자리를 지킬 예정이었어요.”

    “그러면 안 되죠. 아파서 내내 누워만 있었잖아요. 에스페다의 사교계를 즐기지도 않고 브리타냐로 돌아갈 생각은 아니겠죠?”

    제 하녀가 들고 있던 양산을, 응당 그래야 한다는 듯 레오넬에게 넘긴 파르디타가 애교스럽게 이벨린의 팔짱을 붙잡아 꼈다.

    이벨린은 경계하는 눈으로 파르디타를 바라보았다. 아까부터 어쩐지 기분이 좋아 보이는 웃음이 묘하게 불길하게 느껴졌다.

    “브리타냐는 평야 지대가 많아서 귀족들은 걸음마를 떼면 바로 승마를 배운다던데.”

    “…….”

    “설마, 말을 못 다루는 것은 아닐 테고.”

    빠져나갈 구실은 많았다. 그녀의 신분은 처음부터 대단한 귀족이었던 게 아니라, 후계를 잃은 부유한 친척의 상속녀가 된 것일 뿐이었으니까. 배울 기회가 없었다던가, 혹은 말을 무서워한다거나, 낙마 경험이 있다거나….

    “제가 영애께 긴히 의논드릴 이야기가 있어서 그래요. 산책하는 정도로만 말을 타면 몸에 무리가 가지도 않을 거고요. 우리, 그때 그렇게 끝내기엔 좀 아쉬웠잖아요.”

    “…….”

    “영애에게 돌려줄 것도 있고요.”

    돌려줄 것. 아마도 장갑, 그리고 파르디타가 잠정적으로 내린 결론.

    “괜찮죠?”

    이벨린이 거절하리라고 확신하는 회색 눈동자가 잔인한 악의로 반짝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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