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1화 (51/151)

‘전하께서 저를 정말로 욕망할지도 모른다고 주제넘게 그런 생각이나 해요, 제가 지금.’

이벨린은 무릎 위에 올려 둔 양손을 꽉 쥐었다. 그는 그것에 대한 답을 하고 있었다.

“지난번에 네게 저지른 무례를 용서해 주길 바라. 그때 취했다고 변명할 생각은 없어. 어떻게든 변상하도록 하지. 돈이든, 다른 무엇이든. 네가 원하는 것으로.”

“…….”

“하지만 다음부터는 내가 정도를 지나칠 때가 있다면 너도 그냥 무시하도록 해. 가까이 다가오지 말고.”

“그날 일이 전부 기억이 나세요?”

“마차에 탄 뒤로는 드문드문. 전부는 아니고.”

모든 것을 기억하는 것은 아니라곤 하지만 이벨린은 그가 어떤 위화감을 느꼈다고 확신했다. 그게 아니라면 이렇게 다정하게 선을 그을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때 무슨 말을 들었든 잊어버려. 의미조차 없는 헛소리니까.”

이벨린은 찬웃음을 뱉었다. 간신히 삼키려던 목소리가 불쑥 튀어나왔다.

“언제부터 좋아하셨어요?”

“…뭐?”

“전하께서, 어떤 위험이든 감수할 정도로 좋아했던 사람이요.”

그는 당혹스러운 듯 미간을 찡그렸다.

“왜 갑자기 그걸 묻지?”

“보상한다고 하셨잖아요. 그걸 보상으로 받을게요.”

“…….”

“알아야 저도 제 감정을 추스를 수 있을 테니까.”

그는 한동안 말없이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고통인지, 혹은 다른 무슨 감정인지 모를 것으로 일그러졌던 얼굴이 거짓말처럼 차분해졌다. 그가 턱을 괴고 있던 손을 무릎 위로 내리며 말했다.

“설명하기 어려워. 복잡한 문제이기도 하고. 게다가 언제부터라니….”

“…….”

“내가 아는 건, 그리고 말해 줄 수 있는 건 하나야. 나는 그 여자를 매 순간, 모든 것에서 찾아.”

어린아이의 천진한 웃음에서, 울음에서, 해 지는 석양과 바람에 흩날리는 머리카락에서, 귀부인들의 부채와 손수건, 드레스 자락을 끄는 소리와 샴페인의 잔이 부딪히는 소리에서….

읊조리는 목소리가 젖어 들듯 낮아졌다.

“그리고 그 모든 순간은 뇌리에 박혀서, 이제는 어떤 비천하고 비참한 순간에조차 그 여자를 떠올리지.”

“…….”

“그래서 이벨린, 너를 볼 때면 가끔은 내가 미친 것처럼 느껴져.”

과거를 회상하며 반쯤 기울어졌던 눈매가 또렷하게 그녀를 응시했다. 어둠 속에서 빛나는 청보라색 눈동자는 짐승의 것만 같았다. 사냥하기 전, 목덜미에 이빨을 박아 넣기 직전의 맹수처럼 좁아 든 동공이 반들거렸다.

“너는 엘레나를 지나칠 정도로 닮았어.”

엘레나. 그가 멀쩡한 정신으로 제 앞에서 저 이름을 올린 것은, 단연코 이번이 처음이었다.

“단순히 얼굴뿐만 아니라, 에스페다어를 발음하는 방식이, 카스트로를 볼 때마다 얼어붙는 입술이, 눈썹을 찡그리는 습관이, 가장 화려한 공간에서도 관조하듯 내려다보는 눈이, 감정과 생각이 움직이는 방향이, 최악의 상황에서 차악을 선택하는 그 태도가.”

이벨린은 숨조차 제대로 쉴 수가 없었다. 그녀가 들은 모든 것은 엘레나를 향한 절절한 고백이면서, 풀리지 않는 의문이었다.

그가 어떻게 알까? 그녀가 기억하는 한, 비센테와는 대화조차 제대로 나눈 적이 없는데. 그가 대관절 ‘엘레나’의 말투나 습관을 어떻게 알고, 어떤 감정을 쓰고, 어떠한 선택을 하는지를 대체 어떻게 알고….

“내가 미쳐서 네게서 엘레나를 보는 건지, 아니면, 네가 정말….”

조각 같은 얼굴이 금방이라도 울 것처럼 일그러졌다. 그가 속삭였다.

“너는 내가 아직 늦지 않았다고 믿고 싶게 만들어.”

그 말에 모든 생각이 멈췄다.

너는 내가 아직 늦지 않았다고 믿고 싶게 만들어.

이벨린은 그제야 비센테가 내내 쓰고 있던 가면의 이면을 엿본 것만 같았다. 그 차갑다 못해 미약한 불티가 보였다. 이름을 붙이기에는 보잘것없고, 희미한 그것. 얼어붙은 동토에서 애써 움튼 새싹같이 연약한, 그래서 더 찬란한.

몇 번이고 죽여 없애도 징그럽게도 다시 자라나는 미련, 희망.

“너에 대해서 알면 알수록 헛된 기대나 품게 돼.”

정말 그 애가 살아 돌아온 건 아닐까, 하고. 덧붙이는 말의 끝이 자조적으로 뭉그러졌다.

“이런 착각은 서로에게 좋을 게 없지. 너에게도 나에게도. 여기서 더 착각하는 일은 사양하는 편이 좋고, 일어나서도 안 되고.”

그러니 너는 끝까지 행복하기를 바라. 언제까지고 행복했으면 좋겠고. 이 모든 것이 끝날 때, 신이 우리의 편이 아니더라도….

그가 두서없이 덧붙이는 말이 스산한 겨울바람처럼 귓가를 스쳐 지나갔다. 비센테의 말간 눈은 그녀를 바라보는 것 같기도, 동시에 아무것도 없는 허무를 들여다보는 것 같기도 했다.

문득, 그가 웃었다.

“너는 잘 살 거야.”

***

자고 일어나면 나아져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깨어 보니 온몸에 열이 올랐다. 이벨린은 뜨겁게 달아오른 숨을 몰아쉬며 지끈거리는 이마를 짚었다. 어쩐지 자꾸만 바람이 차고, 온몸이 으슬으슬하다 싶었다. 헤아려 보면, 브리타냐를 떠나온 이후로 제대로 쉰 적이 없었다.

그런 상태로 여태껏 버텼으니, 탈이 날 법도 했다. 지금까지 아프지 않고 버틴 게 차라리 기적이었다.

수도원에서 지낼 때는 돈이 없어서, 폰페라다 궁에서는 도무지 넘어가질 않아서, 여기서는 눈치나 보느라. 쉬지도 않고 입에는 제대로 들어가는 것도 없었으니, 앓아눕는 것은 예정된 수순이었다.

하루면 가뿐하게 털고 일어날 것 같았던 몸살이 벌써 사흘을 넘어가고 있었다. 생각보다도 오래 끌었지. 이벨린은 입 속으로 혀를 짧게 찼다. 음악회며 파티, 무도회에 연달아 불참할 수밖에 없어 어그러진 계획을 떠올리면 속이 잔뜩 쓰렸다.

기껏 카스트로의 시선이나 조금 더 붙잡아 둘 목적으로 여기까지 왔는데…. 카스트로가 제게 헛되이 시간을 쓰면 쓸수록 비센테는 그만큼 더 시간을 버는 셈이었고, 그렇게 해서 얻게 될 이익은 감히 헤아릴 수도 없는 크기로 돌아올 테니까.

그런데 이렇게 목전에서 하릴없이 주저앉아 있게 될 줄이야. 그것도 연약한 제 몸뚱이 때문에….

자조가 깊어지는 와중에도 비센테는 단 한 번도 찾아오지 않았다. 그녀의 가치는, ‘이벨린 로즈 레녹스’로서 사교계의 행사에서 화려하게 이목을 끌 때나 있다는 듯.

그건 어쩌면 비센테만의 선을 긋는 방식일 터였다. 너는 내게 어떤 염려도 얻어 내지 못한다고. 여태껏 내가 너를 신경 쓴 것은 그저 목적을 이루기 위한 수단을 잘 돌보는 것에 불과했다고.

‘…생각은 이제 그만두자.’

약해진 마음은 끝없는 비약을 이끌어 낸다. 그러지 않아도 열이 올랐던 머리가 이제는 팽팽 돌았다.

이벨린은 몇 술 뜨다 만 수저를 힘겹게 도로 내려놓았다. 곁에서 이제나저제나 기다리고 있던 메리가 다 식어 빠진 수프가 놓인 쟁반을 얼른 받아 들었다. 걱정스럽게 그녀의 이마를 짚는 손이 서늘했다.

“좀 더 드시질 않고.”

“그냥… 입이 좀 까끌하네.”

“그래도 약을 드시려면 좀 더 드셔야 할 텐데.”

“어제보다는 몸 상태가 괜찮아. 나 때문에, 네가 고생이라 그렇지….”

[이런 걸 어떻게 고생이라고 할 수 있겠어요.]

감정이 북받치는 듯 메리가 브리타냐어로 빠르게 읊조렸다. 온통 일그러진 얼굴이 앳되게만 보였다.

기실 메리의 과도한 감정은 이벨린에 대한 염려보다는 죄책감과 맞닿아 있었다. 며칠 전의 기억은 어렵지 않게 떠올랐다.

“…장갑이, 없어졌다고.”

“아무리 생각해 봐도 비탈리의 계집을 제외하면 가져갈 사람이 없어요. 죄송해요. 전부 다, 저 때문에….”

기억 속 목소리가 흐리게 헐떡였다.

“괜찮아. 어차피 그게 내 것이라는 증거가 있는 것도 아니니까. 누군가 가져와서 물어본다고 해도 빠져나갈 구석이 아예 없는 것도 아니고.”

“하지만….”

“그렇게 걱정되면 네 것이었다고 그렇게 말해도 괜찮겠고….”

“저야 당연히 괜찮죠. 그래도 아가씨에게 애틋한 물건이실 텐데.”

“잃어버린 건 신경 쓰지 않아도 돼. 하지만 다음부터는 이런 일이 있으면 부디 빨리 알려 주길 바라. 너 혼자 짊어지느라 얼마나 마음고생을 했겠어.”

감격과 죄책감에 젖어, 정말 죄송하다고 연신 읊조리던 며칠 전의 모습이 메리의 말간 얼굴 위로 덧씌워졌다. 그날부터 이벨린은 메리에 대한 의심의 수위를 낮췄다. 정말 배신자였다면, 굳이 그녀에게 불리한 정황을 알려 줄 필요는 없었을 테니까.

이벨린은 흐리게 웃었다. 내내 창백하던 얼굴에 그것으로 혈색이 조금 돌아왔다.

“정말 걱정하지 마.”

금세 초조해지는 것과는 별개로, 아파 드러누운 것이 종종 행운처럼 느껴지는 순간이 있었다. 그녀의 감정이 어떻든, 무슨 계약을 했든, 어디까지 복수를 각오했든… 지금 당장은 카스트로의 얼굴을 보지 않아 족하다는 감상이 슬쩍 치밀곤 했다.

그 얼굴은 때때로 그녀가 각오한 것보다도 더 혐오스러웠기 때문이다.

“그래도 처음보다는 열이 많이 내리셔서 다행이에요. 더 필요하신 건 없으세요?”

이벨린은 메리가 내미는 약을 순순히 다 마셨다. 다 비워진 유리잔을 다시금 쟁반 위로 되돌려 주며 물었다.

“시에나께서는? 언제쯤 도착하신다고 했지?”

“내일 오전 중으로는 도착하신다고 하셨어요.”

시에나가 굳이 이번 건국제에 헌관을 자처하고 나선 것은 오로지 이벨린 때문이었다. 건국제의 헌관을 수행하는 시녀들에게는 ‘엘 레테아’에 머물 자격이 주어지니까.

거기서 엔리케가 부탁한 대로 서부의 증표를 손에 넣고 나면, 조금 더 구체적인 계획을 확인할 수 있을 터였다.

그녀는 한때나마 카스트로의 약혼녀였다. 그녀는 카스트로가 쥐고 있는 패의 대부분을 알았고, 그가 은밀하게 쓰는 기사단의 이름은 가명도 외우고 있었다.

어떤 귀족들이 겉으로는 반목하면서 뒤에서는 서로 협력하는지, 누가 여기저기 박쥐처럼 붙어 있는지….

2년 전의 정보이기는 하지만 카스트로를 제외하면 그녀만큼 알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그러니 대강이라도 정보가 주어진다면 그들이 놓치고 있는 맹점을 짚어 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건 결국 비센테의 계획이 조금 더 성공에 가까워지도록 만들 터였다.

‘이벨린’에겐 어떤 사소한 의혹도 쏠리지 않으면서, 카스트로와 가깝게 지내며 얻은 정보인 척 흘리기만 해도….

“일어나시게요?”

그녀가 침대에서 몸을 일으키자마자 서둘러 다가온 메리가 팔을 부액했다. 메리의 팔을 붙잡는 제 손은 며칠 새 훅 야윈 것이 육안으로도 보였다.

“머리가 아파. 누워 있기만 해도 계속 다른 생각이 들어서… 바람이나 조금 쐬려고.”

“창문을 열어 드릴까요?”

“아니. 어차피 다들 연회를 즐기느라 밖으로는 나오지도 않을 테니까. 정원에 잠시 다녀올게.”

“…이대로요?”

이벨린은 제 차림을 내려다보았다. 단출한 흰 네글리제는 도톰한 천이었지만, 야외복으로는 조금 부적절했다. 하지만 고작해야 10분 남짓할 외출에 옷까지 갈아입는 수선을 떨고 싶지는 않았다.

“숄을 걸치면 어차피 뭘 입었는지 알아보지도 못할 텐데.”

메리는 못내 걱정스러운 기색이었지만, 제게는 주인을 말릴 별다른 명분이 없다는 것을 깨닫고 큼직한 숄을 가져왔다. 연회장의 근처 정원이라면 남몰래 밀회를 즐기는 연인들이 그득하겠지만, 그녀가 여태 머무르는 비센테의 방은 연회장에서 조금 멀리 떨어져 있었다.

시종장의 말마따나, 귀족들보다는 기사들의 숙소와 연무장에 보다 더 가까운 위치였다.

첫날 이후로 꼬박 앓아누운 탓에, 숙소를 결국 옮기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벨린은 제게 방을 내준 비센테가 어디에 머무르고 있는지 잠시 고민했다. 어차피 그녀가 상관할 바는 아니었다.

서로 착각하지 말고 본인의 위치에서 충실하자는 말까지 들은 이상에는.

물론 비센테의 권유는 조금 더 부드러웠지만, 이벨린은 종종 더 악의적으로 곡해한 해석을 자학적으로 떠올렸다.

어쨌든 지금은 그것보다 더 신경 써야 할 것이 많았다. 가령, 카스트로가 그녀를 여태 한 번도 찾지 않았다는 점이라던가. 숙소를 강제할 정도로 그녀에게 집착한 것은 까맣게 잊기라도 한 것처럼 말이다.

훔쳐 간 장갑에서 수상한 점을 느낀 파르디타가 무언가 언질이라도 주었을까?

그거라면 더더욱 수상했다. 그녀가 아는 카스트로는 이벨린의 신분이 낮으면 낮다고 더 좋아할 인물이었다. 멋대로 강제해도 되는 뒷배 없는 계집이니 새삼 주변을 신경 쓸 필요조차 없을 테고.

‘모르겠다. 생각은, 정말, 이제 그만….’

이벨린은 큼직한 숄을 어깨에 둘둘 걸친 채 방문을 열었다. 서늘한 바람이 옷 사이를 파고들자 순간적인 현기증이 일었다. 눈앞이 까맣게 암전했다. 그녀가 휘청거리며 문고리를 놓치려는 찰나.

누군가의 억센 손이 그녀의 팔목을 붙잡았다.

이벨린은 황망하게 붙잡힌 팔을 먼저 보았다가, 시선을 위로 들어 올렸다. 순간적으로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던 게 민망할 정도로 익숙한 낯이었다.

“…루카스?”

늑대를 닮은 회색 눈동자가 그녀를 위에서부터 아래로 훑었다. 여윈 팔뚝이나 가냘픈 어깨, 가볍고 단출한 네글리제 위로 그새 흐트러진 숄 따위를.

그녀의 기억보다 조금 더 다정한 어조의 물음이 대답 대신 돌아왔다.

“몸은 좀 괜찮으십니까?”

“왜 여기에 있어요? 아니, 잠시만….”

이벨린은 말문이 막힌 채 루카스의 뒤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복도를 따라 경계를 선 군인들이 보였다. 숫자가 대단하지는 않아도, 누군가가 드나드는 것을 막을 수 있을 정도는 되어 보였다.

대체, 이게 다 무슨….

“저게 다 뭐죠?”

그녀가 창백하게 질린 채로 숨을 몰아쉬자 루카스가 뒤를 돌아보곤 서둘러 입을 열었다.

“아…. 다른 뜻이 있는 게 아니라, 아가씨께서 불안해하실까 봐 한 조치입니다.”

좁은 방, 문 앞을 지키는 기사들, 축축하고 서늘한 공기.

가끔은 그저 비슷한 상황에 놓이기만 해도 불안이 치밀곤 했다. 새파랗게 질린 이벨린의 얼굴에 루카스가 도리어 더 당황하며 양손을 들어 올렸다.

“어디 불편하십니까?”

그 바람에 그가 부축하듯 잡고 있던 이벨린의 팔이 힘없이 낙하했다. 그녀는 힘없이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요. 조금 놀라긴 했지만요.”

“대위님께서 명하셨습니다. 미리 아가씨의 의사를 묻지 못한 점은 죄송합니다. 원치 않으시면 다시 조치하겠습니다.”

굳이 비센테를 대위님이라고 부르는 것을 보면, 황자의 명령이 아니라 군의 상관으로서 지시한 일일 터였다.

이벨린은 부릅뜬 눈으로 복도를 에워싼 스무 명 남짓한 군인들을 둘러보았다. 전시 상황이 아닌 이상 군의 간부로서 동원할 수 있는 최대한의 숫자였다. 시모라의 그 대단한 사병들을 제외한다면….

“이런 방식이 부담스러우시다면 인원을 줄이거나, 시간을 두고 순찰을 강화하는 방식으로 바꾸겠습니다.”

“…사실, 아주 많이 부담스럽긴 해요. 너무 유난스러워 보여요.”

“아예 거두는 것은 안전을 위해 어렵다는 것은 고려해 주십시오.”

지레 놀랐던 마음이 빠르게 가라앉았다. 당황스럽긴 했지만, 냉정히 생각해 보면 필요한 절차가 맞기는 했다.

카스트로의 방으로 곧장 끌려들어 갈 뻔한 것이 고작 사흘 전 일이었으니까.

이벨린은 루카스의 뒤편의 기사들을 한 번 더 바라보곤 슬쩍 투덜거렸다.

“그래도 저 숫자는 너무 많아요. 이렇게 해도 황태자 전하께서 작정하시면 막을 수도 없을 텐데.”

애써 찾아낸 핑계에, 네 마음을 다 안다는 듯 흐릿한 미소가 되돌아왔다.

“그래도 저희가 잠시나마 붙잡아 둘 수 있겠죠.”

“그러니까, 정말 아무 소용도 없는….”

“그사이에 비센테 전하께서 오실 테고요.”

루카스의 얼굴엔 굳건한 신뢰가 묻어났다. 마치 그가 오면 무엇이든 해결할 수 있으리란 것처럼.

“…….”

고요했던 맥박이 조금 빠르게 뛰었다. 그제야 이 모든 유난이 비센테가 제 안위를 염려했다는 걱정처럼 느껴졌다. 감시나 감금이 아니라….

이벨린은 붉어진 뺨을 감추려 숄을 추켜올렸다.

“그나저나 단테 경은 어쩌고 당신이 왔어요?”

“그는 연회장에서 전하를 보필하고 있습니다.”

연회에서의 보필이라면 단테보다야 루카스가 도맡아서 하던 일이었다. 단테가 답답한 것이라면 무엇이든 질색하는 것과 달리, 루카스는 무엇이든 적당히 무던하게 견뎌 내는 그 성미 덕이었다.

“의외네요. 귀족 나부랭이들이 하하 호호 하는 연회장은 당장 싫다고 뛰쳐나올 줄 알았는데.”

“단테 경이 조금 그런 경향이 있긴 합니다만….”

딱히 옹호하고 싶지 않은 기색으로 루카스는 그저 흐리게 웃었다. 문득, 무언가가 생각난 듯 입가를 매만지던 그가 살짝 고개를 기울였다.

“황태자 전하께서 아가씨께 무례를 저지르려고 했다는 전말은 대강 들었습니다. 지금부터는 조금 더 주의해서 살피겠습니다.”

그녀는 잠시 멈칫했다.

“경이 왜요?”

“사냥제 기간 동안 황자 전하께서 아가씨의 호위로 저를 임명하셨습니다.”

“아, 사냥제 기간 동안만.”

이벨린은 흐리게 웃다가, 의아한 점을 발견하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하지만… 경은 군 소속이잖아요? 황국군이 개인의 사사로운 호위를 맡아도 돼요?”

“기사 작위가 있어 영애에게 개인적인 충성을 바치는 것으로 가능합니다.”

“와. 기사 작위도 있어요?”

이벨린은 신기한 눈으로 루카스를 훑어보았다. 하기야 귀족의 사생아라고 했던가. 그의 아버지가 여타의 귀족과 달리, 제 사생아를 살뜰히 보살피는 사람이었다면 기사의 직함을 달아 주는 것이 영 불가능한 일도 아니었다.

저 꼬장꼬장해 보이는 성품으로, 그것을 곧이곧대로 받았다는 것이 신기할 따름이었지….

“왜 그렇게 보십니까?”

왜 기사 작위를 가지고도 고작해야 중위의 직함에 머무르냐고 물으려다가, 그의 첫 상관이 비센테라는 사실을 상기했다. 승진이라도 하면 다른 곳으로 발령 날 테니까. 이 충직한 남자에게는 그런 것이 전부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어렴풋이 했다.

“아… 그러고 보니, 제가 앞을 막고 있었군요. 밖으로 나가시려던 것 아닙니까?”

빤히 바라보는 이벨린의 시선이 질책이라고 느낀 것처럼 그녀의 앞에서 비켜섰다. 바닥에 끌리기 시작한 숄을 허리를 굽혀 주워 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조금, 정원이나 산책하려고 했어요. 사람이 이렇게 많아서… 이 차림으로는 안 되겠지만.”

“아….”

“내일까진 얌전히 방 안에나 머물 테니, 애먼 부하들 고생시키지 말고 돌려보내요.”

“어떻게, 아니…. 그러겠습니다.”

“…정말요?”

“물론입니다. 새벽까지만 지켜보다 별일 없으면 들어가겠습니다.”

이벨린은 미심쩍은 얼굴로 루카스를 바라보았다. 대답은 순순했지만, 네가 뭐라고 하든 비센테의 명령을 우선하겠다는 심산은 그대로 읽혔다. 여기서 말싸움을 해 봐야 서로 꺾이지 않는 대단한 고집을 아니까….

“그래요, 그럼.”

이벨린은 루카스를 가늘게 뜬 눈으로 바라보고는 문을 닫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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