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없어.’
그녀는 서둘러 가죽 가방을 뒤집어엎었다. 허름한 물건들이 대리석 바닥으로 와르르 쏟아졌다. 동전 지갑, 낡은 양피지, 손수건, 손때 묻은 기도서…. 하나같이 낡은 물건들이었지만, 평소엔 잘 건드리지도 못했던 물건이었다.
‘대체 어디 간 거야?’
수선하기 위해 꺼내 두었던 게 실책이었다. 너절하게 닳다 못해 찢어지기 직전이어서, 가죽을 덧대 수선하면 좋을 것 같아 무심코 테이블 위에 두었었는데….
“메리! 아직이니? 아가씨께서 기다리고 있단다.”
“자, 잠시만요, 하녀장님!”
그녀는 울 것 같은 얼굴로 테이블과 바닥, 침대 아래까지 샅샅이 뒤졌다. 조금 더 조심히 다뤘어야만 했다는 자책이 심장을 짓눌렀다. 하지만 여기서 어떻게 더 조심할 수가 있었단 말인가?
이벨린 아가씨의 내실은 온전히 그녀의 소관이었고 드나드는 사람은 극히 한정되어 있었다. 조금 전 되바라지게 행동하던 비탈리의 계집을 제외하면…. 초조하게 서랍을 뒤적거리던 손이 뚝 멈췄다.
과거부터 현재까지 되짚느라 흐려졌던 갈색 눈동자가 명료하게 빛났다.
그래, 그 계집이었다.
***
테네리페 성까지 가는 길은 지루했다.
물론 외부적인 요인 탓은 아니었다. 수도로부터 이어지는 가도는 잘 정돈되어 있었고, 때때로 마차에서 내려서 챙기는 끼니는 소박하게 입맛을 돋웠다. 늦여름으로 접어드는 계절, 가도의 양옆으로 펼쳐진 녹음조차 완벽했다.
문제는 이벨린이 이미 이 길에서 어떤 새로움도 느낄 수 없다는 점이었다.
황족들은 서임식에 참여하는 것이 태어난 그 순간부터 의무였고, 황태자와 약혼한 열 살 남짓부터는 ‘엘레나 데 카스타야’의 의무이기도 했다. 그야말로 매년 한 차례씩 뻔질나게 드나들며 지겹게 보던 풍경들.
그녀가 죽고 없었던 2년의 세월은 이런 게 당연하리만치 익숙했던 십수 년을 가리기엔 턱없이 짧았다.
그리고 때때로 지나친 익숙함은 지겨움을 동반하기 마련이었다.
테네리페 성의 인근 마을을 지날 때 마차의 바퀴가 빠지는 사고가 한 차례 났었기 때문에, 그녀가 성에 도착했을 때는 대부분의 귀족들이 도착한 뒤였다. 이벨린은 지친 얼굴로 가장 마차에서 내려섰다.
신이 거하는 성전보다 지붕이 높아서도, 화려해서도 안 된다는 율법에 맞춰 지어진 테네리페의 성은 황족의 거처라기보다는 신전에 더 가까웠다.
돌로 된 벽과 바닥은 불편했고, 고전적인 아치들이 죽 늘어선 회랑은 지나치게 장엄해 보였다.
“어서 오십시오.”
먼저 온 귀족들을 안내하느라 바쁜 와중에도 용케 그녀를 알아본 시종장이 가까이 다가와 허리를 굽혔다.
“처음 모시는 분이로군요. 혹시, 초대장을 가지고 오셨습니까?”
“여기….”
황태자의 시종이 통보하듯 던져두고 간 초대장을 보여 주자마자, 내내 사무적이던 시종장의 표정이 달라졌다.
“아, 레녹스 백작 영애시군요. 머무실 곳으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하인에게 맡기는 게 아니라, 당신이 직접 말인가요?”
“예. 이쪽으로 오십시오.”
벌써 몇 대째 대를 이어 테네리페 성을 관리해 온 시종장의 얼굴은 그녀에겐 전혀 낯선 것이 아니었지만, ‘이벨린’에게는 낯설어야만 하는 얼굴이었다. 그 표정이 전에 본 바 없이 비굴하다는 점이 어쩐지 마음에 거슬렸다.
이벨린은 시종장의 뒤를 따라 긴 회랑을 걷다가, 문득 위화감을 느끼고 걸음을 멈췄다. 풍경이 지나치게 익숙했다. 그리고 익숙하다는 것은 지금의 그녀에겐 대체로 불길한 징조였다.
“시종장. 여기는….”
더 참지 못하고 입을 떼자, 시종장이 그녀를 흘끔 돌아보며 웃었다.
“아름다운 곳이지요?”
태연하게도 그렇게 읊어대는 시종장의 태도는 뻔뻔했다. 이벨린은 시종장이 멈춰 선 문을 한 번, 복도를 한 번, 그리고 바로 곁에 놓인 거대한 문을 한 번 바라보았다. 날개 달린 사자와 검. 황족들에게만 허락된 황가의 문양이 근사하게 양각된 목문. 시종장이 멈춰 선 것은 바로 그 곁의 방이었다.
이벨린은 기막힌 웃음을 기막히지 않은 척 터트렸다.
‘그러니까 지금 내게 황태자의 곁방을 내주겠다고.’
일반적으로 황태자의 곁방은 황태자비나 그의 애첩들이 사용하는 공간이었다. 그것도 육체적인 관계가 허락된…. 굳이 이곳으로 안내한다는 것은, 그리고 그녀가 이 공간에 머문다는 것은 기실 하나만을 의미했다.
‘황태자의 공개적인 정부.’
과거의 ‘엘레나’조차 아직 결혼을 올리지 않았다는 핑계로 끝끝내 사용하지 않았던 것을, 태연자약하게도 내미는 의도는 빤했다. 그녀가 여기서 무슨 짓을 당하더라도 브리타냐의 국왕은 항의하지 않을 테니까.
브리타냐의 귀족이라는 지위는 에스페다에선 허울이나 다름없었다. 브리타냐의 국왕은 타국에서 명예를 상실한 귀족을 지키느라 카스트로와의 불편을 감수하느니, 이벨린을 산 채로 황태자의 아가리에 쑤셔 넣을 인물이었다.
설령 그녀가 브리타냐 왕의 숨겨진 딸이라고 해도 마찬가지였다. 고작해야 여자의 명예 하나로, 에스페다와 전면전을 감수할 만한 가치는 없을 테니까.
그러니 이렇게도 무례한 짓을, 무례하지 않은 척 저지를 수도 있는 것이다. 외국인으로 알려져 있는 ‘이벨린’은 한밤중 황태자가 제 방에 쳐들어올 때까지 이 상황이 왜 부자연스러운지조차 인지하지 못할 테니까.
“…혹시, 마음에 걸리는 부분이라도 있으십니까?”
시종장이 눈치 빠르게 물어왔다. 이벨린은 어떤 위화감도 느끼지 못한 것처럼 환하게 웃었다.
“말씀대로 정말 아름답네요.”
“아! 그렇죠? 내부는 더욱 근사하게 꾸며 두었습니다. 영애께서도 분명 마음에 드실….”
“그런데 비센테 전하의 숙소는 어디쯤일까요?”
매끄럽게 이어지던 시종장의 말이 툭 끊어졌다.
“2황자 전하… 말씀이신가요?”
“네. 그분께서 이번 연회에서 제 에스코트를 맡아주시기로 하여서요.”
“황자 전하께서 머무는 곳은 이곳에서 조금 멉니다. 아무래도 군인이시고, 혈기가 왕성하실 테니 검술 연습을 하시기 편하도록 근처에….”
“그럼 이 방은 누가 사용하는 건가요? 제가 혼자서 다 쓴다고 하기엔 너무 넓어 보이는걸요.”
시종장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여자는 방을 들여다보기는커녕 문간에 서지도 않은 채였다. 그런데도 훤히 들여다보기라도 한 것처럼 질문이 날아들었다. 시종장은 침묵이 너무 길어지기 전에 대답했다.
“그 옆은… 황태자 전하께서 사용하실 겁니다.”
“황태자 전하께서요? 아까는 군인들이 혈기왕성하다고 하시며 달리 떼어 두신다고 하시지 않으셨던가요?”
“아! 그건 맞지만, 황태자 전하께서는 황자 전하와 달리….”
“황태자 전하께서는 군인도 아니고, 혈기가 왕성하시지도 않다는 소리인가요?”
“아닙니다, 그런 뜻이 아니라….”
시종장은 식은땀을 흘리며 부정했다. 순진하게 생겨 먹어서는 말 한마디마다 비약이 엄청났다.
분명 미리 알아본 바에 의하면 순종적이고, 상냥하다고 들었는데. 좀처럼 굽히지 않으려 드는 여자가 당혹스러웠다. 시종장은 능숙하게 당황을 감췄다.
“그러니까… 황태자 전하께서 그만큼 아가씨를 귀하게 여기고 계신단 의미입니다.”
일반적인 귀족 아가씨라면 이런 말에 들뜨고 행복해하기 마련이었다. 게다가 여자의 나이는 이제 스물둘 남짓. 헛꿈을 꾸기에도 좋을 나이였다. 심지어 여자는 황태자가 시종장에게 특별히 지시를 내리게 할 만큼 예뻤다.
저런 얼굴을 달고 허영심이 없을 수는 없는 것이다.
시종장은 무심코 편견을 드러내며 활짝 웃었다.
“영애께서 조금 더 좋은 숙소를 배정받으실 수 있도록 황태자 전하께서 제게 미리 언질해 두셨습니다. 그러니 부담가지실 필요는 전혀 없으시고….”
“그건 감사하지만 저는 가급적이면 비센테 전하의 근처에 머물고 싶어요.”
이벨린은 길어지기 시작한 시종장의 말을 툭 끊었다. 시종장의 늙은 얼굴에 눈에 띄게 곤란한 기색이 어렸다.
“하지만 그건… 곤란합니다.”
“왜죠?”
“이미 다른 방들은 다 주인이 있고, 영애께서 머무실 만한 방이 아니라서….”
이벨린은 눈매를 가늘게 좁혔다. 시종장은 땀을 뻘뻘 흘리면서도 좀처럼 물러나지 않았다. 곁에 선 메리가 도리어 불안한 듯, 복도를 연신 흘긋거리는 게 곁눈으로도 보였다. 이벨린은 덩달아 초조해졌다.
‘만약 이대로 카스트로가 들이닥치기라도 한다면.’
변변한 저항도 못 한 채 방 안으로 끌려 들어갈 게 분명했다. 눈앞의 이 시종장의 묵인 아래, 어쩌면 바깥에서부터 문이 잠겨질지도 모르지.
처음부터 카스트로는 이럴 속셈으로 그녀를 이곳까지 불러들인 것일 테니까….
애초에 초청을 거절할 수 없게끔 만들려고 수도의 모든 귀족들까지 한 번에 초대한 작자였다. 그녀가 아무리 경계하고, 어떻게 조심하든 한 번은 닥쳤을 일이었다.
어쨌든 당장 이 자리만 적당히 피하면 될 일이었다. 시에나는 늦어도 사냥제 전날에는 도착할 테고, 그러면 카스트로도 더는 같잖은 수작을 부리지 못할 것이다.
이벨린은 복잡한 생각을 겉으로는 드러내지 않은 채 가볍게 미소지었다.
“저는 작은 방도 괜찮아요.”
“그러시다고 해도… 당장은 일손이 부족해서 말입니다. 오늘만이라도 이곳에 머무시면, 내일 즉시 다른 곳을 치워드리겠습니다.”
“…….”
죽어도 이대로 보낼 수는 없다는 투철한 의지가 그대로 느껴졌다. 이벨린은 입술을 짓씹었다. 그녀가 무슨 말로 거절한다고 해도 시종장은 물러날 기색이 아니었다.
어떻게 해야 한담, 어떻게….
“이벨린.”
그때, 등 뒤에서 구원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전하.”
조금 높아진 목소리가 회랑의 둥근 천장을 울렸다. 그 소리가 메아리처럼 다시 돌아오고 나서야 이벨린은 제가 지나치게 반색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비센테는 조금 놀란 것처럼 보였다. 둥글게 커졌던 눈매가 이내 매끄럽게 접혔다. 그가 가까이 다가서며 웃음기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이렇게까지 반겨 주리라곤 예상하지 못했는데.”
“…저를 혼자 두고 떠나셨잖아요.”
추궁은 거의 의식하지도 못하는 새에 튀어나왔다. 그가 마차에서 혼자 사라진 게 며칠 전이 아니라, 바로 어젯밤의 일이라도 되는 것처럼. 물론 그 말을 내뱉자마자 곧바로 후회했다. 그날 있었던 일을 혼자서 내내 곱씹은 것처럼 보일 게 분명했다.
“이벨린.”
나직한 저음이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반사적으로 내민 손등을 비센테가 가볍게 잡았다. 우아하게 허리를 굽히고 손등에 입술을 가져다 댔다. 비스듬히 올려다보는 청보라색 눈동자에 일순 숨이 막혔다.
“아무래도 내 아가씨가 화가 난 것 같은데.”
비센테가 그녀의 손가락을 얽듯이 잡으며 보기 좋은 입술을 매끄럽게 올렸다. 이벨린은 당혹스럽게 더듬거렸다.
“그건, 딱히, 그렇지는….”
“변명의 기회를 달라는 것은 너무 염치없는 짓인가?”
그가 그녀의 손가락 마디를 굳은살이 배긴 엄지손가락으로 지그시 매만졌다. 하필이면 오늘따라 얇은 레이스 장갑인 게 문제였다. 살갗이 눌렸고, 손가락이 벌어지며 가벼운 압박감이 느껴졌다. 이벨린은 숨을 들이켰다. 이건, 명백히 성적인 암시였다.
“2황자 전하.”
초조해진 시종장의 목소리가 불청객처럼 끼어들었다. 이벨린은 그제야 가까스로 그들이 단둘만 남겨진 게 아니라는 것을 상기했다.
아, 그래. 시종장의 앞. 눈치채자 곧장 쓴웃음이 났다. 비센테가 그녀를 이런 식으로 대하는 건 사람들의 시선이 있을 때뿐이었다.
의식해야 할 눈이 없는 곳에선 그가 사소한 접촉도 삼간다는 것을, 어떻게 아주 잠깐이나마 잊을 수 있었을까.
비센테는 그제야 시종장이 거기 있다는 사실을 막 알아차린 사람처럼 눈썹을 치켜올렸다.
“아, 시종장. 레녹스 백작 영애는 내 모후의 손님이니 우선 내 거처로 모시도록 하지.”
“황태후 전하의 손님이기 이전에, 테네리페 성에 영애를 직접 초청한 것은 황태자 전하십니다.”
“남은 방이 없다고 들은 것 같은데.”
“그러니 더더욱 예법에 맞지 않지요. 황자 전하의 방에서 단둘이 머물렀다는 소문이 돌기라도 하면 숙녀의 명예는 땅에 떨어질 겁니다.”
“그것도 그렇겠군.”
비센테가 대수롭지 않은 기색으로 긍정했다. 시종장이 반색하며 말을 이었다.
“예. 그러니 부디, 귀부인의 명예를 고려하시어….”
“그런데 황태자비 전하께서 쓰셔야 할 방을 레녹스 백작 영애에게 드리는 것이, 숙녀의 명예를 고려한 결정이던가?”
“그건….”
“더 명확한 이유가 없다면 영애는 내가 모시도록 하지.”
비센테는 시종장의 말을 더 들을 가치도 없다는 듯 잘라 냈다. 그가 이벨린을 붙잡은 손에 조금 더 힘을 실었다. 이벨린은 엉겹결에 그의 힘에 이끌려 걸으면서도, 연신 뒤를 돌아보았다.
시종장은 아까와는 비교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상심한 얼굴이었다. 그리고 그건 묘하게 사람을 찜찜하게 만들었다.
이벨린은 다시금 고개를 앞으로 돌리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이렇게 가도 괜찮은 거예요?”
“안 될 것 같아?”
목소리에 여전히 웃음기가 묻어 있었다. 이벨린은 제 말이 그에게 어떻게 들렸을지 그제야 깨달았다. 좋게 말하면 황태자에게 반기를 들어도 괜찮냐는 물음이었고, 비꼬아 듣자면 황태자의 시종의 눈치를 안 봐도 되냐는 뜻으로도 얼마든지 곡해할 수 있었다.
그녀는 수습하듯 덧붙였다.
“저야 와 주셔서 정말 감사하지만 전하께는 손해이지 않나요?”
“무슨 뜻이지?”
그제야 앞만 보고 걷던 비센테가 그녀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이벨린은 그의 시선을 피하듯 제 발치를 바라보았다.
“제가 저 방을 쓰면, 황태자 전하의 약점 하나라도 더 캘 수 있었을 텐데.”
“네가 죽어도 카스트로의 침대엔 올라가고 싶지 않다고 했던 건. 잊었어?”
“어차피 여기까지 밀렸으니 그것까지 감수하라고 하실 줄 알았죠.”
이벨린은 여태 그가 제 손을 붙잡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회랑을 지나는 사람은 없었고, 이제 그들을 볼 사람이라고는 거리를 두고 뒤따르는 메리뿐이었다. 그리고 메리는 그들의 관계를 어느 정도 아는 사람이었다.
굳이, 그가 의식할 필요조차 없는.
어쩌면 비센테는 그런 수순으로 제가 그녀의 손을 붙잡고 있다는 사실조차 깜박했을지도 몰랐다. 신경 쓸 가치조차 없어서….
“다들, 그러잖아요.”
이벨린은 뾰족한 생각을 삼키며 웃었다.
“처음에는 무엇이든 들어줄 것처럼 굴면서 테이블에 앉힌 다음, 물러날 수 없는 순간이 오면 선택권을 하나씩 빼앗죠.”
그녀는 숨죽인 채 미소지었다. 눈을 한 번 깜박거리는 것조차 조심스럽다.
“그게, 협상의 기본 아닌가요?”
그가 그녀의 손을 여태 붙잡고 있는 것을 눈치챌까 봐. 이 손이 떨어지는 순간 여유를 가장하던 가면도 같이 벗겨지고, 날 것 그대로의 떨림이 전해질 것만 같아서.
고작 이 한 뼘짜리 온기조차 감히 욕심내서는 안 될 찰나의 꿈이어서.
그 절박함이 기어이 표정에 드러난 순간, 비센테가 걸음을 멈췄다.
“오늘따라 네가 왜 이러는지 생각해 봤지.”
입가에 조각처럼 머물러 있던 미소는 비센테의 눈을 마주한 순간 사라졌다.
“정말 내게 무언가를 기대했다가, 화라도 난 것처럼.”
간간이 켜진 랜턴 빛을 제외하곤 그들을 비추는 건 이제 부연 달빛뿐이었다. 이벨린은 그가 제 쪽으로 한 걸음 다가오자 뒤로 물러섰다. 손이 붙잡힌 채로 움직이는 것에는 한계가 있었고, 회랑은 폭이 넓지 않았다. 순식간에 궁지에 몰리듯 벽에 붙어섰다.
“읏….”
이벨린은 그가 손을 뻗자 반사적으로 눈을 꽉 감았다. 하필이면, 지난번 카스트로에게 붙잡혔을 때와 같은 자세였다. 그보다 더 훤칠한 체격, 어둑해 보이지 않는 얼굴, 그 와중에 느껴지는 사내의 억센 힘, 코끝에 느껴지는 시더의 향….
힘으로 강제당한 공포는 영혼에 깊은 상처를 남긴다. 그걸 이런 식으로 확인하고 싶지는 않았다. 숨이 점점 가빠졌다. 그의 팔이 그녀의 허리 옆을 스치고,
“…….”
이내 등 뒤에서 달칵 문고리가 움직이는 소리가 들렸다. 기대어 서 있던 몸이 그대로 쏟아지듯 어둑한 방 안으로 이끌렸다. 이벨린은 감았던 눈을 얼떨떨하게 떴다.
그녀가 벽이라고 착각했던 것은 목재로 된 문이었다. 등 뒤에서 다시금 문이 묵직한 소리를 내며 닫혔다.
“여긴….”
넓직한 응접실의 전경 뒤로 반쯤 열린 문이 있었고, 그 너머로 네 개의 기둥을 가진 거대한 침대가 보였다. 검소하게 운영되는 테네리페 성을 생각하면 개중 화려한 축에 속하는 구조였다.
이벨린은 가까이 있는 카우치에 남자의 프록코트가 걸려 있는 것을 눈치챘다. 비센테가 그것을 집어 들어 제 팔에 걸치며 말했다.
“오늘은 여기서 자도록 해. 내일은 내 하인들을 시켜서라도 네 방을 정리하게 만들 테니까.”
“…그러면 전하께서는 어디에 가 계시려고요.”
“글쎄, 어디든.”
“…….”
“양이 상관할 바는 아닐 텐데.”
그가 농담처럼 그녀의 눈을 마주하며 미소지었다.
그를 이대로 보내고 싶지 않았다. 굳이 밤을 함께 보내지 않더라도, 그저 마음과 마음을 나누는 관계에 불과하더라도. 이벨린은 문간에 서 있는 그녀를 지나치려는 비센테의 손목을 붙잡았다.
“전하께서도 아시듯 저는 진짜 귀족이 아니에요.”
“…그래서.”
“그러니 전하께서 여기 그대로 머무신다고 해도 제 명예가 위태로워질 일도 없고.”
“…….”
“‘이벨린 로즈 레녹스’의 명예가 얼마나 나락까지 떨어지든, 브리타냐에는 저를 책임져 줄 약혼자도 있고요.”
정확히 말해서는 ‘이벨린 베네딕트’의 약혼자였다. 카터 에일레이 윈스포드. 이벨린은 그가 어떻게 생겼는지, 혹은 어떤 눈동자의 색을 가졌는지를 떠올리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놀랍게도 단 하나도 기억나지 않은 채 흐릿했다.
문득 고개를 들자, 비센테가 표정 없이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왜 그런 눈으로 보세요?”
“마음이 불편해서.”
“…….”
“그리고, 한편으로는 안심이 되기도 해서.”
“그게 무슨.”
“이 모든 게 끝나더라도, 너는 잘 살 테니까.”
너는 잘 살 것이라고. 그렇게 말하는 비센테의 입매에는 희미한 미소가 스며 있었다. 한 치의 꾸밈도, 거짓도 없는 오롯한 안도. 그런 것은 보는 순간 알 수 있었다. 그는 진심이었다.
정말 진심으로, 그녀가 그를 떠나 잘 살 수 있어 다행이라고….
이벨린은 치받는 감정을 가까스로 삼켰다. 비센테를 붙잡은 손에서 힘을 풀자마자 그의 손이 힘없이 아래로 추락했다.
“저는 물론 그럴 거예요.”
그가 미소 지었다.
“그래. 다행이야. 진심으로.”
“그리고 전하께서도 제가 없어도 잘 살 거고요.”
이벨린은 힘주어 말했다. 일그러트리지 않기 위해 부릅뜬 눈이 따끔거렸다. 모래라도 들어간 것처럼 아렸다. 비센테의 얼굴에서 서서히 미소가 사라지고 있었다.
“전하께서는 가끔 인생의 막바지에 접어든 사람처럼 말씀하실 때가 있어요.”
“…….”
“하지만 스물일곱은 그러기엔 지나치게 젊은 나이죠.”
그래, 그는 젊다 못해 어렸다. 죽은 자나 추모하며 평생을 살기엔 지나칠 정도로. 하지만 고작 이런 말이 그에게 닿기나 할까? 위안이 되기나 할까?
“…….”
숨 막힌 정적이 흘렀다. 그가 저 고요한 얼굴 뒤로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짐작조차 가지 않았다. 문득 그녀를 내려다보던 비센테의 눈매가 일그러졌다. 커다란 손이 그녀의 오른쪽 턱과 뺨을 감쌌다.
반쯤은 무의식적인 행동이었던 게 틀림없었다. 그는 제가 이벨린의 뺨에 손을 얹었다는 행위에 저 스스로가 더 놀란 것처럼 보였다. 움찔 떨리는 것이 맞붙은 피부를 타고 느껴졌다.
그러나 그는 이벨린을 밀치지도, 제가 떨어지지도 않았다. 금방이라도 그녀를 끌어안을 것처럼 올라갔던 손이 연신 어정쩡한 위치에서 멈췄다. 굳은살 박인 엄지손가락이 한숨처럼 그녀의 눈두덩이를 조심스럽게 쓸었다.
“울지 마.”
“안 울어요. 제가, 이런 거로 무슨.”
정말이었다. 코끝이 찡하긴 했지만, 금방이라도 울 것처럼 얼굴이 일그러지긴 했지만, 눈물은 단 한 방울도 나지 않았다. 그를 위해 우는 것은 기만이었다. 그의 죄책감의 근원을 알면서도, 시에나의 바람을 알면서도. 한마디만 하면, 그가 지옥에서 벗어날 것을 알면서도.
“아까워서 그래요. 그렇게 아무렇게나 쓸 거면, 저한테나 줄 것이지….”
아깝다는 말은 한 톨의 거짓도 섞이지 않은 진심이었다. 어쩌면 그녀는 처음부터 화가 나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그의 완벽한 얼굴도, 아름다운 기품도,
다음을 상상하게 만드는 육체와 찬란하게 빛나던 미래도.
그 귀한 것들을 세상에서 가장 비천한 것처럼, 죽은 자의 무덤에 모조리 처박은 것을 아니까.
언젠가는. 정말 언젠가는 그에게 진실을 털어놓을 수 있기를 바랐다. 그가 죄책감을 덜고, 세상을 향해 다시 웃고, 모든 것을 선뜻 놓아줄 수 있는 날이 오기를 바랐다.
당혹스럽게 그녀를 바라보던 비센테가 문득 달래는 것처럼 웃었다.
“네 말대로라면 나는 황제가 될 텐데, 넌 지금 에스페다를 달라고 말하고 있군.”
“…….”
“대체 왜 이러는지 모르겠지만, 우선은 좀 앉지.”
이벨린을 놓아준 그는 몸을 돌려 티 테이블로 향했다. 한쪽 의자를 잡아끌고는 이쪽으로 오라는 듯 고개를 까닥였다. 이벨린이 그가 권한 의자에 앉자, 그가 부드럽게 의자를 안으로 밀어 넣었다. 그녀는 그가 맞은편 의자에 앉는 것을 홀린 듯 바라보았다.
길쭉한 다리를 우아하게 포개 앉은 비센테는 무심히 시선을 들다가 이벨린과 눈을 마주하고 픽 웃었다.
“오늘따라 도무지 종잡을 수가 없군. 울었다가, 웃었다가, 금세 또 그런 눈을 하고.”
“…그런 눈이라니.”
“그런 눈. 지금처럼.”
대체 무슨…. 이벨린이 당혹하며 유리창에 제 얼굴을 비춰 보려고 노력하는 동안, 테이블에 팔꿈치를 가져다 댄 비센테는 제 손 위에 턱을 괴었다. 길쭉한 손마디가 그의 얼굴 절반을 가렸다.
“사실 네게 할 말이 있긴 했어. 그러니까, 음….”
그가 말을 고르듯, 혹은 골치 아픈 생각을 밀어 치우듯 미간을 손가락으로 짚었다. 날 서 있던 경계가 유독 느슨해지는 이런 순간을 이벨린은 사랑했다. 그가 지극히 믿을 수 있는 사람에게만 보여 주는 순간들.
그래서 그가 그어 놓은 선 안으로 완전히 들어온 것처럼 느껴지는. 실상은, 그렇지 않더라도.
“피곤하세요?”
“조금. 바빴거든.”
“무슨 일로 바빴는지는 제게 말씀해 주지 않으실 거고요.”
그 말에 비센테는 미간을 짚었던 손을 살짝 들어 올렸다. 길쭉한 손가락의 틈으로 그녀를 바라본다. 흥미를 가장한 눈동자가 어둠 속에서 반짝였다.
“그래.”
“아쉽네요.”
“관심이 지대해. 정보를 얻고 싶나?”
“없는 것보다는 있는 게 좋겠죠. 제가 쥔 정보가 많으면 많을수록, 저는 대체 불가능한 사람이 될 거잖아요.”
“그래. 그리고 네가 다른 사람에게 붙잡혀 가지 않도록 나는 네 발에 족쇄라도 채워야 할 거고.”
족쇄. 그 말에 무심코 과거의 가장 끔찍한 순간부터 떠올랐다. 이벨린은 입 안의 연한 살을 깨물었다. 태연하던 눈매가 살짝 무너졌다.
“…그러실 건가요?”
“그러기 싫어서 네게 알려 주지 않는 것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아?”
“제가 제 한 몸도 지킬 수 없을 것 같아서요?”
“아니.”
“…….”
“네가 잡혀가면 내가 어떤 멍청한 짓까지 저지를지 모르니까.”
내내 웃고 있던 얼굴이 서늘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멍청한 짓을 저지를지도 모르겠다고. 그건 마치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어떤 끔찍한 짓이라도 감수하겠다는 고백 같았다.
이벨린은 당혹스럽게 중얼거렸다.
“저를 좋아하시는 것도 아니잖아요.”
“최선을 다해 책임지려는 거야. 네가, 더는 혼란스럽지 않도록.”
“…….”
“이 상황으로 널 밀어 넣은 건 내 잘못이니까.”
순간은 ‘이 상황’이 카스트로가 그녀를 주제넘게도 욕심내는 지금을 의미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건 이미 동의한 관계였는데. 굳이, 이제 와서 이럴 이유가 없는데.
더듬더듬 그런 생각이나 하던 찰나에 문득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과거의 그녀가, 그의 얼굴에 대고 쏟았던 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