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8화 (48/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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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늦었네요.”

    마차의 문을 열자마자 파르디타가 질책했다. 그녀가 말했던 30분에서 정확히 15분이 지나던 시점이었다.

    이벨린은 마차의 계단을 오르려다 말고 멈칫했다. 파르디타의 맞은편에 남자가 앉아 있었다. 황실의 것처럼 찬란하지는 않지만 적당한 금발, 고수머리, 다갈색 눈동자, 제법 준수하게 생긴 얼굴….

    ‘발데페르의 레오넬.’

    발데페르 백작의 장남이 왜 이 마차에 타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지금은 적당한 때가 아니었다. 특히나 이벨린이 황태자와 2황자 사이에서 저울질을 하고 있다는 지저분한 소문이 물밑에서 도는, 이 시점에는….

    이벨린은 파르디타의 얼굴을 힘주어 바라보았다.

    “다른 동행이 있다는 말씀을 하셨던가요?”

    “아, 동행이 아니에요. 물론 소개시켜 주고 싶었던 건 맞지만요.”

    “…소개요?”

    “인사해요. 발데페르의 레오넬 백작 영윤이셔요. 알렉스, 여기는 레녹스 백작 영애고요.”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발데페르의 레오넬입니다.”

    그가 어딘지 어정쩡하게 손을 내밀었다. 마차에서 내리자니 이벨린이 문을 막고 있어 여의치 않고, 그러자고 에스코트를 아예 안 하기에도 마음에 걸리는 듯했다. 어떻게 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한 채로 이벨린이 그저 바라만 보고 있자, 레오넬이 뺨을 붉히며 말했다.

    “영애께서 제 손을 부끄럽게 만드시는군요.”

    화가 났다기보다는, 숙녀에게 거절당한 쑥스러움에 더 가까워 보였다. 이벨린은 그제야 웃으며 레오넬의 손바닥 위에 제 손을 올렸다.

    “죄송해요. 제게는 조금 당혹스러운 만남이니 영윤께서 너그러이 이해해 주시리라 믿어요.”

    “물론입니다, 영애.”

    “저쪽에 앉아요.”

    이벨린은 파르디타가 가리키는 대로 레오넬의 옆자리에 올라탔다.

    “레오넬은 곧 갈 거거든요. 근처를 지나가던 것을 발견하고, 제가 이벨린을 소개시켜 주고 싶어서 붙잡았어요. 그렇죠?”

    여태 뒤에서 지저분한 소문이나 주도적으로 흘리고 다녔던 주제에 이제는 세상에 둘도 없이 친밀한 척 이름까지 제멋대로 불러대는 것에 기가 막혔다. 카스트로도 그러더니 아주 사촌끼리 쌍으로….

    이벨린은 쓴웃음을 삼키며 레오넬을 향해 물었다.

    “곧 가시나요?”

    “…아, 예. 그렇습니다.”

    그 와중에 레오넬은 무슨 약점이라도 잡힌 것 마냥 멍청이처럼 고개나 끄덕였다.

    그녀가 모르는 사이에 비탈리와 발데페르 사이에 모종의 거래라도 있었던 걸까? 아니면 파르디타에 대한 일방적인 호감? 그보다 심한 꿍꿍이를 품고 있다고 하기엔, 레오넬의 얼굴은 지나치게 신실해 보였다. 차라리 성격 나쁜 여동생에게 휘둘리는 모자란 오빠라면 모를까.

    “줄곧 이렇게 인사드리고 싶었습니다. 저, 그리고 혹시….”

    이벨린은 레오넬의 귀가 조금 붉어졌다는 것을 눈치챘다.

    “레녹스 영애께서 괜찮으시다면 연회 때 에스코트를 요청드리고 싶습니다.”

    이벨린은 당혹스럽게 눈을 깜박였다. 레오넬이 의식하고 있는 상대가 파르디타가 아니라, 그녀일 거라고는 조금도 생각지 못했던 탓이었다.

    “영애?”

    “…아.”

    이벨린은 재빨리 정신을 다잡았다. 이런 경우 부드럽게 거절하는 말은 하나뿐이었다.

    “지금은… 확답드릴 수 없겠어요. 하지만 춤 한 번이라면 긍정적으로 생각해 볼게요.”

    “감사합니다.”

    레오넬은 그제야 흐리게 미소지었다. 내내 긴장했는지 참고 있던 숨까지 내뱉었다.

    “그러면 비탈리 영애, 레녹스 백작 영애. 곧 테네리페 성에서 다시 뵙도록 하죠.”

    “기대하고 있을게요.”

    마지막까지 예의 바르게 인사한 레오넬이 마차에서 내려섰다. 어디에 내놓아도 영애들의 마음을 설레게 할 정도로 근사한 영윤이었지만, 좀처럼 남자로는 느껴지지는 않았다.

    ‘엘레나’와는 대여섯 살 정도 차이가 났었던 기억 때문일까? 레오넬의 그럴듯한 외모나 가문보다도, 그가 코 흘리던 모습이 먼저 떠오르는 것을 보면 그럴듯한 추측이었다.

    멀어지는 레오넬을 창문 너머로 흐뭇하게 바라보던 파르디타가 이내 이벨린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오늘 제가 무례했던 것을 알아요.”

    “…아신다니 다행이에요.”

    이벨린은 부드럽게 웃으며 대답했다. 파르디타의 적의를 끌어내서 좋을 건 없었지만, 좀처럼 말이 곱게 나오지는 않았다. 먼저 무례를 저지른 것은 저쪽인데, 이쪽에서 빌빌 길 필요는 없지.

    이벨린의 뼈 있는 지적에도 파르디타는 그저 활짝 웃었다.

    “분해요? 아니면, 화가 나던가요?”

    예의상 웃는 것이 아니라, 정말 즐겁다는 것처럼 환한 웃음이었다. 이벨린은 떨떠름한 기분으로 웃던 표정을 흐렸다.

    진작부터 제정신이 아니라고는 생각했지만, 이 정도로 미쳤으리라고는….

    “이벨린, 대답해 봐요.”

    “솔직하게 말씀드릴까요, 아니면 영애의 기분을 고려해서 말씀드릴까요?”

    “나쁘게 생각하지만은 말아요. 물론, 의도 자체는 나빴을 수 있지만.”

    “하고 싶으신 말이 있으시다면 정확히 말씀해 주세요.”

    그제야 웃음을 멈춘 파르디타가 이벨린을 똑바로 응시했다. 포개어 꼰 다리 위에 팔꿈치를 대며 턱을 괴었다.

    “제가 영애에게 무례를 저지르더라도, 그러니까 가령… 중요한 예법을 무시하거나, 하다못해 제가 영애의 뺨을 때리고, 무언가를 훔치더라도.”

    탁, 접힌 부채가 이벨린의 턱 밑을 가볍게 받쳤다. 파르디타의 고개가 놀리듯 기울어졌다.

    “그걸 영애가 누구에게 말하거나, 제가 사교계의 모든 사람들이 목도하는 가운데 그 ‘무례’를 저지르더라도.”

    “…….”

    “아무도 영애의 말을 믿지도, 봤다고 나서지도 않을 거예요.”

    파르디타가 다시금 생긋 웃었다. 이벨린은 표정 없이 되물었다.

    “그 깨달음을 주고 싶으셔서 이렇게 귀찮은 짓을 자처하셨다고요?”

    “저에 대한 반감은 이해하지만… 잘 생각해 봐요, 이벨린. 황태후 전하의 후광을 떼면 당신에게 뭐가 남죠? 재산? 지위?”

    파르디타가 새치름한 고양이 같은 회색 눈을 애교스럽게 깜박였다.

    “고작해야 브리타냐의 귀족이라는 지위로 에스페다의 주류 사교계에 편승할 수 있으리란 생각은 좀 맹랑하죠.”

    “…….”

    “만약 영애께서 에스페다의 사교계에 진정으로 머물고 싶다면 말예요. 제가 도와줄 수 있어요.”

    “돕겠다고요?”

    “당신이 남편감을 찾고 있다는 것을 알아요.”

    이벨린이 숨을 살짝 들이쉬는 것이 마치 좋은 징조라도 되는 양, 파르디타가 의기양양하게 말을 이었다.

    “방금 전 레오넬도 괜찮고, 몬테 변경백이나… 당신이 원한다면 안드라데 공작의 장남과도 주선해 줄 수 있어요.”

    “물론, 당신이 조금 더 야망이 있다면, 카스트로도 괜찮고요.”

    가장 끔찍한 것을 가장 귀하다는 듯 건네는 말에 속에서부터 무언가가 치받혔다. 파르디타가 활짝 웃었다.

    “누굴 골라잡는다고 해도, 허울뿐인 2황자보다는 훨씬 낫죠.”

    허울뿐인 2황자. 이벨린은 파르디타의 말을 곱씹다가 엷은 웃음을 터트렸다. 이벨린의 웃음이 길어질수록 파르디타의 얼굴에 자신만만하게 어려 있던 미소가 흐려졌다.

    “왜 그렇게 웃죠?”

    이벨린은 여태 제 턱을 받치고 있던 파르디타의 부채를 밀어 치우며 말했다.

    “2황자 전하께서 물려받으실 시모라의 재산을 생각하면, 누구도 그분을 허울뿐이라고 말할 수는 없을 거예요.”

    파르디타가 답답하다는 듯 눈썹을 찡그렸다.

    “레녹스 백작 영애 또한 막대한 재산을 상속받으셨지 않나요?”

    “감히 시모라의 부에 비할 바는 아니에요.”

    “…가문의 명예는요? 돌아가신 레녹스 백작께선 무엇보다도 과거의 영광을 찾길 바라실 듯한데요.”

    “에스페다에서 오스티나토의 성을 단 사람보다 귀한 가문도 있을까요?”

    “…제 뜻이 영애께 잘 전달되지 않았나 봐요.”

    이제는 숫제 대화가 통하지 않는 머저리를 바라보는 것 같은 눈이었다. 파르디타의 회색 눈동자에 초조함이 스몄다.

    이벨린은 조용히 미소지었다.

    “파르디타.”

    “…….”

    “이 정도의 대화를 나눌 정도의 사이니, 이젠 이름을 불러도 괜찮겠죠?”

    “…이름이야 좋을 대로 해요.”

    “발데페르, 몬테, 그리고 안드라데. 영애께서 추천해 주신 귀족들이 비탈리와 얼마나 가까운 가문인지는 잘 알아요. 그런 귀한 가문들을 제게 진심으로 권유해 주실 만큼 저를 좋게 봐 주셨다는 것도 알겠고요.”

    파르디타의 속내를 알 수 없었을 때는 불안하기 짝이 없었던 행보가 이제는 그저 가소로웠다. 고작 그런 말로 ‘이벨린’을 비센테에게서 떼어 내려는 시도는 형편없었고.

    스스로도 납득하기 어려운 논리로는 누구도 설득할 수 없는 법이었다. 물론 파르디타가 그 어떤 대단히 설득력 있는 논리를 가져온다고 해도, 애초부터 넘어갈 수조차 없는 처지라는 것이 가장 큰 패착이었겠지만.

    게다가.

    ‘비탈리에게 충성스러운 대귀족들만 골라 추천하는 속내란 뻔하지.’

    비탈리의 개들 중 하나와 결혼하는 순간 그녀의 앞에 놓일 미래는 하나뿐이었다.

    카스트로의 사랑스러운 애첩. 언제든 그가 그녀의 다리를 잡아 벌릴 수 있는 미래. 지금의 황제와 바섬 백작 부인의 관계처럼….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속에서 역한 신물이 올라왔다. 가능성을 되짚어 보느라 흐려졌던 이벨린의 눈빛이 선득하게 가라앉았다. 이벨린은 능숙하게 눈매를 접으며 감정을 감췄다.

    “하지만 결혼은 적어도 제가 사랑하고 저를 사랑해 주는 사람과 하고 싶어요.”

    한 음 올라가 불안정해진 목소리는, 이벨린의 의도했던 것보다도 더 풋사랑에 들뜬 소녀처럼 들렸다. 기막히다는 듯 이벨린을 바라보던 파르디타가 짓씹어 뱉듯 말했다.

    “…대체 ‘우리들’ 중 누가 사랑으로 결혼을 하나요?”

    “운명을 믿는 건 우리 나이대의 특권 아닌가요?”

    이벨린은 뻔뻔스레 대답했다. 그 안에 들어 있는 영혼의 나이가 어떻든, ‘이벨린’의 나이는 이제 고작 스물둘이었다. 제 앞에 앉아 있는 파르디타와 같이.

    파르디타의 목소리가 조금 더 충고하는 투로 진지하게 가라앉았다.

    “그렇다면 더더욱 비센테 전하 곁에선 얻을 게 없어요. 전하께서는 아무도 사랑하지 않으세요. 누구도 사랑할 수 없는 분이고요.”

    “사람의 마음은 언제든 변할 수 있죠. 저는 전하께서 제게 보여 주시는 게 꽤 진심이라고 생각하고요.”

    “…그걸 진심이라고 믿다니. 제 생각보다도 더 순진한 분이시네요.”

    평정심을 가장하고 있던 고운 눈매에 독기가 어렸다. 일그러진 얼굴로 말없이 이벨린을 노려보던 파르디타가 불현듯 환하게 웃었다.

    “하긴, 그럴 리가 없는데.”

    “…….”

    “진정한 사랑 따위를 운운하며 내 속을 뒤집어 들려는 행태는 제법 그럴듯했어요. 하마터면 깜박 속아 넘어갈 뻔했고요.”

    “…….”

    “이벨린. 당신 말이 맞아요. 에스페다에 오스티나토보다 고귀한 가문도 없죠. 시모라보다 부유한 가문? 많지 않아요. 하지만 레녹스라는 이름은… 비센테 전하께 대체 무슨 도움이 될까요?”

    이벨린이 얌전히 듣고 있으면 있을수록, 파르디타의 목소리에 점점 더 활기가 돌았다. 새끼 고양이를 닮은 조막만 한 얼굴에 의기양양한 미소가 어렸다.

    “만약 전하께서 브리타냐로 망명하신다면 상황이 달라질지도 모르죠. 하지만 황태후 폐하께선 외국으로의 망명이 엄격하게 금지된 분이에요. 그 말은, 비센테 전하 역시 에스페다에 족히 십수 년은 더 묶여 계셔야 한다는 소리고요.”

    “…….”

    “그러니 부디 현실적으로 계산하고 똑똑하게 굴어요. 같잖은 사랑 운운은 집어치우고, 어느 가문을 원하는지 솔직하게 말해 보라고요. 영애께서 몸값을 높이고 싶어 한다는 건 잘 알겠….”

    “틀리셨어요, 파르디타.”

    물 흐르듯 유려하게 흘러가던 파르디타의 말을 이벨린이 중간에 툭 끊었다.

    “저는 비센테 전하를 정말 진심으로 좋아해요.”

    “…….”

    “그런 ‘계산’을 도무지 할 수도 없을 만큼.”

    파르디타는 순간적으로 제가 무슨 말을 들었는지 확신하기 어려운 듯했다. 눈은 부릅뜨고, 입가엔 여전한 미소를 지은 채 고개를 갸웃거렸다.

    “…무슨 뜻이죠?”

    “영애의 생각보다 제가 더 머저리라는 뜻이겠죠.”

    “…….”

    “영애께서 제게 제발 비센테 전하에게서 떨어져 달라 비는 것이, 영애의 진심이듯.”

    파르디타의 얼굴에 흔적처럼 남아 있던 미소가 완전히 사라졌다. 파르르 떨리는 아름다운 눈매에 남은 것은 독기뿐이었다.

    이벨린이 부채를 펼치며 그림처럼 웃었다.

    “아무래도 우리, 테네리페까지 동행은 어려울 것 같죠?”

    무기질의 인형처럼 앉아 있던 파르디타가 그제야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런 것 같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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