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6화 (46/151)

***

“…그리하여 앞으로도 영원하길!”

극적인 외침을 끝으로 다섯 번째 낭독자가 낭독을 마쳤다. 드문드문한 박수 소리와 미소, 탄성이 좌중들 사이에서 흘렀다. 정말 감명을 받았다기보다는 다분히 보여 주기 식이었다.

낭독은 예상대로 지겨웠다. ‘안드라데’의 후원을 받은 문인들은 황후에게 충성하는 제 주인을 따라, 황실의 업적을 찬양해대는 시나 소설 따위를 읊어댔다.

하물며 비탈리의 하나뿐인 영애까지 참석한 자리임에야. 저들에게도 별다른 선택지가 없었겠지.

‘지금은 누구와 접촉한다고 해도 시선이 집요하게 따라붙을 것 같고.’

그녀는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어차피 카스트로도 오지 않을 것 같고, 이만하면 보여 주기 식으로 참석한 구색은 맞출 수 있을 테니까….

차분한 계산을 마무리하며 부채를 쥘 즈음, 파르디타가 그녀에게 고개를 돌렸다.

“어디 가셔요?”

여태껏 바로 곁에 앉아서 사람 취급도 안 했던 주제에 제법 살가운 물음이었다.

“비센테 전하께서 보이지 않으셔서요. 아무래도 몸이 좋지 않아, 먼저 돌아가겠다는 말을 전하려고요.”

“…그런 천한 일은 하인을 시키시지 않고.”

마치 하인이나 할 법한 일을 자처한다는 투였다. 파르디타는 여태 사내들이 득실거리는 공작의 측실을 흘끗 바라보고는, 이벨린이 대답할 새도 없이 말을 이었다.

“뭐, 마음은 이해가 가요.”

마치 이벨린이 지루함을 견디다 못해 도망가려고 했다는 식이었다. 실제로 그런 마음 만반이었던 터라 그녀는 조금 머쓱해졌다. 이벨린을 빤히 바라보던 파르디타가 제 부채의 끝으로 정원의 뒤편을 가리켰다.

“가기 전에 자카란다 정원은 보고 가세요. 저 흰 문을 넘어가면 있어요.”

“…제가 함부로 들어가도 될까요?”

“공작 부인. 레녹스 영애께서 자카란다 정원을 보고 싶다고 하는데, 괜찮죠?”

“아, 음….”

파르디타의 말에 안드라데 공작 부인의 표정이 흐릿해졌다. 안주인의 정원을 개방해 달라는 요구는 무례했으나, 표면적으로는 제국의 실질적 황녀나 다름없는 비탈리 영애의 부탁이었다.

누구에게도 거절은 쉽지 않을 텐데, 알아서 납작 엎드리는 시늉을 해 대는 안드라데 공작 부인이라면야.

“저야 괜찮지만… 혼자서 괜찮겠어요? 안내해 줄 사람도 없이.”

조금도 괜찮지 않은 얼굴로 그렇게 말해 봐야 설득력이라고는 없었다.

굳이 먼저 요청하지도 않은 자카란다 정원 쪽으로 떠미는 속셈이야 궁금하지도 않았고, 알 필요도 없었다. 어차피 그쪽으로 죽어도 안 갈 테니까.

이벨린은 속내를 숨기며 이제는 익숙해진 순한 웃음을 머금었다.

“공작 부인께서 허락만 해 주신다면요. 흔치 않은 기회이니 조금만 둘러볼게요.”

죽어도 안 갈 테지만, 죽어도 갈 것처럼 말한 이유는 별로 없었다. 고작해야 공작 부인의 일그러진 표정이나 조금 더 감상하겠다는 유치한 속셈이었다.

“그렇게까지 말씀하신다면야….”

안드라데 공작 부인이 못마땅한 얼굴로 애써 고개를 끄덕였다. 주최자의 역할을 다 해야 하기 때문에 자리를 비울 수 없는 현실이 개탄스러운 모양이었다. 이벨린은 생긋 웃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곧장 따라붙는 하인에게는 보란 듯이 말을 전했다.

“2황자 전하께 몸이 좋지 않아 정원에서 기다리고 있겠다고 전해 드리렴. 30분에서 더 늦으신다면 먼저 돌아가겠다고도.”

“그러겠습니다.”

그녀는 부채를 흔들며 정원으로 내려섰다. 이전 생에서 황후를 따라 자주 드나들었던 덕에 안드라데 저택 구조는 익숙했다. 적어도 저 응접실의 창문에서 봤을 때 어느 쪽으로 가야 동선을 감출 수 있는지 정도는 꿰고 있었다.

이벨린은 순순히 정원 쪽으로 가는 척 움직이다가 그들에게 보이지 않을 시점에 방향을 틀었다.

“아가씨, 그쪽은….”

얌전히 뒤따르던 메리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모퉁이를 돌자마자 저택의 외부와 이어지는 쪽문이 나타났다. 문 너머에는 마차들 몇 대가 보이긴 했지만 인적은 드물었다.

“여기서 기다리자. 봐, 여기도 제법 예쁜 꽃이 있어.”

이벨린이 성의 없이 아무 화단이나 가리키며 말했다. 적어도 꽃이 있기는 있으니, 누군가에게 발각된다면 괜찮은 변명거리가 될 터였다. 그 전에 떠날 수 있으면 더 좋겠고.

대충 이 근처를 걷고 있으면 비센테도 알아서 나오겠지. 건강을 핑계로 이벨린이 먼저 일어난 것만으로도 변명거리는 충분할 터였다.

“…아.”

“왜?”

“아가씨 손수건이 없어요. 분명 외투랑 같이 두었는데… 잠시만 기다려 주시면 찾아올게요.”

“그래.”

“안에서 기다리시겠어요?”

“아냐. 여기 있을게.”

메리가 연신 뒤를 돌아볼 때마다 이벨린은 괜찮다는 표시로 손을 흔들었다. 어떻게 빠져나온 셈인데, 다시 돌아갈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무심히 화단의 꽃이나 들여다보는 찰나에 등 뒤에서 작은 소음이 들렸다. 기름칠 된 문이 부드럽게 열리는 소리였다.

이벨린은 무심코 고개를 돌렸다가….

“아, 이런. 레녹스 영애.”

그대로 얼어붙었다. 큰 키 때문에 머리를 살짝 숙인 채 쪽문을 통과하던 카스트로가 그녀를 발견하고 입매를 엷게 뒤틀었다. 몇 걸음 만에 성큼 그녀의 앞까지 다가섰다. 하필이면, 이럴 때….

“여기서 다 만나는군.”

제가 안드라데 공작 부인에게 알력을 불어넣고도, 그녀가 참석하리라곤 꿈에도 몰랐다는 듯 당혹한 표정이었다.

그녀가 정말로 브리타냐 출신이라 자세한 사정을 몰랐다면 눈치채지도 못했을 교묘한 수법이었다.

“…….”

이벨린은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섰다. 재빨리 주변을 훑었지만, 황태자의 뒤에는 그를 수행하는 기사는 보이지 않았다. 적어도 그녀의 시선이 닿는 범위 내에는.

애초에 일국의 황태자씩이나 되는 사람이 대체 왜 멀쩡한 정문을 놔두고 쪽문으로 다니는지. 하필이면 근처에 아무도 없을 때 마주친 것도 이상했다. 상황이 이렇게까지 꼬일 수는 없는 법이었다.

“응?”

이벨린의 침묵에 카스트로가 눈을 얇게 휘며 웃었다. 그녀는 제가 부자연스럽게 행동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가 뱀같이 징그러운 시선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다는 것도.

이벨린은 바짝 긴장한 채 무릎을 굽혔다.

“황태자 전하를 뵙습니다. 갑자기 나타나셔서… 놀랐어요.”

“낭독회는 벌써 다 끝난 건가?”

“아, 아직이에요. 저는 조금 답답해서.”

이벨린은 초조하게 곁눈으로 길목을 흘긋거렸다. 금방 돌아온다던 메리는 코빼기도 보이지 않고 있었다.

“우연이군.”

“…….”

이벨린은 코웃음을 삼켰다. 그녀가 혼자 남기만을 기다렸다는 듯 절묘하게 마주친 게 고작 그녀가 운이 나빴던 탓이라고. 차라리 이번 일은 처음부터 계획된 일이라는 게 더 그럴듯했다.

메리가 저들과 한패던가, 아니면 그녀의 손수건을 빼돌린 사람이 계획한 일이거나.

일이 어떻게 돌아가든 카스트로와 단둘이 시간을 보낼 마음은 조금도 없었다. 이벨린은 응접실로 가는 길목에서 슬쩍 비켜섰다.

“들어가 보셔요. 비탈리 영애가 전하를 찾더군요.”

그가 재미있는 농담이라도 들은 것처럼 짧게 웃었다.

“걷지.”

“…낭독회엔 참석하시지 않고요?”

“지금 들어가 봐야 부산스럽기만 할 테지. 안드라데 공작 부인의 낭독회가 좀 지겨워야지.”

이벨린은 그가 비센테를 흉내 내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시선 처리나 어조, 말투, 징그럽게도 그녀의 옷 아래를 훑는 눈길과 달리 담백하게 손을 내미는 태도.

어떤 것도 그녀가 알던 ‘카스트로’와는 달랐다. 그는, 이런 것보다는….

“이벨린, 어서.”

이벨린은 주춤 뒤로 물러섰다.

“제가 전하께 이름을 허락해 드렸던가요?”

그녀에게 내밀었던 손을 거둔 그가 그대로 헛웃음을 뱉었다. 바람에 흐트러진 제 앞머리를 넘기는 손길이 짜증스러웠다. 앞머리에 가려져 있던 흉터가 그대로 드러나며 인상이 변한다.

적당히 호의적이었던 분위기에도 순식간에 날이 섰다.

“상관있나? 너는 곧 제국의 귀족이 될 텐데.”

“제가 귀족이 되는 것과 전하께서 제 이름을 부르시는 것이 무슨 관계가 있죠?”

“제국의 모든 것이 나의 것이지. 그대의 남편은 추밀원에 이름을 올리는 대가로 너를 기꺼이 내 방에 밀어 넣을 테고.”

“…….”

“아, 떠는군. 애처롭게도.”

이벨린은 그가 다가오는 만큼 뒤로 물러섰다. 잔뜩 경계하며 물러서던 발꿈치 뒤에 돌벽이 툭 닿았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인적이 드물어 좋다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이보다 절망적일 수가 없었다. 차라리 누가 지나가다가 목격이라도 할 수 있는 장소였다면.

더는 물러설 곳 없는 그녀의 손목을 카스트로가 억세게 움켜쥐었다.

“너도 원하리라고 생각했는데.”

“아니에요.”

“믿을 수 없군. 아니라면 이렇게 인적이 드문 곳에 홀로 있었을 리가 없지. 누구와 약속했지? 비센테?”

“…전하의 명예를 생각해서라도, 부디 놓아주세요.”

“네 처녀를 비싸게 팔아먹고 싶어서 온 게 아니었나. 에스페다의 명예로운 멍청이나 하나 물어 보려고.”

그녀는 잡힌 손을 빼내려고 잡아당겼지만, 꼼짝도 하지 않았다. 도리어 아프기만 했다. 카스트로가 이죽거렸다.

“왜? 황태자로는 부족한가?”

“무례하십니다.”

“무엇이.”

카스트로는 다소 급작스러울 정도로 빙글거리던 웃음을 멈췄다. 표정 없는 얼굴이 선득했다.

“네가 비센테가 주워온 창녀가 아니냐고 묻는 것이?”

“…아파요.”

“더 지껄여 봐. 내가 너 따위에게 무례하게 행동하고 있다고.”

“전하께서 고려하셔야 할 건 제가 아니라, 저의 후견인이신 황태후 폐하세요.”

“…….”

“그분께서 제 신분을 직접 증명하셨어요. 전하께서는 지금 저를 의심하는 무례를 저질러 황태후 폐하를 모욕하고 계시고요.”

예전이라면 카스타야라는 가문과 약혼녀라는 지위가 황태자로부터 그녀를 지킬 수단이었겠지만, 지금은 작위조차 불분명한 외국인 여자일 뿐이었다.

카스트로에게 무슨 짓을 당한다 한들 항의조차 할 수 없었다. 그녀는 만들어진 가짜였으니까.

“그러니, 이만 놓아주세요….”

아무리 생각해도 이 상황을 타개할 방법이 보이지 않았다. 이벨린은 그에게 손목이 잡힌 순간부터 제정신이 아니었다.

제대로 항변했는지조차 모르겠다. 저 미치광이의 귀에 왜곡되지 않고 들렸기나 할지….

“아하.”

“…….”

“그것참 대단히 실례했군.”

놀랍게도 잠깐의 침묵 끝에 그가 피식거리며 그녀의 손목을 놓았다. 이벨린은 강한 힘에 짓눌린 탓에 불그죽죽하게 변한 손목을 감싸 쥐며 벽에 바짝 붙었다. 그 모습에 카스트로가 한 번 더 웃었다.

“조만간 황태후 폐하를 찾아뵙고 사죄드리도록 하지.”

진득한 시선이 그녀를 머리에서부터 발끝까지 훑었다. 고양이가 앞발로 먹이를 가지고 놀듯이 명백하게 그녀의 반응을 즐기고 있었다.

“숙녀의 명예를 모욕한 죗값도.”

카스트로는 순식간에 신사의 가면을 다시 뒤집어썼다. 마치 방금 전의 모습이 그녀의 착각이기라도 한 것처럼. 분노와 무력감으로 눈앞이 붉게 충혈되었다.

진짜 이 미치광이가….

“레녹스 영애. 아무래도 무척 긴장한 것 같은데. 조금도 웃질 않잖아.”

“…황태자 전하께서 이렇게 행동하시면, 누구라도 그럴 거예요.”

“아하….”

그게 문제였냐는 듯, 여유로운 미소가 그의 입가에 걸렸다.

“이렇게 하지. 전부 농담이었어.”

이벨린은 그가 손을 들어 올리자 반사적으로 눈부터 감았다. 2년 사이에 체격이 더 건장해진 사내의 손은 옛 기억을 떠올리기에 충분했다. 감금과 폭력. 사랑이라는 명목으로 쏟아진….

그러나 통증 대신 고개가 우악스럽게 들렸다. 그녀의 턱과 뺨이 카스트로의 오른손에 통째로 붙들렸다.

“지난번 무도회 때는 잘만 웃어 놓고는.”

“…….”

“다시 웃어 봐. 응?”

이벨린은 진저리치며 그의 손을 뿌리쳤다. 이 상황에서 이 상황에서 웃을 수 있다면, 그거야말로 미치광이나 다름없을 터였다.

그를 경멸하듯 마주하자 카스트로는 일순 한 대 맞기라도 한 것 같은 얼굴을 했다. 멍한 시선이 허겁지겁 그녀를 훑었다. 그리고 다음 순간 지저에서부터 끌어 올린 환희가 역겹게도 그 얼굴에 가득 찼다.

마치, 신의 황홀경이라도 엿본 것처럼.

“…너처럼 화내는 여자를 알아.”

그가 그녀의 목을 붙잡아 벽에 짓눌렀다. 그의 아랫배와 그녀의 복부가 바짝 맞닿았다. 이벨린은 간신히 흐느꼈다. 지독한 공포가 머리를 잠식했다.

“흣….”

“그 이면 아래 넘실거리는 혐오를 숨기고, 증오를 삼키고, 흐트러짐 없이 고고한 눈으로.”

“으흣, 하…!”

“그게 사람을 돌아 버리게 만드는 줄도 모르고 말이야, 응?”

역겹게도 잔뜩 딱딱해진 무언가가 허벅지를 찔렀다. 발정난 짐승이라도 된 것 같은 눈이었다. 카스트로가 그녀의 목덜미에 제 이마를 묻으며 읊조렸다.

“아, 엘레나….”

엘레나. 벼락이라도 맞은 것 같은 끔찍함이 온몸을 관통했다. 지긋지긋하다 못해 지겨웠고, 역겹다 못해 혐오스러웠다. 그녀인 줄 알아챈 것인지, 그저 닮았다는 이유로 불러댄 것인지는 중요하지도 않았다.

지금 당장 그가 메스껍게도 세운 물건을 짓밟아 줄 수만 있다면 정말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카스트로.”

훅 가까워진 위스키 냄새에 인상을 찡그리기 무섭게, 그녀의 목을 우악스럽게 잡고 있던 힘이 사라졌다. 그와 동시에 카스트로가 흙바닥으로 내동댕이쳐졌다.

이벨린은 억눌렸던 숨과 기침을 한 번에 토해 냈다.

“콜록, 히, 흐읍, 하으….”

커다란 손이 재빨리 그녀를 부축했다. 이벨린은 눈물이 고여 뻑뻑하게 성기어진 속눈썹을 깜박였다. 비센테였다.

“움직일 수 있겠어?”

그라는 것을 인지하자마자 다리의 힘이 풀렸다. 이벨린은 힘겹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떻게… 왔어요?”

그새 잔뜩 쉬어 버린 목에서는 바람 빠지는 소리가 났다. 비센테는 그녀가 안전하다는 것을 확인하자마자 메리에게로 넘겼다. 바닥에 고꾸라져 있던 카스트로가 아야야, 소리를 내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의복에서 먼지를 털어낸 카스트로가 헛웃음을 지었다. 입가에 걸린 미소와 달리, 붉게 충혈된 눈은 도무지 제정신처럼 보이지 않았다.

“비센테. 미친 건가?”

“너야말로 미치지 않고서야.”

비센테가 차갑게 가라앉은 낯으로 짓씹어 뱉었다. 서늘한 증오가 어린 얼굴은 평소보다 하얗게 질려 있었다.

“여자에게까지 손을 대는 말종인 줄은 몰랐군.”

“장난이었지. 안 그래, 영애?”

“황태후 폐하께서 직접 신분을 증명한 여자다. 네 그 하잘것없는 장난질에 놀아날 만한 사람이 아니라.”

“이 계집의 신분을 증명했다는 그 황태후께서 네 어미라는 것을 모르는 이도 있나.”

카스트로가 짜증스럽다는 듯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흉터를 가리기 위해 내린 앞머리를 그는 정작 저런 식으로 귀찮아했다.

카스트로가 손을 까닥이자 어느새 다가온 기사가 제 칼을 풀어 넘겼다.

“그리고 무례는 지금 네가 저지르고 있지, 비센테. 내게 손을 올렸다는 것만으로도 즉결 처분이 가능한 반역이라는 걸 잊진 않았을 테고.”

잘 벼려진 칼날이 제 목에 겨눠지는데도 비센테는 그저 태연했다. 어쩌면 가소롭게 여기는 것 같기도 했다. 그는 심지어 황태자 쪽을 쳐다보고 있지도 않았으니까.

카스트로의 앞에 공손히 머리를 조아리는 기사단장을 바라본 비센테가 입매를 뒤틀었다.

“처음 보는 기사 같은데. 네가 잘 쓰던 개는 어디에 두고.”

“아, 죽었어.”

태연한 대답이 도리어 섬뜩했다. 그들이 말하는 ‘개’가 물건이나 짐승이 아닌, 사람이라는 것에서 더더욱.

비센테를 겨눈 칼끝이 불안정하게 떨렸다. 차라리 멀쩡하게 겨누는 것보다 배는 더 위태로워 보였다. 카스트로의 눈동자가 묘한 광기로 번들거렸다.

“네가 죽였잖아, 비센테.”

악이 속삭이는 소리였다. 이벨린은 흠칫 어깨를 떨었다. 쉿쉿거리는 뱀의 혓바닥이, 그 차디찬 냉기가 귓가에 고스란히 달라붙었다.

“한 명만 더요. 독을 먹고 쓰러지던 날에 기사단장이 제 얼굴을 봤어요.”

순진하게도 읊던 언젠가의 목소리가 환청처럼 떠올랐다. 그가, 죽었다고…. 카스트로의 말을 오로지 다 믿기는 어려웠지만, 정황은 명백했다. 그 사내가 죽은 것은 오로지 그녀의 책임이었다.

그녀가 기사단장을 기억했기 때문에, 비센테에게 말했기 때문에.

알량한 죄책감으로 속이 불편하게 뒤엉켰다. 이벨린은 치솟는 헛구역질을 간신히 삼켰다.

“하긴. 증거조차 없지. 너는 교활해서, 좀처럼 증거를 남기지 않으니까.”

그 순간에도 비센테는 카스트로가 아닌 이벨린을 바라보고 있었다. 금방이라도 기절할 것 같이 창백하게 질린 이벨린의 얼굴에 얼마간 시선을 두던 그가 다시금 카스트로를 바라보았다.

“도대체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지?”

“…아하. 끝까지 모른 척하시겠다? 그래, 뭐. 상관없어.”

“…….”

“그 개새끼가 네 편의를 야금야금 봐주고 있었던 걸, 내가 모를 줄 알고. 네가 아니었으면 내가 죽였을 거야.”

비센테가 하, 하는 찬웃음을 뱉었다. 그가 숨을 뱉고 들이쉴 때마다 진한 위스키 향이 묻어났다. 그 지경인데도 취한 기색이라고는 없이 그저 차분했다.

“카스트로. 멍청하게 굴지 마.”

“널 여기서 죽이면 황제께선 이제 나 말고 다른 대체재도 없지. 안 그래?”

“숙부의 너저분한 자리엔 관심 없어.”

그 ‘너저분한 자리’가 황위라는 것을 감안하면, 퍽 불온하게 들리는 언사였다. 모욕에도 카스트로는 비실거리는 웃음을 물었다.

“…그래. 그 태도가 널 여태 살렸지. 네가 가진 것 중 내가 유일하게 마음에 들어 하는 거고.”

“하나 충고하자면, 카스트로. 넌 주변에 좀 더 관심을 둘 필요가 있겠어.”

“대체 이번엔 또 무슨 허튼소리실까….”

“바섬 백작 부인이 또다시 폐하의 아이를 임신했다더군.”

카스트로의 미소에 순식간이 금이 생겼다. 잇새를 아득 맞물며 음산하게도 읊조렸다.

“그 바섬의 창년이, 뭘 어쨌다고?”

“숙부께선 그 핏덩이에게 기꺼이 황자의 작위를 내리시겠지. 이안을 3황자로 만들 때 이미 한 번 관례를 모조리 무시한 전적도 있는데, 두 번이 어려울까.”

“개소리도 작작 해야….”

“개소리인지 아닌지는 네가 확인해 보면 될 일이고, 사촌.”

비센테가 비스듬한 웃음을 물었다. 사촌이라는 호칭은 조롱이었다.

“네가 이런 식으로 숙녀의 명예나 실추시키고 다닌다면, 폐하께서 특히 좋아하시겠군.”

“…….”

“알아서 발을 헛디뎌 준다는데.”

카스트로가 그 말의 진의라도 파악하려는 양 눈을 가늘게 좁혀 떴다. 과거를 되짚어 보는 듯 묘한 기색으로 가라앉았다. 개중 몇 가지 의심스러운 점을 찾았는지 얼굴이 시퍼렇게 질렸다가 붉게 달아오르길 반복했다.

그가 비센테의 목젖을 겨누던 검을 바닥으로 아무렇게나 내팽개쳤다. 끄트머리에 피부가 베이며 피가 엷게 배어 나왔다. 카스트로가 짓씹어 뱉듯 말했다.

“…이번엔 운이 좋았어. 네가 나보다 하날 더 알아서.”

황실에서 수여한 것이 분명한 기사단장의 검이 진흙 위를 나뒹굴었다. 비센테의 피가 묻은 검끝을 카스트로가 발로 밟으며 이죽거렸다.

“이게 거짓이라면 각오해야 할 거야. 그때야말로 네 근사한 얼굴에 칼자국을 내 줄 테니.”

“기대하지.”

“그러면, 이벨린. 또 봐.”

그가 제게 말을 걸리라곤 생각조차 못 했던 터라 이벨린은 흠칫 놀랐다. 카스트로는 여유로운 척 손까지 흔들어댔다. 제 꼴이 흠칫 놀라 달아나는 짐승만도 못하다는 것도 모른 채.

“그때는 조금 더 신사답게 굴 테니 긴장 풀고. 응?”

차라리 한 번 더 죽지. 이벨린은 입속으로 욕설을 짓씹으면서도 간신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 자가 제 곁을 지나, 정원의 모퉁이 너머로 사라지고 나서야 숨통이 트였다.

저주와 혐오가 반반 섞인 눈으로 카스트로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이벨린은 그제야 고개를 돌렸다.

“도와주셔서 감사해요.”

“아….”

순간적으로 비센테의 꼿꼿하던 몸이 휘청거리며 무릎이 픽 꺾였다. 고꾸라지기 직전에 그가 간신히 벽을 붙잡고 섰다. 이벨린은 놀라 그의 팔과 허리를 붙잡아 부축했다.

“괜찮으세요?”

“나야, 괜찮지….”

부축이라고는 했지만, 그건 기실 일방적으로 끌어안는 자세였다. 비센테는 귀엽다는 듯 웃으며 그녀의 어깨에 손을 얹었지만 체중은 조금도 싣지 않았다. 도리어 벽을 붙잡고 선 손등에 핏줄이 툭 불거진 것이 보였다.

이벨린은 그가 생각보다도 더 많은 양의 술을 마셨다는 것을 깨달았다. 제정신도 아니면서 여태 가까스로 버티고 있었던 것도.

그는 긴장이 풀렸는지 후, 숨을 내뱉으며 쓴웃음을 지었다.

“너야말로 죽을 것 같은 얼굴이던데.”

“저는, 괜찮아요. 전하께서 적절할 때 와 주셔서….”

“마차로 가지. 지금은 내가 조금, 힘들어서.”

그는 도리어 평소보다도 더 차분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약이나 술에 취한 사람들이 으레 보이는 흥분이라고는 조금도 찾아볼 수 없었다.

이벨린의 눈짓에 재빨리 달려간 메리가 이윽고 마부와 마차를 찾아내 쪽문으로 데려왔다.

그가 휘청거릴지도 모른다는 걱정은 기우였다. 그는 마차에 올라타는 그 순간까지 단 한 번도 발을 헛디디거나 고꾸라지지 않았다. 처음이 예외였다는 것처럼. 그 모습만 본다면 그가 약이나 술은 입에조차 안 댄 사람처럼 보일 지경이었다.

“돌아가십니까?”

“그래.”

“황자 전하는 어디로 모실까요?”

이벨린은 잠깐 고민했다.

“2황자 전하께 내려진 사택이 여기서 머니까, 우선은 집으로 가지.”

“알겠습니다.”

“되도록 급하지 않게 천천히 몰도록 해.”

마부에게 당부하고 마차의 문을 열자 비센테는 정물처럼 앉아 창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이벨린은 잠깐 눈이 부신 듯 눈매를 가늘게 좁혔다가, 표정을 바로 하며 마차 위로 올라탔다.

인기척에 그가 그녀를 돌아보았다.

“손목은?”

“손목이요?”

다소 뜬금없게 느껴지는 질문에 이벨린은 반사적으로 제 손목을 내려다봤다. 카스트로에게 잡혔던 손목이 그새 조금 더 새빨갛게 변해 있었다. 내일이면 푸르죽죽한 멍이 손자국대로 남을 것 같기는 했지만, 지금 당장은 아프지 않았다.

“멍은 좀 남겠지만 괜찮아요.”

그가 그녀의 손목을 조심스럽게 들어 올렸다. 제가 세게 쥐면 깨지기라도 할 것처럼. 천천히 살펴보던 우아한 눈매가 설핏 일그러졌다.

“아프지는 않아?”

“지금은요.”

“너는 거기 혼자 있어선 안 됐어.”

“반성은 아까 다 끝냈어요. 두 번 다신 같은 실수는 안 할 거고요. 그런데… 대체 무슨 술을 이렇게 드셨어요?”

그가 말없이 눈웃음을 지었다. 제가 그녀의 손목을 쥐고 있다는 것도 깜박 잊은 듯했다.

“대체 아까 드신 게 뭐예요? 술에 탄 거요.”

“내가 먹은 것? 아….”

반쯤 감긴 속눈썹이 뺨 위로 긴 그림자를 드리웠다. 그가 느릿하게 대답했다.

“신경안정제야.”

“…그것만으로 이렇게 되신다고요?”

“조금 독하긴 해. 꾸준히 섭취하면 의존증도 심해지고….”

“아시면서 대체 왜 그걸 드셨어요?”

“원래는 성분을 바꿔치기한 것을 먹는데. 오늘은, 운이 나빴어. 눈치라도 챈 모양인지 거절할 수 없게 만들더군.”

동공이 풀린 청보라색 눈동자가 나른하게 깜박였다. 정말 제정신이 아닌지, 두텁게 세우던 벽이 무너진 것이 보였다.

죽어도 그녀에게만큼은 제 상태를 숨길 사람이, 이렇게 순순히.

“원래는 정말 안 이래. 카스트로가 밀어 넣은 대로 족족 집어먹었다면… 벌써 광증이 돋았겠지.”

“그 이름 듣기 지겨워요.”

“그래? 미안해.”

“전하께서 이러시는 것도 마음에 들지 않고요.”

“그것도 미안해.”

“제게 사과하지 마세요.”

“…….”

“저를 그렇게 바라보지도 마시고요.”

이벨린은 입술을 짓씹었다. 머릿속이 엉망진창이었다. 이 바보 같은 남자를 끌어안고 싶었다. 욕심껏 엉망으로 헤집고, 제 것으로 만들고 싶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그 ‘엘레나’는 생각조차 못 할 정도로….

안다. 과거의 자신을 질투하는 모습이 꼴불견에 가까우리라는 것쯤은.

그녀는 이제 어떻게 노력해도 엘레나가 될 수 없었다. 이미 죽었으니까. 그때와 같은 얼굴도, 체형도, 가문도, 성품도 남아 있지 않았으니까.

이렇게 ‘변질된 것’을 영혼만 같다고 어떻게 동일인물이라고 할 수 있을까?

“착각하지 않겠다고 했지만, 전하의 말이 옳았어요.”

“…….”

“전하께서 저를 정말로 욕망할지도 모른다고 주제넘게 그런 생각이나 해요, 제가 지금.”

이것은 명백한 화풀이였다. 이벨린의 몸으로 그를 받아들일 수는 없었다. 그녀는 이 몸의 주인이 아니었고, 이 몸을 함부로 할 권리조차 없었다.

그가 한 번 더 짓밟아 주기를 바라고 내뱉은 진심이었다. 자근자근 짓밟고, 짓밟혀서 비참해져야만 이 구질구질한 감정을 멈출 수 있을 테니까.

그런데.

“왜… 부정하지 않으세요?”

순식간에 넘어간 해가 그의 얼굴에 짙은 주홍색 그림자를 드리웠다. 여태 나른했던 것이 거짓이었던 것처럼 그가 그녀를 똑바로 응시했다. 그의 얼굴에 드리운 빛과 대비되는 청보라색 눈동자가 어두운 밤 맹수의 것처럼 일렁였다.

보라색 테두리 안에 심해처럼 가라앉은 눈동자. 그 오묘한 눈에서 시선을 떼는 순간, 그대로 잡아먹힐 것만 같다는 착각이 일었다.

긴장으로 굳어 버린 이벨린의 얼굴에 비센테가 이윽고 흐린 웃음을 물었다.

“욕구가 있다는 건, 글쎄… 달리 말하자면 살고 싶다는 뜻이겠지.”

그가 여상히 입을 열었다. 고해하듯 담담하게 가라앉은 목소리는 그래서 더 진실되게 들렸다.

“나는, 그래서는 안 돼.”

그래서는 안 된다고. 크게 들이쉰 숨 때문에 빗장뼈가 들썩거렸다. 화가 나는데 대체 이걸 어디서부터 어떻게 터트려야 할지도 모르겠다. 눈앞이 흐려지는 것이, 분노 때문인지 씨근덕거리는 숨 때문인지 분간조차 가지 않았다.

“왜요?”

“…….”

“죄책감 때문에? 언제까지요? 대체 언제까지, 이렇게 살아도 산 게 아닌 척, 이미 죽어 버린 척, 다 모르는 척, 어떤 것도 느끼지도 못하는 척….”

제 고귀한 인생을, 통째로 의미 없는 무덤에나 처박고 있을 것인지.

그는 목줄에 매인 맹수였다. 그 목줄의 끝은 죽은 카스타야의 영애에게 닿아 있었다. 제대로 잡기는커녕 시취를 풍기는 그 손에, 그저 얹어 놓았을 뿐인 것을.

제힘으로 능히 벗어날 수 있으면서 그 썩어 문드러진 줄에서 풀려나고 싶어 하는 최소한의 의지조차 비센테에겐 보이지 않았다. 그것이 문제였다.

그 헐겁다 못해 수백 번은 끊어진 줄에, 인연에 미련스럽게도….

마차는 진작에 저택의 뒷문에서 멈춰 섰고, 마부며 하녀들이 눈치껏 비킨 주변은 고요했다. 정원에 켜둔 랜턴등으로부터 새어 들어오는 불빛이 서로의 얼굴을 확인할 수 있는 유일한 빛이었다.

시에나의 말이 맞았다. 그는 살아야 했다. 죄책감을 덜어 내고, 언젠가의 과거처럼 찬란히 빛나는 제 인생을 살아야 했다. 이미 골백번도 더 썩었을 시체 따위는 잊고.

이벨린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의 앞으로 다가가 무릎으로 좌석을 짚었다. 등받이에 손을 얹어 제 체중을 받친 채로 앉아 있는 비센테를 내려다보았다. 깍지 낀 손을 허벅지 위에 느슨하게 올려 두었던 비센테의 눈매가 설핏 일그러졌다.

“왜….”

제 영역을 단번에 침입한 자를 향한 반사적인 경계였던 것 같다. 이벨린이 손을 뻗자 그가 그녀의 손목을 붙잡았다. 아프지는 않았다. 힘으로 강제한다기보다는, 그저 존재를 확인하며 매만지는 것 같은 움직임이었다.

그의 이마 위로 손을 뻗어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자, 고개가 손길을 따라 부드럽게 젖혀졌다.

이벨린은 제어하기 힘든 짐승을 다룰 때처럼 부드럽게 읊조렸다.

“쉬이….”

비센테의 목울대가 울렁거리는 게 보였다. 오만하던 눈매가 무방비하게 누그러든다. 이벨린은 잡히지 않은 반대편 손으로 그의 눈가를 쓸었다. 그가 순순히 눈을 감자, 그녀는 제 손바닥으로 그의 눈꺼풀을 완전히 덮었다.

“비센테.”

그녀의 목소리가 살짝 떨렸다. 이벨린은 그가 얌전히 듣고만 있다는 것에 용기를 얻었다. 완전히 취한 게 분명했다. 그에게서 풍기는 독한 위스키의 향만으로도 취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술은, 여태껏 단 한 방울조차 입에 대지도 않았는데도.

아마도 그는 내일이면 기억조차 제대로 못 할 것이다. 제가 그의 이름을 부르는 것만으로도 질색하던 사람이, 이렇게 가만히 있는 것을 보면.

“…하.”

설령, 기억하더라도 한밤의 꿈이라고 생각하겠지.

“네가 나의 구원이야. 너는 나를 구했어.”

어차피, 이 모든 것을 그는 기억조차 못 할 테니까.

무의식의 저편에라도 남아 준다면 기꺼울 것이다. 엘레나가 정말로 그를 찾아왔다고, 그가 있어서 괜찮았다고, 구원이었다고 그렇게 말했다고.

그가 그렇게만 믿어 준다면.

“네 덕분에 많은 것이 정말 괜찮아졌….”

그러나 다음 순간 그녀의 목과 허리가 억세게 붙잡혔다. 여태 순순했던 것은 이 순간을 위한 올가미였던 것처럼. 이벨린은 그대로 좌석의 아래로 끌어 내려졌다. 순식간에 그를 내려다보던 자세에서, 올려다보는 자세로 바뀌었다.

비센테가 그녀의 양 손목을 아프지 않게 붙잡았다. 좁은 마차 안에 애달픈 숨이 터졌다.

“엘레나.”

그는 이것이 꿈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최소한 환각이라고. 그렇지 않다면 저런 눈으로 ‘이벨린’을 바라볼 리 없었으니까.

그가 느릿하게 눈을 깜박였다. 제가 절박하게도 붙잡고 있는 게 현실인지, 환각이나 꿈이 아닌지 혼란스러워하는 얼굴이었다. 이윽고, 아무래도 상관없어진 모양으로 웃었다.

웃고 있는데도 우는 것 같았다.

“너는, 항상 너무 쉽게 죽어.”

쉽게 죽는다고. 그 말은 묘했다. 마치 그녀가, 여태껏 수십 번은 더 죽기라도 한 것처럼…. 그녀가 죽던 순간을 여러 차례 곱씹고 곱씹은 끝에 정말로 그렇게 죽어 버리고, 죽어 갔다고 믿는 기색이었다.

서서히 스민 광증이 그를 어디서부터 어떻게 갉아먹었는지가 이제야 보였다.

“네가 나를 망가뜨리고 아프게 하는 것은 괜찮아. 너만 아프지 않았으면 좋겠어. 네가 두 번 다시 내 눈앞에서 다치지 않았으면 좋겠어. 내가 어떻게, 어떻게 해야….”

그가 창백한 얼굴로 읊조렸다. 성화처럼 아름다운 눈동자에 눈물이 고였다.

이내 그녀의 뺨 위로 톡 떨어져 뜨거운 감각을 남기고 흘렀다.

“네가 죽지 않을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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