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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서 오세요, 황자 전하. 그리고 레녹스 백작 영애. 이렇게 와 주어 고마워요.”
“환대에 감사합니다, 부인.”
안드라데 공작 부인의 유리 정원은 시절이 어긋난 꽃들로 화려했다. 사방에서 피어오르는 꽃과 과실의 향은 향기롭다기보다는 숨이 막힐 정도로 짙었다. 그 향에 미약한 현기증을 느끼면서도 이벨린은 비센테를 따라 우아하게 인사를 돌려주었다.
“초대해 주셔서 감사해요.”
“오늘도 무척이나 아름답네요, 레녹스 백작 영애. 오늘 참석한 사람들이 낭독은커녕 모두 영애만 바라보는 건 아닌지 모르겠어요.”
“좋게 봐주셔서 감사해요. 공작 부인의 낭독회에 대한 명성은 익히 들었어요. 설레서 어젯밤 잠까지 조금 설쳤답니다.”
“이쪽으로 와요. 화원의 꽃들이 아름답기는 한데… 아가씨들에게는 조금 독하리라는 것을 미처 고려하지 못하였어요.”
팔짱을 끼는 손길은 살갑기까지 했다. 어찌하냐는 듯 비센테를 돌아보았지만, 그는 제게 다가오는 하인에게 블레이저를 넘기며 다른 귀족들의 인사를 받기에도 바빴다.
이벨린은 멈칫한 적조차 없다는 듯 다시금 환하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그래도 꽃들이 무척 아름다운걸요. 부인의 정원에 에스페다에서 가장 아름다운 자카란다 나무가 있다고 들었어요.”
“그런 소문을 벌써.”
“나중에 제게도 자랑해 주셔요.”
“물론이에요. 꽃이 피는 계절에 한 번 더 초대할 테니, 그때도 와 주어야 해요.”
공작 부인이 기분 좋은 웃음소리를 내며 웃었다.
이벨린은 제게는 늘 냉한 태도를 고수하던 안드라데 공작 부인을 떠올렸다. 그녀가 처녀 시절부터 여태껏 황후의 충성스러운 개처럼 굴고 있다는 것도.
애초에 그녀가 안드라데 공작과 결혼할 수 있었던 것조차, 황후의 입김 덕분이었으니 따지고 보면 당연한 충성이었다.
“아, 그리고 이것을.”
이벨린의 손짓에 얌전히 뒤따르던 메리가 한 걸음 다가서며 작은 벨벳 상자를 바쳤다. 이벨린은 그것을 받아 안드라데 공작 부인에게 다시금 내밀었다.
“부인의 살롱에 빈손으로 올 수는 없죠.”
“어머나, 예뻐라!”
상자를 열자 아름다운 보석 브로치가 모습을 드러냈다. 자색 루비와 에메랄드가 자카란다 꽃 모양으로 섬세하게 세공되어 있었다.
공작 부인의 입매가 흐뭇하게 올라갔다.
“이런 것을 언제 또 준비하셨어요?”
“부인께 초대장을 받고 그 저녁에 곧바로 의뢰했어요. 사용된 보석은 직접 골랐고요.”
“어쩜. 안목이 좋으세요.”
안드라데 공작 부인의 표정이 눈에 띄게 우호적으로 변했다. 그녀에 대한 인간적인 호감이라기보다는, 최소한 자신과 같은 것을 향유하는 특권층을 바라보는 시선으로.
“고마워요. 다음에 저도 영애의 사랑스러운 티 파티에 초대해 주셔요.”
“물론이에요.”
절대로 그럴 일은 없을 것이라고 다짐하면서도, 이벨린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안드라데 공작 부인은 어차피 뼛속까지 황태자의 사람이었다. 아무리 친분을 쌓아봐야 이쪽으로 돌아설 일말의 여지조차 없는.
이 여자에게 들이는 공의 절반만 들여도 비센테에게 충성할 귀족들이 넘쳤다. 여태 정치적 중립을 지키는 대귀족들도 남아 있었고.
‘그나마 안드라데 공작 부인의 살롱에서 건질 만한 사람을 고른다면.’
때마침 도착한 커다란 응접실 안에는 카우치며 의자, 소파들이 둥글게 배치되어 있었다. 드문드문 자리를 채운 귀족들과 그보다 바깥에 공손히 대기하고 있는 전도유망한 문인들이 보였다.
물 흐르듯 흘러가던 시선이 한 곳에서 정확하게 멈추었다. 그리고 그것과 동시에 그녀의 등 뒤에서 누군가가 접근했다.
“공작 부인. 그리고… 레녹스 영애.”
목소리를 듣자마자 남몰래 한숨부터 내쉰 것은 불가항력이었다. 이벨린은 우아하게 뒤로 돌아섰다. 벌써부터 앞으로 마주할 모든 게 지겨웠다.
“비탈리 영애.”
“파르디타, 어서 오렴.”
이벨린이 적당히 예의를 차린 것과 달리, 안드라데 공작 부인은 활짝 웃으며 파르디타의 팔을 붙잡았다. 친밀함을 표시한다기보다는 복종에 가까운 자세였다.
평생 고개를 숙일 만한 일이 몇 번 없었을 안드레다 공작 부인이 저래야만 하는 것은, 그녀보다 한참은 어린 파르디타가 황후의 조카이기 때문이다.
“아는 얼굴이 없어서 지루하던 참이었어요. 카스트로 오라버니도 아직은 도착하시질 않아서.”
앙큼한 고양이같이 치켜 올라간 눈매를 사르르 접는 사랑스러운 여자의 얼굴이 이렇게 지긋지긋하게 느껴질 수 있다는 게 신기했다.
이벨린은 안드라데 공작 부인의 문학 낭독회와 이 여자 중 제 인생에서 가장 먼저 치워 버리고 싶은 게 무엇인지 잠깐 고민했다.
어차피 쓸데없는 고민이었다. 어느 것 하나 그녀의 마음대로 치울 수 없는 것들이었으니까.
“저런. 그래도 모두 훌륭한 청년들이니 한번 이야기라도 나눠 보지 않고.”
“어쨌든 초대해 주셔서 감사해요. 덕분에… 레녹스 영애도 만났고요.”
파르디타가 제 오빠 때문에 아직 작위 없는 처녀에 불과하다면, 이벨린은 가문의 유일한 상속녀로서 백작 영애라는 호칭으로 불리는 것이 마땅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달랑 작위를 빼고 부르는 것에서 미묘한 악의가 느껴졌다. 문제는, 이벨린이 그런 사소한 호칭 따위에는 아무런 타격조차 없다는 것이겠고.
벌써부터 귀찮았지만, 이벨린은 귀찮지 않은 척 눈썹을 파르르 떨며 내리깔았다. 제 생애 다시없는 모욕이라도 들은 것처럼. 파르디타의 눈에 잔인한 만족감이 어리는 것은 심지어 귀엽기까지 했다.
“레녹스 영애께선 혼자 오셨나요?”
“비센테 전하라면 안드라데 공작 각하와 측실에서 말씀을 나누고 계세요.”
“…….”
고작 비센테의 이름을 부른 것만으로도 파르디타의 의기양양하던 표정이 무너진다. 그 반응을 눈치챈 안드라데 공작 부인이 분위기가 더 이상하게 흘러가기 전에 부드럽게 화제를 돌렸다.
“곧 첫 낭독이 시작되겠어요. 이쪽으로 오세요. 사내들이야, 어차피 세 번째 낭독 전까진 저들끼리 알아서 즐길 테고….”
이벨린은 공작 부인의 못마땅한 시선을 따라 반쯤 열린 문으로 시선을 돌렸다.
고만고만 모여 있는 사내들 사이에서 비센테는 한눈에 시선을 끌었다. 부연하게 피어오르는 시가 연기 속에서도 빛을 잃지 않는 금발, 흐릿한 덕에 더 몽환적으로 보이는 눈빛… 여자를 미치게 하는 것들.
이벨린은 공작이 비센테에게 위스키가 담긴 유리잔을 내미는 것을 보았다. 그가 잔을 잡자 그 위로 흰 가루가 쏟아졌다. 이벨린은 저도 모르게 움찔했다.
그게 뭔지 확신할 순 없지만, 적어도 좋은 것은 아닐 터였다.
“……!”
그녀가 저지하기 위해 반사적으로 한 걸음 앞으로 내딛는 것과 동시에 비센테와 시선이 마주쳤다. 입술이 천천히 움직인다.
‘그대로 있어.’
짙은 눈동자가 그녀를 직시했다. 그녀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로 그가 천천히 잔에 입술을 묻었다. 셔츠깃 사이로 살짝 젖혀진 울대가 위아래로 움직이는 것이 보였다. 그는 기어이 위스키를 다 비우고 나서야 잔에서 입을 뗐다. 심지어 기껍다는 듯 웃기까지 했다.
무슨 즐거운 농담을 했는지 무리에서 커다란 웃음이 터져 나왔다. 누군가 비센테에게 큐대를 건넸고, 잔은 비워지기 무섭게 재차 채워졌다. 이벨린은 그가 지겹다는 듯 인상을 찡그리던 찰나의 순간을 놓치지 않았다. 일부러 느긋하게 반쯤 내리뜬 눈 아래 여전히 형형한 눈빛도.
그것은 어쩐지 위안이 되었다.
아직까지는 비센테가 버틸 수 있다는 것이.
그리고 지금 이 시간이, 그녀에게만큼이나 그에게도 끔찍하리라는 것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