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는 이벨린의 뺨 위로 엷은 웃음을 터트렸다. 복수에 대해서 물을 때까지만 해도 새하얗게 질렸던 여자의 얼굴이, 순식간에 더 붉어질 수도 없을 정도로 달아올랐다. 조금 전 결연한 결심을 한 것처럼 굳은 표정은 온데간데없이 변명하는 목소리가 기어들어 갔다.
“소문, 소문을 내려면… 이게 가장 확실해서….”
“정말 그것뿐인가?”
“…….”
“네 욕심을 채우려는 게 아니라?”
“이용할 수 있는 것을 굳이 이용하지 않을 이유는… 없으니까요.”
변명을 오물오물 뱉어내는 입술이 붉다. 목을 감싸 안은 것만으로도 끌어낼 용기를 모두 끌어낸 것인지, 그녀의 팔에서 힘이 조금 풀렸다. 슬쩍 뒤로 물러나려는 그녀의 팔을 비센테가 다시금 붙잡았다.
여자의 떨리는 숨결에선 샴페인의 향이 물씬 피어났다. 사과와 복숭아, 배꽃의 달큼하고 싱그러운 향. 이제 그는 제 뺨 위에 흩어지는 여자의 숨을 느낄 수 있었다. 입술 사이의 거리는 고작해야 손가락 두 마디 정도였다.
연회장에서 테라스로 새어 들어오는 불빛은 희미했고, 여자는 언제나처럼 어둠 속에서 엘레나를 더 떠오르게 만들었다. 하물며 그녀를 연상시키는 옷과 머리, 보석까지 주렁주렁 매단 지금에야.
여자는 엘레나의 모습을 한 독초였다. 그것도 제 손으로 직접 공들여 피워 낸. 그걸 알면서도, 이벨린의 물기 젖은 회푸른 눈동자를 마주한 순간 시선을 뗄 수가 없었다. 도리어 함정에 빠진 것만 같았다.
그는 여자의 가냘픈 목을 쥐고 있던 손에 살짝 힘을 주었다. 놀란 듯 여자가 숨을 흐느낀다. 그 모습이 사랑스럽다고, 그렇게 생각한 순간 차가운 얼음물을 끼얹은 것처럼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
부드럽게 흘러가던 감정 위로 진득한 죄책감이 엉겨 붙었다. 사랑? 그가 감히?
“전하?”
갑자기 서늘해진 그의 태도에 여자가 고개를 갸웃거리는 게 보였다. 그 목소리에 깜박 정신이 들었다. 그는 느릿하게 시선을 던졌다. 바짝 붙어 있는 배, 얽힌 다리, 그의 손바닥 아래에서 여리게 뛰는 맥박. 방금 전까지만 해도 그의 경계심을 허물었던 그 모든 것이 이제는 조금도 기껍지 않았다.
순진하게도 여전히 저를 걱정하는 이벨린의 눈과 마주하자, 걷잡을 수 없는 자기혐오가 밀려들었다. 서늘한 얼굴 위로 오만한 가면이 드리웠다.
“네 말이 옳아. 이용할 수 있는 것을, 이용하지 않을 이유가 없지.”
“…….”
“입, 벌려.”
이벨린은 반사적으로 입을 벌렸다. 명확하게 상황을 이해했다기보다는, 그저 놀라 다물지 못한 듯했다. 비센테는 그것을 그대로 삼켰다. 연한 점막이 벌어지며 거칠게 스쳤다. 여자가 움츠리는 것과 동시에, 목 뒤로 옮겨간 손이 도망가지 못하도록 깊숙이 받쳤다. 혀와 혀가 얽히며 질척이는 소리를 냈다.
마음을 나누며 서서히 깊어지는 교감이 아니라, 난폭하고 잔인한 약탈이었다. 조금의 배려도 없었다. 노긋한 입술의 궤적이, 떨림이, 설렘이, 미약한 기대가… 그대로 이어진 채 고스란히 느껴졌다. 그는 헐떡이는 여자의 숨을 억지로 삼켰다. 힘겨워하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비참함을 느끼도록 짓이겼다. 그녀가 입술을 붙인 채로 흐느꼈다.
“으흣….”
여자를 끌어안지 않기 위해선 상당한 자제심이 필요했다. 테라스를 붙잡은 손에 힘이 바짝 들어갈 찰나였다. 갑자기 연한 살갗에 송곳처럼 따끔한 통증이 느껴졌다.
입술을 떼자 아연실색한 여자의 낯이 보였다. 터진 입술 사이로 비릿한 피의 맛이 스며들었다.
“마, 맙소사. 괘, 괜찮으세요?”
그의 얼굴을 매만지며 확인하는 손길이 부산스럽다.
“죄, 죄송해요. 숨이, 막혀서….”
비센테는 피가 배어 나오기 시작한 입술을 손가락으로 쓸었다. 물린 것은 그인데, 정작 상처를 낸 여자가 울 것 같은 얼굴을 했다. 잘 이어지지도 않는 말은 여태 헐떡이듯 몰아쉬는 숨 때문인 것 같았다. 그 와중에도 희망으로 반짝이는 눈과 상기된 뺨은 싱그럽다 못해 아름다웠다. 그는 쓴웃음을 흘렸다.
“힘드네.”
“정말, 죄송….”
“너를 사랑하는 척하겠다고 했지. 너는 착각하지 않겠다고 했고.”
“…….”
“이런데도 괜찮겠어?”
그의 차디찬 조소에 말갛게 올려다보던 이벨린이 눈이 일순 흐려졌다. 이런데도 괜찮겠냐는 말은, 그녀보다는 저 스스로에게 묻는 질책이나 다름없었다. 위험을 감지한 짐승처럼 잔뜩 으르렁대는 것에 지나지 않았다. 그의 의도대로 이벨린에게는 전혀 다른 뜻으로 들린 모양이었지만.
그는 그녀에게서 몸을 떼어 내며 헝클어졌던 크라바트를 제대로 맸다.
“엿보던 쥐는 사라진 모양이군. 이만 정돈하고 나가지.”
비센테는 여자의 실망을 애써 모른척했다. 굳이 오해를 정정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의도했고, 여자가 제게 정이 떨어진다면 차라리 잘된 일이었다. 이벨린은 비틀거리며 그에게서 조금 멀어졌다.
“…….”
그래, 실망해라. 진저리치며 멀어져라.
“착각은, 안 해요.”
꾹 주먹 쥔 손으로, 눈가를 가린 이벨린이 중얼거리듯 말했다. 억지로 울음을 참는 기색이 역력했다.
“다만, 부탁드리고 싶은 건 있어요.”
“…부탁?”
“이제 그만 제게도 ‘진짜’를 공유해 주세요.”
다시금 그를 바라보는 여자의 시선은 젖어 있었지만, 곧았다. 그 결연한 눈빛에, 당당한 태도에, 말을 전하는 방식에 기시감을 느끼고 만 것은 그가 과민하기 때문일 터였다. 수도로 올라온 뒤부터 엘레나의 환영이 시도 때도 없이 들이닥치기 때문에…. 그는 애써 길어지는 생각을 갈무리했다.
“네게 주어진 역할은 하나뿐이야. 카스트로를 유혹하는 것.”
“좀 더 잘 해내고 싶어요. 지금은 체스판 위의 말조차 못 될 테니까….”
여자는 말을 멈추고, 호흡을 골랐다.
“전하와 같은 이상을 바라보고 싶어요.”
그는 헛웃음을 터트렸다.
“주제 파악은 잘하겠다더니.”
“쓸모는 증명해 냈잖아요. 제게도 역할을 주세요.”
“아직 네 복수의 이유를 제대로 말하지도 않았잖아.”
여자의 낯빛이 조금 흐려졌다. 그 주제가 다시 튀어나올 거라곤 상상도 못 한 얼굴이었다. 어떻게든 이야기를 틀었다고만 생각했겠지. 그녀가 필사적이면 필사적으로 굴수록, 더 눈에 띄는 것은 생각도 못 하고.
비센테는 여자의 점점 더 빨라지던 목소리를 떠올렸다. 눈꺼풀을 깜빡이는 것조차 잊은 채 굳은 얼굴과 태연한 척 굴던 목소리의 괴리, 그리고 그게 제법 유쾌했다는 것…. 가끔, 이벨린은 그녀를 너무 많이 닮았다.
비센테는 문득 느껴지는 기척에 이벨린에게서 시선을 뗐다. 그들의 바로 곁에, 죽은 자의 흰 발이 보였다.
“전하?”
“이만 무도회장으로 돌아가지.”
“그러면.”
“…당장 말하고 싶지 않으면, 네가 준비될 때까지 기다리지.”
“정말이세요?”
이벨린이 반색하며 속삭였다.
“그래.”
학술원에 대한 진술이 사실이라면, 곧 관련된 정보는 남김없이 그의 손에 들어올 터였다. 이벨린이 입을 열든 열지 않든 하등 관계없이. 기대는 크지 않았다. 여자의 말은 처음부터 끝까지 거짓이었으니까.
그녀는 제가 거짓을 말할 때의 얼굴을 모른다. 그게 얼마나 엘레나의 버릇과 맞닿아 있는지도 모를 것이다.
가라앉았던 속이 서서히 엉망으로 뒤엉켰다. 그는 제가 이벨린에게 무르게 굴고 있다는 것을 인지했다. 거짓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그 위에 위태롭게도 신뢰를 쌓았다.
복수를 말할 때만큼은 강렬해지는 저 눈이, 자신과 닮았기 때문에.
다음 날 오전 내내 이벨린의 응접실은 고요했다. 밤을 새우는 긴 연회에 아직 사람들이 깨어나기도 전이기는 했지만, 그것을 감안해도 지나치게 고요했다. 연회나 살롱에 참석해 달라는 편지가 줄을 이을 것이라는 예상에서 완벽히 어긋나는 오전을 보냈다.
“아가씨. 말씀하셨던 가십지예요.”
“고마워.”
이벨린은 메리가 가져다준 몇 종류의 가십지를 서둘러 읽었다. 2황자에 대한 언급은 전면에 배치되어 있었지만, 그녀에 대해서는 브리타냐 출신 상속녀로 짤막하게 언급되어 있었을 뿐이었다. 간밤의 비센테의 손을 잡았을 때만 해도 불타오르다 못해 뜨겁던 시선들과는 달리…. 이 가십지를 배포하는 배후들이 누구든 아직까지는 조심스러운 행보였다.
그게 아니라면 그녀와 비센테가 얽히는 것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거나.
뭐가 됐든, 이런 식으로 여론을 통제하려 드는 것도 얼마 가지는 못할 터였다. 직접적으로 비센테와 그녀가 자주 사교계에 모습을 내비치면 내비칠수록. 관심은 더해져만 갈 테니 결국 시간문제였다.
이벨린이 가십지를 내려놓는 것과 동시에 시에나가 부드럽게 말했다.
“그러고 보니 어제 춤은 한 번도 추질 않았다면서.”
“어찌 아셨어요?”
이벨린은 따듯한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찻잔을 손에 쥐다 말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긴 녹색 카우치에 앉아 있던 시에나가 웃으며 대꾸했다.
“클라우디아가 애써 꾸며 놓은 보람이 없다며 한탄하더구나.”
“그건… 제가 긴장해서 전하께서 배려해 주셨어요.”
“전하께서?”
“아무래도 사람들의 시선을 받는 일이, 익숙하지는 않으니까요.”
“혹시 다른 일이 있지는 않았고?”
이벨린은 시에나의 우아한 미소 아래에 깔린 불안을 감지했다. 이벨린은 두 손을 공손히 무릎 위에 올려 두었다. 잠시나마 잊고 있었던 ‘이벨린’의 비천한 신분, 그리고 비센테. 시에나는 황자의 모후였으니 제 아들이 신분도 불분명한 고아와 필요 이상으로 가까워지는 것은 경계하는 것은 마땅히 당연한 일이었다.
“별다른 일은 없었어요.”
“그렇다면 다행이지만….”
사교계의 모두를 속인다는 목적은 분명했지만, 시에나까지 불안해하도록 둘 수는 없었다. 그녀는 이런 일을 모두 감당하기엔 이미 지나친 불행을 감당하고 있었다. 이벨린은 그녀가 사제복을 입지 않을 때만큼은 여태 검은 옷을 고집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죽은 남편을 기리기 위해서…. 그런 여자에게 아들이란 얼마나 대단한 의미일까.
“무엇을 걱정하시든, 그런 종류의 일은 일어나지도 않았고, 앞으로도….”
“맙소사, 이벨린.”
그녀의 이어지는 말에 시에나가 엷은 탄식을 내뱉었다.
“그런 의미로 말한 게 아니란다. 질책처럼 들렸다면 미안하구나. 정말, 그런 뜻이 아닌데.”
“…….”
“그런 것을 경계했다면, 처음부터 황자 전하께서 무엇을 약속하셨든 널 거두지도 않았을 거란다.”
이벨린의 불안을 잠재우려는 듯 시에나가 재차 말을 얹었다. 시에나는 눈이 보이지 않는 대신 타인의 감정에 민감하게 반응하고는 했다. 고작 몇 마디의 말에서 불안을 짐작하고, 위로하려는 지금처럼.
그게 진심인지 아닌지는 차지하고서라도.
“말이 나온 김에 이야기하자면, 사실 나는 네가 아주 비센테를 데려갔으면 싶어.”
시에나가 장난스럽게 덧붙인 말에 도리어 펄쩍 놀란 것은 이벨린이었다.
“네?”
“애써 그렇게 생겨 먹게 낳아 줬는데도, 여태 너 말고는 곁에 누굴 두지도 않았고.”
비센테. 그녀의 아들인데도 시에나가 황자를 이름 대신 지위로 부르는 일이 더 흔한 것을 고려하면, 저것은 그야말로 온전히 드러낸 진심이었다.
“…좋게 봐주신 것은 감사하지만 저는 제 주제를 단 한 번도 잊은 적 없어요.”
그리고 시에나가 얼마나 진심이든, 그녀가 돌려줄 답은 하나뿐이었다.
“네 주제가 어디가 어떻다고.”
“시에나께서도 아시듯….”
“너는 내 먼 친척이지. 그리고 귀한 가문의 하나뿐인 상속자고.”
시에나가 당연한 듯 읊어대는 저 조건들이, 비센테가 제 머리 위로 씌워 준 거짓이라는 것은 이 방에 있는 모두가 다 알았다. 아주 조금만 뒤틀려도 이벨린뿐만 아니라, 시모라까지 뒤집어쓸 불명예도. 그럼에도 아무것도 모른다는 것처럼 말갛게 내어놓는 말은, 정말 진지한 권고였다.
“클라우디아의 말로는 어제 둘이 그렇게 다정했다던데.”
네가 원하면 정말 그것을 네 것으로 가져도 되지 않겠냐는. 이벨린은 쓰게 웃었다. 기실 그녀의 주제가 어떻든, 시에나가 얼마나 그녀를 마음에 들어 하든, 처음부터 하등 중요하지도 않은 문제였다. 애초에 비센테의 마음이 단 한 번도 ‘이벨린’에게 기운 적도 없는 와중에는.
“황자께선 정말 조금도 저를 그런 식으로 생각하지 않으세요.”
“글쎄…. 정말 그럴까?”
시에나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근처에 있던 하녀를 물렸다.
“그러고 보니, 이벨린. 네게 줄 게 있었단다.”
“제게요?”
“그래. 이리 가까이 오렴.”
이벨린은 시에나의 손짓대로 의자에서 일어나, 카우치의 앞까지 걸어갔다. 그녀의 발소리를 자세히 들으려는 것처럼 귀를 기울인 시에나가 부드럽게 제 옆의 의자를 톡톡 쳤다. 이벨린의 무게만큼 카우치가 가라앉자, 시에나는 곁에 있던 사이드 테이블을 더듬어 납작한 상자를 찾아냈다.
“이걸 가져오려고 급히 라 카벨로스의 집사를 재촉했지.”
라 카벨로스. 시모라 가문의 오래된 성이 위치한 영지의 이름이었다. 상자는 그 자체만으로도 아주 아름다웠다. 세공은 섬세했고, 보석들이 절제된 양식으로 우아하게 박혀 있었으며, 오랜 세월 동안 잘 관리된 흔적은 고풍스러움을 더했다.
“이걸… 제게 주신다고요?”
“열어 보렴.”
시에나는 묘하게 들뜬 기색이었다. 그녀의 재촉에 이벨린은 조심스럽게 걸쇠를 열었다. 그 안에 담긴 것을 본 순간 순간적으로 말문이 막혔다.
“폐하, 이건….”
애써 입을 연 것이 무색하게도 그녀는 그 말을 차마 다 잇지도 못했다. 어떻게 당혹하지 않을 수가 있었을까. 그 안에 담긴 것은 몇 세대 전의 황제가 시모라 가문 출신 황후에게 내렸다는 티아라였다. 이벨린은 아주 어린 시절, 이 티아라를 시에나가 지극히 중요한 자리에나 아껴 쓰던 것을 기억했다.
“이제 시모라에는 2황자 뿐이고, 이것을 의미 있게 쓸 만한 여자도 없지.”
시에나는 열린 상자를 더듬어 티아라를 들어 올렸다. 부드럽고 완만한 곡선을 그리는 몸체에 빼곡히 박힌 다이아몬드가 아름답다 못해 시선을 빼앗았다. 고개 숙인 이벨린의 머리 위로 시에나가 어설프게 올려놓은 것을, 이벨린이 제대로 고쳐 썼다. 그 모습이 마치 보이기라도 하는 것처럼 시에나가 흐뭇하게 웃었다.
“잘 어울리는구나.”
“…하지만 제게는 너무 과분한 물건이에요.”
이벨린은 어색하게 웃으며 티아라를 만지작거렸다. 그리 무겁지도 않은 티아라의 무게가, 묵직하게도 목과 어깨를 짓눌렀다.
“마음은 감사하지만 빌려주시는 것으로 생각할게요. 잘 쓰다가 꼭 돌려드릴게요.”
“나는 언제고 네게 이것을 줄 작정이었단다.”
이벨린이 시에나의 말에서 위화감을 느끼기도 전에 손이 붙잡혔다. 그저 곁에서 보기엔 피로하여 잠시 가깝게 기댄 것처럼 몸이 기울었다. 이벨린이 그녀를 부축하듯 붙잡자 시에나가 그녀를 가볍게 끌어안았다. 귓가에 속삭이는 목소리가 닿았다. 희미하지만 분명하게.
“네가 숨기는 것을, 구태여 묻지는 않으마.”
“…….”
“잘 돌아왔어. 널 다시 보게 되어 내가 얼마나 기쁜지 모를 거야.”
기쁘다고, 잘 돌아왔다고. 명확하게 무엇이라 지칭하지는 않았지만, 그 순간 그녀는 시에나가 제 정체를 눈치챘다는 것을 깨달았다. 등 뒤로 여운이 소름처럼 끼쳤다.
이벨린은 필사적으로 부정했다. 덜덜 떨리는 제 목소리가 두서없이 이어졌다.
“저를 누구로 착각하셨는지는 모르겠지만, 시에나. 저는 돌아온 적이 없고… 갑자기 제게 왜 이러시는지조차 짐작되지 않아요. 제가 뭔가를 잘못했나요?”
“쉬, 진정하렴. 내게는 거짓으로 꾸며 낼 필요가 없단다.”
“…….”
“내가 아무리 부족한 어미여도, 딸처럼 키운 널 몰라볼까.”
응? 엘레나.
이벨린은 맥이 탁 풀린 채로 눈을 꽉 감았다. 누군가에게 이 비밀을 털어놓고 편해지고 싶다는 욕망이, 제가 그저 미친 것이 아니라 한때 정말 존재했던 사람이었다고, 이해를 주고받고 싶다는 간절함이 턱 끝까지 차오른 순간.
“얼마나, 너 혼자 얼마나 힘들었니….”
울음에 젖은 시에나의 목소리가 귓가에 흩어졌다. 순식간에 고인 눈물이 어찌할 새도 없이 뚝뚝 떨어졌다.
아.
이벨린은 파르르 떨리는 손을 시에나의 등에 올렸다. 다른 것을 생각할 겨를도 없이 꽉 끌어안았다.
억눌린 목소리가 엉망으로 흘러나왔다.
“어떻게… 아셨어요?”
“처음 본 날부터 말했지 않니. 보이지 않아서 더 잘 아는 게 있다고.”
“…….”
“겉모습과 말투는 그럴듯하게 꾸며낼 수 있지만, 사람들은 가끔씩 그들의 발을 잊어.”
시에나의 미소는 그저 편안해 보였다. 그녀가 이벨린을 부드럽게 놓아주며 말했다.
“네가 일전에도 후작 몰래 와서 가끔 내 하녀인 척 시중을 들어주던 것도 알고 있었지.”
“…그때도 눈치채셨어요?”
“어릴 적 네 걸음걸이를 교정한 것이 나인걸. 나와 발소리가 똑같은데, 몰라보기도 어렵지.”
“…….”
“비센테에게는 미안하지만… 이번에도 모른 척해 주는 편이 낫겠지?”
이벨린은 꽉 막힌 숨을 가까스로 삼켰다. 애써 웃었다가, 웃음을 가장할 필요조차 없다는 것을 깨닫고 무표정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부디, 그렇게 해 주세요.”
“그렇다면 하나만 약속해 주렴.”
“제가 들어줄 수 있는 것이라면 무엇이든요.”
“네가 어디로든 떠나기 전에, 그 애의 죄책감을 덜어 주었으면 해.”
죄책감을 덜어 주라고. 시에나의 말이 맞았다. 그녀가 영원히 비센테의 곁에 있을 작정이라면, 언제든 그녀의 정체를 밝히면 그만이었다. 언제 사라질지 모르는 불안정한 영혼으로는… 겨우 끝을 생각하지 않는 것이 고작이었다.
“그 값이라고 치면 이 티아라가 조금도 아깝지 않지. 물론, 이대로 네 예물이 되어도 좋고.”
“그 부분은 약속… 드릴게요. 그게 전하께서 더 상처받는 일이 아니라면요.”
갑작스레 들린 인기척에 그녀의 손을 꽉 잡고 있던 시에나가 몸을 떼는 것과 동시에, 열린 문을 두 번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메리였다.
“이벨린 아가씨.”
이벨린은 젖은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당혹해 보이는 메리의 곁에, 처음 보는 하인이 서 있었다.
“2황자 전하께서 급보를 보내셨어요.”
“전하께서? 들어오렴.”
하인에게서 건네받은 쪽지를 메리가 공손히 쟁반 위에 받쳐 들어 내밀었다. 반으로 접힌 푸른 종이였다. 연서를 주고받을 때 흔히 쓰이는 작약 한 송이가 그사이에 놓여 있었다. 이벨린은 꽃을 빼어 메리에게 건네주고 쪽지를 펼쳤다. 내용은 단순했다.
[네가 원하던 것]
유려한 필체로 휘갈겨 쓴 브리타냐어 아래에 웬 주소가 적혀 있었다. 잠깐은 숨이 막혔다가 부랴부랴 내려놓았다. 그녀가 원하던 ‘진짜’라고. 저도 한 몫 가담하게 해 달라는 그 어설픈 투정이 정말로 먹힌 걸까?
어쨌든 그가 필요로 할 때에만 불려 나가는 인형이 아니라, 스스로 행동할 수 있는 반경이 넓어지게 된다는 것은 좋은 일이었다. 설령 이게 저를 시험하는 또 다른 함정이라고 해도.
이 기회를 잘 이용한다면 역으로 그의 신뢰를 얻어 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
“메리. ‘그걸’ 가져다줘. 외출할 거야.”
“네, 아가씨.”
잠깐 멈칫했던 메리가 서둘러 그녀의 방으로 달려갔다. 큰 소리를 내며 방문이 닫히자 시에나가 어깨를 움찔 떨었다.
“지금 가려고? 곧 해가 저물 텐데.”
시에나가 걱정스럽게 물었다. 이벨린은 그녀의 손을 한 번 꽉 잡았다가 놓았다.
“걱정하지 마세요. 위험한 곳도 아니고, 2황자 전하께서도 같이 계실 텐데요.”
“황자께선 군인이니까, 어디 내놓아도 걱정 없다만….”
“정말 괜찮아요. 비야톨레드의 별저로 부르셨어요.”
이벨린은 메리의 손에서 외투를 받아들며 말했다.
“그렇다면야 다행이긴 한데.”
“금방 다녀올게요.”
외투에 팔을 꿰어 넣으며 서둘러 아래층으로 내려가자 마차가 이미 대기 중이었다. 마부가 공손하게 물었다.
“어디로 모실까요?”
“비야톨레드 가도의 432번지. 아, 그리고 메리.”
“네, 아가씨.”
“전하께서 머무시는 저택으로 가서, 이 쪽지를 단테 경에게 그대로 전해 드려.”
“전해 드리기만 하면 되나요?”
“맞아. 다녀올게.”
그녀는 마차의 문을 닫는 것과 동시에 쿠션에 몸을 푹 파묻었다. 이윽고 마차는 서서히 동쪽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비야톨레드 가도. 벨몬테의 근교에서 가장 값비싼 별장들이 즐비한 곳으로, 역대 황제의 별장은 모두 이곳에 있었다. 그녀의 조언대로 별장을 구했다기엔 시기가 맞지 않았다. 서류 문제를 해결하는 것에만 사나흘은 족히 걸렸을 텐데 연회 이후로 하루도 채 지나지 않았으니.
결국 결론은 하나뿐이었다. 비센테가 평소에도 자주 쓰던 장소라는 것.
만약 비센테를 지지하는 사람들이 주기적으로 모이는 장소라면, 그의 기반은 생각보다 훨씬 튼튼할지도 모르겠다는 것에 생각이 미쳤다. 이런 곳에 드나드는 것이 자연스러울 정도로 대귀족이라면…. 결국 직접 눈으로 보기 전엔 어떤 것도 확신할 수 없었다. 이윽고, 풍경은 조금 더 자연에 가깝게 접어들고 있었다.
자연이라고는 해도, 귀족들이 자주 왕래하는 곳이기 때문에 길은 완벽하게 닦여 있었다. 보기 좋은 상록수들이 좌우로 길게 늘어진 길을 따라 30분쯤 달리자, 바다와 연결된 큼직한 만이 나타났다. 물가를 따라 화려한 별장들이 그림처럼 늘어선 것이 보였다.
“도착했습니다.”
마차는 주 가도에서 살짝 떨어진 저택 앞에서 멈춰 섰다. 규모는 다른 저택에 비해 소박했지만, 정원이 아름다워 눈길을 끌었다. 마차의 문을 열고 내리자 저택 앞에 서 있던 늙은 집사가 그녀에게 공손하게 인사를 건넸다.
“이벨린 로즈 레녹스 영애 되십니까?”
“맞아요.”
“전하께서 기다리십니다. 외투를 받아드릴까요?”
이벨린은 늙은 집사의 손을 완곡하게 거절했다.
“아뇨. 지금은 좀 추워서….”
“알겠습니다. 그러면 바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이벨린은 그의 뒤를 따라 저택의 안으로 들어섰다. 시에나가 머물던 수도의 저택과 비교하자면 휑하니 황량했다. 내부를 장식하는 대리석은 모조리 최고급품이었고 샹들리에도 장인의 솜씨인 만큼 공간의 격이 떨어지지는 않았지만, 따지자면 주인이 이사 오기 직전의 분주함처럼 보였다.
“이쪽입니다.”
집사의 뒤를 따라 둥글게 휘어지는 계단을 올라가면서도 그 감상은 여전했다. 하지만 복도의 끝에 있는 방의 문을 연 순간 풍경은 또 한 번 달라졌다.
상아를 깎아 만든 테이블 다리, 그 위에 놓인 흰 대리석 상판, 연푸른색 벨벳이 씌워진 카우치와 의자들. 값을 매길 수도 없이 아름다운 카펫과 커튼. 무엇을 기대했든, 그 기대를 배로 채워 주는 화려한 공간이었다.
이벨린은 순수하게 감탄하다가, 낯선 남자가 나타나자 흠칫 물러섰다. 이 근사한 공간과 어울리지 않게도… 남자는 좋게 말하자면 밤을 새운 예술가처럼 보였다. 구불구불하게 늘어진 갈색 머리카락이 덥수룩하게 눈 앞을 가리고 있었다. 이벨린은 반쯤 풀어 헤쳐진 그의 차림새를 바라보고 한 걸음 더 뒤로 물러섰다.
“…당신은 누구죠?”
“엔리케 베르트란입니다.”
엔리케 베르트란! 열일곱에 <전쟁과 전략>을 쓴 천재이자 레알 코르도바를 열둘에 조기 졸업한 희대의 천재. 이벨린은 당혹스럽게 눈을 깜박였다. 그 유명한 엔리케가 저런 사람이라는 것이 좀처럼 믿기지 않았지만… 이벨린은 손을 내밀었다.
“만나서 반가워요.”
“…저도 반갑습니다. 뵙고 싶었거든요.”
그는 이벨린이 내민 손을 내키지 않는다는 태도로 슬쩍 끄트머리만 잡았다. 마치 그녀가 지독한 오물이라도 되는 것처럼. 그 비사교적인 태도에 반사적으로 뒤를 돌아보자, 공손한 얼굴로 대기하던 집사가 고개를 숙였다.
“정말 이 사람이 엔리케 베르트란이 맞아요?”
“맞습니다.”
“…….”
“저래 보여도 펜을 잡으면 사람이 아주 달라지거든요.”
천재들이 사교적이지 못하다는 것은 그저 지나친 편견이라고 생각했는데, 이런 식이라면 왜 그런 통념이 생겼는지 알 것도 같았다. 이벨린은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 사내가 재미있다는 듯 짤막하게 웃었다.
“저를 부정하시더니, 이제는 안도하시는군요.”
“그래서는 안 될 이유가 있을까요?”
“아직 2황자 전하의 얼굴조차 뵙지 못했잖습니까.”
“…그건.”
“당신이 받고 온 그 쪽지가, 정말 전하께서 보내신 게 맞는지 어떻게 확신하셨죠?”
“전하께서 제게 직접 쪽지를 보내셨어요. 전해 준 사람은 비센테 전하의 시중을 드는 하인이었고요.”
이벨린은 무표정하게 대답했다. 조금 전 춥다고 말한 것이 무색하게, 외투를 벗는 그녀의 손길은 신경질적이었다. 이벨린의 대꾸에 사내가 부드럽게 허점을 지적했다.
“하인은 매수할 수 있죠. 쪽지는 흉내 낼 수 있고요.”
“…둘만 알 수 있는 내용이 적혀 있었는데.”
“대화를 엿들을 수 있는 사람은 많죠. 특히나 그렇게 훤한 테라스에서 나눈 대화라면.”
이벨린의 손이 움찔 튀었다. 그녀는 제 떨림을 감추려는 듯 외투로 손을 감쌌다. 그와 동시에 엔리케가 그녀를 향해 한 걸음 더 가까이 다가섰다.
“…그만. 가까이 다가오지 마세요.”
밀어내려는 듯 뻗어진 손이, 도리어 손목째 붙잡혔다. 그가 이벨린을 제 쪽으로 끌어당기며 의기양양한 얼굴을 했다.
“영애께서 얼마나 무력한지 말씀드리려는 겁니다. 혹은….”
그러나 그는 그 말을 채 끝맺지도 못했다. 외투가 바닥으로 떨어지는 것과 동시에, 이벨린이 가깝게 다가온 엔리케의 손등에 날카로운 바늘을 가져다 댔다. 그녀는 기이하게 느껴질 정도로 침착한 눈으로 말했다.
“혹은, 당신이 얼마나 무례한 사람인지에 대해서요.”
그는 제 손등을 찌를 듯 가볍게 누른 바늘을 바라보다가, 기막힌 듯 웃으며 물었다.
“독입니까?”
“움직이지 마세요. 조금이라도 움직이셨다가 피부에 상처라도 나면 나도 당신 목숨 장담 못 하니까.”
“…….”
“하나 더 말씀드리자면, 제가 황자 전하의 필체가 익숙한 위치라는 걸 잊으셔서는 안 되죠.”
“…….”
“이만하면, 시험에 통과한 건가요?”
이벨린은 시선은 유지한 채로 고개를 살짝 돌려, 등 뒤의 집사를 향해 말했다. 묘한 기색으로 그녀를 지켜보던 늙은 집사가 급작스럽게 웃음을 터트렸다. 우습다는 듯 박수까지 쳐대는 꼴에 인상을 설핏 찌푸리려던 찰나, 집사가 입을 열었다.
“아, 죄송합니다. 제 기대보다 더 인상적이어서요.”
조금 전 들었던 노회한 목소리와는 완전히 다른, 젊은 남자의 목소리였다. 집사는 차갑게 식은 이벨린의 눈초리조차 아랑곳하지 않고 성큼 다가섰다. 이벨린은 제게 붙잡힌 사내의 손등에 바늘을 조금 더 위협적으로 들이대며 경계했다.
“더 하실 말씀 있으면 거기서 하세요.”
집사는 즉시 양손을 들며 걸음을 멈췄다.
“아, 죄송합니다. 습관적으로 그만.”
“…….”
“불편한데, 변장을 벗는 것까지는 허용해 주시겠습니까?”
이벨린이 고개를 끄덕이자 집사가 가발과 수염을 뜯어냈다. 희끗한 수염이 사라진 얼굴은 놀랍게도 20대 중후반 정도로나 보였다. 검은 머리카락에 약간의 매부리코, 초록색 눈동자가 이제 보니 신문 속 초상을 쏙 닮아 있었다. 이벨린은 눈매를 가늘게 좁혀 떴다
“아마도… 당신이 진짜 엔리케 베르트란이겠군요.”
“맞습니다, 아가씨. 이래 봬도, 펜을 들면 달라진다는 말도 진심이고요.”
그가 연극배우처럼 우아하게 절하며 인사했다. 들고 있는 게 모자가 아닌 가발이라 조금 우스꽝스러웠지만.
“우선 그 불쌍한 남자에게서 독바늘을 좀 치워 주시겠습니까?”
“절 한 번 속이셨는데, 당신의 무엇을 믿고요?”
“2황자 전하께서 제게 맡기신 물건입니다.”
그녀는 그가 손바닥 위에 올린 회중시계를 한눈에 알아보았다. 비센테가 지니고 다니던 물건이 맞았다. 그의 집무실에서도 몇 번인가 보았으니까.
“그것 역시 믿을 수 없어요.”
“전하의 물건이 확실한데요. 자세히 보시면 여기, 이름도 새겨져 있다고요.”
“당신들이 전하를 납치, 감금하고 그분의 물건을 빼앗은 것일지도 모르잖아요.”
남자의 눈에 그녀를 희미하게 칭찬하는 것 같은 기색이 어렸다. 이벨린은 점점 더 이 상황이 불편해졌다. 아무리 조심한다고 해도 눈앞의 남자는 둘이었고, 그녀가 가진 것은 해 봐야 손가락 두 마디짜리 바늘 하나뿐이었다. 그녀는 목소리를 조금 더 높여 윽박질렀다.
“장난치는 거라면 여기까지 해요. 전하를 뵙기 전까진 믿을 수 없어요.”
“전하께서는 안 오실 겁니다.”
“그게, 무슨.”
“제가 뵙고 싶어 드린 요청이었거든요. 전하께서는 서명만 빌려주셨죠.”
“…….”
“그렇게 경계하시니 슬프네요. 제가 이래 봬도 전하의 하나뿐인 책사인데….”
그 순간, 열린 창문으로 빠르게 가까워지는 말발굽 소리가 들렸다. 흙먼지가 뽀얗게 일 정도로 빠르게 가까워진 말은 저택의 앞에서 멈춰 섰다. 이벨린이 선 자리에서는 분명하게 보이진 않았지만, 이렇게 급히 달려올 만한 일이라면 하나뿐이었다.
메리가 그녀의 쪽지를 무사히 단테에게 전한 것이다. 이벨린은 지나치게 의기양양해 보이지 않으려고 노력하며 입을 열었다.
“곧 황자 전하의 기사가 올라올 거예요.”
그녀의 말에 창문 밖을 내다보고 있던 엔리케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요.”
“그러니 여기서 시간을 끌어봐야 나는 손해될 것 없어요. 그쪽이 정말 황자 전하를 위해 일하든, 아니든… 나와는 관계도 없고요.”
이건 비센테와의 관계를 적당히 자른 말이었다. 엔리케 베르트란, 저 천재를 한때 카스트로가 그를 얼마나 탐냈는지 아니까…. 그가 정말로 현명한 사람이라면, 황태자를 두고 언제 유폐가 풀릴지도 모르는 2황자에게 붙었을 리가 없었다.
황태자가 보장해 줄 수 있는 것은, 일개 황자가 보장해 줄 수 있는 것과는 대체로 차원이 달랐으니까. 그러나 엔리케는 비센테의 기사들을 보고도 조금도 경계하지 않았다. 서두르는 기색조차 없었다. 이벨린은 경계심을 바짝 드러냈다.
“그러니 제게 용건이 있다면 빨리 말씀하시는 게 좋을 거예요.”
그녀의 말과 동시에, 그들이 있던 방의 문이 벌컥 열렸다. 달려온 듯 숨을 몰아쉬는 단테의 뒤로 루카스까지 보였다. 이벨린은 얌전히 바늘을 거두고 어깨를 으쓱했다.
“아무래도 시간이 다 된 모양이죠?”
“베르트란!”
“전하의 허락도 없이 무슨 짓을….”
단테와 루카스가 동시에 분을 터트리듯 으르렁댔다. 그들이 엔리케에게 달려들기 전에, 이벨린이 먼저 선수 치듯 물었다.
“잠시만요. 황자 전하의 허락이 없었다뇨?”
그녀의 물음에 엔리케가 고개를 갸웃했다.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제가 그저 뵙고 싶었다고요.”
“하지만 전하께서 서명을 빌려주셨다고. 그 서명은, 분명….”
“기껏 써두고 고민하시길래 슬쩍했죠.”
“…….”
“일단 전하께 가서 사실대로 고하고 네 잘못에 대한 처벌을 기다리도록.”
이벨린이 입을 다물자 루카스가 엔리케의 팔을 붙잡았다. 두 명이 더 들어섰을 뿐인데, 넓은 응접실이 꽉 찬 것처럼 북적였다. 단테가 그녀에게 다가서며 정중하게 물었다.
“레녹스 양. 괜찮으십니까?”
“괜찮아요.”
“다친 곳은, 아니, 다치신 곳은 없으십니까?”
“안 다쳤어요. 그런데 갑자기 왜 존대를 하고 그래요?”
이벨린은 못 볼 꼴을 본 것 같은 눈으로 단테를 아래위로 훑었다. 그가 뒷머리를 긁적이며 슬쩍 속삭였다.
“루카스가 네게 존대하라고 잔소리를 그렇게 하더라니까.”
“루카스가요?”
“황궁에는 벽과 바닥에도 눈과 귀가 있으니 마땅히 언사를 조심하고, 어쩌고저쩌고….”
그의 투덜거림을 듣던 루카스가 엔리케를 붙잡다 말고 인상을 설핏 찡그렸다.
“전하께서도 네게 동일한 명령을 하신 것으로 안다.”
“그야 그렇긴 하지만. 지금은 우리 전하의 별저인데… 여기서까지 굳이 그럴 필요가 있나?”
“침실 밖에서는 무조건 입조심하라는 말씀은 대체 어디로 들었나.”
“나 참, 왜? 아예 침대에서도 입조심시키지?”
그 순간 동시다발적으로 여기저기에서 숨을 들이키는 것 같은 소리가 난 것은 착각이 아니었다. 적어도 이벨린의 귀에는 그랬다. 그녀부터가 그랬으니까. 잠깐 얼어붙는 정적 뒤에 이벨린이 읊조리듯 입을 열었다.
“그랬구나….”
“아니, 아니야! 네가 생각하는 게 뭔지 아는데, 그거 아니고, 그런 뜻으로 한 말도…”
“둘이 그렇고 그런 사이구나….”
“말이 헛나온 거라고! 제발 좀 들어!”
루카스가 진저리치며 단테로부터 몇 걸음 떨어졌다.
“저 천박한 놈의 말은 귀담아들으실 필요 없습니다.”
“야!”
그 난장판 사이에 용케 빠져나온 엔리케가 어깨를 으쓱이며 이벨린에게 다가섰다.
“저 둘로 제 신원은 증명이 된 것 같으니 이제 대화를 나눠 보죠.”
“…대화요? 이 상황에서요?”
“이제는 제 말씀을 믿으실 거 아닙니까.”
“…….”
“저 둘과 제 기사까지 셋. 저들을 내보내고, 아가씨와 저 둘이서 오붓하게 담소나 나눠 보죠.”
“안 됩니다.”
끼어든 것은 루카스였다. 그가 엔리케를 그녀에게서 떼어 내려는 것처럼, 팔로 이벨린의 앞을 막았다.
“저자는 전하께서 신뢰해 쓰시는 자이고, 접근할 수 있는 정보에는 제한이 없지만… 아가씨는 예외입니다.”
예외. 그 말에 도리어 마음 한구석이 싸늘하게 얼어붙었다.
“엔리케 베르트란. 장난은 여기까지 하지. 전하께서 아신다면 용서치 않으실 거다.”
“결정은 아가씨께서 하십시오. 저와는 조금 더 솔직한 대화를 나눌 수 있으실 겁니다.”
엔리케가 루카스의 가로막은 팔을 향해 한 걸음 내딛으며 말했다. 손짓에 따라 상체를 기울이자, 그의 목소리가 독사의 독처럼 은밀하게 귓가에 퍼졌다.
“서로 질문 세 개씩만 주고받죠. 우리의 계획에 대한 직접적인 정보 누설은 어렵지만, 잘만 이용하면 아가씨의 궁금증 정도는 풀 수 있을 테니.”
“…좋아요. 그렇게 해요.”
“레녹스 양.”
이제는 제법 충성스러워 보이기까지 하는 루카스의 회색 눈동자가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걱정을 담은 눈길에는 언제든 약해지기 마련이었지만, 지금은 행동해야만 할 때였다. 묻고 싶은 것이 아주 많았다. 희대의 천재라고 불리는 엔리케라면 어쩌면, 그녀의 물음에 대한 답을 줄 수 있을지도 몰랐다.
이벨린은 제 앞을 가로막은 루카스의 팔을 부드럽게 밀어냈다.
“20분. 딱 그것만 시간을 주세요.”
“아. 20분이라면 저도 딱 좋습니다.”
엔리케가 제가 이겼다는 양, 뻐기듯 루카스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녀의 결연한 표정에 루카스가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정확히 20분 뒤에 다시 오겠습니다. 용건이 끝나시면 곧장 돌아가셔야 할 겁니다.”
“알겠어요.”
이벨린은 단테와 남자를 챙겨서 문밖으로 나서는 루카스의 뒷모습을 끝까지 바라보았다. 한때는 제게 저렇게 날을 세웠던 것 같은데. 대체 어느 순간을 기점으로 제게 이렇게 무르게 구는 것인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
“앉으시죠.”
“아, 네.”
이벨린은 엔리케의 권유대로 티 테이블에 앉았다.
“아가씨 먼저? 아니면 제가 먼저?”
“먼저 하세요.”
“그러면 우선… 무기는 대체 언제 준비하셨습니까?”
잔뜩 긴장했던 게 무색하게 질문의 내용은 소소했다. 이벨린은 소맷자락에 꽂아 넣었던 바늘을 아무렇게나 뽑아 들어 가볍게 흔들었다.
“이 바늘이요?”
그녀의 태도에 맞은편에 앉아 있던 엔리케의 어깨가 움찔 튀었다. 아무래도 조금 전 남자의 목숨을 쥐고 협박한 것이 깊은 인상으로 남은 모양이었다. 이벨린은 다시금 바늘을 갈무리하며 짓궂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이건 그냥 바늘이에요. 실을 꿰고, 천을 깁는 데 쓰이는 도구 말이에요.”
“…우릴 속인 겁니까?”
“속이다니. 말씀을 무섭게 하시네요. 저는 독이 발려 있다곤 한마디도 안 했는걸요.”
“정말 아니라고요…?”
엔리케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읊조렸다. 이벨린은 양손을 펴 보였다.
“전하께서 제게 독을 구해 줄 만한 사람을 제 곁에 붙여 두셨겠어요?”
“…….”
“믿기 어려우시면 직접 찔려 보시던가요.”
“아니, 아니…. 됐습니다.”
엔리케가 진저리치며 손을 내저었다.
“그럼 두 번째. 언제부터 의심하셨습니까?”
“여기 오는 거요? 아니면 처음 남자가 엔리케가 아니라, 집사인 척했던 당신이 엔리케라는 거요?”
“둘 다라고 하죠.”
“첫 번째는 그냥 조심한 거고, 두 번째는 당신 손이 너무 말끔해서요.”
“…손이요?”
이벨린은 턱짓으로 집사의 손을 가리켰다.
“변장하신 나이대와는 맞지 않게 주름 하나 없던걸요.”
그제야 깨달았다는 듯 사내는 나직한 탄성을 터트렸다.
“그럼, 이제 제 차례네요.”
“잠깐만, 제 질문은 아직 다 안 끝났….”
그녀의 말에 대해 정면으로 반박하려던 엔리케는, 순간적으로 무언가를 떠올린 듯했다. 이벨린은 그의 혼란에 확실히 종지부를 찍었다.
“바늘과 의심, 손에 대해서까지 세 개 끝났어요.”
“제기랄. 손을 질문에 치는 건 억지라는 거, 당신도 알죠?”
“약속은 약속이죠.”
“…좋아요. 물어보도록 해요.”
이벨린은 잠깐 머릿속으로 질문들을 가다듬었다. 묻고 싶은 것은 많았다. 비센테가 준비하고 있는 반역의 규모, 가담한 귀족들의 정보나 내전이 일어날 시기 등에 대해서…. 그 모든 계획을 자세히 듣는다면 그녀 나름대로 대비할 부분이 있을지도 몰랐다.
그러나 지나치게 중요한 정보를 묻는다면 의심을 피하긴 어려울 터였다. 이벨린은 그가 처음부터 ‘직접적인 정보에 대한 누설은 어렵다’고 언질을 해 둔 것을 잊지 않았다. 그녀는 고민 끝에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럼 첫 질문은 이것으로 하죠. 절 왜 보고 싶어 했죠?”
“흥미롭네요. 생각보다는 소소하고요.”
“대답이나 해요.”
“음…. 일단은 ‘같은 이상’을 보고 싶다고 말한 사람이 궁금했습니다.”
“…….”
“혹은, 당신이 우리의 대의를 위해 어디까지 감수할 수 있는지도요.”
순식간에 싸늘하게 가라앉은 눈매가 그녀를 직시했다.
“제가 감수해야 할 일이 무엇인데요?”
“일단은… ‘서부의 인장’이면 좋겠네요.”
서부의 인장. 역대 오스티나토 공, 즉 황태자가 대대로 물려받아 온 상징에 가까운 은화.
“‘서부는 은화를 쥔 자에게 충성한다’는 말을 들어보신 적 있을 겁니다. 양께서 브리타냐 출신이시긴 하지만 워낙 유명한 말이니.”
“들어봤어요.”
“혹자들은 서부인들이 그야말로 돈에 충성하니 신뢰하지 말라는 격언쯤으로 생각하지만 실상은 다릅니다.”
이벨린은 미약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초대 황제와 서부가 맺었던 맹약에 대한 뒷이야기라면 그녀만큼 자세히 아는 사람도 드물 것이다. 카스트로가 ‘오스티나토 공’으로서 새로이 맹약을 계승하는 자리엔 그녀도 있었으니까.
“그 맹약을 얻기 위해 초대 황제가 무엇을 내주었는지는 비밀에 부쳐져 있지만, 받은 것은 확실하죠. 무조건적인 충성.”
“…….”
“그것이 아무리 부당할지라도, 서부는 ‘서부의 증표’를 가진 자에게 충성한다.”
굳이 이 자리에서 해묵다 못해 빛바랜 맹약에 대한 이야기를 굳이 꺼낼 이유는 하나뿐이었다. 이벨린은 새파란 눈을 들었다.
“그 증표를 제게 가져오라고 할 셈이군요.”
“맞습니다.”
“그게 얼마나 허무맹랑한 제안인지는 이미 아시겠고요.”
“제가 필요한 부분에 대해서 솔직하게 말씀드리고 싶었습니다.”
“전하께서도 이 미친 제안에 동의하셨겠고요.”
순간적인 침묵이 싸하게 일었다. 유들유들하게 굴러가던 엔리케의 혓바닥이 딱 달라붙기라도 한 것처럼. 이벨린의 시선을 피하지 않고 마주하던 그가 어깨를 으쓱했다. 팽팽하게 긴장되었던 공기가 느슨해졌다.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전하께서는 모르십니다. 아신다고 해도 용납하지 않으실 테고요.”
“그런데도 제게 그런 제안을요.”
추궁은 발음 덕분에 더 고상하게 들렸다. 가당찮다는 시선은 덤이었고. 엔리케는 반쯤 얼떨떨해서 이벨린에 대한 정보를 머릿속으로 되짚었다. 브리타냐 출신, 고아, 수도원 출신, 구질구질한 가족 관계, 절박함.
황자의 손을 직접 탔다고는 하나 고작해야 몇 달 남짓인데, 여자에게서는 벌써부터 묘한 기품이 흘렀다.
마치 숨기고 있던 재능이 시절을 맞아 흐드러지게 피어나는 것처럼. 어떤 순간에는 정말 태생부터 대귀족의 딸이었다고, 그런 천성을 타고났다고 느껴질 지경이었다. 다른 사람을 용케 흉내 내는 것이든, 그 짧은 사이에 체득한 것이든. 여자가 그것까지 휘두를 수 있다는 것은 제법 인상적이었다.
그리고 그것으로, 그들의 ‘가짜 상속녀’가 보다 더 그럴듯해졌다는 것도.
“음. 아가씨가 마음에 들었으니, 저도 조금은 솔직해져 볼까요.”
엔리케는 뒤늦은 호감을 사기 위해 부드럽게 웃었다. 그 웃음이 도리어 여자의 경계심을 높인 것은 안타까운 일이었지만, 그는 모르는 척 말을 이었다.
“계획에서 전체를 그리는 사람은 둘입니다. 저와 비센테 전하뿐이죠.”
이벨린의 표정이 묘해졌다. 맹약 이야기에서 왜 갑자기 그쪽으로 튀었냐는 얼굴이었지만, 그녀는 딱히 저지하지 않았다. 도리어 더 해 보라는 듯 고개를 까닥였다.
“전하께서는 누구도 이탈하지 않도록 이끄시는 분입니다. 그분은 주변의 안위를 살피시고, 충성에 대한 과한 증명을 요구하지도 않으시죠. 역설적이게도 그렇기에 도리어 그분에게 충성하는 기사들이 수두룩하고요.”
“못마땅한 것처럼 들리네요.”
“제가요? 전혀요. 통치자로서는 좋은 자질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
“하지만 저는 전하와는 달라야 합니다. 실제로도 다르고요.”
“다르다니.”
“저는 이상을 위해서라면 그게 누구든 스스럼없이 위험 속에 내던지죠. 사람을 소모품으로 사용하는 것에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도 않고요.”
난 당신을 서슴없이 위험한 곳에 던질 것이라고 말하는 사내의 낯은 지극히 평화로웠다. 이벨린은 헛웃음을 삼키며 되물었다.
“굳이 제 경계심을 높이시는 이유는요?”
“다시 말했듯, 당신이 어디까지 감수할 수 있는지를 보고 싶었을 뿐입니다. 이래 봬도 친절한 사람이라 위험성에 대한 경고조차 하지 않고 내던지진 않아요.”
“…인장을 빼내다 들키면, 소모품처럼 버리겠다는 협박이 친절하다고요.”
그가 뒷통수를 긁적이며 말했다. 그 모습은 제법 순진해 보였지만, 이미 경계심이 극으로 올라간 이벨린에게는 그저 순진한 척하는 쓰레기로 보일 뿐이었다.
“그렇게 말씀하시니까 정말 제가 불한당처럼 들리네요.”
“…….”
“어쨌든… 전하께서 당신에게 유독 무르게 굴고 계신 게 이해가 갑니다.”
급작스러운 화제의 전환에 이벨린은 헛웃음을 터트렸다.
“갑자기요?”
“네, 갑자기요. 사실 그래서 더 아가씰 보고 싶었거든요. 그리고….”
엔리케는 장난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질문은 세 개 모두 끝났어요.”
“…….”
“시간도 벌써 이렇게 되었네요.”
그가 시계를 확인하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벨린은 덩달아 자리에서 일어서며 구겨진 치맛자락을 폈다. 그녀가 의복 정돈을 끝내자, 그가 악수를 청하려는 것처럼 손을 내밀었다.
“그럼 만나서 반가웠어요. 제안에 대해서는 숙고해 보세요.”
“그럴 필요 없어요. 할 거니까.”
“정말인가요?”
그가 미심쩍다는 듯 눈매를 좁혔다. 애초부터 반대편 선택지에는 어떤 것도 올려놓지 않은 주제에, 그녀가 정말 한다고 말할 줄 몰랐던 것처럼 뻔뻔하게도. 이벨린은 그가 내민 손을 무시하고 말을 이었다.
“그리고 제가 이 일을 해내는 대가로… 그쪽도 제게 해 줘야 할 일이 있어요.”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던 그가 웃음기가 어린 목소리로 물었다.
“전하 몰래 말인가요?”
“피차 전하께 당당할 입장은 아니잖아요?”
“좋습니다. 말씀해 보시죠.”
“전 예비 황태자비였던… 엘레나 데 카스타야 영애를 보살폈던 유모를 찾아 줘요. 이름은 힐다.”
“외국인처럼 들리는데요?”
“부모 중 한쪽이 스베아 사람이라고 들었어요. 성은 확실하지 않지만… 룬드그렌이었던 거 같아요.”
이벨린은 과거의 기억을 더듬었다. 힐다 룬드그렌. 사실 성은 정확히 기억나지는 않았다. 그녀의 어머니부터 그녀까지 한결같이 돌보아 온 유모라는 것만 기억날 뿐. 가문이 반역으로 뒤집어지기 직전 도망칠 수 있도록 안배해 주었으니 아마도 잘 살아 있을 터였다.
‘찾아서 꿈속에서 들었던 그 말, 그 말이 뭔지 확인해야 해.’
그 말을 정말 들었는지조차 확신하긴 어려웠지만, 찾아서 확인해 볼 필요는 분명히 있었다.
“카스타야의 고용인들 사이에선 마녀로 통했던 모양이에요.”
사실 힐다는 그녀의 어머니만 아니었다면 진작 거리로 내쫓겼을 정도로 수상쩍은 여자였다.
‘그러고 보면 유령을 본다는 소문도 있었지.’
생각에 잠긴 이벨린의 모습에 엔리케가 손가락끼리 딱 맞부딪쳤다. 소음에 퍼뜩 정신을 차리자 엔리케가 말을 이었다.
“무슨 생각이신지는 모르겠지만, 사람을 찾는 일이라면 저보다 전하의 손을 빌리는 게 빠르실텐데요.”
“전하께서… 전 예비 황태자비의 흔적을 찾는 걸, 허락하지 않으실 테니까요.”
‘최악의 경우 수상쩍게 생각할 수도 있고.’
이벨린은 뒷말을 삼키며 말끄러미 엔리케를 바라보았다. 대답을 종용하는 모습에 잠깐 고민하던 엔리케가 시원시원하게 대답했다.
“좋습니다. 아가씨께서 신의를 지키신다면 저도 약속드리죠.”
“일은 언제부터 시작하죠?”
“때가 되면 연락드리겠습니다. 그때까진 지금처럼 지내시면 됩니다.”
이벨린은 멈칫했다.
“참고로 힘으로 하는 일은 무리에요.”
“그런 건 아닙니다. 멀쩡히 두 발로 들어가셨다가 나오실 수 있으실 겁니다. 어쩌면 기사들의 제지조차 받지 않고요.”
“인장이 있는 곳이 어딘데요?”
“오스티나토.”
이벨린은 너무 경악하지 않으려고 노력하며 입을 열었다.
“그곳은….”
오스티나토라면 옛 수도이자 제국의 기원이 되는 땅이었다. 흡사 바다를 방불케 하는 넓은 호수가 있는 주신 카일레스에게 바쳐진 제국 최대의 성지. 그리고 제국의 황태자가 되면 가장 먼저 물려받게 되는 땅.
그곳에 합법적으로 드나들 수 있는 사람은 공식적으로는 황족뿐이었다. 1년에 몇 번, 가끔씩 일반인들에게도 공개될 때가 아니면….
거기까지 생각한 이벨린은 하나의 가능성을 떠올리고 헛웃음을 터트렸다.
“설마.”
“이용할 수 있는 건 다 이용해야죠.”
“그래서 저더러 황태후 폐하를 수행해서 다녀오라는 말씀을 하시는 건가요?”
“어려우시다면야.”
“어렵고 자시고가 아니라 이건 불가능해요.”
차라리 정말로 카스트로와 결혼해서 제대로 된 황족 취급을 받았다면, 오스티나토 신전 내부에 대해서 속속들이 알았을지도 모르겠지만… 그녀는 어디까지나 약혼녀에 불과했다. 이벨린이 경악하자 엔리케가 서둘러 덧붙였다.
“그 땅은 황족의 결혼식 때도 열리죠.”
“당신, 진짜….”
“그리고 사냥제와 사냥제가 끝나고 제물을 바치는 건국제 때도 열리고요.”
“…….”
대체 어디까지 하는지 보자는 식으로 가만히 듣고 있던 이벨린의 눈에 이채가 어렸다. 사냥제와 건국제. 그래, 그것을 잊고 있었다.
이벨린의 표정이 서서히 누그러들자, 엔리케가 씩 웃으며 덧붙였다.
“그리고 바로 2주 뒤부터 사냥제가 시작될 예정이죠.”
에스페다의 사교계에서는 반드시 참석해야만 하는 세 개의 커다란 행사가 있다. 서약식과 사냥제, 그리고 건국제.
‘서약식’은 모든 행사의 시작으로 과거 오스티나토 공작이던 초대 황제에게 기사들이 충성을 맹세하던 전통을 충실히 계승한 의식이었다. 목적 자체가 제국의 부와 힘을 과시하는 것에 있다 보니, 그날만큼은 온 황궁이 평민들에게까지 완전 개방이 되곤 했다.
“그런데 올해는 불의의 사고로 황궁 개방이 늦어지고 있다 보니 사냥제부터 먼저 시작될 겁니다. 제가 알아낸 정보에 의하면, 이제 2주 정도 남았고요.”
이벨린은 엔리케가 말하는 ‘불의의 사고’가 3황자의 죽음을 말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 귀한 목숨의 죽음이, 이제는 고작 저런 식으로 취급된다는 것에는 헛웃음조차 일지 않았다.
그녀는 감정적인 동요를 감추려 더욱 딱딱하게 입을 열었다.
“그렇군요.”
“늘 그랬듯 올해도 사냥제에서 잡은 사냥감을 건국제의 제물로 바칠 겁니다. 황태후 폐하께서 헌관을 자처하시면 사냥제가 끝나는 밤부터 오스티나토의 엘 레테아 신전에서 몸을 정결히 하는 의식을 치르실 겁니다. 아실지는 모르겠으나, 그분을 수행하는 시녀도 예외적으로 그 밤만큼은 신전에 머물 수 있고요.”
“그 말씀인즉.”
“바로 그 하룻밤 동안, 영애께서 서부의 증표를 손에 넣을 방법을 생각해 내야 한단 소리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