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2화 (42/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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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네가 끼어들 자리가 아니었어.”

    테라스의 문이 닫히자마자 선득한 추궁이 돌아왔다. 선선한 바람을 마음껏 만끽할 새도 없이.

    이벨린은 따끈하게 달아오른 뺨을 손으로 부채질하다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녀의 유순한 눈에 일순 서러운 기색이 어렸다.

    “제가….”

    이벨린은 입술을 얕게 깨물었다. 그는 그녀를 모른다. 모르니 화를 내는 것이다. 그녀가 어디까지 참아낸 것인지, 얼마나 끔찍한 상황을 버텨낸 것인지. 칭찬을 바란 것은 아니었지만, 그의 계획대로 카스트로의 관심을 끄는 데 성공했음에도 불구하고 추궁을 당하는 것은 솔직히 슬펐다. 그녀는 가까스로 말을 이었다.

    “제가 생각보다 더 잘했나 보네요.”

    “대체 무슨 생각이었지?”

    “전하께서는, 무슨 생각이셨는데요.”

    이벨린의 떨리는 목소리가 조금 더 분명해졌다.

    “이런 일을 하라고 저와 계약하신 게 아니었나요?”

    그가 크라바트를 조금 더 풀어 내리는 것이 보였다. 짜증인지, 무엇인지 모를 감정이 서늘한 보랏빛 눈동자 아래로 들끓는 것도 보였다. 그가, 그것을 고요히 다스리고 있는 것도. 악문 턱과 그 아래의 목에 선 핏대가 선명했다. 불편한 침묵은 길지 않았다.

    “내가 놓친 게 있더군.”

    그녀는 그가 제 쪽으로 다가오자 흠칫 뒷걸음질을 쳤다. 그러나 몇 걸음 만에 테라스의 난간에 가로막혔다. 어쩔 줄 몰라 하는 그녀를 그가 양팔 사이에 가두었다. 비스듬히 숙인 고개가 한 뼘 정도의 틈을 남겨놓고 멎었다.

    “네 ‘복수’의 이유. 그걸 물어본 적이 없었지.”

    그가 시선을 회피할 수 없도록 그녀의 턱을 받쳐 들어 올렸다. 그가 지적한 점은 그녀의 명백한 실수였다. 카스트로를 향한 복수심에 취해, 경계조차 느슨해졌던 그 밤의 일이 이렇게 돌아올 줄은…. 이벨린은 입술을 꼭 깨물었다.

    “믿기 어려우실 거예요.”

    “그건 내가 판단할 문제고.”

    턱을 쥐고 있던 손이 조금 더 아래로 내려왔다. 가냘픈 목을 단번에 움켜쥐듯 붙잡아 당겼다. 숨이 막히거나 아프지는 않았지만… 그 과격한 접촉에 놀랐다. 목에서 박동하는 맥이 지나칠 정도로 생생하게 느껴졌다.

    “…….”

    “이유가 뭐지? 말해.”

    정말, 더는 물러설 곳이 없었다. 이벨린은 눈을 도르륵 굴렸다. 여기서 진실을 말할 수는 없었다. 스스로 ‘엘레나’임을 밝히는 것은, 이 진창을 더 끔찍한 난장판으로 만드는 일일 테니까. 그녀는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렸다.

    ‘제발, 뭐라도, 그럴듯한 변명이 될만한 것으로….’

    이 상황을 타개할 만한 무언가를 찾아내야 했다. 과거의 기억들 중에서 쓸만한 걸 떠올려서, 제발…. 초조하게 굴러가던 머릿속에 번뜩 떠오른 것이 있었다. 브리타냐, 황태자, 수도원.

    “화, 황태자께서 브리타냐의 학술원에서 지내실 때예요.”

    “…학술원? 리버턴 아카데미?”

    비센테의 눈매가 의혹으로 설핏 가늘어졌다. 황태자가 브리타냐의 학술원에서 지냈다는 것은 기밀까지는 아니었지만, 잘 알려진 정보도 아니었다.

    “그때 만났나?”

    이벨린은 습관처럼 긍정하려다가 뻣뻣하게 고개를 저었다. 만났다고 한다면, 조금 전 서로를 알아보지 못한 것에 대해서도 추궁하겠지. 이 와중에도 교묘하게 함정부터 깔다니…. 이벨린은 불순해지려는 눈매를 억지로 내리떴다.

    “황태자께서는 저를 모르실 거예요.”

    “모르다니.”

    “…제게 저지른 잘못이 아니니까요.”

    이것만은 에두른 진실이었다. 모조리 거짓으로 꾸며내는 것보다는, 진실을 섞는 쪽이 조금이나마 더 믿음직스럽게 들리기 마련이다. 그러나 무엇이든 급조된 거짓은 파고들면 들킬 위험이 있었다.

    ‘여기서 더 이야기가 진행되기 전에, 어떻게든 화제를 돌려야….’

    초조한 그녀의 시선에 미세하게 열린 테라스의 문이 보였다.

    그가 문을 닫는 것을 직접 봤으니, 저절로 열렸을 리는 없었다. 이벨린은 순간적으로 말을 돌릴 구실을 찾아낸 것에 안도했다가, 그가 제 기색을 눈치채기 전에 서둘러 손짓했다.

    “자, 잠시만. 이건 나중에 얘기해요. 지금 누가 문을 열었어요.”

    “열린 지 얼마 안 됐어. 어차피 말소리가 들릴 정도의 거리는 아니고.”

    “알고 있으셨어요?”

    “인기척으로.”

    “왜 말씀하지 않으셨어요?”

    “굳이 우리가 타인의 시선을 거리낄 필요가 없으니까. 게다가 테라스는 밀회의 장소로 유구히 이용되는 곳이니, 우리를 본 사람이 있다면 계획에 보다 더 효과적이겠지.”

    “계획… 우리가 연인으로 공표되는 것 말이에요?”

    “그래.”

    “아까도 말씀드렸듯 이런 것만으로는 부족해요.”

    그녀는 겨우 멀어지기 시작한 화제로 다시 돌아가지 않도록 최선을 다해 말을 이었다. 흐름이 끊어지거나 잠시라도 침묵이 생기지 않도록…. 그 덕분에 뱉는 족족, 머릿속으로 최소한의 정돈도 거치지 않는 말들이라는 게 문제였다.

    “별별 일들이 다 일어나는 곳이 수도의 사교계잖아요. 고작, 이런 모습을 보였다고 일어날 추문이라면… 길어야 이틀도 채 가지 못할 거예요.”

    “그래서.”

    “수도에 별장을 매입하세요. 값비쌀수록, 위치가 은밀할수록 좋겠죠. 그곳에 저를, 자주 부르시고요.”

    그의 눈이 흥미롭다는 듯 가늘어졌다.

    “그리고.”

    “아침마다 시종을 시켜서 꽃을 보내 주시는 것도 괜찮겠죠.”

    “계속해.”

    이벨린은 머릿속을 쥐어짜 냈다. 하지만 할 말은 진작에 다 떨어진 뒤였다. 게다가 필사적으로 말을 늘이려는 그녀의 노력과는 달리, 비센테가 전혀 협조적이지 않다는 것도 문제였다. 이제는 조금 더 과감해져야 할 때였다. 그가, 그녀의 과거를 작정하고 파고들기 전에.

    “아니면.”

    이벨린은 제 쪽으로 비스듬히 기운 그의 목에 제 팔을 둘렀다. 갑자기 이게 무슨 짓이냐는 듯 그가 눈썹을 우아하게 치켜 올렸다. 이벨린은 그의 눈에서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빨려 들어갈 것 같은, 보랏빛 눈동자가 충동을 부추긴다.

    “아니면… 지금 제게 입 맞추셔도 되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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