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1화 (41/151)

***

“…짐의 조카가 언제나 국가에 충성스러웠던 것을 그대들은 기억하여야만 한다. 영광스러운 전선의 최전방에서 희생에 앞장섰음을 기억하여야만 한다. 짐은….”

황제의 연설이 길어지고 있었다. 비센테는 감흥 없는 눈으로 황제의 누르스름한 얼굴을 바라보았다.

초대 황제의 금언을 어긴 ‘불충’이 황제의 말 몇 마디로 지극히 충성스러운 행위로 뒤집혔다. 그 순간에는 일말의 감동도, 놀라움도 없었다. 그 유폐가 처음부터 황제의 몇 마디만으로 그럴듯하게 봉합될 수 있었다는 깨달음은, 새삼스럽지도 않았고.

“황자는 처음부터 일국의 군인으로서, 반역자인 ‘엘레나 데 카스타야’를 처단한 것에 불과했을 뿐….”

무심히 상황을 관조하던 눈매가 왈칵 일그러졌다. 반역자. 엘레나의 이름이, 고작해야 황제의 값싼 입에서 저런 식으로 불릴 줄은…. 그는 파르르 떨리는 눈매를 내리떴다. 주먹 쥔 손등에 여자의 손등이 가만히 와 닿는 감촉이 느껴진다.

“…….”

비센테는 가만히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딱딱하게 굳은 여자의 표정은 엄숙해 보이기까지 했다. 그 단단한 가면 아래로 그를 걱정하는 눈빛이 언뜻 드러났다 사라진다.

“…그리하여 오늘부로 2황자의 복위를 명하는 바이다. 에스페다의 앞날에 무한한 영광 있으라!”

이윽고 길고 긴 연설이 극적인 결말에 도달했다. 황제의 선언이 끝나자마자 우레와 같은 박수가 터져 나왔다. 정작, 당사자인 그는 이벨린의 얼굴을 바라보느라 깜박 늦었는데도. 그의 무덤덤한 반응에 여자가 제 쪽으로 상체를 슬쩍 숙였다.

“전하, 뭐 하세요? 박수 안 치고.”

눈은 부릅뜬 채 입술로만 웃는 모습에 웃음이 났다. 제 딴에는 저게 최선이랍시고 지은 표정이라는 것을 알아서.

“…….”

여자의 지적대로 몇몇 귀족들이 그를 주시하고 있었다. 심지어 황제까지도. 비센테는 예의상 두어 번 박수를 치곤, 황제에게 허리를 굽혀 예를 올렸다. 그리고 곧장 이벨린의 손을 붙잡고 단상에서 내려섰다.

단상 바로 아래에 서 있던 귀족들이 뒤로 물러서며 그들이 지나갈 통로를 만들어 주었다. 그는 곧장 기둥 뒤에 마련된 좌석 쪽으로 이벨린을 안내했다. 그녀는 의자를 발견하자마자 반색했다.

“아, 이제 살 것 같네요.”

단상 위에서 새파랗게 질렸던 여자의 얼굴이 순식간에 평소의 혈색을 되찾았다. 비센테는 마침 곁을 지나가던 시종에게서 샴페인 잔을 받아 들었다.

“마셔.”

“아, 감사해요….”

이벨린은 서둘러 입술을 축이곤, 힘없이 웃었다.

“생각보다… 힘드네요. 각오는 다 했다고 생각했는데도요.”

“주목받는 게 불편한가?”

“사실… 제가 언제 다른 사람들 앞에 서 봤겠어요.”

그는 맞은편 의자의 팔걸이에 살짝 걸터앉은 채로 여자를 바라보았다. 예법에는 어긋나는 행동이었지만, 정작 지적할 사람도 없었다. 사람들은 그가 예법을 어겼다는 사실보다, 그가 ‘그렇게까지’ 신경 쓰고 있는 여자에 대해 이야기할 테니까.

지금처럼 그가 연회를 즐길 생각조차 하지 않고 여자에게 붙어 있으면 있을수록.

여자, 이벨린, 그의 가짜 엘레나.

그녀는 오늘 작정이라도 한 것처럼 우아하고 아름다웠다. 엘레나가 갓 스무 살이 되었을 무렵과 같은 머리 모양과 화장, 비슷한 드레스까지 갖춰 입은 이벨린은 그야말로 죽은 그녀가 다시 되살아온 것 같았다. 그것이 못내 끔찍하면서도, 차마 고개를 돌릴 수조차 없다.

여전히 엘레나는 그에게 그런 존재였다.

“전하?”

그의 긴 침묵에 여자가 불안한 듯 속삭였다.

“계속 그렇게 바라만 보고 계실 거예요?”

그는 이벨린의 가느다란 손가락에 걸쳐져 있던 샴페인 잔을 받아 들었다. 손가락 끝이 잠깐 얽혔다 풀어졌다.

“문제가 되나?”

“춤은 안 추더라도, 사람들에게 저를 소개는 시켜 주셔야죠.”

“시종이 네 이름을 불렀는데 뭐 하러. 이미 알아서 추측하고들 있을 텐데.”

“하지만 무도회에서 인사드리고 싶다는 편지들을 받았는데….”

“잘 보이고 싶은 건 그쪽이니 네가 신경 쓸 필요는 없지.”

“그렇긴 하지만요….”

제 손을 붙잡고 연회장에 들어온 그 순간, ‘이벨린 로즈 레녹스’의 조작된 시시콜콜한 사정은 이미 연회장의 모두에게 퍼졌을 터였다. 불행한 어린 시절, 뜻하지 않게 찾아온 막대한 유산, 그리고… 어쩌면 2황자의 연인일지도 모른다는 점까지.

이미 그가 나서지 않아도 우아한 척 물어뜯는 시선이 쏟아지고 있었다. 더구나 그들이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았다는 점에서, 소문은 점점 더 호기심을 자극하는 방향 쪽으로 흐를 터였다.

그가 직접적으로 이벨린을 제 연인이라고 인정하든, 인정하지 않든 관계없이.

물론, 그가 계획한 모든 것이 딱 떨어지는 계산으로만 돌아가진 않았다. 적어도, 가장 밑바닥에 있는 충동만큼은…. 솔직해지자면 순간적으로 망설였다. 이 계획에 대한 확신, 혹은 필요성보다, 순간은 저 여자의 안정이 중요한 것도 같았다.

연회장에 들어설 때 공포로 새파랗게 질린 그 얼굴을 목도한 그 순간만큼은.

그는 천천히 크라바트를 풀었다. 들이쉬는 숨 한 번에 불필요한 감정을 잘라 냈다. 그는 입술을 살짝 당겨 미소를 만들었다.

“클라우디아가 네게 귀족들의 초상을 외우게 시켰다고 들었는데.”

“아…. 맞아요.”

여자의 표정이 조금 흐려졌다. 자신이 없는 것이라기보다는, 짐작하기 어려운 다른 이유에서인 듯했다. 비센테는 삼삼오오 모여 있는 무리 중 하나를 가볍게 턱짓했다.

“저들이 누군지 알아보겠어?”

“황태자 전하를 지지하는 분들이네요. 올리바레스 공작 각하와 비탈리 후작, 그리고 말라가 후작까지….”

“기메라 백작 부인이 벌써 그런 것까지 가르쳤나?”

“비탈리야 황후 전하의 친정이시고, 올리바레스는 늘 황제의 월계관에 충성을 바치는 가문이니까요. 고결하신 말라가 후작께서 저 무리에 붙은 것은 의외지만.”

“…브리타냐의 수도원에서는 그런 것까지 가르치는군.”

해묵다 못해 먼지까지 쌓인 의심을 드러내자, 여자는 말갛게 웃었다.

“게다가 아까부터 이쪽을 노려보고 있잖아요.”

“…….”

“다시 돌아보지는 마시고요.”

그가 미간을 살짝 찡그리기 무섭게, 이벨린이 허벅지 위에 올려 두었던 그의 손목을 붙잡았다. 숨을 들이쉬며 움찔한 비센테가 이벨린의 손목을 붙잡아 제게서 부드럽게 떼어 냈다. 이벨린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어여쁘게 휘며 웃었다. 멀리서 보기엔 그림 같은 한때를 보내고 있다고 착각할 법했다.

“친밀하게 보여야 한다면서요.”

“그래서 그대 곁에 붙어 있잖아.”

“이거로는 부족하죠. 사실….”

그녀가 막 무슨 이야기를 속삭이려는 찰나였다. 연회장의 입구 쪽에 서 있던 사람들이 수런거리는 소리가 먼저 들렸다.

“오스티나토 공, 카스트로 오스티나토 비탈리 데 에스페다 전하 드십니다!”

뒤이어 시종이 쩌렁쩌렁하게 외치는 목소리가 오케스트라의 연주 소리를 누르고 홀을 울렸다. 당혹스러운 술렁임이 귀족들 사이에 번졌다.

“황태자 전하께서?”

“오늘 참석이 어려우시다지 않았나?”

“시찰을 가셨다고 듣긴 했는데….”

황제가 있는 홀이었다. 아무리 황태자라고 해도, 황제보다 뒤늦게 홀에 들어설 수는 없는 법이다. 그가 황제를 제치고 실권을 장악하려는 마음을 품지 않은 이상에야. 비센테는 단상 위에 선 황제부터 살폈다. 미세하게 균열이 간 얼굴, 부릅뜬 눈, 억지로 지은 미소.

자식을 바라보는 눈이라기보다는, 제 권력을 탐내는 경쟁자를 바라보는 살벌함이 느껴졌다.

황제는 피 흘리지 않는 반역으로 저 자리까지 올라간 사내다. 혈육을 독살하고 기어이 권력을 찬탈한 자에게 장성한 자식은 또 다른 반역자일 뿐일 터다. 우습지도 않지. 드높은 황위에 올라 권력에 취하면 취할수록, 결국에는 제 발밑의 불안으로 고꾸라지게 된다는 것은.

“…….”

조금 전부터 여자는 유독 말이 없었다. 비센테는 무심히 곁을 내려다보고는, 조금 놀라 표정을 달리했다. 여자는 입술이 하얗게 질리도록 꽉 깨물고 있었다. 덜덜 떨리는 몸은 무언가를 간신히 참고 인내하는 듯했다. 그 선명한 증오심 위로 복수를 말하던 여자의 과거가 겹쳐 보였다.

“전하께서 말씀하셨던 그 복수.”

그렇게 말하던 여자의 새파란 눈동자,

“그 복수에 흥미가 생겼을 뿐이에요.”

서늘하던 음성. 브리타냐에서 일생을 보낸 여자였다. 제국의 황태자에게 새삼스레 복수를 결심할 만한 동기가 있다고. 그 부자연스러운 고리가, 내내 본능처럼 거슬리던 지점이 그제야 명확하게 보였다.

“카스트로를 만난 적 있나?”

“…아뇨.”

대답은 조금 뒤에야 돌아왔다. 그녀는 망설이는 것처럼 머뭇거리다가 덧붙였다.

“어쩐지 닮은, 그러니까, 생각나게 하는 사람이 있어서요.”

“초조해 보이는군.”

“네?”

“입술이 다 망가지겠어.”

그는 이벨린의 아래쪽 뺨에 제 손바닥을 가져다 댔다. 엄지손가락으로 엉망으로 짓이겨진 아랫입술을 쓸자, 상처로부터 묻어난 피가 입술 위로 엷게 번졌다.

“몸이 안 좋아 보이는데, 이만 돌아….”

“비센테!”

그 순간,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그의 이름을 불렀다. 순한 눈으로 비센테를 올려다보던 여자의 몸이 뻣뻣하게 굳었다. 비센테는 이벨린의 굳은 얼굴을 한 번 내려다보고 천천히 뒤로 돌아섰다.

근처에 은근히 모여들었던 귀족들이 일시에 뒤로 물러서는 소란이 일었다. 비센테는 반사적으로 이벨린을 제 뒤로 숨겼다. 그는 무덤덤한 눈으로 귀족들이 터 준 길을 따라 다가오는 사촌을 바라보았다. 햇수로 꼬박 2년이었다. 마지막으로 마주했던 것이 그의 재판에서니까.

비센테는 오른손을 제 가슴에 대고 가볍게 묵례했다.

“황태자 전하.”

카스트로는 근처 귀족들의 인사를 대충 받고는 그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상반신을 가로지르는 견장과 흰 담비 망토가 화려하게도 이목을 집중시켰다.

다소 마른 듯 보이는 뺨과 옅게 비틀린 입술, 형형하게 푸른 눈동자, 채도 낮은 금발, 그 아래로 이마에서 오른쪽 눈까지 얼룩처럼 남은 피부병의 흔적.

그 흔적 때문에 안 그래도 사나운 인상이 두 배는 더 잔인하게 보였다. 이윽고 비센테의 코앞까지 걸어온 그가 눈매를 곱게 접었다. 그 눈에 담긴 살의가 미처 완전히 사라지기도 전이었다.

“사촌끼리 그리 딱딱하게 굴지 마. 오랜만에 만난 자리인데.”

“…전선에 시찰을 나갔다고 들었는데.”

“네 복위인데 내가 마땅히 와야지. 이래 봬도 하나뿐인 사촌이지 않아.”

카스트로의 손짓에, 아닌 척 귀를 기울이던 귀족들 몇몇이 조금 더 거리를 두고 물러섰다. 그들을 두고 둥근 원이 형성되자마자 카스트로는 곧장 가면을 벗어 던졌다. 안 그래도 가깝던 거리를 한 걸음 더 좁힌 그가 으르렁거렸다.

“왜 돌아왔어?”

나직하게 끓는 목소리는 숫제 협박이었다.

“그 지저분한 궁에서 평생 약이든, 술이든, 주는 대로 입 속에 처넣지 않고.”

“…….”

“네가 그 손으로 엘레나를 죽인 그 순간부터, 내가 네 숨통을 얼마나 끊어 두고 싶었는지 모를 거야. 대체 여기가 어디라고, 살인자 새끼가, 감히.”

“…….”

“혹시 가당치도 않은 네 권리를 주장하며, 내 아비의 자리를 노리는 거라면….”

“카스트로.”

점점 열띤 쪽으로 흐르기 시작한 논지를, 비센테가 한쪽 손을 들어 올리며 저지했다. 그는 엷은 한숨부터 뱉었다. 뚝뚝 묻어나는 피로한 기색을 감추려는 최소한의 노력조차 하지 않은 채 입을 열었다.

“네가 그렇게 날 세울 필요도 없다. 네가 그러지 않아도 나는 어차피 평생을 전장을 떠돌 거고, 평생 네 자리를 향해서는 눈길조차 주지 않고 살 테니까.”

“…….”

“네가 제위에 올라 있는 한, 수도는 밟지도 않겠다고 약조하지.”

환멸, 혹은 희미한 비난. 비센테의 우아한 얼굴에선 그 두 가지 감정 외엔 어떤 것도 묻어나지 않았다. 그것을 고까운 눈으로 바라보던 카스트로가 등지고 선 귀족들에게 보이지 않게 그의 멱살을 틀어쥐었다.

“그렇게 주제를 잘 아는 새끼가, 지금 여기가 어디라고 기어들어 와?”

처음에는 침착하게 읊조리던 것이 무색하게, ‘새끼가’에서부터 커지기 시작한 목소리는 ‘기어들어 와’에 이를 즈음엔 물러선 사람들이 들을 정도는 되었다. 앞뒤 분간하지 못하는 난폭함이야 하루아침의 일이 아니었지만, 지금은 지나치게 이목이 그들에게로 집중된 상태였다.

황제는 영리하지는 못해도 최소한 영악한 자였고, 비센테의 복위연을 한낱 데뷔탕트와 묶은 것은, 그의 군인으로서의 이미지에 심심찮은 타격을 입히려는 심산이었을 것이다. 처음부터 끝까지 구경거리로나 존재하는 자리였다. 안 그래도 불편한 위치에서, 황태자와 한데 묶여 ‘혈기왕성하다’는 평으로 박제되는 것은 사양이었다.

게다가, 이벨린. 그의 등 뒤에서 새파랗게 질려 있을 여자가 신경의 대부분을 잡아먹었다. 그는 반쯤 매달리듯 앞섶을 움켜쥔 카스트로의 손을, 힘으로 억눌러 끌어내렸다.

“부르심은 황제의 명이었다. 내게 항의할 시간에 부자간의 대화나 나누는 것이 더 유익할 테고.”

“네가, 폐하께서 부른다고….”

“부른다고 오고, 가라면 갔지. 그렇게 전쟁터의 최전선이나 떠돈 것이 열여섯부터 지금까지의 내 평생이었고.”

“…….”

“네가 황제가 된다고 해도, 에스페다를 향한 충성심은 같겠지.”

비센테는 다소 짜증스럽게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쓸어올렸다. 여자의 상태를 확인할 수 없어 지독한 초조함이 일었다. 눈에 띄게 덜덜 떠는 게 숨도 제대로 못 쉬는 것 같던데, 시간을 더는 지체할 수가….

잠깐 침묵하던 카스트로가 입술을 비틀었다.

“네가 그렇게 주제 파악을 잘 하고 있는 줄은 몰랐네.”

“더 할 말 없으면 이만 가보도록 하지. 내 아가씨가 몸이 불편한 것 같아서.”

“…여자?”

그제야 카스트로는 비센테의 등 뒤에 여자가 있다는 것을 눈치챈 듯했다. 놀란 듯 크게 트였던 눈에 순간적으로 강렬한 증오가 어렸다.

“네가, 계집을 가까이 둔다고.”

“소식을 듣지 못했던 모양인데.”

“듣기야 했지. 백모께서 먼 친척을 의탁했다고. 그리고 네가, 그 운 좋은 고아 계집에게 제법 진심인 척 군다고.”

“…….”

“하나같이 믿을 수가 없는 이야기였는데… 네 뒤에 같잖게도 숨겨둔 꼴을 보니, 정말인가 보군.”

그는 피로한 얼굴을 마른 손으로 짚었다. 여기서 더 실랑이가 길어져서는 안 됐다. 적어도 이벨린을 보이는 순간만큼은, 지금이어서는 안 됐다. ‘엘레나’는 어느 순간에나 철저한 여자였다.

두려워도 가냘프게 떨지 않고, 아프더라도 아픈 티는 죽어도 내지 않는, 고집 있고 결벽적이기까지 한. 기실 황후보다는 황제의 위가 더 어울리는 여자였다. 이벨린이 겉으로는 아무리 엘레나를 닮았다고 해도 저런 태도로는 어설프게나 보일 터다. 특히나, 엘레나에게 집착했던 카스트로에게는 더더욱.

오늘은 일단 물러나, 저 여자가 완벽하게 준비될 때를 기다려서….

“인사는. 시켜 주지 않을 셈인가?”

그런데, 기어코. 무언가를 감지라도 한 듯, 카스트로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고작해야 옷자락, 머리 모양, 그리고 등 돌린 뒷모습이나 본 주제에…. 비센테가 성가시다는 듯 눈매를 일그러트렸을 때였다. 그의 팔뚝을 붙잡는 작은 온기가 있었다.

“송구합니다, 황태자 전하. 제가 몸이 좋지 않아서.”

탁. 그의 팔을 쥐는 손길에 날 일순, 미약한 파열음이 들린 것만 같았다. 그는 반사적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여자의 낯빛은 화사했다. 한 번도 창백하게 질렸던 적 없었던 것처럼, 과호흡은커녕 잠깐의 머뭇거림조차 단 한 차례도 없었던 것처럼.

그 언젠가의, 엘레나처럼.

비센테는 그녀가 힘주는 대로 밀려나 주었다. 그를 제 앞에서 밀어낸 이벨린이 카스트로의 앞에 정면으로 섰다. 말간 웃음을 지으며 무릎을 굽혔다.

“이벨린 로즈 레녹스입니다.”

완벽에 가깝도록 우아한 예법에, 주변에서 아닌 척 지켜보던 귀족들 사이에 미미한 탄성이 일었다. 이벨린을 희대의 작부라도 되는 양 바라보던 시선들이 순식간에 우호적인 기색으로 누그러든다. 여자의 발음은 풍부한 브리타냐의 억양으로 더욱 고혹적으로 들렸다.

“바로 인사 올리지 못한 것은 용서하세요. 2황자 전하께선, 그저 친척 된 도리로 저를 걱정해 주셨어요.”

엘레나의 데뷔 때와 똑같은 머리와, 장신구, 의복, 목소리…. 처음 꼽았던 조건들은 그저 사소하게 느껴질 정도로 여자는 근사했다. 고아한 예법, 쉽게 흉내 낼 수조차 없던 미소, 눈매, 목소리와 발음. 비센테는 입속으로 헛웃음을 삼켰다. 제 앞에서 적당히 어설픈 척 굴던 ‘이벨린 로즈 레녹스’는 이미 온데간데없었다.

그의 등 뒤에서 숨을 몰아쉬는 소리가 들린다. 호흡이, 가빴다가, 밭았다가, 믿을 수 없다는 듯 서서히 흘러나왔다. 이벨린의 얼굴에 못 박힌 듯 시선을 고정했던 비센테는, 그제야 카스트로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충격과 희열, 순식간에 불붙은 욕망에 휩싸인, 저 진득한 눈동자.

“…이벨린, 로즈 레녹스라고.”

여자가 매혹적인 웃음을 지으며 손을 내민다. 카스트로가 그녀의 가냘픈 손을, 손목째로 붙잡았다. 입술을 손등에 묻는 그 순간까지도, 징그러울 정도로 이벨린의 면면을 훑는 게 보였다. 그녀의 뺨, 입술, 콧날, 목덜미, 팔뚝….

“이벨린….”

언제 봤다고, 벌써부터 그녀의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가 그야말로 애달팠다. 이벨린이 순하게 웃었다.

“예, 전하.”

그가 준비한 가짜는 그야말로 완벽했다. 카스트로의 얼빠진 꼴을 보겠다고 준비한 여자인데도, 웃음은 말라붙은 것처럼 조금도 나지 않았다. 하다못해 비웃음조차. 제가 파 놓은 함정에 걸려든 것이니 꼴사납게 느껴져야 마땅한데도.

그저 끔찍했다. 황태자의 지저분한 아가리에 또 다른 희생양을 밀어 넣고야 만 것이, 저 꼴을 보자고 그가 여태껏 감내해 왔던 모든 것들이.

그리고 어떤 무엇보다도, 저 여자가 황태자 앞에서 엘레나를 닮은 얼굴로 웃고 있는 것이.

비센테는 손등에 핏줄이 툭 불거지도록 꽉 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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