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0화 (40/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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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와의 대면은 긴장했던 것이 무색하게도 시답잖게 끝이 났다. 자작 및 남작 영애 서너 명과 함께 우르르 몰려들어 갔다가, 얌전히 예를 올리고 다시 우르르 물러 나온 것이 전부였다. 그 과정에서 특이 사항이라고 해 봐야 ‘이벨린 로즈 레녹스’를 소개하는 시종장의 말이 끝난 뒤 황제의 침묵이 조금 더 길었다는 것뿐이었다.

“발 조심해.”

이벨린은 드레스 자락을 살짝 말아쥔 채로 비센테의 손을 붙잡고 마차에서 내려섰다. 데뷔 무도회가 열리는 ‘엘 레티에로’ 홀에는 벌써부터 발 디딜 틈 없이 사람들로 꽉꽉 들어차 있었다.

“이쪽으로.”

이벨린은 비센테가 이끄는 대로 계단 옆에 마련된 대기실로 들어섰다. 열린 문틈으로 연회장 안이 들여다보였다. 그녀는 홀의 장식들이 지나칠 정도로 단순하다는 것을 눈치챘다. 국상이 일어난 것이 고작 몇 달 전이니, 이것보다 더 화려하게 꾸밀 수는 없었을 터였다.

“바섬 백작 부인이 이번에도 황제의 아이를 가진 것 같더구나.”

황제의 또 다른 아이. 시에나의 말을 듣고서야 이 정신 나간 일정이 납득이 갔다. 하긴 국상을 치른 지 얼마나 되었다고, 데뷔탕트며 무도회, 사냥제까지 연달아…. 황제는 새로운 자식을 보호하기 위해 죽은 아들을 누구보다 빠르게 묻은 것이다. 그 속내가 오늘따라 더욱 역하게 느껴지고 만 것은, 3황자를 처음 만난 날과 오늘의 풍경이 겹쳐 보이기 때문일 터였다.

“읏….”

이벨린은 가벼운 현기증을 느끼며, 비센테와 맞잡은 손에 조금 더 힘을 실었다. 평소보다 가늘게 압박된 허리 때문인지 숨이 가빴다.

“긴장돼?”

조금씩 말라 가는 기분은 긴장 때문만은 아니겠지만, 이벨린은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은요.”

“긴장할 필요 없어. 아주 아름다우니까.”

이벨린을 대하는 비센테의 태도는 요즘 들어 눈에 띄게 달라졌다. 정확하게는 그녀가 ‘꿈을 꾸고 싶다’고 말한 뒤부터. 요즘의 그는 깊이를 알 수 없는 호수와 같았다.

폰페라다 궁에서처럼 위태롭지도, 서늘하지도 않은 계산된 고요함. 그 다정함. 한 꺼풀의 거짓된 애정을 벗겨 내면, 그 아래 철저하게 동요 없는 남자의 민낯이 보였다.

“저 연회장의 사람들 모두 그대만 바라보겠어.”

그가 이벨린의 손가락을 들어 올려 제 입술에 가져다 대며 말했다. 역설적이게도 이벨린은 그가 아주 다정하게 구는 순간마다 거리감도 동시에 느꼈다. 그건 아마도 비센테가 의도한 바였을 것이다.

거짓된 연기를 위해 다정히 대하는 것은 어렵지 않지만, 그것을 진심으로 착각하지는 말라고.

요즘의 비센테는 정말로 그녀가 그를 사랑하게 될까 봐 경계하는 것처럼 보였으므로.

처음으로 자각하기 시작한 마음은 그 순간부터 맹목적으로 불길을 키워갔다.

이벨린은 그를 향한 자신의 감정이 생각보다 깊고, 시시각각 깊어지고 있다는 것에 가끔은 절망을 느꼈다. 그럴 때면 낭떠러지 앞에 홀로 선 것 같은 까마득함도 함께 왔다.

비센테는 죽어도 그녀를 돌아보지 않을 것이다. 그녀가, 엘레나라는 사실을 실토하지 않는다면.

“…….”

이벨린은 그에게 제가 엘레나라고 고백하는 순간을 상상했다. 둘 사이에 확인할 만한 유대감이라고는 그가 저를 죽인 그 순간에나 있었으므로, 증명을 위해서 들먹어야 할 것은 명확했다.

그들은 ‘그날’의 진실을 알았다. 세간에 알려진 것과는 다르게 비센테는 그녀를 죽이지 않았다는 진실을.

그 일을 언급하면 비센테는 그녀의 말을 믿을 수밖에 없다. 그가 그녀를 마녀로 몰아서 죽일 만한 사람이 아니라는 확신도 이제는 있었다. 문제는, 이게 끔찍하게도 이기적인 행동이라는 것이다.

고작 사랑을 위해 상대의 가장 아픈 상처를 헤집어도 되는 걸까?

게다가 이벨린의 몸은 언제나 ‘이벨린’의 것이었다. 언제까지 이 몸에 머무르게 될지도 모르면서, 그를 끝까지 책임질 자신도 없으면서. 무책임한 고백은 순간을 즐기겠다는 충동보다 나을 게 하나도 없었다.

그녀는 비센테의 시선을 피하듯 고개를 돌렸다.

“속이 불편해요.”

“힘들면 이만 돌아갈까?”

“…어떻게 그래요. 제가 무슨 각오로 여기까지 왔는데.”

이벨린은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애써 웃었다. 웃음의 끄트머리에 불현듯 불안감이 치밀었다.

“정말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겠죠? 제가, 정말, 전하의….”

“그래.”

말을 채 마치기도 전에 비센테가 부드럽게 그녀의 불안을 끊어 냈다.

“아무도 모를 거야.”

“얼마나 더 기다려야 해요?”

“조금만 더. 황족은 늘 귀족들 다음에 등장해야 하니까. 이제 거의 다 끝난 것 같군.”

이벨린은 마지막으로 제 차림새를 정돈했다. 낮에 입었던 드레스가 정숙한 쪽이었다면, 지금 입은 것은 목선을 쇄골 아래까지 과감하게 드러낸 형태였다. 목에 걸린 사파이어 목걸이가 묵직하게 숨을 죄었다. 이윽고 절반만 열려 있던 문이 노크와 함께 활짝 열렸다.

“황자 전하.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시종의 공손한 조아림에 이벨린은 다시금 비센테의 손을 맞잡았다. 어둑한 대기실에서 나온 탓일까? 쏟아지는 환한 빛에 잠깐은 눈이 멀듯이 부셨다.

“인판테, 비센테 오스티나토 시모라 데 에스페다 전하 드십니다.”

“이벨린 로즈 레녹스 백작 영애 드십니다.”

이벨린은 등을 우아하게 펴고 그의 에스코트를 따라 천천히 걸었다.

‘레녹스’니 ‘유산의 상속자’니 해도 결국 이방인이었다. 전쟁 배상금으로 몰락하는 귀족들이 속출하던 시절도 아니고, 외국의 돈 많은 집안과 결혼이 유행했던 것은 이백 년도 전의 일이었다. 기실, 누구의 호의도 기대할 수는 없을 것이다.

에스페다인들이 외국인에게 폐쇄적인 것은 그녀도 누구보다 잘 알았으므로.

“2황자 전하.”

“전하를 뵙습니다.”

모여 있던 귀족들의 무리가 일렁이듯 물러서며 인사를 건네왔다. 질시와 호기심이 반반씩 어린 시선이 이벨린의 얼굴에 따갑게 와 닿았다.

이벨린은 비센테의 손을 잡은 채로 천천히 연회장을 가로질렀다. 한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인파가 좌우로 갈리며 길이 트였다. 물러서며 고개를 조아리는 귀족들의 면면은 예상했듯 익숙했다. 발데페르와 몬테 영애, 알가바 백작과 바스크 후작….

한순간, 아득한 과거 속을 걷는 것 같았다. 잘 가라앉혀 두었던 속이 다시금 얕게 울렁거리기 시작했다.

“웃어야지, 이벨린.”

비센테가 그녀의 귓가에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속삭였다. 이벨린은 입매를 매끄럽게 끌어 올렸다. 긴장으로 뻣뻣하게 굳어 있던 얼굴이, 재치 있는 농담이라도 들은 것처럼 순식간에 활짝 피었다. 그녀는 첫 무도회에 긴장한 것처럼 비센테를 붙잡은 손에 힘을 조금 더 실었다.

비센테의 목적이 사교계 사람들을 속이는 것에 있다면, 그녀의 목적은 비센테까지 속이는 거였으니까. 이제 갓 사교계에 데뷔한 여자가 사람들의 시선에 초연한 것만큼 수상쩍어 보이는 것도 없을 것이다. 이벨린은 살짝 어깨를 떨었다.

“다들 우릴 보고 있어요.”

웃으라고 종용했던 게 무색하게도, 정작 그는 이벨린의 웃음에 심란한 눈을 했다. 이벨린은 그 눈빛에 미심쩍어하며 되물었다.

“우리, 지금 잘하고 있는 것 맞죠?”

“…그래. 내 예상보다도 훨씬 더.”

사람들이 웅성거리는 목소리 위로 관현악단이 현을 정비하는 소리가 얕게 덮였다. 비센테는 흠잡을 곳 없이 우아한 태도로 이벨린을 연회장의 가장 안쪽으로 이끌었다. 단상 가까이 다가서자 시립한 황제의 시종장이 비센테를 향해 고개를 조아렸다.

“두 분께서는 첫 단에 오르십시오.”

이벨린은 드레스 자락을 살짝 쥐고 첫 번째 단상 위로 올랐다. 고작해야 가장 낮은 단 위에 올라선 것뿐인데도, 모두의 머리 위에 선 것 같은 착각이 일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직접적이던 시선 중 무엇 하나 가깝게 닿지 않았다.

단상 위는 지나치게 밝았다. 고작해야 몇 발짝 떨어진 그 아래가 흐릿하게 물감을 뭉개 놓은 것처럼 불분명하게 보였다. 서로를 관찰하던 위치에서, 이제는 일방적으로 관찰당하는 위치로 전락한 것이다. 그리고 ‘저들’ 중 대다수는 ‘엘레나’를 안다. 불현듯 불안이 치밀었다.

“여기, 반역자의 딸이 있다!”

이벨린은 소리가 들려온 쪽을 향해 고개를 휙 돌렸다.

“…….”

그러나 그곳에는 무표정한 귀족들뿐이었다. 환청이었을까? 물론, 그랬겠지…. 어떤 소란도, 그녀를 끌어 내리기 위해 기사들이 달려오는 일도 없으니까. 머리로는 이성적인 판단이 되는데도, 긴장된 호흡은 순식간에 가빠졌다. 심상찮은 기색에 비센테가 그녀의 팔뚝을 붙잡아 왔다.

“갑자기 왜 그래? 몸이 안 좋아?”

이벨린이 손등에 핏줄이 서도록 힘을 주어 그의 팔을 맞잡았다.

“보, 보는 눈이, 많아서… 그런가 봐요.”

“나한테 기대.”

그가 이벨린의 팔을 붙잡고 부드럽게 제게로 끌어당겼다. 덕분에 그의 넓은 가슴팍에 거의 끌어안긴 자세가 되었지만… 사람들의 집요한 시선에서 벗어났다는 것만으로도 큰 위안이 되었다. 이벨린은 그의 가슴에 이마를 살짝 기댔다. 그의 큼직한 손이 그녀의 헐벗은 등에 살짝 닿았다.

“긴장 풀어. 천천히 숨 들이쉬고.”

“…….”

“이제 다시 내쉬고.”

그녀는 비센테의 지시대로 천천히 호흡을 가다듬었다. 가장 끔찍한 순간이 지나가자, 남은 것은 부끄러움뿐이었다. 잠깐 미쳤던 게 틀림없었다. 보는 눈이 이렇게나 많은데, 이렇게 바짝 붙어서는…. 그녀는 어색하게 그에게서 몸을 떼어 냈다.

“이제 괜찮아졌어요.”

“정 힘들면 내려가 있어.”

“여기서요? 전하만 두고요? 내일 가십지에서 감히 2황자 전하를 버려 두고 간 여자로 물어뜯을걸요.”

“이벨린, 네 몸이 우선이야.”

답지 않게도 진지한 권유에 이벨린은 눈을 깜박였다. 저 말은 그의 진심일까, 아니면 이것도 연인인 척하는 연기의 일부일까. 사실 답은 명확했다. 혼란스러운 것은 그의 태도가 아니라, 저 말을 곧이곧대로 믿고 싶어 하는 제 마음일 뿐이었다.

이벨린은 그에게서 애써 눈길을 떼어 내며 말을 돌렸다.

“황제께서 많이 늦으실까요?”

“아마 오래 걸리진 않을 거야.”

“어떻게 아세요?”

“시종들이 분주하게 움직이기 시작했으니까.”

그의 말대로였다. 단상 아래에서 시종들이 바쁘게 움직이는 것이 보였다. 곧, 황제와 마주하게 된다. 등줄기를 타고 기분 나쁜 긴장이 서서히 기어 올라왔다. 황제에 대한 마지막 기억은 최악이었다. 특히, 종신형을 선고하던 그 냉랭한 음성은.

“목숨은 보존하되, 후사는 낳지 말라. 맹약으로 정해 놓았다고 하나 스스로 아이를 거부해 가문이 끊어지는 것은 신도 어쩌지 못하리라.”

이벨린은 목에 걸린 목걸이를 만지작거렸다. 커다란 보석에 비해 무겁지는 않았지만, 후덥지근한 공기 때문인지 숨이 막혔다. 손톱을 세워 체인이 닿은 피부를 긁듯이 매만지자, 비센테가 단호하게 그녀의 손을 붙잡았다.

“상처 나겠어.”

“…자꾸, 왠지 목이 답답해서요.”

“조금만 참아. 연회가 시작되면 샴페인이라도 가져다줄 테니.”

“시작부터 술을 마셔도 돼요? 우리, 춤은요?”

“네 상태가 이러한데 굳이 출 필요는 없지.”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제 상태가 어떻든 첫 춤은 춰야 해요.”

“왜?”

“단순히 제 데뷔 무도회라면 몰라도, 전하의 사교계 복귀를 알리는 연회기도 하니까, 보란 듯이 춰야 의미도 있고….”

귀족들의 머리 위로 시선을 두었던 그가 이벨린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왈츠 말고 달리 출 수 있는 춤이 따로 있던가?”

“없…지만….”

“그러면 오늘은 분위기만 익힌다고 생각해 둬.”

“…….”

“춤을 추지 않는다고 해도 사람들은 그대가 아닌 내게서 원인을 찾겠지. 내가 여태껏 그런 걸 신경 쓴 적 없으니까.”

“…….”

“이런 자리에 여자와 동행한 적조차 처음이니.”

비스듬히 짓는 미소는 그림 같았다. 태생처럼 새겨진 우아한 권태와 오만, 그 여유로운 태도에 기대어 가까스로 숨을 내쉬었다.

이벨린은 천천히 안도했다. 아직은 버틸 수 있었다. 적어도 그를 바라보고, 그의 손이 제 손을 붙잡고 있는 동안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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