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9화 (39/151)

***

“그러니까 요약하자면, 오스티나토 공이 황태자 전하를 부르는 공식적인 호칭이어요.”

마지막으로 상식을 점검하라는 명령이라도 내려온 모양이었다. 그녀의 머리카락을 땋으며 읊기 시작한 귀족들의 신상 명세는, 이윽고 황태자와 황자에까지 이르렀다. 이벨린은 적당히 이해했다는 시늉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비센테 전하께서는 이제 유폐가 풀리셨으니, 공식적으로 다시 칭호가 붙으시는데 그게 바로….”

그러나 그 ‘점검’이 30분쯤 이어지자, 이벨린은 급격하게 인내를 잃어 갔다.

“알아, 인판테. 황위 계승권의 두 번째.”

머리를 올리다 말고, 하녀가 거울을 바라보며 눈을 마주쳤다. 감탄이 선명했다.

“아가씨께선 브리타냐에서 오셨으면서, 어찌 그렇게 에스페다의 문화를 잘 아세요?”

그야, 내가 살던 곳이 이곳이니까….

게다가 근래 들어서는 오스티나토 공이니, 인판테니, 모두 다 사장되기 시작한 호칭들이었다. 황태자 전하나 황자 전하로 부르는 것이 조금 더 ‘세련된’ 것으로 여겨지는 시대였으니까. 서대륙에서 유일한 제국의 위엄을, 조금이라도 더 돋보이기 위해서.

“화장은 어떻게 하시겠어요?”

이벨린은 이어지던 생각에서 빠져나와 하녀를 향해 미소 지었다. 그새 솜씨 좋게도 올린 머리가 근사했다.

“이대로 마무리하면 될 것 같아.”

“이벨린 아가씨. 황자 전하께서 하인을 보내셨어요.”

이벨린은 하녀의 몸 옆으로 고개를 쭉 내밀었다.

“무슨 일인데?”

“직접 뵙겠다고 하여서… 들여보내도 될까요?”

“들여보내렴.”

그녀의 허락에 문 바깥에서 기다리고 서 있던 하인이 방 안으로 성큼 들어섰다.

“2황자 전하께서 아가씨께 보내는 선물입니다. 받으시는 것을 직접 보고 돌아오라고 명하셨습니다.”

하인이 양손으로 받쳐 든 상자를 그녀에게 내보였다. 검푸른 비로드로 덮인 작은 상자는, 모서리마다 은으로 섬세하게 장식되어 있었다.

“열어 보렴.”

그녀의 명령에 하인이 상자를 열었다. 순간, 아닌 척 그들을 구경하고 있던 방 안의 하녀들이 전부 탄성을 내질렀다.

상자와 똑같은 검푸른 비로드 위로, 큼직한 사파이어 목걸이가 놓여 있었다. 연결된 체인을 따라 박힌 자잘한 다이아몬드들이 빛을 받을 때마다 반짝였다.

“맙소사!”

“지난 엘 포르토 경매에 나왔다던 모로네 왕녀의 사파이어 아닌가요? 이것 때문에 한동안 수도가 시끄러웠었잖아요.”

“세상에, 이 섬세한 세공 좀 보세요….”

“어서 걸어 보셔요, 아가씨.”

도리어 하녀들이 더욱 신나서 그녀를 재촉했다. 정작, 목걸이를 바라보는 이벨린의 속내는 복잡하게 가라앉았다. 굳이 ‘엘 포르토’까지 거쳐, 유난스럽게도 낙찰받은 목걸이를 가져다준 것은 기실 보여 주기에 더 가까웠다.

그 속내를 모르는 하녀들이야 낭만적이라고 외치겠지만….

“어제저녁, 정원에서 아가씰 보고 한눈에 반하신 게 틀림없어요.”

이벨린은 순진한 하녀의 말에 흐리게 웃었다.

가까이에서 그들을 지켜본 하녀들까지 이 지경이니, 사교계는 말할 것도 없이 떠들썩할 터였다. 하녀들이 재빠르게 그녀의 목에 걸려 있던 에메랄드를 치우고, 사파이어를 걸어 주었다. 몇 가지 사소한 단장마저 끝마칠 무렵, 클라우디아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급히 준비하여 걱정했는데, 괜찮구나.”

그녀를 위에서 아래로 훑어본 클라우디아는 흡족한 듯 미소 지었다.

“마차를 준비해 뒀단다. 다행스럽게도 늦지는 않았어.”

“지금 당장 출발하나요?”

“그래. 다른 아가씨들과 똑같이 알현실에서 인사를 드리게 될 거야.”

빠르게 달리던 마차가 서서히 속도를 늦추기 시작했다. 이벨린은 작은 창문을 가렸던 커튼을 들추고 바깥을 내다보았다. 황제궁의 초입부터 길게 늘어선 마차들은 보는 것만으로도 사람을 진 빠지게 만드는 구석이 있었다.

“아가씨, 부채….”

메리의 지적을 듣고서야, 이벨린은 제가 부채를 거의 쥐어짜고 있다시피 하고 있는 것을 깨달았다.

“…미안해. 완전히 구겨졌네.”

“손에 끼고 계시면 잘 보이지 않을 거예요. 이리 줘 보셔요. 단추를 채워 드릴게요.”

이상하게도 첫 번째 데뷔 때보다도 더욱 긴장되었다. 거짓으로 모두를 속이겠다는 포부 때문인지.

“아가씨. 곧 우리 차례예요.”

메리의 재촉에 이벨린은 서둘러 옷매무새를 가다듬었다. 느리게 앞으로 움직이던 마차가 이윽고 완전히 멈춰 섰다. 뒤에 타고 있던 하인들이 부산스럽게 내리는 소리가 들렸다. 곧 문이 열리고, 하얀 장갑을 낀 손이 마차 깊숙이 내밀어졌다.

“이블린 로즈 레녹스 양.”

매끄러운 브리타냐 궁정식 발음이었다. 에스페다 식이나, 평민들이 아무렇게나 발음하는 이벨린이 아니라, 이블린. 고작해야 하인일 거라 생각한 이벨린은 예기치 못한 얼굴을 마주하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녀의 본 비센테의 눈매가 미세하게 좁혀졌다.

“그렇게 놀랄 일인가?”

머리부터 발끝까지 말끔하게 성장한 차림의 비센테는, 오른쪽 눈썹 위로 흐트러진 머리카락과 대비되게 반대쪽은 말끔하게 넘긴 채였다. 금사로 수 놓인 흰 베스트가 조각 같은 얼굴에 화사함을 더했다. 그야말로 어떻게 해야 제 잘난 얼굴이 더 잘나 보일 수 있는지를 완벽하게 꿰고 있는 게 분명했다.

심장이 뛰기 시작했다. 예상치 못한 곳에서 맞닥트린 놀람 때문인지, 다른 이유에서인지….

“여긴 왜 왔어요?”

그녀의 물음에 손을 내밀다 말고 비센테가 헛웃음을 터트렸다. 그러자마자 순식간에 아닌 척 관찰하고 있던 주변의 시선들이 그들에게 쏠렸다. 이벨린은 쏠린 사람들의 관심에 낯을 붉히는 척하며 비센테의 손 위로 제 손을 겹쳤다.

“굳이 이러실 이유가… 무도회장에서 만나도 되었잖아요.”

“그보단 더 유난스럽게 보여야지.”

“그러니까, 굳이….”

“내가 그대를 좋아하잖아.”

이벨린은 마차에서 내리는 도중이라는 것도 잊고 그를 올려다보며 눈을 깜박였다. 꿀이 떨어질 듯 달콤한 목소리와는 달리, 내려다보는 눈빛은 숨길 수 없이 오만했다. 이벨린은 헛웃음을 삼켰다. 저런 눈을 마주하고도 ‘착각’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차라리 며칠 전이 더 감정적이었지….

이벨린은 대답하지 않은 채 시선을 돌렸다. 아닌 척 이쪽을 살피는 사람들 중 유독 익숙한 낯들이 몇몇 보였다. 안드라데 공작 영애, 에스테반 공작, 누에바 후작 영애…. 시선을 돌릴 때마다 호기심과 질시, 경계가 뒤섞인 눈빛이 관찰하듯 달라붙었다.

에스페다의 사교계는 폐쇄적인 편이었고, 대귀족들은 갓 걸음마를 뗀 어린 시절부터 저들끼리 왕래하는 것이 보편적이었다. 서로가 빤한 사람들 사이에 급작스레 낯선 인물이 등장했으니 경계심을 가지는 것도 당연했다.

어쩌면, 처음부터 저들의 호의 어린 얼굴을 아예 몰랐다면, 이 모든 것을 견디기 수월했을지도 모르겠다. 낯선 타인을 바라보는 것 같은 시선에 주제도 잊고 막막했다. 속이 금방이라도 토할 것처럼 불편하게 울렁거리기 시작했다. 이벨린이 창백한 얼굴로 마차에서 완전히 내려서자, 그가 물었다.

“긴장돼?”

“전하께서는 긴장되지 않으세요?”

이벨린은 입을 열자마자 괜한 것을 물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황가의 일원으로 평생을 전시된 채 살아온 남자였다. 이제 와서 새삼스레 타인의 시선에 긴장한다면, 그야말로 저 근사한 껍질 속에 다른 영혼이 들어 있는지 의심이라도 해 봐야 할 터였다. 그가 픽 웃음을 흘렸다.

“답지 않게 걱정까지 해 주는 걸 보니 정말 긴장했나 보군.”

“답지 않다니….”

“알현이라고 해도 별거 없어. 하던 대로 걸어서 홀의 중앙까지 가. 황제께서 부르시기 전까진 시선을 들지 말고, 부르신다고 해도 콧등 위로는 바라보지 마.”

“…충고 감사해요.”

한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쏟아지는 시선들이 따가웠다. 과거, 카스타야 후작의 손에 이끌려 걷던 때와는 무엇도 달랐다. 환경도, 주변의 시선도, 몸도, 그녀의 손을 잡은 사람조차…. 이윽고 도달한 거대한 목문 앞에서 그가 부드럽게 이벨린의 손을 놓았다.

“내가 함께 갈 수 있는 곳은 여기까지야.”

직계 혈족이 아닌 이상에는 미혼의 남성에게는 알현실 안까지 에스코트 자격이 없었다. 이벨린은 멀어지는 그의 손을 다시금 붙잡았다. 생각이나 계획이 반영되지 않은 충동적인 행동이었다.

“잠깐, 잠깐만요.”

“왜?”

그가 의아한 듯 바라보았다. 이 싸늘한 온기가 유일한 버팀목이라는 게 아이러니했다.

“이대로 잠시만 있어 주세요. 긴장되어서… 조금, 침착함을 되찾게요.”

“시건방지다. 고작 그런 이유로 황족의 몸에 먼저 손을 대?”

“…좋아하는 여자한테 그렇게 말해도 돼요?”

“좋아하니까 네 무례를 넘어가 주고 있잖아, 지금.”

이벨린은 순간적으로 말문이 막혀 그를 올려다보았다. 낯부끄러운 말을 내뱉고도 정작 담담하게 그녀를 내려다보던 그가 입매를 부드럽게 끌어 올렸다.

“왜?”

“아무래도 제 무덤을 제가 판 것 같아서요.”

이벨린은 한숨처럼 항복했다. 그녀의 순순한 태도에 비센테가 조금 더 진하게 웃었다. 그가 그녀의 손을 아무렇게나 잡아 올려 키스했다. 매끄러운 뺨 위로 속눈썹이 우아하게도 그늘졌다.

“…….”

당하는 당사자는 그 성의 없음을 알지만, 곁에서 보기엔 퍽 그럴듯했던 모양이다. 아닌 척 그들을 살피고 있던 주변에서 작은 감탄사가 일었다.

“이 너머가 바로 황제의 홀은 아니니 안심해.”

“…….”

“그럼 다녀와. 여기서 기다릴 테니까.”

그에게 부드럽게 떠밀려 목문 쪽으로 걸어가자마자 시종이 문을 열었다. 이벨린은 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몇몇 영애들의 틈바구니에 섞여 두 번째 홀 안으로 들어섰다. 뒤를 흘긋 돌아보자 그녀를 바라보고 있던 비센테가 반사적으로 미소 지었다. 제대로 볼 새도 없이, 다시금 목문이 닫혔다.

이벨린은 앞쪽으로 시선을 바로 한 채 천천히 걸었다. 사람을 압도하는 거대한 기둥들과 끝도 없이 긴 회랑, 드높은 천상이 그려진 천장화. 황가에 대한 반감에도 불구하고, 그 공간이 아주 인상적이라는 것만큼은 부정할 수 없었다.

세 번째 홀로 통하는 문 앞에는 먼저 들어온 아가씨들로 북적였다. 이벨린이 그들의 끄트머리에 다가서자, 자리를 비켜 주려는 부드러운 소란이 일었다. 다 같이 한 걸음씩 붙은 탓에 그녀를 주변으로 작은 원이 생기긴 했지만…. 어쨌든 서 있기엔 편하다는 장점만은 분명했다.

“올리바레스 공작 영애, 바르코 후작 영애, 마티에라 백작 영애.”

시종장이 우렁차게도 외치자, 드레스 자락끼리 사그락거리는 소리마저 사라졌다. 이윽고 창백한 낯의 여자 셋이 세 번째 목문 너머로 사라졌다. 한 번에 여럿씩 부르는 것을 보아하니, 올해 데뷔하는 여자들의 숫자가 제법 되는 모양이었다. 하기야 여기만도 사람이 이렇게 많은데.

이벨린은 문득 따갑게 느껴지는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마자 이쪽을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던 여자와 눈이 마주쳤다. 여자는 그녀와 눈이 마주치자 화사하게 미소 지었다.

회색 머리카락에 회색 눈, 도톰한 입술과 앙큼한 고양이 같은 눈매. 몇 년 전에 마주했던 것보다는 성숙했지만,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파르디타 데 비탈리. 황태자의 사촌 여동생이자, 비탈리 후작가의 유일한 영애. 황녀가 없는 에스페다에서 그야말로 황녀처럼 군림하는 여자.

위화감은 분명했다. 그녀가 알기로 파르디타는 올해로 스물둘이니, 아무리 늦되어도 작년에는 데뷔를 했어야 옳았다. 귀족 가문의 영애들에게 사교계 데뷔를 늦추는 게 아무리 유행처럼 번지고 있다고 해도, ‘대귀족’들은 언제나 모범을 보여야 했다.

이벨린이 의아해하는 사이에 파르디타가 성큼 다가섰다.

“안녕하세요, 영애.”

“안녕하세요.”

“저는 비탈리의 파르디타예요. 실례지만, 영애께서는 어느 가문의 영애이실까요?”

“레녹스랍니다, 비탈리 영애.”

파르디타의 미소가 조금 더 짙어졌다. 놀람이나 당혹스러움은 조금도 내비치지 않은 채. 이벨린은 파르디타가 애초부터 그녀의 신분을 짐작했으리라는 것을 깨달았다.

“레녹스라면 에스페다의 가문이 아니네요.”

“맞아요. 저는….”

“아, 이제 기억났어요. 황태후 전하의 먼 친척이시라고 들었어요.”

그녀의 대답을 기다리지도 않은 채 파르디타가 말을 끊었다. 예법에 어긋나는 행위였으나 워낙 우아하게 웃고 있으니, 순간은 잘못된 것처럼 느껴지지도 않았다.

“정말, 소문처럼 황태후 전하를 조금도 닮지 않았네요.”

여자의 아름다운 눈이 악의로 반짝였다.

파르디타 데 비탈리와 엘레나 데 카스타야. 두 사람의 인연은, 파르디타가 대여섯 살 무렵부터 줄곧 이어져 왔다. 그녀는 제 사촌 오라비의 약혼녀에게 적당히 예의를 차릴 줄 아는 사람이었고, 그마저도 사교계엔 데뷔조차 안 한 탓에 접점은 드물었다.

대체로는 무관심, 아주 가끔은 선망에 가까운 시선이나 받았을까.

어쨌든 적어도 지금처럼 적대적인 관계에 놓인 적은 없었다.

물론 그 시절에도 파르디타는 여러모로 유명했었다. 아름다운 얼굴과 그보다 더 아름다운 목소리, 그리고 앞뒤 가리지 않는 잔인한 성정으로.

데뷔하기도 전인 미혼 영애에게 붙기엔 고약한 악명이었지만, 그녀의 하녀가 체벌 때문에 불구가 되었다는 소문은 사교계의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파르디타가 10년도 넘게 지독하리만큼 비센테에게 목을 맨다는 소문과 더불어.

그 집요한 명성대로라면 여태껏 비센테에게 집착하고 있다고 해도 전혀 놀랍지 않았다. 어쩌면 지금까지 그녀가 데뷔를 미룬 것도 그래서였을 것이다. 그녀의 목표인 2황자가 유폐되어 있는 동안, 구태여 사교 활동을 할 필요조차 없었을 테니까.

그렇게 누구도 원치 않는 짝사랑을 이어가는 와중, 비센테가 다시금 벨몬테의 사교계에 얼굴을 내비친 것이다. 그것도 웬 낯선 여자의 손을 잡고. 보자마자 곧장 거슬렸으리라.

이벨린은 그 뻔한 속내를 모르는 척 침착하게 되물었다.

“영애께서는 무슨 말이 하고 싶으신 걸까요?”

“정말 황태후 전하와 혈연관계가 맞긴 해요?”

“불쾌한 질문이군요. 영애께선 지금 저와 황태후 전하께 불경한 누명을 씌우고 계세요.”

파르디타의 입가에 매끄럽게 걸려 있던 미소가 짙어졌다.

“제 말뜻을 오해하셨네요.”

“그 말에 무슨 오해가….”

“저는 당신과 비센테 전하가 대체 어떤 사이인지 묻는 거예요.”

“…….”

“혹은, 영애께서 얼마나 어여쁜 태도로 그분께 웃음을 팔았는지.”

“…….”

“저도 꼭 배우고 싶어서요.”

웃음으로 가늘어진 눈매 사이로 은은하게 광기 어린 눈동자가 그녀를 직시했다. 에스페다는 사촌끼리도 결혼이 가능한 나라였다. 하물며 촌수도 불분명한 먼 친척이라니. 대놓고 경계해 달라는 신호나 다름없었다. 이벨린은 파르디타의 떨리는 입술에서 선명한 불안을 읽어 냈다.

이벨린은 그녀가 조금은 안쓰러웠다. 보답받지도 못할 감정에 목을 매는 것은 파르디타나 그녀나 다르지 않았으니까.

지금 파르디타에게 무슨 말을 해도, 그것은 기만이 될 터였다. 비센테의 계획은 사교계에 그들을 연인으로 각인시키는 것부터 시작이었으니까. 황태자가 그녀에게 관심을 가지도록. ‘엘레나’의 대체품에 천착하도록.

하지만 당장 파르디타를 자극할 필요도 없었다. 적어도 주변에 그들의 말 한마디, 한마디를 물어다 나를 사람들이 호기심에 가득한 얼굴로 귀를 기울일 때는 더더욱. 이벨린은 적당히 조심스럽게 들리는 대답을 냈다.

“전하께서는 저를 정말 친혈육처럼 아껴 주세요. 여동생을 대하듯 호의를 가지신 것뿐이에요.”

“…정말 그뿐인가요?”

“적어도 제가 느끼기에는 그래요. 하지만 자세한 것은 전하께 직접 여쭙는 게 좋겠네요.”

“…….”

“분명 제게 그러셨던 것처럼, 영애의 질문에도 친절히 답해 주실 테니.”

이벨린은 파르디타의 손아귀가 그녀의 머리채를 금방이라도 잡아챌 것처럼 꿈틀거리는 것을 무덤덤하게 바라보았다. 대귀족의 딸로 태어나 평생을 교육받은 여자였다. 뒤에서라면 얼마든지 하녀들을 매질할 수는 있어도, 적어도 이 홀에서 난장을 피우지는 못할 터였다. 숨을 한 번 들이쉬고 내쉴 시간이 찰나처럼 지났다.

예상대로 파르디타는 다시 한번 곱게 눈을 휘었다. 정말로 기다려 마지않은 대답을 들은 것처럼 기쁘게.

“충고 고마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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