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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날, 새벽.
이벨린은 클라우디아의 하녀들에게 붙잡혀 욕실로 떠밀렸다. 그녀는 의아해하면서도 변변한 저항조차 하지 못했다. 하녀들의 표정이 하나같이 결연했던 탓이었다.
“시간이 없어요, 아가씨.”
“대체 무슨 일인데 그래?”
하녀들은 이유를 정확하게는 모르는 것 같았다. 그저 서두르는 손길이 조급했다. 향유며 장미가 아낌없이 부어진 욕조 속에 몸을 담그면서도 이벨린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황제와 황후 앞에 제 사교계 데뷔를 고할 수 있는 영예는 대귀족들에게만 주어졌다. 이벨린의 가짜 가문인 ‘레녹스’가 아무리 날고 긴다고 해도 브리타냐의 귀족이었다. 안 그래도 존재감이 희미하던 영예는, 국경을 넘으면 그저 ‘명문가’라는 인식만 남게 된다.
즉, 같은 날 사교계에 데뷔한다고 하더라도 황제나 황후에게 인사씩이나 드릴 신분으로는 턱없이 부족했다.
해서, 저녁 무도회에서나 신비롭게 얼굴을 비출 심산이었지.
진작부터 드레스며 장신구, 하다못해 머리 모양에 이르기까지 모조리 정해 둔 터라, 이제는 준비할 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 적어도 이른 새벽부터 수선을 부릴 이유는 조금도 짐작되는 바가 없었다.
그녀가 제대로 된 이유를 듣게 된 것은 욕실에서 나온 직후였다.
“이벨린.”
이벨린은 얼떨떨한 얼굴로, 문을 열고 들어온 기메라 백작 부인에게 무릎을 굽혀 인사했다.
“기메라 백작 부인. 대체 이게, 다 무슨….”
굳은 표정으로 다가온 클라우디아가 뻣뻣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폐하께서 널 찾으신다.”
“폐하께서 드십니다.”
시종의 외침에, 시에나는 곁에 선 시녀가 부축하는 대로 자리에서 일어섰다. 발걸음 소리가 들려오는 쪽을 향해 그녀가 공손히 고개를 숙였다.
“폐하를 뵙습니다.”
“건강해 보이는군.”
“모두 폐하께서 은혜를 베푸신 덕입니다.”
“은혜라.”
황제 아드리안의 얼굴에 걸려 있던 웃음이 미묘하게 비틀렸다. 눈이 보이든, 보이지 않든 고고하기 짝이 없는 여자였다. 17년 전, 이 궁에서 내쳐질 때와는 조금도 달라진 바 없이.
“세상은 모르지만 짐과 그대는 알지. 그런 가증은, 우리 사이엔 필요조차 없을 것이다.”
황제는 곁에 선 시종과 기사들을 향해 손을 내저었다.
“물러나들 있게. 황태후와 독대할 것이니.”
“하오나, 폐하….”
“눈조차 보이지 않는 여인이다. 그녀가 짐을 해할 수 있으리라 보나?”
“…….”
“아니면 짐이, 몸이 불편한 여자를 겁박이라도 하리라 보나?”
“아, 아닙니다, 폐하. 따르겠습니다.”
시종들이 물러나는 소리로 잠시간 주변이 수선스러웠다. 마지막 발소리까지 멀어지고, 이윽고 두꺼운 문이 천천히 닫히는 소리가 났다. 시에나의 얼굴에 잠깐은 불안한 듯한 기색이 스쳤다. 주변을 돌아보고 싶은 듯, 살짝 기우는 고개는 애처롭기까지 했다. 한 꺼풀 벗겨진 고고함에 그제야 속이 족했다.
“17년이던가. 그대가 그 자그마한 신전 바깥으로 일체의 걸음도 삼간 것이.”
“그렇습니다.”
황제는 시에나의 창백하게 질린 얼굴과 떨리는 손끝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 우아한 얼굴에 균열처럼 스민 증오와 공포를 애써 억눌러 참는 모습도. 황제는 조금쯤 생경한 눈으로 여자를 바라보다가 픽 웃음을 흘렸다. 저 속에 품고 있는 것이 무엇이든 결국 무력한 여자일 뿐이었다.
“그대와 그대의 아들이 오랜 세월 짐에게 충성스러웠음을 잊지 않아.”
“…….”
“그대가 감내한 세월 동안 그대의 아들은 자랐지. 그것도 제법 충성스러운 모양새로, 짐이 그어 놓은 선은 용케도 밟지 않고.”
시에나는 무릎에 올려 둔 손을 꽉 쥐었다. 겉으로는 평온을 가정한 채, 희미한 미소마저 띠었다.
“그 애는 늘, 폐하를 좋아했었죠.”
“…그래, 그랬지.”
황제의 목소리가 누그러들었다. 온화한 숙부인 척하던 역겨운 과거라도 되새기는 듯한 모양이었다.
“이 같은 시기에 그대의 아들을 다시 부른 것은 오직 하나뿐이다.”
“무슨….”
“이사벨라가 아이를 가졌다.”
찰나의 시간 동안, 황제의 애첩이 아이를 가진 것이 오늘의 독대와 무슨 상관인지를 되새겼다. 다음 순간 시에나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다. 계승권을 지닌 황제의 또 다른 자식. 이런 시기에 비센테를 불러들였다는 것은, 카스트로를 끌어안고 자멸하라는 신호와도 같았다.
시에나는 절망적으로 눈을 감았다. 이제는 먼지조차 남지 않은 해묵은 기억이 부유하듯 떠올랐다.
“가브리엘라가 형의 아이를 가졌어.”
“그게, 대체 무슨….”
“달수가 도무지 맞지를 않아. 내가 출정에 나가 있을 때라고! 모르겠어, 시에나?”
“…….”
“네 남편과 내 아내가 우리를 배신한 거야.”
광기에 번들거리는 눈빛에 그녀는 처음으로 두려움을 느꼈다. 그의 의심병이 하루하루 깊어지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참담한 결론을 내릴 줄이야.
“카스트로는 네 아들이야, 로드리고. 무엇보다 가브리엘라가 그럴 리 없어. 물론, 폐하께서도….”
“나도 한때는 그렇게 믿었지. 그럴 만한 사람들이 아니라고. 하지만 그 애의 얼굴에 난 흉터를 봐. 피부병을 봐! 부정의 산물이기 때문에, 전능하신 천주께서 낙인을 찍으신 거야.”
“…네가 정녕 미쳤구나, 로드리고.”
“이제야 결심이 섰어.”
“대체… 뭘 어쩌려고.”
“되찾으려고. 전부.”
그날로부터 모든 것들이 뒤틀려 가기 시작했다. 1년이 지나기도 전에 남편이 죽고, 기사들이 죽고, 충성을 맹세했던 귀족들이 하나씩 돌아섰다. 그렇게 종내에는 홀로 궁지에 몰려 저 미치광이가 내미는 독을 순순히 받아 마셔야 했다. 그게 제 눈을 멀게 하리라는 것을 알면서도.
그래야 저 정신병자의 손에서 비센테를, 시모라를 살릴 수 있을 테니까.
시에나의 얼굴은 이제 새하얗게 질리다 못해 얼어붙은 조각 같았다. 그녀는 말라붙은 입술을 간신히 움직였다.
“아직도 그런 불경한 의심을 하시나이까.”
“카스트로는 자랄수록 형님을 닮지. 그대의 눈이 영영 멀어 버린 것이 아쉬워. 그 낯짝이야말로 짐이 그대에게 보일 수 있는 최고의 증거일 텐데.”
시에나는 입속으로 웃었다. 미친 자의 말을, 어찌 곧이곧대로 믿을까.
“이사벨라의 아이는 짐의 유일한 적통이 될 것이다.”
“…황후와 황태자께서 좌시하지 않으실 텐데요.”
“그럴 테지.”
“…….”
“그 계집과 그 계집의 아들을 진작 죽이지 못한 게 한스럽군. 그 계집은 사특해서 좀처럼 흔적을 남기지 않거든. 그리고 애석하게도 짐에겐 아직 ‘비탈리’의 군권이 필요하지.”
이미 그 마음속에서 제 부인과 장자를 잘라 낸 듯한 언사였다. 이윽고 의자가 끌리는 듯한 소리가 났다. 시에나는 급작스레 그녀의 턱을 잡아 올리는 손길에 경악했다.
“폐, 폐하!”
그 경악이 기껍다는 듯, 황제는 나직하게 웃었다. 황제의 손이 시에나의 주름진 눈가를 천천히 쓸었다. 크게 트인 시에나의 새하얀 눈동자를 짓누르려는 것처럼, 그가 엄지손가락으로 그녀의 눈꺼풀을 쓸었다.
미약한 토기가 치밀었다. 시에나는 가까스로, 숨을 억눌렀다.
“놓, 놓아 주십시오.”
“그때는 조금도 이해할 수 없었는데, 이제야 그대의 선택을 이해할 것도 같군.”
“…….”
“먼 친척이 에스페다의 사교계에 데뷔한다지.”
“이벨린은…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입니다.”
“무슨 작정으로 불러들인 것인지, 정말 네 친척이 맞기나 한지, 무엇도 묻지 않겠다.”
닿아 있는 곳에서부터 시작한 떨림은 이내 온몸으로 번지기 시작했다. 그날. 과거의 공포가 다시금 그녀를 엄습했다. 컴컴하던 시야가 다시 한번 까무룩 암전했다.
그녀의 창백한 뺨을 타고 눈물이 후드득 떨어졌다. 그 젖은 얼굴 위로 황제의 서늘한 목소리가 드리웠다.
“카스트로를 죽여, 시에나. 무슨 수를 써서든.”
“…….”
“그러면 짐이 너와 네 아들을 살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