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쌍둥이 양장사가 다녀간 이후 브리타냐에서 온 ‘상속녀’에 대한 소문은 그야말로 수도 벨몬테를 뜨겁게 달궜다. 덕분에 이벨린은 그 어느 때보다 정신없는 날들을 보내고 있었다. 오전에는 물밀 듯이 밀려드는 편지에 시에나 대신 답장을 써야 했고, 오후에는 클라우디아를 따라 상점가에서 수많은 물건을 사들였다.
하루에도 수십 번씩 상인들이 보낸 심부름꾼이 저택의 문을 넘나들었다. 보석, 향수, 쥘부채와 계절에도 맞지 않는 모피며 손수건…. 쏟아지는 상자에 기겁한 이벨린이 너무 과하지 않느냐고 묻자, 클라우디아가 단호하게 말했다.
“이 정도는 해야 네가 부유한 상속녀라는 사실을 의심하지 않을 테지. 사람들은 생각보다, ‘그럴듯하게 보이는 것’에 약하단다.”
“…….”
“네 손도 그저 드러냈을 때는 보기 흉할 뿐이지만, 이렇게 레이스 장갑으로 감싸면… 비밀스러운 것이 되지.”
“클라우디아.”
클라우디아의 노골적인 품평에, 맞은편에 앉아 있던 시에나가 엄격한 얼굴로 목소리를 냈다. 클라우디아는 그녀의 지적에 조금도 기죽지 않은 채로 이벨린에게 명령했다.
“이제 바로 서 보렴.”
이벨린은 클라우디아가 시키는 대로 일어나서 걷고, 찻잔을 쥐고, 부채를 흔들고, 다시 앉았다. 일부러 몇 번쯤 틀린 자세를 취했는데도 클라우디아의 얼굴에 묘한 기색이 어렸다.
“전하께서 널 고작 한 달밖에 안 가르치셨다는 게 믿기지 않는구나.”
“대단하구나, 이벨린!”
칭찬을 들은 것은 이벨린인데, 정작 시에나가 뿌듯한 표정으로 감탄했다.
“클라우디아는 칭찬에 인색한데 말이야.”
“폐하….”
클라우디아가 뺨을 붉히며 고개를 숙였다. 시에나는 후후 웃으며, 이벨린을 향해 손짓했다.
“내일은 오전부터 바쁘게 움직여야 하니, 이만 올라가도록 하렴.”
“그러면 먼저 올라가 보겠습니다.”
이벨린은 예법대로 절을 올리고, 빠르게 방을 빠져나왔다. 오늘도 새벽부터 늦은 밤까지 종일 움직인 탓에 피로가 몰려들었다. 한시라도 빨리 침대에 쓰러지고 싶어 죽을 것 같았다. 그녀는 계단을 오르며 머리에 꽂았던 핀들을 하나씩 뽑았다. 마지막 핀까지 뽑아내자, 틀어 올렸던 머리카락이 허리춤까지 쏟아지듯 흘러내렸다.
“세숫물을 준비해 올릴까요?”
눈치 빠르게 다가온 메리가 그녀의 손에서 핀을 받아 들며 물었다.
“그래 줘.”
메리마저 방을 나가자, 이벨린은 슬리퍼를 살짝 끌며 화장대 앞에 앉았다. 어쩐지 아주 오랜만인 것 같았다. 이렇게 가만히 ‘이벨린’의 얼굴을 마주하는 건. 처음처럼 낯설지는 않았지만, 어쩌다 한 번씩 이 모습에 위화감을 느끼지 않는다면… 거짓말일 터였다.
‘가끔은 정말, 예전의 내 모습을 보는 것 같을 때도 있고.’
이벨린은 복도에서 다가오는 발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벌써 메리가 세숫물을 가지고 돌아오는 모양이었다. 사실 그녀 말고 이 밤중에 달리 찾아올 만한 사람이 없기도 했다. 이윽고, 발소리가 그녀의 문 앞에서 멈춰 섰다. 노크 소리가 정중했다.
“이벨린.”
이벨린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오늘따라 하인들이 새벽부터 분주하다고는 생각했지만, 단지 데뷔 전날 밤이기 때문이라고만 짐작했었다. 이렇게 언질도 없이 찾아올 줄은.
“벌써 잠든 건 아니겠지?”
이벨린은 여태껏 제가 숨조차 쉬지 않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녀는 서둘러 거울에 비친 제 모습을 점검했다.
내일 황제의 앞에서 입을 드레스를 입고, 화장까지 한 덕에 겉모습만큼은 최상이었다. 틀어 올렸던 머리카락이 지나치게 구불거리고 있긴 했지만… 어쨌든 누구에게 못 보일 꼴은 아니었다.
“들어오세요, 전하.”
이벨린은 서서히 침착함을 되찾았다. 적어도, 문을 열고 들어오는 비센테의 얼굴을 마주하기 전까지는.
오자마자 씻었는지 그는 조금 젖어 있었다. 머리카락에 맺힌 물방울, 달라붙은 셔츠 사이로 보이는 넓고 단단한 가슴, 그녀를 내려다보느라 비스듬히 기울어진 뺨.
“잘 지냈어?”
이벨린은 제가 그를 지나치게 의식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녀는 치맛자락을 살짝 구기듯 쥐었다.
“잘 지냈어요. 전하께서는….”
그녀는 숨을 한 번 골랐다.
“전하께서도 잘 지내셨어요?”
태연하게 인사하려고 했는데 말끝이 조금 떨렸다. 이벨린은 제가 그의 얼굴을 다시 보게 되는 그 순간만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것을 인정했다.
그래, 바로 이 순간을.
그녀는 어색하게 손가락을 매만졌다. 미안함이나 안쓰러움, 씁쓸한 환상이 사라지고 난 자리엔 원망부터 치밀었다. ‘이벨린’인 제게 그럴 자격이 있는지, 감히 그래도 되는지, 이성적인 판단보다도 한 줌짜리의 서운함이 먼저 앞섰다.
그가 지나치게 멀쩡해 보였기 때문에.
연락 한 번 못 할 정도로 바빴던 것도, 신변에 문제가 생긴 것도 아니면서…. 여태껏 저만 초조해하고 안달한 것만 같았다.
이벨린은 입술을 달싹였다. 하고 싶은 말은 많았는데, 무엇부터 터트려야 할지 갈피를 잡기가 어려웠다.
“이제는 저를 두 번 다시 찾지 않으실 줄 알았어요.”
원망처럼 들렸을까? 비센테가 한쪽 눈썹을 치켜뜨며 입술을 끌어 올렸다.
“왜 그렇게 생각했지?”
“제가 전하께서 정해 놓은 선을 넘었으니까요.”
“…….”
“그리고, 적어도 사교계 데뷔 사흘 전에는 와 주실 줄 알았어요.”
“그동안 밀린 일을 처리하느라 바빴어.”
“전날에라도 와 주신 걸 감사해야 하는 걸까요?”
이벨린은 입술을 깨물며 고개를 숙였다. 이건 숫제 추궁이나 다름없었다. 말이 아니라 돌이킬 수 없는 실수를 엎지른 기분이었다.
비센테가 화가 난 이유는 오로지 그녀 탓이었다. 그녀가 멋대로 엘레나의 물건을 빼돌렸기 때문에. 미안하다고 무릎을 꿇어도 모자를 마당에, 그야말로 주제 파악도 못 하고….
“내가 잘못 생각했다. 네가 불안할 것을 미처 헤아리지 못했어.”
번뜩 고개를 들자마자 시선이 마주쳤다. 이벨린은 얼어붙은 채로 눈만 깜박였다.
“미안해.”
비센테의 얼굴에는 비아냥거리는 기색도, 사과를 강요당한 자의 면구함도 없었다. 그저 당연히 해야 할 일을, 당연하게 하는 사람의 담담함만이 엿보였다.
몇 주 사이에 대체 어떤 심경의 변화가 있었던 걸까? 폰페라다 궁에서 그녀를 자주 당혹스럽게 했던 날 선 모습은 누그러들고, 그녀가 알던 과거의 비센테에 벌써 더 가까워진 것이 보였다.
팽팽하던 신경을 일시에 끊어 낸 것처럼, 사교계라는 괴물을 상대하기 위해 스스로를 다시 벼려낸 것처럼.
그가 우아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서류 작업이 복잡해서 이제야 끝이 났거든. 확인해 봐.”
이벨린은 그가 내민 두툼한 서류 뭉치들을 한 아름 받아 들었다. 가장 위에 놓인 것은 위조된 신분 증서였다.
‘이벨린… 로즈 레녹스.’
이 ‘레녹스’가 그녀가 아는 레녹스가 맞다면 이는 브리타냐에서 상당히 명망 있는 백작 가문이었다. 남부 광산의 절반이 한때 모조리 레녹스의 것이었으나, 몇 번의 투자 실패로 막대한 빚을 떠안았다는 사실은 유명했다. 어쨌든 브리타냐의 추밀원에까지 올라갔던 가문이니, 그녀의 가짜 신분으로는 차고도 넘쳤다.
“그 뒤는 네가 상속받게 될 재산 목록.”
이벨린은 조금 질린 눈으로 뒤이은 서류들을 한 장씩 넘겼다. 광산과 토지, 무역 증서며 투자 증서 따위가 넘기는 대로 줄줄이 튀어나왔다.
‘양도인은 모두, 로웬 앨먼다이트 레녹스 경.’
아마도 ‘레녹스 영애’의 부유하고도 후계자 없는 친척인 모양이었다. 서류들은 하나같이 위조라고 믿기 힘들 정도로 정교했다.
국가에서 공인된 증서에만 쓰이는 종이, 섬세한 금박, 문양과 직인, 서명…. 이 증서를 본 사람이라면, 누구도 그녀를 가짜라고 의심할 수는 없을 터였다.
문제라면 상속된 재산의 양이 과해도 너무 과하다는 점이었다.
“이걸… 전부 다요?”
“서류상으로는. 대부분의 브리타냐의 토지이니 소유주 확인이 불가하지. 절반은 내 재산의 일부를 일시적으로 옮겨 둔 것이고.”
“제가 이걸 들고 도망가면 어쩌시려고.”
“상관있나?”
그가 우아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네 말대로라면, 어차피 온 에스페다가 내 것이 될 텐데.”
이벨린은 입술을 짓씹었다. 어쩐지 완벽하게 말려든 기분이었다. 그가 제게 여태 화가 나 있는 줄로만 알았는데, 정말로 바빴을 줄이야.
게다가 귀한 입으로 사과까지 먼저 하게 만든 셈이었다.
정작 원인을 제공한 그녀는, 여태껏 그날의 일에 대해 제대로 된 미안함이라곤 내비치지도 않아 놓고.
그녀는 머뭇거리다 운을 뗐다.
“사실 다시 뵙게 되면 그날의 일에 대해서… 사죄드리고 싶었어요.”
그녀의 사과에 비센테가 눈썹을 살짝 찡그렸다. 순간적으로 무슨 일인지 놓친 듯했다.
“그날?”
“손수건 말이에요. 전하께서 제게 화내셨던 날이요.”
“무슨 오해를 한 모양인데. 나는 네게 화났던 게 아니야.”
“그걸… 믿으라고 하시는 말씀이세요?”
양순한 척 내리떴던 눈이 한순간에 의심을 품고 불경해졌다. 비센테는 기막히다는 듯 그녀를 바라보았다.
“내가 고작 너 듣기 좋으라고 거짓을 말할까.”
“…….”
“자의식이 대단하군.”
그녀가 서 있는 화장대 앞까지 천천히 다가온 그가, 장난스럽게 눈썹을 찡그렸다.
“화장이 좀 과한 것 같은데. 뭘 바른 거지?”
그제야 이벨린은 다시금 거울로 시선을 돌렸다. 이른 아침부터 하녀가 찍어 바른 화장품의 가짓수가 유독 많기는 했지만, 저렇게 질색할 정도로 끔찍하지는 않았다. 전반적으로 색조가 조금 진하다뿐이지. 이벨린은 자신 없이 말했다.
“하녀가… 최신 유행의 화장 기법이라고 하던데요.”
“앉아 봐.”
“…전하께서 직접요?”
이벨린은 못 믿겠다는 듯 비센테의 얼굴을 위아래로 훑었다. 그가 기막히다는 듯 입을 열었다.
“수도로 올라오고 나서부터 태도가 지나쳐진 것 같은데.”
“전하께서 제게 주신 재산에 부합하려고요. ‘상속녀’라면, 이 정도는 해야 할 것 같아서요.”
“…….”
“앉았어요.”
언제 그에게 맞먹었냐는 듯 다시금 얌전해진 얼굴은 새침해 보이기까지 했다. 그 간극에 비센테가 헛웃음을 터트렸다.
“날 보고 앉아야지.”
“어떻게….”
“시간 없고, 바쁘니 실례 좀 하지.”
그 말과 동시에 허리를 숙인 비센테가 그녀의 무릎 아래로 팔을 집어넣었다. 다음 순간 앉아 있던 의자에서 몸이 허공으로 붕 떠올랐다. 이벨린은 놀라서 그의 단단한 팔뚝을 붙잡았다. 화장대 위에 정리되어 있던 유리병들이 급히 밀려나며 자그락거리는 소리를 냈다. 그녀는 화장대 위에 밀어 넣듯 앉혀졌다.
“마, 말씀을 먼저 해 주셨으면….”
“네 스스로 이렇게 앉았을 거라고?”
“…….”
그 말에 이벨린은 제 꼴을 내려다보았다. 드레스 자락은 발목까지 말려 올라간 채였고, 무릎은 그의 허리를 감싸듯 양쪽으로 살짝 벌려진 채였다. 화들짝 몸을 뒤트는 이벨린을 비센테가 가볍게 막았다.
“잠시만 이대로 있어. 오래 걸리지 않을 테니까.”
여태 잘만 나불거렸던 혓바닥이 달라붙기라도 한 것처럼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가까이에서 들리는 나직한 목소리, 그가 입을 열 때마다 피부 위로 숨결이 부드럽게 흩어졌다. 그가 솜에 화장수를 적시며 느릿하게 말했다.
“눈은 감아야지.”
정작 그에게선 성적인 의도는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다. 어쩐지 조금 귀찮아 하는 것 같기도 했고.
조금쯤 주저하며 눈을 감자마자, 긴 손가락이 그녀의 턱을 붙잡았다. 뒤이어 피부에 축축한 솜이 닿았다.
“으….”
그녀가 작게 신음하자 솜이 피부에서 떨어졌다.
“아픈가?”
이벨린은 제가 그의 손길을 지나치게 의식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뇨. 괜찮, 괜찮아요.”
그의 손길이 스칠 때마다 얇은 피부가 달아올랐다. 그 아래로 혈류가 빠르게 흘렀다. 심장에서부터 흘러나간 피가 손끝까지 저릿하게 퍼졌다. 이벨린은 그가 제 변화를 눈치챌까 두려웠다.
간신히 눈꺼풀을 들어 올리자, 제게 진지하게 열중하고 있는 그의 얼굴이 보였다.
엎질러진 향유 병에서 짙은 장미 향이 숨 막히도록 올라오고 있었다. 흩날리는 분가루에 시야가 부옇게 변했다. 그가, 너무 가까웠다.
청보라색 눈동자가 매끄럽게 휘었다.
“눈 뜨면 따가울 텐데.”
이벨린은 가까스로 대답했다.
“견딜 만해요.”
심장이 더는 버티기 어렵다는 듯 쿵쿵 소리를 내며 솟구쳤다 떨어지길 반복했다. 이벨린은 도망치듯 눈을 감았다. 어떻게 그에게 끌릴 수 있지? 어떻게 감히….
심지어 그에게 느끼는 떨림은 근원부터 순수하지 않았다. 그를 이런 식으로 의식하기 시작한 건, 그가 ‘엘레나’의 손수건을 여태 간직해 오고 있었다는 걸 깨달은 뒤부터니까.
생각해 보면 그녀는 비센테에 대해 정작 아는 것이 없었다. 3황자가 죽으리라는 것을 알고도 방치한 비센테, 어린아이를 일으켜 세워 주던 비센테, 전쟁에서 사람의 목숨을 빼앗았을 비센테, 그녀의 성년을 축하해 주던 비센테, 우아하게 웃는 비센테….
그중 어떤 모습이 진짜 그의 것인지는 판별조차 어려웠다. 언제부터 ‘엘레나’를 마음에 담았는지조차 모르겠다.
애초부터 그들 사이의 접점은 적었고, 그는 너무 많이 변했다.
“전하께서는….”
이벨린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예전에 알던 이가 변했다면… 어떻게 하실 건가요?”
“알던 이가 변했나?”
“몰라볼 정도로요.”
음. 그의 목울대가 가늘게 울리는 것이 보였다.
그는 크게 고민하지도 않고 대답했다.
“그런 경우에는 둘 중 하나지.”
“…….”
“처음부터 그런 사람이었던 것을 네가 몰랐거나, 그 사람이 그렇게 변해야 할 만한 일이 있었거나.”
그가 그녀의 턱을 붙잡고 있던 손에 힘을 주어 들어 올렸다. 비스듬히 들어 올려진 얼굴에 풍성한 붓의 끝이 닿았다. 눈두덩이와 콧날, 뺨과 이마를 간지럽게 스쳤다. 눈을 감았다가 뜰 때마다, 그가 붓을 고쳐 쥐는 것이 보였다.
“전하께서는 어느 쪽이세요?”
“음?”
“처음부터 지금과 같으신 분이셨나요, 아니면… 이렇게 변한 계기가 있으셨나요?”
“글쎄. 중요한가?”
그는 이 주제를 별로 달가워하지 않는 것 같았다. 그녀가 입을 다물자, 기다렸다는 듯 붉은 연지를 묻힌 세필 붓이 입술 위로 내려앉았다. 전쟁터나 구르던 사내치고는 손길이 섬세하다고, 그렇게 생각했을 무렵 모든 움직임이 멎었다.
“…….”
그는 여전히 그녀의 턱을 쥔 채로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제 작품을 감상하듯 가늘어진 눈매 사이로 숨길 수 없는 그리움이 묻어났다.
침묵은 길지 않았다. 순식간에 감정을 추스른 그가, 엄지손가락으로 이벨린의 입술을 살짝 누르며 놓아주었다.
“나쁘지 않네.”
이벨린은 고개를 돌려 거울을 마주했다. 전반적으로 엷은 색감의 화장이었다. 피부는 결을 정돈하는 것에서 그쳤고, 눈꼬리와 입술은 겨우 붉은 기를 머금는 수준이었다. 놀라운 건 이게 ‘엘레나’의 방식이라는 점이었다.
“…….”
이벨린은 떨리는 손으로 거울의 거친 표면을 쓸었다. 화장법이 비슷해진 탓인지, 거울 속에 비친 그녀의 모습은 제법 ‘엘레나’ 같았다. 그녀는 애써 웃었다.
“연습이라도 하셨어요?”
“흉내 내는 건 어렵지 않지.”
“그래도, 색을 이렇게 섞는 건 어려웠을 텐데….”
“예전에 누군가 가르쳐 준 적이 있어서.”
누군가. 하지만 그녀는 비센테에게 이런 것을 가르쳐 준 적이 없었고, 그와 그 정도로 가까웠던 아가씨가 있었다면 진작 온 사교계에 소문이 돌았을 터였다.
또, 무언가를 놓친 듯 막막했다. 그녀는 입술을 깨물었다.
“내일.”
이벨린은 허리까지 치렁치렁하게 늘어졌던 머리카락을 대충 그러모았다. 헐겁게 올림머리를 만들어 핀으로 고정시켰다. 완벽하다고는 할 수 없지만, ‘엘레나’의 첫 데뷔 무도회를 연상시킬 정도는 되었다.
“이렇게 하고 갈게요.”
“어떻게….”
그의 눈에 충격이 스몄다. 이벨린은 그의 충격에 미세한 전율을 느꼈다. 본능적으로, 제가 저 표정을 원했다는 것도. 그녀는 아무것도 모르는 척 말을 이었다.
“몇 년 전쯤 에스페다에서 유행한 머리잖아요. 최근 브리타냐의 사교계에서 돌고 돌다가, 요즘은 젠트리(gentry)들도 따라 하더군요.”
“…….”
어쩌면… 그들은 서로를 아내와 남편으로 섬겼을 수도 있었다. 그녀의 아비가 그토록 탐욕스럽지 않고, 그의 아비가 그렇게 허망하게 죽지만 않았다면. 그 시절 비센테의 감정을 죽을 때까지 몰랐던 것은 차라리 다행이었다.
알았다 한들 달라질 것은 없었을 테니까. 지금과 마찬가지로.
이런 몸으로는 미래를 기약할 수조차 없을 테니까. 언제 그녀가 사라지고, ‘이벨린’이 돌아올지 모르는 상황에서는.
“부탁드릴 게 있어요.”
“말해 봐.”
“사교계 사람들 앞에서 우리가 서로 사랑하는 것처럼 속여야 한다고, 전하께서 말씀하셨잖아요”
“그랬지.”
“하지만 전하께서는 제게 아무런 감정도 없으시고.”
“…….”
“저 역시 그런 기대나 품기엔 주제 파악을 잘하게 됐고요.”
이벨린의 말에 그가 픽 웃었다.
“그런 것치고는 황태후 폐하의 이름을 격의 없이 부르던데.”
“그건, 황태후께서 부탁하셔서….”
“…모후께서?”
그는 의외라는 듯 그녀를 슬쩍 위아래로 훑었다. 이벨린의 조건이나 겉모습이 아닌, 그제야 최초로 그녀라는 사람에 대해 인지한 것만 같은 시선.
그녀의 존재는 그에게 구원일까, 아니면 더한 나락으로 가는 길일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그들은 죽어도 이뤄질 수 없는 사이라는 점이었다. 그는 반역자이자 제국의 황자였고, 반역이 성공하면 황제가 될 남자였다.
세상이 뒤바뀌어도, ‘이벨린 베네딕트’가 한낱 고아 계집애이듯이.
진실은 거짓의 장막을 찢을 수 있는 칼날이고, 아무리 정교한 비밀도 언젠가 들키기 마련이다.
비센테가 그녀를 가진다면 사람들은 황제의 아들이 천한 계집을 침대에 눕혔다고 손가락질을 할 터였고, 그녀는 희대의 브리타냐 출신 창녀로나 역사서에나 오를 터였다.
그들이 서로를 원한다는 것은, 그렇게 천박하고 끔찍한 것이었다. 비센테는 물론이거니와 ‘이벨린’에게도 그런 일을 겪게 둘 수는 없었다.
하지만, 그렇게 죽어도 이루어질 수 없는 사이라면.
“그럼 차라리 저까지 속여 줘요.”
“…….”
“우리가 이러는 게 고작 계획이나 연극을 위해서가 아니라, 정말 전하께서 저를 사랑한다고 제가 착각할 수 있도록요.”
잠깐의 꿈까지는 신께서도 벌하지 않을 것이다. 이벨린은 그의 턱끝에나 가까스로 시선을 걸쳤다. 목소리가 자신 없이 기어들어 갔다.
“그 편이 사람들을 속이기도 쉬울 거예요. 주제넘게, 일이 다 끝나고 나서까지, 착각하진 않을 테니까….”
“그럼 너는?”
그가, 시선을 피하는 이벨린의 턱을 붙잡아 들어 올렸다.
“너는, 나를….”
너는 나를 사랑이라도 하냐고. 그의 눈이 그렇게 묻고 있었다. 비센테가 그걸 끝까지 입 밖으로 내뱉지 않은 것은 타고나길 고결하게 타고난 탓일 터였다.
그가 황궁에서 내쳐져, 전쟁터에서 어떻게 굴러먹었든, 어디까지 추락했든, 상대방의 약점은 공격하지 않는 고상함.
“제가 전하를 좋아하게 되기를 바라셨잖아요.”
“…그랬지.”
그가 쓰게 웃으며 긍정했다.
“이렇게까지 내 마음이 불편할 줄은 몰랐고.”
“…….”
“나는 너에게 진심이 될 수 없어, 이벨린.”
이벨린은 그제야 그가 저를 정말로 걱정해 주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것이 사슴의 목을 물어뜯은 사자가 변덕스러운 아량을 베풀어 주는 것에 불과하더라도.
진심, 어쩌면 사랑. 엘레나로서의 그녀는 사랑을 몰랐다. 평생 근처에 있는 남자들이라곤 같은 판에서 찍어 낸 듯 하나같이 혐오스러웠고, ‘엘레나’를 사랑했던 유일한 사람을 그녀는 죽을 때까지 몰랐다.
이번 생 또한 다르지 않을 터였다. 아니, 그래야만 했다.
하지만, 잠깐의 꿈이라면.
“알아요. 그래도 상관없어요.”
“…….”
“어차피 이건 다 하룻밤의 꿈이니까. 어차피 꿀 꿈이라면 조금 더 근사한 꿈을 꾸고 싶을 뿐이에요.”
이벨린은 떨리는 눈을 감추려 애써 눈을 부릅떴다. 그게 더 어색해 보일 거라는 것은 생각하지 못하고. 간신히 입꼬리에 매달린 웃음이 썼다.
“그리고 꿈은 꿈으로 둬야죠. 꿈에 분별없이 홀리는 건 지긋지긋해요.”
“홀려 본 적 있는 것처럼 말하는군.”
“지금보다 어릴 때는….”
그녀의 대답에 그가 얕은 웃음을 흘렸다.
“네 나이가 대체 몇이기에.”
‘이벨린’의 나이는 이제야 겨우 스물둘이었다. 카스타야 영애로 죽기 전 그녀는 이벨린의 나이보다 세 살이 더 많았고, 다시 돌아와 두 해를 더 살았으나… 모르는 사람에게는 그저 연륜 있는 척을 한다고 느낄 만했다. 이벨린의 뺨이 더 달아오를 수조차 없이 달아올랐다.
“하고자 하는 말의 뜻은 알겠다.”
“…….”
“네 착각이, 우리의 계획에 도움이 된다면 어려울 것도 없고.”
이벨린은 그의 고개가 기울고, 제 위로 그늘을 드리우는 순간까지도 현실감 없이 서 있었다. 이윽고 그의 입술이 그녀의 이마 위에 가볍게 닿았다가 떨어졌다. 미소가 그린 듯 근사했다.
“내일 저녁에 데리러 올게, 이벨린.”
이벨린은 그가 문을 닫고 나서는 순간까지도 얼어붙어 있었다. 그의 발걸음 소리마저 들리지 않고 나서야 가까스로 손을 들었다. 그의 입술이 닿았던 피부가 뜨거웠다. 약한 열상이라도 오른 것처럼. 이벨린은 지독한 예감에 눈을 감았다.
어쩌면 찰나의 단꿈이 아니라, 끔찍한 나락으로 떨어지는 중일지도 모르겠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