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6화 (36/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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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깨가 좁고, 우아하게 처진 모양이라 무엇을 입으셔도 괜찮네요.”

    “연한 하늘색도 잘 어울리시지만, 고전적인 풍의 하얀 드레스도 잘 어울리셔요. 금사로 소맷단을 잡고, 가슴 쪽에 보석을 많이 달면… 이렇게.”

    “피부가 흰 편이셔서 이 짙은 감색 드레스도 괜찮을 것 같아요.”

    클라우디아가 부른 양장사들은 근래 벨몬테의 사교계에서 가장 인기 있는 쌍둥이 자매들이었다. 머리가 둘이다 보니 당사자가 의견을 내지 않아도 알아서 착착 진행된다는 장점은 있었으나, 그들은 말이 많아도 너무 많았다.

    벌써 두 시간째 거울 앞에서 인형처럼 웃고 있자니 볼에 경련이 일 지경이었다.

    “평소 보석은 다이아몬드와 사파이어를 주로 사용하시고, 루비로 된 목걸이가 있으시다면 아껴 두셨다가 밤 야유회 때 가슴 바로 위에 늘어트리셔요.”

    “목장갑보다는 팔뚝까지 오는 긴 장갑이 이 아가씨께는 더 잘 어울리겠어요.”

    “그리고….”

    “장갑은 어떤 순간에도 벗으셔서는 안 되겠고요.”

    한 명이 단호하게 말을 받자, 다른 한 명이 똑같이 엄격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카우치에 우아하게 기대앉은 채로 그들을 지켜보던 클라우디아가 무심히 물었다.

    “향유를 아침저녁으로 바르면, 어떻게 안 되겠니?”

    “아가씨 손이 워낙, 다듬어지지 않으셔서….”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매끄럽게 만들려면 몇 년은 족히 걸릴 거예요.”

    수도원에서 평생 지내며 자질구레한 일을 도맡아 했던 이벨린의 손은, 가짜 신분에 맞지 않게도 몹시 거칠었다. 불에 덴 흔적도 여럿이었고, 펜대를 잡았던 손가락엔 굳은살마저 붙어 있었다. 클라우디아는 들고 있던 찻잔을 소서 위에 내려놓으며 미간을 모았다.

    “하면, 어쩔 수 없지…. 황태후 폐하께서도 네 옷에 돈을 아끼지 말라 하셨으니, 이참에 장갑도 몇 장 구입하도록 하렴.”

    황태후 폐하라는 말에 양장사 자매들의 눈이 번뜩 빛이 났다.

    “그러면, 정말 소문이 사실이온지요?”

    둘 중 언니 쪽이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물어왔다. 클라우디아가 부드럽게 되물었다.

    “무슨 소문?”

    이벨린은 클라우디아의 손짓대로 제자리에서 우아하게 빙그르르 돌았다. 몇 바퀴 돌아 제자리로 돌아오기 무섭게, 동생 쪽 양장사가 그녀의 손을 붙잡았다. 그대로 팔꿈치에서부터 팔목까지의 길이가 재어졌다.

    “여기 이 사랑스러운 아가씨께서, 황태후 폐하의 먼 친척이라는 소문이요.”

    황태후 시에나가 먼 친척 아가씨의 남편감을 찾기 위해 수도로 돌아온다는 소문은 시에나의 마차가 신전의 정문을 출발하기도 전부터 벨몬테 사교계의 뜨거운 화두였다. 양장사 자매는 내색하지는 않았지만, 소문만 무성한 ‘아가씨’의 정체를 밝힐 기회를 내심 놓치고 싶지 않은 눈치였다.

    “정확히는 종고모부의 육촌 조카 되지.”

    건방진 질문이나 한다고 깨질 것도 각오했는데, 정작 흔쾌히 돌아온 대답에 자매들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 정도로 먼 친척이라면… 두 분께서 닮지 않은 것도 이해가 가네요.”

    “황자 전하와 황태후 전하 모두 금발이신데, 아가씨의 머리칼은 짙은 갈색이니까요.”

    그야 애초부터 같은 핏줄이 아니니 당연했다. 그러나 이벨린은 무슨 진리라도 들은 것처럼 감탄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눈썰미가 좋구나.”

    “그야, 저희 직업인걸요. 그러면 그 소문도 진짜인가요?”

    “최근, 부유한 친척의 유산을 상속받으셨다는 이야기요!”

    “정확히는 벨저 광산 말이죠!”

    “그건….”

    이벨린은 곤란한 얼굴로 말끝을 흐렸다. 비센테가 그녀를 막대한 유산을 상속받은 상속녀로 사교계에 소개한다는 말만 들었지, 아직 구체적인 ‘재산 목록’에 대해서는 들은 바가 없었다. 섣불리 말을 얹었다가는 추후 곤란해질 터였다. 그때, 클라우디아가 다소 급작스럽게 웃음을 터트렸다.

    “벨저 광산뿐이겠니. 브리타냐 왕실에서 칙허를 받은 동제도 무역 회사 두 개가 이 아가씨의 소유인데.”

    “어머, 어머!”

    “그럼 에스페다에는 남편감을 찾으러 오셨다는 것도, 정말인가요?”

    “그래. 조금 더 귀띔해 주자면, 마리나 해변의 근사한 섬도 이 아가씨의 지참금 목록에 있단다.”

    “세상에나!”

    양장사 중 언니가 입을 가리며 호들갑을 떨었다

    “혼인 적령기의 딸을 가진 귀부인들께서 긴장하실 만하네요. 안 그래도, 요즘 괜찮은 신랑감이 없다고 성화시던데.”

    “아들 가진 귀부인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좋아하겠지만요. 게다가, 이렇게나 아름다우시니.”

    듣고 있는 입장에서는 뺨이 화끈거릴 정도로 노골적인 품평이었다. 클라우디아가 무심히 그들의 말을 받았다.

    “얼굴 번듯한 이들은 꽤 여럿이던데.”

    “작위며, 재산이… 하나씩은 부족하다는 평이에요.”

    동생 쪽이 이벨린의 허리춤에 핀을 정교하게 꽂으며 웅얼거렸다.

    “두 분께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사실 대부분 그렇죠!”

    “에스테반 공작의 장남 정도가 그나마 괜찮을까요? 나머지 괜찮은 자들은 어리거나 나이가 많고, 카르피오 후작의 차남은 물려받을 재산이 적으시고….”

    “알바 백작의 장남은 숫기가 부족하고, 몬테 변경백… 누가 그 외지에 가려고 들까요?”

    “2황자 전하께서 참석하지 않으신다면, 아무래도 올해 사교계에는 진짜 보석은 없다고 봐야죠.”

    “사실 2황자 전하와 나란히 세워지면, 어떤 남자라도 추남처럼 보일 테지만요.”

    “발칙한 혀들 하곤!”

    클라우디아는 웃음을 터트렸지만, 꾸중하려는 의도는 아닌 듯했다. 이벨린은 어색하게 입을 다물었다. 카스타야 저택에 드나들었던 양장사들은 하나같이 후작의 위압감에 짓눌리다시피 했기 때문에, 이렇게 스스럼없이 수다를 주고받는 분위기 자체가 낯설었다.

    “그러면 드레스는 전부 다섯 벌로… 살구색과 처음 보셨던 흰 것, 연한 노란색과 짙은 감색 드레스, 그리고 이 연푸른색까지. 모두 맞으시죠?”

    “우선은. 언제까지 받아 볼 수 있지?”

    “웃돈을 주셨으니… 기존에 작업하던 옷본을 급히 수정하면, 이 살구색 드레스는 이틀 내로 첫 가봉이 가능해요.”

    “아가씨, 잠시만 여기 앉아 보세요.”

    클라우디아가 대금을 지불하는 동안, 동생 양장사가 이벨린을 거울 앞 의자에 다시금 앉혔다. 양장사는 이벨린의 머리카락을 흰 레이스 리본과 함께 솜씨 좋게 땋아 올렸다. 순식간에 파티에 참석해도 될 만큼 근사한 머리 모양이 완성되었다.

    “이 리본은 선물로 드릴게요.”

    “이것을?”

    “앞으로 잘 부탁드린다는 뜻에서요. 이번 사교 철에 아가씨의 옷을 저희가 전부 담당하게 된다면, 정말로 영광일 거예요. 그리고….”

    비밀 이야기라도 되는 것처럼 고개를 숙인 양장사가, 애교스럽게 속삭였다.

    “부자시니까 비싼 옷감도 마구 재단할 수 있도록 해 주시겠죠?”

    까만 속내를 밉지 않게 드러내는 것도 재주라면 재주였다. 저들이 빠르게 사교계에 자리 잡은 이유를 알 것도 같았다. 이벨린은 그들에게 재빨리 점수를 매기면서, 그런 적 없는 것처럼 말갛게 웃었다.

    “물론이야. 늘 최우선으로 고려할게.”

    “감사해요.”

    양장사들은 떠들썩하게 기뻐하며 옷감과 가방을 챙겨 들고 방을 나섰다. 떠들썩하던 사람 둘이 사라지자 방 안은 순식간에 적막해졌다. 이벨린은 클라우디아의 손짓대로 카우치에 다가가 앉았다. 그녀가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생각보다 더 잘 해내더구나.”

    “양장사들을 상대하는 것 말씀이세요?”

    “그래. 사실, 귀띔을 듣긴 했지만 조금 걱정했단다. 네 신분이….”

    이벨린은 그녀가 흐린 말끝을 곧바로 알아차렸다. 신분이 천하니, 사교계에 적응하기 힘들것이라 짐작했겠지. 클라우디아의 기메라는 에스페다 내에서도 몇 안 되는 대귀족의 지위를 가진 가문이었다.

    그 기저에 깔린 우월감을 이해했다. 한때는 그녀에게도 있었던 것이었으니까.

    “손을 이리 줘 보렴.”

    이벨린은 시에나가 내민 손바닥에 제 손을 가볍게 올려놓았다. 오랜 노동으로 거칠어진 손은, 양장사들의 말마따나 하루아침에 변할 수 있는 종류는 아니었다. 클라우디아가 짧게 혀를 찼다.

    “네 눈치가 상당하니, 교양이야 짧은 기간 내에 어떻게 한다고 해도…. 역시 여인을 모르는 사내라 이런 사소한 부분은 쉽게도 놓치셨던 모양이야.”

    “…….”

    “하지만 무릇 신사들이란 여인의 사소한 흠은 쉽게 넘어가 주는 법이지. 그것도 돈이 많고, 어리고, 아름답기까지 한 여인의 흠이라면 말이야.”

    “…….”

    “양장사들에게 네가 한때 가난했었다는 것도 언급해 두었으니, 아마 오늘이 가기 전에 너에 대한 소문이 수도 귀족 절반에겐 족히 번질 테지.”

    그저 습관처럼 짓고 있던 클라우디아의 미소가 조금 더 짙어졌다.

    “이제 네 순진함이, 어떤 절박한 자들을 물어오는지 보자꾸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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