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5화 (35/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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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들이 탄 마차는 해가 느지막이 질 무렵, 수도 벨몬테의 시가지로 접어들었다. 보랏빛 자카란다 나무들이 길의 양옆으로 흐드러지게 핀 그 고풍스러운 벽돌 길을 달리기를 얼마간. 마차는 서서히 거대한 저택 앞에 멈춰 섰다. 마차가 멈춰 서기 전부터 창밖을 내다보고 있던 이벨린은, 치받는 울렁거림을 가까스로 삼켰다.

    “여기는….”

    사금을 흩뿌려 놓은 것처럼 하얗게 반짝이는 상앗빛 벽체와 층고 높은 아치, 2층의 테라스를 장식한 넝굴 식물…. 마치, 카스타야의 저택을 그대로 옮겨 두기라도 한 것 같은 모습이었다. 그 저택이 2년 전에 불탔다는 것을 몰랐다면, 정말로 그렇게 착각했을 것이다.

    마차가 멈추자, 계단 앞에서 기다리고 서 있던 하인이 문을 열었다.

    마차 안으로 깊숙이 내민 하인의 손 위로 시에나의 손을 이끌어 올려놓자, 그녀가 부드럽게 고개를 저었다.

    “나는 괜찮으니 먼저 내리렴.”

    “하지만, 시에나….”

    “수도에 방문한 사제들은 대성당에 먼저 고하여야만 한단다. 대주교를 뵙고 오면 밤이 늦을 테니, 먼저 올라가 있으렴.”

    “그렇다면 제가 곁에서 수행할 수 있도록 허락해 주셔요.”

    “너는 해야 할 일이 있지 않니.”

    해야 할 일이라니? 이벨린이 당혹스럽게 바라보자, 시에나가 웃으며 말했다.

    “비센테의 말로는 네게 제대로 된 옷이 한 벌도 없다던데.”

    “황태후 폐하.”

    그녀가 미처 대답하기도 전에 누군가가 그들의 대화에 불쑥 끼어들었다. 일반적인 경우라면 무례였으나 앞이 보이지 않는 시에나를 생각하면 도리어 배려였다. 고개를 돌리자, 하인이 비켜선 마차의 문간에 한 여인이 서 있는 것이 보였다.

    희끗한 갈색 머리를 하나로 올려 묶은 초로의 여자였다. 이벨린은 그녀가 시에나의 옛 시녀라는 것을 금세 눈치챘다. 과거, 시에나가 엘레나를 초대해 담소를 나눌 때면 한 걸음 뒤에서 흐뭇한 눈으로 그들을 바라보던 여자.

    그때의 기억보다 조금 더 나이 든 얼굴은 여전히 고아했고, 어린 시절 엘레나가 가끔은 어려워하던 엄격한 표정은 세월이 덧대지며 보다 완고한 형태로 자리를 잡았다.

    클라우디아는 우아하게도 치맛자락을 붙잡은 채 절을 올렸다. 정작 절을 받는 시에나는 볼 수도 없을 텐데, 마치 그녀의 눈이 여전히 멀쩡한 것처럼.

    목소리만으로도 상대를 알아차린 시에나가 반색했다.

    “클라우디아!”

    “벨몬테의 거리에서 폐하를 다시 뵙게 될 거라곤 생각지도 못하였습니다. 건강해 보이셔서 기쁩니다.”

    클라우디아의 목소리가 감격으로 조금 떨렸다. 시에나는 입술을 가리며 부드럽게 웃었다.

    “가끔 신전으로 찾아왔으면서, 새삼스럽긴. 그대도 목소릴 들으니 여전해.”

    “자주 뵙지는 못하였지요. 특히 요 몇 년간은….”

    그녀는 감정을 추스르듯 잠시 침묵했다가, 이벨린을 돌아보며 말했다.

    “폐하께서 올해 데뷔 준비를 부탁한다는 아가씨가 여기 이 아가씨인가요?”

    “맞아. 이벨린, 인사드리렴. 기메라 백작 부인이란다.”

    시에나는 재빨리 이벨린의 귓가에 속삭였다.

    “너에 대해서 모두 아는 사람이니, 긴장할 것 없단다.”

    이벨린은 시에나에게 한쪽 손이 붙잡힌 채로 어정쩡하게 예를 올렸다. 마차에 올라탄 상태였던 터라 별다른 선택지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백작 부인을 뵙습니다.”

    시에나가 붙잡고 있는 손 때문에, 다행스럽게도 그 모습이 크게 거슬리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이벨린을 머리에서부터 발끝까지 티 나지 않게 훑어본 백작 부인의 눈매가 조금 부드러워졌다.

    “오늘부터 바빠지겠군요. 준비해야 할 것이 한둘이 아닐 테니까요.”

    “그대가 수고롭겠어.”

    “황태후 폐하께 도움이 될 수 있다면 무엇이든 기쁨일 겁니다.”

    시에나는 이벨린의 손을 잡고 있지 않은 쪽 손을 내밀었다. 클라우디아가 그 손을 부드럽게 잡고 제 이마를 가져다 댔다. 시간이 지체되려는 찰나, 마부석에서 마부가 공손하게도 고했다.

    “사제님. 대주교님과 약속하신 시간이 다 되어 갑니다.”

    “그러면 회포는 나중에 풀어야겠군.”

    “예. 언제든 영광일 것입니다.”

    이벨린은 클라우디아가 내민 손을 붙잡고 마차 아래로 내려섰다. 약속 시간이 다 되었다는 말이 빈말은 아니었는지, 마부는 가방을 내려놓자마자 조급하게 출발했다. 이벨린은 마차가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얼마간 지켜보았다. 고개를 돌리자, 클라우디아가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따라오렴. 네 방으로 안내해 줄 테니.”

    이벨린은 폰페라다 궁에 올 때 들고 있었던 가죽 가방을 꼭 쥔 채로, 클라우디아의 뒤를 따라 걸었다. 저택의 내부는 바깥에서 보았던 것만큼이나 아름답게 정돈되어 있었다. 하지만 근무하는 하인이나 하녀들의 숫자는 일반적인 경우에 비해 현저하게도 적었다.

    “그 가방 속에 꼭 보관하여야만 하는 물건이라도 있니?”

    이벨린은 주변을 살피느라 클라우디아의 질문에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죄송해요. 뭐라고 하셨죠?”

    “그 가방이 중요한 물건인지 물었단다.”

    “챙길 것이 조금 있는데, 따로 가방을 구하지 못 해서요.”

    “그러면 내일 정오엔 상점가에 다녀오자꾸나. 아, 이곳이란다.”

    클라우디아는 계단을 올라가자마자 보이는 하얀 목문 앞에서 멈춰 섰다. 그녀의 눈짓에 앞에 서 있던 하녀가 얼른 문을 양옆으로 열어젖혔다. 이벨린은 급작스레 들이닥친 빛에 눈을 가늘게 좁혀 떴다. 커튼이 열려 있었고, 큼직한 창문으로는 후원의 가장 근사한 풍경이 보였다.

    “급작스레 부탁하셔서, 되는대로 꾸며 보았단다.”

    연푸른색 벽지와 커튼, 상아색으로 화사한 가구들, 질 좋은 카펫과 촛대…. 하나부터 열까지 모조리 새로 들인 가구들로 채워진 방은 척 보기에도 신경 써서 꾸민 티가 났다. 이벨린은 진심으로 감탄했다.

    “물론이에요. 정말 마음에 들어요.”

    “다행이구나. 메리. 이쪽으로 오렴.”

    클라우디아의 부름에 문간에 서 있던 하녀가 한 걸음 다가와 재빨리 무릎을 굽혔다 폈다.

    “이 아이가 앞으로 네 전담 하녀가 될 거란다.”

    “모시게 되어 영광입니다, 아가씨. 메리라고 해요.”

    “반가워. 그런데, 브리타냐 사람인 것 같은데… 맞니?”

    하녀의 이름과 억양에서는 브리타냐 냄새가 짙게 났다. 이벨린이 묻자, 정작 대답한 것은 클라우디아였다.

    “이 애는 대외적으로 네가 브리타냐에서부터 데리고 온 하녀로 소개될 거란다. 입이 무겁고, 손이 야무진 아이이니 믿고 쓰기에 괜찮을 거야.”

    이벨린은 시에나가 말했던 ‘그녀에 대해서 모두 알고 있는 사람’이라는 의미를 그제야 완벽하게 이해했다. 클라우디아가 다시 손짓하자 메리는 뒷걸음질로 벽 쪽으로 물러섰다.

    “공식적인 사교계 행사는 앞으로 일주일 뒤에 있단다. 너는 황태후 전하의 먼 친척으로 데뷔탕트에 소개될 거야. 그 뒤에 있을 무도회까지 준비해야 할 게 아주 많아.”

    데뷔탕트. 지난 생에서 치렀던 그 지루하고 끔찍한 무도회를 한 번 더 겪어야 한다니. 그나마 나은 것은, 올해의 데뷔탕트에는 황태자가 참석하지 않으리란 점이었다. 신문에 의하면 그는 지금 베르비크의 요새를 둘러보러 갔다고 하니까. 잠시나마 마음의 대비를 할 시간을 번 셈이니 다행이었다.

    “마님. 막 양장사들이 도착했다고 합니다.”

    “어서 올라오라고 해라.”

    마치 그것만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클라우디아가 손뼉을 치며 쾌활하게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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