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4화 (34/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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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니?”

    달리는 마차 안, 스쳐 지나가는 풍경에 시선을 고정했던 이벨린은 그제야 고개를 돌렸다. 맞은편 좌석에는 나이를 짐작하기 어려울 정도로 아름다운 여자가 앉아 있었다.

    찬란한 벌꿀색이 감도는 금발과 갸름한 얼굴, 부서질 듯 가냘픈 어깨…. 탁하게 빛을 잃은 눈동자나, 목 끝까지 정숙하게 올라오는 사제복도 여자의 아름다움을 감추진 못했다.

    “지난 며칠 동안의 일을 떠올리고 있었어요.”

    이벨린은 머뭇거리다 덧붙였다.

    “황태후 폐하.”

    황태후, 시에나. 비센테의 모친이자, 지아비였던 황제가 죽고 시력마저 잃은 여자, 스스로 황궁을 떠나 수도원에 종신 서원한 수녀. 세간은 그녀를 한때 황후였던 여자로 추억하기보다는, 누구보다도 가엾고 불행한 여자로 기억했다.

    “그렇게 매번 존칭 붙여 부를 필요 없단다.”

    정숙한 사제복을 갖춰 입은 여자는, 마치 이벨린이 보이기라도 하는 것처럼 정확한 방향을 보고 미소 지었다.

    “시에나라고 편히 부르렴.”

    “제가 어떻게 감히요….”

    “수도원에 종신 서원한 이래로, 이름으로 불리는 것이 당연해진 지 오래되었어. 그게 편하니 부디 그렇게 해 주렴.”

    아직 시력이 온전하던 시절의 시에나는, 종종 그녀와 비센테를 무릎에 앉힌 채 귀한 손으로 직접 머리를 빗겨 주곤 했었다. 한때는 그 온기가 세상의 전부였던 적이 있었다. 정작 시에나가 쫓겨나듯 황궁을 떠날 땐 인사조차 올리지 못했던 주제에.

    “…….”

    그 이후로는 몇 번 뵙지도 못했었다. 처음 몇 년 동안은 아비의 지독한 감시 탓에, 그 뒤로는 시에나 쪽에서 좀처럼 만나 주지 않아서.

    한때는 시에나가 제 불행을 외면한 그녀를 원망한다고도 생각했었다. 그게 시에나가 지켜 주는 방식이라는 것을 몰랐을 때는. 이벨린은 늦지 않게 꺼끌거리는 마음을 삼켰다.

    “배려에 감사드려요.”

    “배려라 생각지 말렴. 내 편의대로 요구하는 것인데. 오히려 불편하게 했다면 모를까….”

    “그렇지 않아요. 사실, 직접 마중 나와 주실 거라곤 미처 상상도 못 했어요.”

    이벨린이 기억하는 한 궁을 나간 뒤부터 시에나의 삶은 늘 수도원에 매여 있었다. 황태후의 존재가 시동생의 경계심을 불러일으킬까 봐, 그게 제 아들의 목숨을 위협할까 두려워 수도원 바깥으로는 감히 고개조차 돌리지 않고 숨죽인 채 사는 것. 그게 바로 지난 몇 년간 이어진 시에나의 삶이었다.

    그녀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비센테가 전쟁의 최전선으로 내몰렸던 걸 생각하면, 그리 가치 있지도 않은 굴종이었다.

    “황자께서 너를 내 친정 쪽 먼 친척으로 사교계에 소개해 달라고 하더구나.”

    퍼뜩 고개를 들자, 온화하게 웃고 있는 시에나의 모습이 보였다.

    “여섯 살 이후로 내게 무엇 하나 부탁하지 않았던 분께서.”

    “…….”

    “궁금해서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단다.”

    이벨린은 폰페라다 궁을 떠나오던 순간을 되새겼다. 눈을 가린 채 축축하고 긴 비밀 통로를 지나자 곧장 지하 수로였고, 까마득한 낭떠러지였다. 끝이라고 생각했는데 좁은 계단이 있었다. 내려오자마자 다시 눈이 가려졌고, 조금쯤 더 걷다 창문이 없는 마차에 태워졌다. 그 길고, 두려운 여정 끝에 시에나를 발견하고 얼마나 놀랐었던지….

    “피로하니?”

    이벨린은 퍼뜩 고개를 들었다. 그제야 제가 시에나를 앞에 두고 지나치게 오래 상념에 잠겨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벨린은 시에나가 볼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자세를 바로 하며 대답했다.

    “조금… 긴장이 되어서요.”

    “목소리에 힘이 들어가 있는 게 느껴지는구나. 연회장에서는 그보다 조금 더 우아하게 말할 수 있기를 바란다.”

    “명심할게요.”

    “어떤 것도 안 되겠으면, 그저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는 척하는 것도 도움이 돼.”

    이벨린은 그제야 시에나가 제게 진지하게 충고해 주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녀는 습관처럼 고개를 끄덕이다가, 그녀가 볼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목소리를 냈다.

    “충고해 주셔서 감사해요.”

    “이제 수도에 거의 다 와 가는 것 같구나.”

    시에나의 말대로, 마차는 그 유명한 톨레아 가도를 막 지나던 참이었다. 이벨린은 신기해하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찌 아셨어요?”

    “눈이 보이지 않으면 다른 감각들이 발달하기 마련이란다. 특히 사람의 손은 생각보다 많은 정보를 읽어 낼 수 있지.”

    “…….”

    “이쪽으로 건너와서 앉아 보렴.”

    시에나가 제 옆의 좌석을 손으로 톡톡 두드리며 말했다. 이벨린은 조심스럽게 자리를 맞은편으로 옮겼다. 체중대로 좌석이 가라앉자 시에나가 더듬어 이벨린의 손을 잡았다. 손목과 팔뚝, 어깨…. 차례로 거슬러 올라간 손이 마침내 얼굴을 찾아냈다. 가냘픈 손가락이 이벨린의 이마와 볼, 입술과 눈두덩이를 부드럽게 쓸듯이 매만졌다.

    “사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네가 어떻게 생겼는지 줄곧 궁금했단다.”

    “…….”

    “아주 예쁘구나, 이벨린.”

    시에나의 웃음 위로 언젠가의 과거가 겹쳤다. 그들이 조금 더 젊었고, 어렸던 날들이. 그 시절, 황태자이던 비센테와 막 약혼했을 예닐곱 살 무렵. 그때도 시에나는 그녀를 이렇게 앉혀 두고 예뻐해 주었었다.

    “…….”

    그러나 온화하게 빛나던 황후의 눈동자는 이제 희게 멀어 버렸고, 그 앞에 앉은 이는 더 이상 ‘엘레나’도 아니었다. 이벨린의 순한 눈이 금방이라도 울 것처럼 일그러졌다.

    “이런, 이벨린.”

    그제야 이벨린은 제 뺨을 타고 눈물이 흘러내린 것을 깨달았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냥.”

    이벨린은 잔뜩 목이 멘 채로 간신히 울며 웃었다.

    “가끔은 모든 게 너무 빨리 변하는 것 같아서요.”

    “…좋은 시절은 금방 지나가기 마련이지.”

    이벨린은 그녀의 뺨을 감싼 시에나의 손등 위로, 제 손을 가볍게 포갰다.

    “맞아요. 정말로, 그러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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