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3화 (33/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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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종장, 안토니오는 지끈거리는 두통을 느끼며 깨어났다. 가장 먼저 느껴진 것은 축축하고 끔찍하게 차가운 돌바닥이었다. 그는 무심코 머리를 짚으려다가, 제 손발에 묵직한 사슬이 걸려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는 비척거리며 주변을 한 바퀴 둘러보았다. 아무래도 여기는 폰페라다 궁의 지하 감옥인 듯했다.

    대체 이게 다 무슨 일인지. 집무실에서 업무를 보고 있는데, 급작스레 들이닥친 기사들이 그를 찍어 누르듯 제압했다. 그리고… 확신할 순 없지만, 그 충격에 기절했었던 것 같다.

    언뜻 듣기로는 이번에 죽은 브리타냐 계집과 관련된 일인 것 같았는데. 아마도 중간에 지독한 오해가 있었던 게 분명했다. 그는 이번 사건에는 일절 관여한 바가 없었다. 물론 그 하녀가 죽은 것은 잘된 일이었지만.

    어쨌든, 감히 증거도 없이 그를 건드린 자들은 추후에 그 대가를 톡톡히 치러야 할 터였다. 제가 어떤 사람인데. 황제께서 저를 얼마나 신임하시는데. 특히, 그들을 진두지휘하는 듯 보였던 황자의 평민 부관 놈…. 안 그래도 사사건건 부딪쳐서 벼르고 있던 참이었다. 그놈만은 꼭 제 손으로 직접 지하 감옥에 처박아야 족할 것 같았다.

    계단을 내려오는 발소리가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급작스레 들이닥친 랜턴 빛에 시종장은 눈살을 잔뜩 찌푸렸다. 눈이 빛이 익숙해지자 사람이 보였다. 시종장은 부릅뜬 눈으로 철창 너머를 향해 손가락질을 했다. 손이 분노로 부들부들 떨렸다.

    “…너, 너!”

    “드디어 일어나셨군요.”

    그 부관 놈이었다. 매번 이벨린의 곁에 바짝 붙어서, 웃음이나 가볍게 흘리던 자. 평소에는 몰랐는데 어두운 곳에서 마주한 무표정은 제법 사나웠다. 시종장은 당혹스러운 감정을 감추려 되려 더 큰소리를 냈다.

    “이게 대체 무슨 행패인가!”

    지하 감옥 벽을 타고 쩌렁쩌렁 울리는 고함에도 부관은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그 낯짝에 약이 바짝 올랐다. 시종장은 이를 으득 갈았다.

    “내게 이런 식으로 굴고도 무사할 것 같나? 전하께서 나를 얼마나 신임하시는데! 내가 전하를 얼마나 헌신적으로 보살폈는데! 내게 이러는 걸 황자 전하께서 아시기라도 하는 날엔…!”

    “전하께서 승인하신 일입니다.”

    “…뭐?”

    “돌려 말하는 재주는 없으니 단도직입적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무슨.”

    “자작의 침실에서 독약 병이 발견되었습니다.”

    대체 무슨 소리인가 싶어 눈을 껌벅거리던 시종장의 얼굴이 순식간에 새파래졌다.

    “도, 독약이라니?”

    “말 그대로입니다. 잔여물을 조사해 봤더니, 시체의 빠른 부패를 유도해 사망 시각에 혼란을 주는 독인 모양이더군요.”

    황자의 부관은 품속에서 구겨진 종이를 꺼내 펼쳐 들었다.

    “그리고 이건 이벨린 베네딕트가 마신 독과 유리병에서 발견된 독이 일치한다는 궁의의 소견서입니다.”

    “마, 말도 안 돼. 내가 그 여자를 죽일 이유가 없지 않나!”

    “…….”

    “이건 조작이다. 모함이야! 누가 나를 음해하는 게 틀림없어!”

    시종장은 양손으로 철창을 거칠게 움켜쥐었다. 부릅뜬 눈에 선 핏발이 흉흉했다.

    “자네, 자네는 나를 믿어야 하네. 전하를 한 번만 뵐 수 있도록 해 주게. 다 설명드릴 수 있어. 무슨 착각이 있었던 모양….”

    “그런 변명이 통하리라 생각하십니까?”

    “저, 정말일세! 내가 아니야! 그날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증언해 줄 증인, 증인도 있네. 그렇지, 마테오를 불러 주게. 그 애가….”

    “이벨린 베네딕트가 죽던 날 저녁. 마테오는 당신을 본 적이 없다고 이미 증언했습니다.”

    “거짓일세! 그 증언은 결단코 거짓이야! 그자가 범인이라 나를 모함하는 거다!”

    “…….”

    “전하를, 전하를 뵙게 해 주면 모든 것을 설명하겠네. 그, 그렇지….”

    시종장은 헐떡이며 무릎을 꿇었다.

    “내가, 큰 실수를 했어. 자, 자네에게… 이, 이렇게 빌겠네. 하, 한 번만 도와주게. 내가 그런 게 아니야.”

    “자작.”

    시종장은 눈물과 공포로 얼룩진 얼굴을 들었다. 그를 오연하게도 내려다보는 부관의 눈에는 일말의 동정심조차 깃들어 있지 않았다. 그 심연을 마주한 순간, 시종장은 불현듯 깨달았다.

    “아직도 모르시겠습니까?”

    “…….”

    “자작께서 이벨린 베네딕트를 살해했든, 안 했든. 결백하든, 결백하지 않든.”

    “…….”

    “전하께서는 당신이 범인이기를 원하십니다.”

    이미, 황자께서는 그를 버렸노라고. 이명처럼 귀가 먹먹했다. 황자의 부관이 읊어 대는 소리는 들리지도 않았다. 그가 순순히 혐의를 인정했을 시 받을 수 있는 특혜나, 인정하지 않았을 시 받을 불이익까지…. 특혜라니. 스스로 죽는다면, 일가는 보존하리라는 협박이 어떻게 특혜가 된단 말인가. 시종장은 미약한 헛웃음을 터트렸다.

    “황자께서는 당신께서 순순히 혐의를 인정할 경우, 황족 시해의 혐의까지는 묻지 않겠다고 하셨습니다.”

    고개를 푹 떨군 시종장의 몸이 위아래로 들썩였다. 이제야 알겠다. 열 살 무렵부터 지금껏 제 손바닥 위에 두었다고 생각한 황자를, 사실은 단 한 순간도 제 손에 쥐어 본 적조차 없었다는 것을.

    지독히도 늦된 깨달음이었다. 창살을 우악스레 붙잡고 있던 시종장의 손이 힘없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러니 자작. 부디, 현명한 선택을 하시길 바랍니다.”

    그로부터 이틀 뒤 새벽. 시종장이 하녀 연쇄 살인의 혐의를 인정했다. 그리고 정오 무렵, 그가 자살했다는 소문이 온 궁에 파다하게 번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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