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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이후로 비센테는 자취를 감추었다. 적어도 이벨린이 느끼기에는 그랬다. 아무리 바쁘더라도, 오가며 먼발치에서 얼굴이나마 볼 수 있었던 때와는 달랐다. 정말로 다시는 그녀를 찾지도 않을 것처럼, 계획조차 어그러트릴 것처럼.
“전하께서 어디 계시냐고? 그야….”
“큼, 흠.”
“나, 나도 모르지.”
이벨린은 그 말을 할 때마다 둘 사이에 곤란한 눈빛이 오고 가는 것을 놓치지 않았다. 그녀는 그제야 비센테가 저를 피하고 있다는 것을 온전히 인정할 수 있었다. 물론, 계획이 막바지에 이르렀으니 바쁘기도 바쁠 테지만….
“전하께서 제게 남긴 전언도 없으셨나요?”
“변경된 계획은 없어. 적어도 내가 듣기로는 그러해.”
“아가씨께선 지금처럼 계시면 됩니다.”
“…대체 그게 언제까지인데요.”
“길진 않을 거야. 네가 왜 불안해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전하의 의중 속엔 아직 네가 있으니까. 확실한 건….”
“단테.”
길어지려는 단테의 말을 루카스가 끼어들어 잘라 냈다. 이벨린은 입술을 짓씹듯 깨물었다.
“대체 그 계획이 정말 실행되기는 하는 건가요?”
“무슨 말을 그렇게 해.”
“…죄송해요. 하지만 아무것도 공유해 주질 않으시니, 저도 답답해서….”
“네가 답답한 건 이해해. 하지만 우리도 신중하게 접근하고 있다고.”
“…….”
“넌 그냥 사라지는 게 아니라, 죽은 것으로 처리되어야 하니까.”
“…….”
“갑자기 왜 이렇게 조급하게 구는지 모르겠지만, 머리 좀 식혀.”
단테의 지적은 정확했다. 그녀는 근래 들어 명백하게도 초조했고, 조급했다. 비센테를 다시 만나고 싶다는 마음은 강렬했으나, 정작 만나서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조차 알 수 없는 상태였다.
그녀가 사실 엘레나라고 밝혀? 충동이야 대단했지만, 그건 어떤 해결책도 되지 않는다.
그가 과거에 저를 조금… 좋아했다고 해서 달라질 건 없었다. 더구나 감정은 어떤 해결책도 되지 못한다. 도리어 사람의 이성을 좀먹고, 정확한 판단을 해친다면 모를까.
‘특히나 반역을 앞둔 지금 같은 시점에서 동요할 여지를 준다? 그야말로 자살 행위지.’
물론, 하나같이 낙관적인 관점이었다. 그가 여전히 그녀를 사랑할 때를 가정한. 유폐까지 당한 지금, 게다가 그녀가 죽은 지 제법 세월이 흐른 지금, 그에게 남은 감정이 오로지 애정뿐일 거란 보장이 없었다.
‘지금의 나를 온전히 그 시절의 엘레나라고 해도 좋은지도 모르겠고.’
그 모든 이성적인 판단에도 불구하고, 끝내 머릿속을 지배하는 것은 형편없는 충동이었다.
‘그저, 다시 한번 그 얼굴을 보고 싶….’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순간, 이벨린은 양손으로 제 뺨을 세게 내리쳤다. 미쳤구나, 정말.
“갑자기 왜 그래?”
단테가 뜨악한 눈으로 그녀의 손목을 재빨리 잡아챘다. 이벨린은 아무렇지도 않게 대꾸했다.
“정신 좀 차리려고요.”
“정신 차리려고 제 뺨을 때려?”
그는 여전히 당혹스러워하면서도, 이벨린이 당기는 대로 손목을 순순히 놔주었다.
“안 잡으셨으면 두 번은 더 때렸을 거예요.”
“…허.”
“이젠 안 그럴 테니까 걱정 마시고요. 그럼 이만 가 봐야겠어요. 차를 준비해야 해서.”
그녀는 몸을 돌려 재빨리 계단을 내려갔다. 서둘러 걸으면, 마치 조금 전의 생각에서 더 빠르게 멀어질 수 있는 것처럼.
어쩌면 에스페다의 공기가, 사람들이, 들려오는 말씨가, 토양이, 음식이 문제일지도 모르겠다. 제 아비가 그토록 억누르려고 애썼던 과격한 성미가, 엘레나로서의 모든 것을 포기하기로 마음먹은 이 순간에조차 불쑥불쑥 튀어나오는 것을 보면.
“…난 거 아냐?”
“소문에 의하면….”
세탁실이 있는 복도에 접어들자마자 하녀들 두셋이 모여 두런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요 며칠 분위기가 뒤숭숭하다 싶었더니, 이상한 소문이 도는 모양이었다. 그녀는 문고리를 조심스럽게 움켜쥔 채 조금만 열었다. 수런거리는 하녀들의 목소리는 고작 틈 사이로 듣기엔 불분명했다.
“그렇지. 그러니까 이번에야말로….”
이벨린은 더 기다리지 않고 문을 열어젖혔다. 얼굴을 맞댄 채 모여 있던 하녀들은 화들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가 이벨린을 보고 눈에 띄게 안도한 얼굴들을 했다. 대외적으로 그녀는 아직 에스페다의 언어를 조금도 모르는 것으로 되어 있었다.
[이벨린. 뭐 도와줘?]
그 무리 중에 라켈이 있었던 것만은 의외였지만. 이벨린은 유순한 얼굴로 미소 지었다.
[고맙지만 괜찮아. 요새 일이 손에 익어서 금방 할 수 있어.]
[괜찮겠어?]
[그럼. 앉아서 좀 쉬도록 해. 모두 오전 내내 바빴잖아.]
라켈은 어깨를 으쓱하고는, 화롯가에 옹기종기 모여 앉은 하녀들을 향해 시선을 던졌다.
[그렇다면야….]
오래 걸리지 않는다고 말했지만, 이벨린은 일부러 더 평소보다 천천히 움직였다. 물을 데우고, 찻잔을 쟁반에 담는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지루하게도 이어졌다. 눈치만 보던 하녀 중 한 명이 다시 입을 연 것은 그즈음이었다.
“하지만 정말 영문 모를 일이니까….”
“황태자 전하께서 폐하의 눈 밖에 난 건 확실해.”
단언하듯 말한 하녀가 조심스럽게 덧붙였다.
“2년 전에 있었던 반역만 해도, 지금의 황태자 전하를 밀어내고 3황자 전하를 그 자리에 올리려던 거였잖아. 황제 폐하의 비호가 없었다면, 그때 2황자 전하께서 살아남으실 수 있었겠어?”
“하긴. 결국 가담했던 귀족들만 전부 죽어 나갔지. 그 대단한 카스타야부터 레가네스, 바예카, 알바세테….”
“그 와중에 폐하의 애첩이자, 3황자의 모친인 바섬 백작 부인은 털끝 하나 건드리지도 못했고.”
“그러면 정말 2황자 전하의 유폐가 풀린다고?”
“그래. 폐하께서 2황자 전하를 다시 수도로 부르실 거라더라.”
하녀들 사이에 조용한 술렁임이 일었다. 주인이 유폐에서 풀린다니, 저들도 같이 수도로 올라갈 수 있다는 희망 때문이다.
“그런데 하필 왜 지금이야?”
“왜? 뭐 마음에 걸리는 거라도 있어?”
“황제 폐하께서 황태자 전하를 내쳤다기엔, 여전히 그분의 계승권이 공고하잖아. 이번 귀족원에서 과반수를 못 얻기는 했어도… 그분 외에 별다른 대안도 없고.”
“3황자 전하께 힘을 실어 주시려는 것 아닐까? 유폐를 풀어 주는 대가로, 2황자 전하의 지지 세력이 3황자 전하께 붙기로… 뭐, 그런 모종의 거래가 오갔다던가.”
“…너, 아직 그 소문 못 들었어?”
“무슨 소문?”
지나치게 숨죽인 속삭임들이 이어진 탓에 그 뒤는 불분명하고 거친 호흡처럼 들렸다. 불유쾌하던 침묵을 뚫은 것은, 다소 날카로운 목소리였다.
“뭐? 3황자 전하께서 살해당했다고?”
쨍그랑.
순간적으로 손에서 놓친 찻잔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쟁반 위를 뒹굴었다. 급작스레 들린 요란한 소리에 부엌 안의 이목이 그녀에게로 쏠렸다. 이벨린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이목이 쏠린 것이 부담스러운 것처럼 양 뺨을 붉히며 말했다.
[미안하다고 전해 줄래, 라켈? 손에서 미끄러져서.]
[…다치진 않았어?]
[응. 멀쩡해. 찻잔은 깨지지도 않았어. 괜찮아.]
의심스러워하는 시선들이 이벨린의 얼굴을 샅샅이 훑었다. 그러나 이벨린은 말간 눈으로 시선을 똑바로 마주한 채, 눈썹 하나 까딱이지 않았다. 별다른 트집거리를 찾지 못한 하녀들은 다시금 저들끼리의 수다로 빠져들었다.
“범인으로 유력한 건 황태자 전하야. 그분 외에 3황자의 죽음으로 이득 볼 사람이 달리 누가 있겠어.”
“돌아가시기 며칠 전에 황태자 전하께서 선물한 과자를 드셨다더라고.”
“그러면 독살이야?”
“어쩐지 점점 무서워지기 시작했어. 이제 이 주제는 그만 이야기하자. 유배에서 풀려나면 다들 뭐부터 하고 싶어?”
주제는 순식간에 가벼워져서, 유배에서 풀려나게 되면 가장 먼저 하고 싶은 일들로 바뀌었다.
이벨린은 쟁반을 받쳐 들고, 자연스러운 태도로 부엌을 나섰다.
한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속이 불편하게 뒤엉켰다. 과거의 기억들이 마구잡이로 떠올랐다. 3황자. 언젠가의 어둑한 서고에서 만났던 어린아이, 그 말간 음성, 또박또박 책을 읽던 총명함, 통통한 뺨, 자그마한 손, 그녀의 어깨에 기대던 뜨끈한 체온.
그런 어린애를 제게 접붙이려 한 아비에게 신물이 나오던 감정까지, 모조리.
도무지 무슨 정신으로 다시 계단을 올랐는지 모르겠다. 그녀는 가까스로 떨리는 손을 억누른 채 집무실의 문을 열었다. 머리가 아닌 몸에 밴 습관대로 움직인 탓이었다. 집무실의 문을 열자마자 대기 중의 엷은 향이 숨 깊이 들어찼다. 그제야 이벨린은, 제가 숨을 몰아쉬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곧 유폐가 풀리게 될 거야.”
비센테의 집무실에서는 늘 엷은 시더와 몰트 향이 났다. 그가 있을 때나, 없을 때나. 그리고 그 향은 마치 그가 눈앞에 있는 것처럼 느껴지게 했다.
“길어야 2달쯤. 상황이 빠르게 변하고 있어.”
적어도 2달 전에 비센테는 이 상황을 예견하고 있었다. 황태자가 3황자를 죽이고, 황제가 제 아들을 견제할 번견으로 저를 다시 수도로 불러들일 것임을…. 이벨린은 테이블을 붙잡은 채로 현기증이 이는 정신을 간신히 다잡았다.
그가 어린 사촌의 죽음조차 이용할 수 있는 사람이었나?
그녀가 알던 비센테는 적어도 모든 면에서 반듯한 사람이었다. 도움이 필요한 자에게는 기꺼이 도움을 주었고, 고작해야 길 잃을 어린애를 달래겠다고 제 고귀한 무릎을 흙바닥에 굽힐 수 있는 사람이었다.
손익을 따지고 계산해서 나온 행동이 아니라, 그렇게 하는 것이 황족 된 의무이기 때문에 당연하다는 태도로. 그게 전부 거짓이었을까?
다 알고 있다고 생각한 것들이 산산이 부서지는 소리가 났다. 굳건하다고 착각했던 것은 얼마나 얄팍한 허상이었던가.
그 중, 가장 끔찍하고 견디기 힘든 것은 제 위선적인 마음이었다. 한때는 비센테가 이안을 진심으로 아꼈을 거라고. 그게, 처음부터 끝까지 온전히 거짓이었던 것은 아니라고. 어쩌면, 그는 이 상황까지는 몰랐을지도 모른다고.
“이벨린.”
그녀는 가까스로 고개를 들었다. 눈물로 엉망이 된 시야에, 어딘지 모르게 굳은 표정의 단테가 보였다.
“전하께서 승인하셨다.”
“무엇을….”
“내일 새벽. 드디어 네가 죽을 거야.”
이벨린이 평소보다 늦어지고 있었다. 근래 들어 시종장의 자질구레한 심부름을 그 여자가 도맡고 있었던 터라 부재는 금방 눈에 띄었다. 하녀는 마뜩잖은 기분으로 계단을 올랐다. 늦잠이거나 꾀병이겠지. 독살 사건 이후로 황자 전하께서 유독 끼고도시지만 않았어도, 진작에 마구간으로 쫓겨났을 텐데.
“무슨 일이지?”
그녀가 마지막 계단을 오르자마자, 앞을 지키고 선 기사 중 한 명이 검집으로 길을 가로막았다. 하녀는 공손히 손을 모았다.
“이벨린이 여태 내려오지 않아서요.”
“여태?”
“번거로우시겠지만, 혹시 확인 좀 해 주실 수 있으실까요?”
“방문 앞까지 가 보는 것은 어렵지 않지만… 여자의 숙소에 함부로 출입할 수는 없는 노릇이라.”
“시종장께서 급히 찾으세요.”
“그러고 보니 오늘 내려간 것을 보지 못한 것 같군.”
기사의 수려한 얼굴에 희미하게 망설이는 빛이 어리자마자, 그녀는 밀어붙이듯 주장했다.
“그 문제라면 제 동행을 허락해주세요. 제가 방 안에 들어가 볼게요.”
“그건 내가 임의로 결정할 수는 없는 문제야.”
“만약 몸이 아파서 일어나지 못하는 거라면요? 이벨린이 없어서 전하의 시중이 늦어지면, 기사님도 함께 곤란해지시잖아요.”
그녀는 애원하듯 속삭였다. 기사는 곁에 선 다른 기사를 한 번, 그리고 계단 위를 한 번 차례로 훑어보고는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붙어서 따라오도록.”
하녀는 기사의 뒤를 따라 조심스럽게 4층으로 진입했다. 만약 그녀가 조금 더 경계심 깊은 성격이었다면, 갑작스러운 허가를 의아하게 생각했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하녀는 이제 고작 스물 남짓이었고, 금지된 장소에 발을 디딘다는 것만으로도 조금 흥분한 상태였다.
4층에는 묘한 냉기가 감돌고 있었다.
황자가 시체를 전시해 놨다느니, 술병과 약이 굴러다닌다느니, 혹은 비밀 통로가 있다느니…. 시종들 사이에서 비밀스럽게 돌고 있는 온갖 끔찍한 소문들과는 달리, 복도는 그저 평범해 보였다. 벽을 장식한 태피스트리나 문양들이 유독 고풍스럽긴 하지만, 그뿐이었다.
“이곳이다.”
이윽고 기사가 문 앞에서 멈춰 섰다. 그녀는 목을 가다듬고 조심스럽게 나섰다. 문을 두드리는 손길은 조심스러웠다.
[이벨린?]
귀를 쫑긋 세웠지만 돌아오는 소리는 없었다. 하녀는 조금 더 소리를 크게 냈다.
[이벨린? 안에 있어?]
대답은 여전히 없었다. 더구나 아무리 귀를 기울여봐도 사람의 인기척은 좀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하녀는 어쩔 수 없다는 듯 기사를 올려다보았다.
“아무래도 문을 열어 봐야겠어요.”
“열쇠는 전하께서 가지고 계신다.”
“하면….”
“비켜서.”
하녀는 두어 걸음 문에서 비켜섰다. 기사는 들고 있던 검의 손잡이를 문고리에 걸었다. 그 상태로 체중을 싣자 우지끈하는 소리와 함께 손잡이가 뜯어지듯 부서졌다. 기사는 능숙하게 파편을 치우고, 뚫린 구멍으로 손을 집어넣어 잠금쇠를 풀었다. 이윽고 문이 양쪽으로 활짝 열렸다.
“윽….”
커튼이 쳐진 방 안은 어둑했다. 창문을 오랫동안 열지 않았던 것처럼, 어딘지 모르게 불유쾌한 냄새가 가장 먼저 느껴졌다. 하녀는 불안한 얼굴로 기사를 흘긋 바라보았지만, 그는 그녀에게 들어가길 재촉하는 것처럼 엄한 눈길을 보낼 뿐이었다. 하녀는 입술을 깨물고 조심스럽게 방 안으로 들어섰다.
[이, 이벨린?]
목소리는 조금 떨려서 나왔다. 문이 열린 직후부터 묘하게 솜털이 곤두서는 것 같았다. 서늘한 냉기 때문일까, 아니면 불안한 직감 때문일까. 선 채로 악몽을 꾸는 것 같았다. 하녀는 조심스럽게 문이 열린 침실 안까지 들어갔다. 얇은 시트는 사람의 체형대로 부풀어 있었다.
[아직 자는 거야?]
깨달음은 그 말을 뱉은 직후에 왔다. 시트가, 사람의 호흡대로 오르락내리락하지 않았다. 하녀가 다가가던 걸음을 멈춘 것과 동시에, 시트에 가려져 잘 보이지 않던 팔이 아래로 툭 떨어졌다. 복도의 희미한 빛을 받아 번들거리는 것이 꼭 죽은 물고기의 시허연 배를 보는 것 같았다. 그녀가 침을 꼴깍 삼키며 시선을 조금 더 들어 올린 순간….
“으아아악!”
도저히 사람의 얼굴이라고 생각할 수조차 없이 너절해진 살점들 사이로, 부릅뜬 청회색 눈동자가 허공을 응시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