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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드렸던 서고의 열쇠입니다.”
이벨린은 루카스가 내민 열쇠와 그의 얼굴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순간적으로 미심쩍은 마음이 들지 않았다고 한다면 거짓이었다.
그가 진지하게 수업하기 시작한 근래에는 조금 더 가까워졌다곤 하지만, 경계심을 늦추긴 어려웠다. 거의 원수지간처럼 으르렁거리던 때에서 얼마나 지났다고. 더구나 그가 말한 서고는 비센테의 집무실에 바로 붙어 있었다.
함정이거나, 아니면 정말로 호의거나. 한번 경계심을 풀면 끝도 없이 풀어지는 성격이 아니라면야 함정이라고 생각하는 쪽이 더 합리적이었다. 이벨린은 오른쪽 눈썹을 우아하게 치켜올렸다.
“정말 제가 들어가 봐도 괜찮나요?”
“금서라고 해도 급진적인 사상가들의 책이나 몇 권 있을 따름이니까요. 생각하시는 것만큼 대단하지는 않을 겁니다.”
그는 진실을 이야기하는 것처럼 솔직해 보였다. 적어도 요 몇 주간 얼굴을 맞대며 파악한 바로는 그랬다. 이벨린 경계심을 조금쯤 누그러트리며 대답했다.
“그렇다면야… 수업 전에 한 번 살펴볼게요.”
“아. 오늘부터는 수업이 없을 겁니다. 전하께서 교육은 이 정도면 됐다고 하셨습니다.”
“그런가요?”
“그렇게 좋으십니까….”
“조금은요. 그 말씀은 계획이 가까워졌다는 뜻인가요?”
“정확히는 모르겠습니다만… 준비해 두시는 게 좋을 겁니다. 자세한 건 전하께 직접 들으십시오.”
따지고 보면, 비센테가 처음 그녀에게 ‘완벽히 준비되어야 한다’고 말했던 3주에서 사흘이 더 지난 시점이었다. 슬슬 다음 단계로 넘어갈 때가 되긴 했지. 머리로 짐작하고 이해한 것과는 별개로, 긴장이 되는 것만큼은 어쩔 수 없었다.
“제가 뭘 더 준비해야 할까요?”
“당분간은 지금처럼만 지내시면 됩니다.”
“하녀 일을 하면서 눈도장을 남겨 놓으란 말이죠.”
“잘 알고 계시는군요.”
그는 자신의 대꾸가 너무 차가웠다고 생각했는지, 조금 누그러진 어조로 덧붙였다.
“서고는 전하께 말씀드려 놨으니, 언제든 이용하셔도 괜찮습니다. 책에서 많은 것을 배우신 듯하니… 교양을 더 쌓으시려거든 저보다는 그편이 더 큰 도움이 될 겁니다.”
“알겠어요. 고마워요.”
때마침 하녀들을 부르는 종소리가 울렸기 때문에 이벨린은 루카스에게 서둘러 인사하고 계단 아래로 내려갔다. 아래층 계단의 모퉁이로 접어들자마자, 막 위로 올라오려던 라켈과 곧장 마주쳤다. 라켈은 이벨린을 한 번, 계단의 위쪽을 한 번 번갈아 바라보더니 물었다.
[4층에 있었어요?]
[전하께서 따로 명하신 게 있어서요. 시종장께서 절 찾으셨나요?]
[아뇨. 그, 기사가….]
라켈은 조금 불편한 표정으로 말끝을 흐렸다. 라켈이 말하는 ‘기사’는 요 근래 이벨린에게 바짝 붙어 감시하던 단테를 의미했다.
[단테께서요?]
[별거 아니에요. 저번에… 마리아에게 일어난 안 좋은 사건 이후로 한동안 시끄러웠잖아요. 하인실을 들쑤시고 다니는 걸 시종장께서 오늘은 못 참으신 모양이에요. 괜히 이벨린에게까지 불똥이 튈 테니까, 눈에 띄지 않는 게 좋을 거 같아서요.]
[아….]
[지금은 하인실 쪽으로는 가지 말아요.]
[고마워요. 덕분에 살았어요.]
이벨린이 진심으로 안도하는 표정을 짓자, 라켈이 입술만 움직여 미소지었다.
[그냥. 의심했던 게 미안해서요.]
[네?]
[아무것도 아니에요.]
라켈은 알쏭달쏭한 말만 남긴 채 방향을 바꿔 계단을 그대로 내려갔다. 정말 이벨린을 찾아서, 시종장을 조심하라는 말을 해 주려던 게 용건의 전부였던 모양이었다.
찜찜하긴 했지만, 따르지 않을 이유도 없었다. 근래 이벨린은 시종장을 마주하는 게 점점 더 껄끄러워지던 참이었으니까.
처음 비센테의 명령으로 다시 하녀 일을 시작했을 때는, 그녀를 보고 직접 ‘드디어 돌아오셨다’며 대놓고 비아냥을 퍼부었었다. 제 손으로 키워 낸 황자가 저 말고 다른 하녀를 가까이 둔다는 것에 상당히 빈정이 상한 것처럼 보였다.
뒤로는 황제를 섬기면서 비센테조차 제 손아귀에 잡아 두려는 속셈은 무서울 정도였다. 그가 여태껏 비센테의 정보를 얼마나 값싸게 카스트로에게 넘겼는지를 생각하면 더더욱.
어쨌든 시간이 붕 떠 버리게 되었다. 이벨린은 길게 고민하지 않고 발걸음을 돌려 4층으로 향했다. 앞주머니 속에 루카스가 준 열쇠도 있겠다, 저녁까지 시간도 남겠다, 금지된 책들을 탐구하기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시점이었다. 게다가, 찾아야만 하는 정보는 비교적 명확했다.
[여기서 역사 수업이나 하고 있을 생각은 없어. 어쨌든, 4층에 폰페라다 궁 바깥으로 이어지는 비밀 출입구가 있을 거야. 그 출입구가 어딘지 확인해.]
귀부인의 하수인에게서 들었던 말대로라면 적들은 비밀 출입구에 대해서 확신하고 있었다. 출입구가 어디인지, 어떻게 작동하는지는 파악하지 못한 듯했지만. 가장 정확한 것은 시종을 붙잡아 묻는 것이겠지만, 그는 이벨린이 비센테에게 정보를 밀고한 직후 행방을 감췄다.
텅 빈 집무실의 공기는 조금 쌀쌀하기까지 했다. 이벨린은 비센테의 책장 사이에 교묘하게 감춰진 작은 벽 앞에 섰다. 돌 틈을 더듬자, 손끝에 무언가 걸리는 느낌이 났다.
손끝을 조금 더 밀어 넣자, 덜컥하고 무언가가 맞물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숨겨져 있던 열쇠 구멍이 나타났다.
이벨린은 루카스가 준 열쇠를 조심스럽게 밀어 넣었다. 잠금은 부드럽게 풀렸다.
‘안에… 아무도 없지?’
이벨린은 문고리를 붙잡은 채 먼저 안을 들여다보았다. 서가가 빼곡히 들어선 어둑한 방이었다. 눅눅한 종이 냄새가 가장 먼저 훅 끼쳤고, 바로 다음 순간 서늘한 바람이 뺨을 스쳤다. 벽 뒤에 숨겨져 있던 공간인데도 공기가 맑았다.
그 흔한 창문조차 없는 차디찬 돌벽은 순간적으로 전생에 유폐되어 있던 서쪽 탑을 떠올리게 했다.
‘언제까지 그 기억에 매여 있을 순 없어.’
이벨린은 단호하게 비센테의 책상에 놓인 랜턴을 집어 들었다. 불을 붙이고 서고 안으로 성큼 들어섰다.
‘우선은… 폰페라다 궁의 숨겨진 비밀에 대해 서술되어 있을 법한 책.’
대외적으로 폰페라다의 궁에 대해서 알려진 것이라면, 이것이 한때는 황제의 겨울 별장이었다는 것. 사냥제 때에만 한시적으로 열렸다는 것. 에스페다의 고위 귀족들이 전부 머물 수 있을 정도로 거대한 규모의 궁이라는 것. 본관과 동관의 일부 층만 사용하고 있는 지금은, 외부에서 바라볼 때가 아니면 실감으로 와닿지 않지만 말이다.
‘인간성의 상실, 이건 아니고, 고독의 종말, 정말 끔찍하게 지루할 것 같고, 도시의 역사, 이것도 아니고….’
서가를 몇 바퀴씩 돌고 나서야 이벨린은 그녀가 원하던 책들을 엇비슷하게나마 찾아냈다. <제국의 비밀>과 <역사에는 기록될 수 없는 사적 견해>, <제국의 역사와 건축> 그리고, <사라진 것들에 대하여>.
‘마지막은 조금, 주제에서 비껴간 것 같기는 하지만….’
사실 마지막 권은 흥미 위주의 선정이기는 했다. 그녀는 랜턴의 불빛을 조금 더 돋운 채, 바닥에 무릎을 세우고 주저앉았다. 먼저 훑어보다가 주제에 맞지 않는 것들은 다시 꽂아 둘 요량이었다. 문제라면, 책의 내용이 너무 흥미진진하게 흘러간 탓이었다.
…를 근거로, 고대 란토 제국의 건국 왕과 그 직계 혈족들에게 전해지는 이능이 있었을 것으로 짐작되는바. 천 년 전, 마도 시대가 저물어감에 따라 점차 쇠락하기는 하였으나, 현황께서 기록을 금지하셨던 시기에 전해지는 풍문에 따르면…
오백 년도 훌쩍 넘은 고서이니, 책에 쓰인 현황은 아마도 에스페다의 건국제를 지칭하는 것일 터다. <역사에는 기록될 수 없는 사적 견해>라더니, 아예 대놓고 당대 황제가 기록하지 말라고 명령했던 것을, 기어이 기록해 둔 자료인 모양이었다.
‘불태워지지 않고 여태 한 권이라도 남아 있는 게, 대단하다고 해야 할지….’
마도 시대의 이야기는 제국에서 금기어나 다름없었다.
순수한 인간의 힘만으로 이룩했다고는 도저히 믿기지 않는 유적들, 있었다고 전해지기만 할 뿐인 대단한 마법들. 그로부터 수천 년이 지나 마력이 완전히 사라진 작금에 이르러서는 꾸며 낸 전설로나 여겨질 뿐이었다.
사람들에게 헛된 희망이나 망상을 불러일으킬 뿐인….
‘엘레나’가 어릴 적만 해도 2천 년도 전의 유물이 세월의 흔적도 없이 발견되었다느니, 그게 마도 시대의 잔재라느니 하는 소릴 지껄이기만 해도 황궁 기사단에 끌려가던 시절이 있었다.
어쨌든, 공개적으로는 이런 글을 읽을 수조차 없었다. 그녀는 잠깐은 상황도 잊고 글에 빠져들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당황하며 책을 뒤적거릴 수밖에 없었다.
바로 뒷장이 누군가 통째로 구겨 내어 뜯어진 것처럼 마구잡이로 찢어져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공교롭게도, 그와 동시에 그녀의 머리 위로 새로운 그림자가 내려앉았다.
“무엇을 보고 있지?”
“전하.”
이벨린은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서려다가, 무릎에 올려 두었던 책을 우수수 바닥에 떨어트리고 말았다. 값을 헤아릴 수조차 없이 비싼 책들이 바닥에 처박히는 모습에, 이벨린의 얼굴에서 순식간에 핏기가 가셨다.
“이런….”
그러나 정작 비센테는 그녀가 놀란 것에 제가 더 놀란 눈치였다. 그녀의 얼굴에서 시선을 떼지 못한 채 조금 더 커진 눈매가 그 증거였다. 그가 머쓱한 듯 목덜미를 손으로 쓸며 말했다.
“이렇게까지 놀랄 줄은 몰랐어.”
“오신 줄 몰랐, 몰랐어요.”
“문을 두드리긴 했는데.”
“너무 집중했었나 봐요. 정말 조금도 눈치채지 못했어요.”
“발은?”
높낮이가 없어 무심하게까지 들리는 물음에 그제야 이벨린은 제 발을 내려다보았다. 정신이 없어서 눈치채지 못했지만, 책이 떨어지면서 발등을 찍은 모양이었다. 두꺼운 가죽신을 신고 있었던 덕에 통증이 경미해, 그가 말하지 않았다면 아예 모르고 지나쳤을 것이다.
“괜찮아요.”
그녀는 신발 속에서 발끝을 꼼지락거려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비센테는 그녀의 안일함이 못마땅한 것처럼 보였지만, 별다른 말 없이 허리를 굽혔다. 이벨린이 흠칫 물러서자 그녀의 발치에 떨어진 책들을 하나씩 주워 올렸다.
“그, 그건 제가….”
기겁하며 만류할 새도 없었다. 그가 주워든 책들의 표지를 한 번씩 보고는 비뚜름한 미소를 지은 채 읽었다.
“<제국의 비밀>과 <역사에 기록될 수 없는 사적 견해>라….”
…하필이면 두 권의 역사서는 손이 닿는 위치에 얌전히 놔두었던 탓에, 그가 주워 든 책들은 제목이 하나같이 저 모양이었다.
서고 안이 어두워서 다행이었다. 이벨린은 달아오른 뺨을 손부채질로 식히며 더듬더듬 변명했다.
“궁금해서 찾아본 것이 아니라, 우연히 손이 닿는 곳에 있어서….”
“그런 것 치고는 열심히 탐독하시던데.”
“불손, 불손한 사상을 담은 책이라는 것을 알았다면, 결단코….”
“변명할 필요는 없어. 무슨 내용이 적혀 있는지는 나도 알고 있으니까.”
“…하면.”
“금서가 있는 서고 출입을 허락한 게 나인데, 이제 와서 양을 신고할 거라고 생각한 건 아니겠지.”
근사한 얼굴에 어울리는 우아한 미소를 지었지만, 이벨린은 비센테의 기분이 조금쯤 상했다는 것을 눈치챘다. 간혹, 그녀에게 빈정거리고 싶을 때면 일부러 ‘양’이라는 호칭을 쓴다는 것쯤은 파악할 정도로는 가까워진 까닭이었다.
이벨린이 부디 그녀를 이름으로 불러 달라고 한 뒤부터 생긴 의도적인 악의였다.
“뭘 찾고 있었어?”
이벨린은 입술을 깨물었다. 사실대로 말해야 할까?
‘시종의 말대로 폰페라다 궁의 역사를 뒤져서 밖으로 빠져나갈 통로에 대해서 알아보려고 했다고?’
차마 곧이곧대로 말할 수 없는 것은, 그게 어떤 배신의 전조처럼 여겨질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하지만 거짓을 어설프게 말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해명의 기회라도 있는 편이 낫겠지. 그녀는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사실은….”
이벨린은 침착하려고 노력하면서 입술을 뗐다.
“저번의 시종이 말했던 것을 찾고 있었어요. 궁 내에 비밀 출입구가 있는데, 마치 어떤 역사적인 사건에 기반해서 말하는 것 같더라고요.”
“…….”
“정말, 다른 의도가 아니라, 어느 정도의 정보에 접근 가능한 사람인지가 궁금하기도 해서.”
그의 시선이 한 번 더 책에 가닿았다. 정말 이런 것을 읽어서 그런 정보를 찾아내려고 했냐는 것처럼. 괜한 자격지심일 수도 있겠지만 목덜미가 화끈거렸다.
“그래서. 찾던 것은 찾았는지.”
“아뇨. 허무맹랑한 이야기들뿐이었어요.”
“뭘 봤지?”
비센테가 표정 없이 되물었다. 그녀는 어쩐지 그가 원하는 답변 쪽으로, 조금씩 유도당하고 있는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게 좋은 쪽인지 아닌지는 정확히 판단하기 어려웠지만. 이벨린은 복잡하게 꼬이기 시작한 머리를 비우고 솔직하게 이야기하기로 마음먹었다.
“별다른 건 아니고… 고대 란토 왕국의 힘을 계승한 자들에 대한 이야기였어요. 마도 시대에 걸맞은 이능을 지닌 자들이 있었고, 그들의 힘 중 일부는 여전히 핏줄을 따라 계승되고 있다는, 그런 글이었어요.”
“…….”
“심지어 에스페다의 건국제와 개국 공신 중 일부도 그 힘을 발현할 수 있었다고….”
“…….”
“오백 년 전에 기록된 이야기치고도 정말 터무니없죠.”
일부러 가벼운 어조로 말을 맺었는데도, 비센테는 여전히 무감한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글쎄.”
대답이 이어진 것은 한참 뒤였다. 이벨린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전하께서는 다른 의견을 가지고 계신가요?”
“…맹약에 대해서 들은 바 있기는 해.”
그는 잠시 숨을 고르는 것처럼 입을 다물었다가, 엷게 미소 지으며 말을 이었다.
“혹은, 저주에 대해서.”
“저주라니….”
“들어본 적 있지 않나. 영생을 살게 한다는 요정의 피나, 망각의 샘, 혹은 신을 모독한 죄로 반복되는 형벌을 받은 자들.”
“그런 건 동화들이잖아요.”
비센테는 말없이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그래. 전설이란 하나같이 동화처럼 터무니없는 이야기들이지.”
“…….”
“우선 여기서 나가지.”
이벨린은 랜턴과 역사서 두 권을 마저 챙겨 들고 비센테가 붙잡고 있는 문으로 빠져나왔다. 서고 안에 있을 때는 사위가 어두워 시간이 가는 줄도 몰랐는데, 창밖에는 벌써 노을이 지고 있었다. 저녁 어스름이 방 안을 주홍빛으로 물들였다.
이벨린은 허겁지겁 들고나온 책을 포갰다.
“시, 시간이 이렇게까지 지난 줄 몰랐어요. 시종장께서 분명히 저를 찾았을 것인데.”
“하녀 일은 적당히, 눈도장이나 찍을 정도로만 해도 좋다고 했을 텐데.”
“시종장께서 도무지 ‘적당히’를 용납하지 않으셔서요. 서둘러 가 봐야겠어요.”
서가에 무방비하게 기댔던 탓에 하녀복에는 뽀얗게 먼지가 묻어 있었다. 검은 의복이다 보니 먼지가 더 도드라져 보였다. 아무래도 내려가기 전에 옷을 갈아입어야 할 판이었다.
이벨린은 한숨을 쉬고 서둘러 걸음을 옮기려고 했다. 그러나 비센테가 그녀의 앞을 막아선 채 꼼짝도 하지 않았다.
“저어, 달리 시키실 일이라도 있으신가요?”
조심스러운 그녀의 반문에 그는 도리어 기가 막히단 얼굴을 했다.
“그 꼴을 하고 대체 어디를 가겠다고.”
“…….”
“의자에 앉아서 신발부터 벗어. 궁의를 불러올 테니.”
“제 발은 정말 괜찮아요.”
“판단은 네가 아닌 궁의가 해, 베네딕트 양.”
“하지만.”
“사교계에 데뷔하게 되면, 하루가 멀다고 춤을 춰야 할 텐데. 그때 가서 통증이 심해지기라도 하면 곤란해.”
“그거라면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 다쳤다고 미룰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지금은 정말 괜찮아서….”
“벗도록 해, 이벨린. 내가 직접 벗기기 전에.”
이벨린은 입술을 얕게 깨물었다. 이대로 실랑이를 계속해 봐도 승산이 없다는 것을 깨달은 그녀는 비센테가 내민 의자에 순순히 앉았다. 발을 보이는 것이 꺼려지는 것은 숙녀는 함부로 맨살을 보이지 않는 에스페다의 관습 탓이었다.
물론 브리타냐에서 나고 자란 ‘이벨린’의 입장에서는 오래 주저하는 것도 우스웠다. 브리타냐에서는 십수 년 전쯤 실내용 슬리퍼가 유행하면서 같은 관습이 사장된 지 오래였으니까.
이벨린은 입술을 얕게 깨물었다. 그 탓에 새하얗게 질린 안색과 달리 입술에는 엷은 홍조가 맴돌았다.
“그럼 궁의는 부르시지 말아 주세요. 저번에 해독제를 주기적으로 받아 마신 이후로 절 고깝게 보셨는지. 제가 또 찾았다간 정말, 온갖 잔소리를 다 들을 터라.”
“…….”
“차라리 제가 직접, 저, 전하!”
이벨린은 기겁하며 다리를 움츠렸다. 그러나 이벨린의 발치에 무릎을 꿇고 앉은 그가, 그녀의 오른발을 양손으로 부드럽게 붙잡는 게 먼저였다. 뒤이어 무릎까지 올라오는 스타킹이 벗겨졌다. 맨다리가 허공에 드러났을 때는, 이벨린은 양손으로 얼굴을 가리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써야 했다.
“제가, 직접 하, 하게 해 주세요….”
거의 울 것같이 일그러진 눈매나 애원하며 떨리는 목소리, 붉어진 귓불 탓에 애써 참은 의미는 조금도 없게 되었지만.
이벨린은 피부에 닿은 그의 손길에 예민하게 반응했다. 모든 감각이 달라붙듯이 그를 느꼈다.
뒤꿈치를 받친 왼손이나 발의 앞부분을 폭 감싼 오른손. 근육을 부드럽게 이완시키는 동작들, 발등의 아치를 쓸어올리는 엄지손가락.
고개를 숙인 채로 시선만을 위로 올린 비센테가, 이벨린의 발개진 얼굴을 보고 나직한 웃음을 흘렸다.
“양은 브리타냐의 사람이면서, 가끔 에스페다의 문화에 대해 지나치게 이해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어.”
“…….”
“이렇게 되도록 조금도 아프지 않았다고.”
그 말에 이벨린은 용기를 내서 발을 향해 시선을 내렸다. 분명 아까까지는 조금도 아프지 않았는데, 발등이 제법 발갛게 부은 것이 보였다. 우습게도, 그렇게 부은 것을 보자마자 통증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으….”
비센테의 길고 단단한 손가락이 발등을 어루만지자, 그만 참지 못하고 엷은 신음을 흘렸다. 그는 이벨린의 일그러진 미간을 한 번 바라보고는, 다시금 시선을 내렸다. 부끄러워하는 그녀를 배려하는 것처럼.
“아파?”
…이러면, 더는 아프지 않다고 뻗댈 수조차 없게 되었다. 그녀는 망설이다가 순순히 인정했다.
“사실, 아주 조금, 아프긴 한데요.”
“아까는 아프지 않다더니.”
“…….”
이벨린은 입술을 빨듯이 깨물었다. 제 발치에 무릎을 꿇고 앉은 비센테의 모습은 어쩐지 비현실적으로 느껴지는 구석이 있었다. 내리뜬 속눈썹이 그의 뺨에 그늘을 드리웠다.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가끔은, 배덕한 기분이 들게 하는 남자였다. 저렇게나 단정한 얼굴을 하고서도.
그는 기어이 이벨린의 발등에 화한 느낌이 나는 연고를 펴 바르고, 붕대까지 꼼꼼히 감았다. 그제야 발이 부드럽게 바닥에 닿았다.
“너무 세게 묶진 않았어?”
이벨린은 앉은 채로 제자리에서 발을 조심스럽게 한 번 디뎠다.
“이젠 괜찮은 것 같아요.”
괜찮지 않아도, 그래야만 했다. 괜찮지 않다고 말했다간 처음부터 다시 붕대를 묶어 줄 기세였으니까. 한 번도 당혹스러운데, 이런 일을 두 번 겪을 수는 없었다. 비센테는 적당히 넘어가려는 이벨린의 속내가 훤히 들여다보인다는 양, 입매를 끌어 올렸다.
“양은 제법 현명한 줄 알았는데.”
“정말로, 이제는 괜찮아서….”
“괜찮다면 혼자 일어설 수도 있겠지.”
“물론이에요, 전하.”
“일어서 봐.”
이벨린은 그가 내민 손과 그의 얼굴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황자의 명령이라면, 그녀에게는 거절할 권리가 없었다. 이벨린은 조심스럽게 그의 손바닥 위에 제 손끝을 올렸다. 붙잡는 시늉이나 하려던 것인데, 손이 닿기가 무섭게 비센테가 그녀의 손마디 사이에 제 큼직한 손가락을 욱여넣듯 단단히 붙잡았다.
“…….”
갑작스러운 접촉이 당혹스러웠다. 화들짝 놀라서 손을 물리려는 것을, 강한 힘으로 붙잡는 바람에 균형이 무너졌다. 안 그래도 붕대를 감은 오른발을 의식하고 있었던 탓에 몸은 쉽게도 휘청거렸다. 그러자마자 곧장, 그가 허리와 무릎을 받치며 그녀를 안아 들었다. 이벨린은 기겁하며 비센테의 팔뚝을 부여잡았다.
“저, 저, 전하….”
너무 놀란 나머지 항의의 말조차 뒤늦게나 나왔다. 그것도 천치처럼, 고작해야 더듬거리며 그를 부르는 수준에 그쳤다.
“팔을 내 목에 둘러. 그편이 조금 더 편할 테니까.”
안 그래도 듣기 좋던 저음의 목소리가, 귓가에서 울렸다. 당혹인지, 미혹인지. 그녀는 새빨갛게 달아오른 채로 그의 말을 따랐다. 그렇게 해야 비센테에게 제 얼굴을 들키지 않을 테니까.
“네 침실로 데려다줄 테니, 오늘은 더는 발을 쓰지 말도록 해.”
“이젠… 마음대로 걷지도 못하게 하시려고요?”
“필요하다면.”
“고작 발등 좀 찧은 것 가지고 유난이세요.”
타박하듯 뱉은 말에, 비센테가 엷은 웃음을 터트렸다. 숨결이 닿은 목덜미가 간지러웠다.
“말했잖아. 나는 네가 제법 간절하다고.”
“…정말, 오해하기 쉬운 말씀을, 매번.”
“그러게 내 눈앞에서 다친 양의 잘못이지.”
그의 목을 감싼 팔에 힘이 조금 더 들어갔다. 얼굴을 보지 않으니 다른 것들이 느껴졌다. 고작해야 얇은 옷 몇 겹을 사이에 둔 건장한 가슴팍이나, 그녀의 허리와 무릎을 받친 팔, 얼핏 호리호리하게 보이는 육체임에도 빈틈없이 자리한 근육 따위가.
거리가 너무 가까웠다.
“…….”
겉으로는 순진한 소녀처럼 뺨이나 붉히면서도, 이벨린 머릿속 한쪽 구석이 차갑게 가라앉는 것을 느꼈다. 긴장감. 그리고 그보다 심한 위화감.
“자.”
그가 조심스럽게 침대 위에 이벨린을 올려놓았다. 그가 그녀를 품에서 놓아줄 때, 이벨린은 저도 모르게 몸을 가볍게 떨었다. 멀어진 체온만큼 공기가 선득하게 느껴진 탓이었다.
“당분간은 조심하도록 해. 적어도 통증이 사라질 때까지는.”
내내 당혹으로 빠르게 뛰었던 그녀의 심장과는 달리, 비센테의 눈매는 어딘지 모르게 차가웠다. 계산적이기까지 하다고. 그렇게 생각한 순간, 그제야 실체도 없이 떠돌던 위화감의 정체를 어렴풋이 알아차렸다. 이벨린은 입술만 짓씹으며 말을 고르다, 어떻게 물어도 당돌하게 들린다는 것을 깨닫고 포기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제게 왜 이렇게까지 해 주세요?”
비센테는 순간적으로 멈칫했다가, 별 희한한 것을 다 묻는다는 것처럼 근사하게 미소 지었다.
“눈앞에 다친 사람이 있으니까.”
“아무리 생각해도 전하께서 제게 직접 이러실 이유가 없는 것 같아서요.”
루카스나 단테를 부르셨다면 모를까. 희미한 덧붙임에 그가 고개를 조금 기울었다.
“혹시… 제가 전하를 좋아하길 바라시나요?”
되바라진 소리를 한다고, 그의 입에서 험한 말을 듣게 될지도 모른다는 작정으로 힘겹게 꺼낸 말이었다. 차라리 비센테가 비웃어 주기를 바랐다. 그러나 그는 그저 속내를 짐작할 수 없는 얼굴로 그녀를 바라볼 뿐이었다.
“글쎄.”
“그러면, 제가 전하를 사랑하길 바라시나요?”
“…아마도.”
“왜요?”
질문이 거듭될수록 그의 얼굴에서 미소가 점점 희미해졌다. 이제는, 거의 웃음기를 찾아볼 수조차 없었다. 그저 무감한 눈으로 입술만을 움직여 말했다.
“그편이 자연스럽기 때문이겠지.”
“사교계의 사람들을 더 자연스럽게 속일 수 있을 테니까요?”
“그래.”
어쩐지 겨우 그게 전부일 리 없다는 직감이 들었다. 정말 더 자연스럽게 굴 사람이 필요했다면, 차라리 배우를 고용하는 편이 효과적이었을 테니까. 게다가 고작 ‘자연스러움’을 위해 자기를 사랑하라고 말하는 남자의 눈은, 정작 메말라 있었다.
저 눈을 보고 누가 그들이 연인이라고 생각할까.
“솔직히 대답해 주세요. 정말 그게 전부인가요?”
“아니.”
이벨린은 입술을 오므렸다. 제가 물어 놓고도, 그가 정말로 부정할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 비센테는 버릇처럼 입매를 쓸었다. 그녀를 가늠해보는 오만한 눈빛이 생경했다.
“네가 날 사랑한다면, 보다 더 위험을 감수해 줄 테니까.”
“…위험을 감수해야만 할 일이 생기나요?”
“어쩌면.”
“제가 전하를 사랑하면 감수할 만하고요?”
“사랑한다면 감내하지 못할 일이 있기나 하겠어?”
어쩐지 자조적인 어조였다. 누구보다도 사랑을 불신할 것같이 생긴, 저 홀로 있어도 완전할 것만 같은 사내의 입에서 나오는 사랑에 대한 단상치고는 어쩐지 처절했다. 이벨린은 묘한 직감에 사로잡혔다.
“전하께서는 그런 사랑을… 해 보셨어요?”
허공을 배회하던 짙푸른 눈동자가 그녀를 바라보았다. 빛이 드는 방향에 따라 보라색으로도 보이는 눈은, 가끔은 마주 보는 것만으로도 숨을 조이는 듯했다.
“제법 건방진 소리를, 다.”
이벨린은 이번에야말로 그녀가 아슬아슬한 선을 밟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의 표정에서 인간적인 면모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그녀를 내려다보는 눈빛이 메마르다 못해 쩍쩍 갈라지는 듯했다. 그제야 이벨린은 그가 그녀를 얼마나 봐주고 있었는지를 깨달았다.
“너는….”
그의 입술이 다시금 열렸을 때, 이벨린은 긴장한 숨을 조금쯤 토해 냈다. 정작 정말로 화났을 때의 목소리와는 달랐기 때문이다. 그러나 고개를 든 순간, 무언가를 보고 말문이 막힌 것 같은 그를 마주했다. 그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린 이벨린은 제 침대 곁 사이드 테이블에 놓아두었던 손수건을 발견했다.
엘레나의 피가 묻은 ‘그날’의 손수건.
몇 번인가 돌려놓으려고 할 때마다, 어쩐지 번번이 실패하게 되어서…. 물론, 그때마다 하나같이 그럴듯한 이유가 있었지만, 이제 와서 내뱉을 변명은 아니었다. 안 그래도 첩자로 의심받는 도중에, 서랍을 뒤졌다는 증거품이나 다름없었으니까.
“…….”
“…….”
이벨린은 그가 침착하다고 생각했다. 혹은, 고요하다고. 하지만 그와 다시금 눈이 마주친 순간, 모든 것이 착각이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네가 이걸 왜 가지고 있지?”
일그러진 눈매와 떨리는 입술, 눈동자 속에 선연한 불티. 위스키와 약, 근사한 미소와 탕아스러운 태도로 감추고 있던 2황자의 이면, 그 숨겨진 속을 들춰 보고야 말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그가, 여태 어떤 감정을 감춰왔는지도.
“대답해.”
대답은 듣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그의 눈빛이, 목소리가, 일그러진 얼굴이, 꽉 쥐어진 채 새하얗게 변한 주먹과 떨리는 입술이…. 그 모든 게 가리키는 징조는 하나뿐이었으니까.
고작해야 죽은 자의 피가 몇 방울 묻었을 뿐인 손수건에 저런 표정을 짓는 사람은 없다.
저 손수건이 그에게 대단한 의미로 남아 있는 것이 아니라면. 그러니까, 소중히 여기던 사람의 유품이 아니라면.
“그건, 정말 실수로….”
“실수.”
그가 차갑게 말을 받았다. 이벨린은 이제 그가 어떤 얼굴로 증오를 견디는지를 알았다.
“서류를 정리하다가, 갑자기 들어오셔서, 그만 놀라서요….”
더듬거리는 목소리는 형편없게 들렸다. 좀처럼 정리되지 않은 머릿속이 들끓었다. 침착하려고 했지만, 도무지 그럴 수가 없었다.
대관절 그에게 ‘엘레나’가 가진 의미가 무엇이기에 제 손으로 오명을 뒤집어썼나.
불쌍한 사람에게 베풀어 주는 동정에 지나지 않으리라 무심코 생각하고 넘어갔던 것들이, 순식간에 다른 의미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깊이조차 모를 그의 바닥이 그제야 보였다.
“믿기, 어려우시겠지만… 어떤 의도도 없이….”
두서없이 이어지던 변명마저 얼마 버티지 못하고 멈추자 이윽고 지독한 정적이 찾아들었다.
이제는 그의 모든 것이 정반대의 의미로 의식되기 시작했다.
가까워진 숨결, 핏줄이 불거진 손등, 제 위로 드리워진 그늘, 저를 안느라 구겨진 셔츠와 흐트러진 머리카락.
그와 시선이 마주친 순간 이벨린은 불에라도 덴 듯 고개를 떨굴 수밖에 없었다.
“…….”
긴 침묵 끝에 그가 움직이는 소리가 들렸다. 이벨린이 다시 고개를 들었을 땐, 그는 이미 문을 열고 나간 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