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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센테는 집무실의 창문에 기대섰다. 계절치고는 부드러운 바람에 커튼이 흩날렸다. 요 며칠 부쩍 볕이 좋았던 덕에 황량한 북부의 땅에도 푸릇한 생기가 돌았다.
잔가지에 난 잎들을 따라 부유하던 시선이 조금 더 가까운 곳을 향했다. 하녀들 몇몇이 빨래 바구니를 들고 안뜰로 향하는 것이 보였다.
그들 사이에 익숙한 모습이 보였다. 햇빛을 받아야 적색으로 보이는 흑갈색 머리카락, 둥근 이마와 부드럽게 이어지는 콧날, 그 아래 도톰한 입술.
반쯤 열린 창문을 조금 더 젖히자, 안뜰의 목소리들이 희미하게 들려왔다. 그는 그 목소리들 사이에서 여자의 목소리를 어렵지 않게 구별해 냈다.
브리타냐어를 내뱉는 여자의 억양에는 독특한 특징이 있었다. R을 흘리듯 발음하고, A는 정확하게 발음했다. 고아에 수도원에서 자랐다고 주장하는 사람치고는 퍽 귀족에 가까운 억양이었다.
여자는 물먹은 빨랫감이 무거운 듯 인상을 찡그렸다. 입술을 윗니로 짓누른 채, 미간을 모았다. 그 모습이 묘하게 감각을 자극했다.
비센테는 한동안 여자를 홀린 듯 바라보았다. 그것이 여자를 보는 것인지, 혹은 여자에게서 다른 사람을 보고 있는지는 스스로도 알 수 없었지만.
바람에 나부끼는 하얀 천들 사이로 이벨린의 옆모습이 보였다 감춰지기를 반복했다. 시야에서 놓친 그 잠깐 사이에도 목이 바짝 탔다. 눈은 여전히 안뜰에 고정한 채로, 비센테는 유리잔에 위스키를 조금 따랐다.
“전하.”
조용히 가까워진 발걸음이 지척에서 멈춰 섰다.
“부르셨습니까.”
비센테는 시선은 창문 너머에 고정한 채, 들고 있던 위스키로 입술을 축였다.
“교육은 어떻게 진행되고 있지?”
“예법과 이론은 더 가르칠 곳 없이 완벽합니다.”
“네가 봐도 그러한가?”
“수업 태도는 좋지 않고요.”
루카스의 가차 없는 평가에 비센테의 시선이 무심하게 닿았다. 요 몇 주간 이벨린이 거의 일방적으로 루카스를 쫓아다녔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그녀의 적극적인 태도에 루카스가 두 손 두 발을 다 들었다는 것도. 그게 불과 며칠 전의 일이었다. 인정받겠답시고 그 난리를 치고서, 정작 수업 태도는 좋지 않다고? 비센테의 의문을 짐작한 듯 루카스가 서둘러 제 말을 고쳤다.
“불성실하다는 게 아닙니다. 그보다는….”
그는 잔뜩 지친 얼굴로 입을 다물고는, 한참 동안 말을 골랐다.
“그 눈에서 인내심이 보입니다. 다 아는 것을, 다시 들어주고 있는 것처럼.”
“…….”
“배웠다는 것을 숨길 생각은 없었던 모양입니다. 어쩌면 숨길 여유가 없었는지도 모르고요. 그 출신을 생각하면 도무지 말이 안 되는 일이기도 합니다만….”
루카스의 의문은 그의 의문이기도 했다. 이 모든 것을 그럴듯하게 설명하려면 여자는 차라리 몰락 귀족이어야 옳았다. 그러나 어디를 어떻게 파도, 여자의 부모와 조부모까지 몇 대를 거슬러 올라가도, ‘이벨린’은 평범한 평민 소녀였다.
비센테는 글라스에 입술을 붙인 채로 느릿하게 웃었다.
“도대체 어디서 저런 인재가 튀어나왔는지 모르겠군.”
그의 시선을 느끼기라도 한 듯 여자가 갑자기 고개를 들었다. 방황하듯 창문을 훑는 눈은 흐린 날의 하늘 같았다. 언젠가의 엘레나와 같은 회푸른 색의. 빛을 받고 있는 것은 여자인데도 비센테는 도리어 제가 눈이 부신 것처럼 눈매를 가늘게 좁혔다.
“우리 계획을 실행하는 데 있어서는? 부족함이 없겠나?”
“전하께서 이미 판단하신 바….”
“내가 아닌 네 판단을 듣고 싶군.”
루카스는 잠깐의 침묵 끝에 곧은 시선을 들었다.
“…모든 부분에 부합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