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7화 (27/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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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날부터 당장 이벨린은 잠부터 줄였다. 오전에는 하녀의 본분대로 잡다한 일을 도맡아 했으니, 루카스의 무리한 요구를 따라가려면 그 수밖에는 없었다.

    그녀는 무언가를 시도하면 철저한 쪽이 보다 취향이었고, 맡기로 한 일은 완벽하게 끝내야만 한다는 기이한 강박이 있었다. 어중간한 것은 하지 않으니만 못할 테니까.

    황가에 대한 복수심은 날로 새로워졌다. 카스트로에게 손끝 하나 댈 수 없다고 생각했을 때는 아예 제쳐 두었던 감정이, 길을 알게 되자마자 폭우를 맞은 강처럼 범람했다.

    그 굴욕적인 전시, 쏟아지던 폭력, 시간마다 강제적으로 입에 처넣어지던 태를 망치는 약물….

    그 순간만큼은, 제 아비보다도 카스트로가 더 증오스러웠다. 아비가 죽고 난 뒤로는 아비에게 갈 증오까지 더해서 더더욱.

    증오와 절망의 굴레에서 그녀의 육신을 구원해 준 것은 비센테였다. 그러나 그녀의 정신은 여전히 그곳에 갇혀 있다는 것을 이곳에 와서야 알았다.

    어쩌면 처음 이 일을 수락했을 때부터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이것이 황태자에게 향하는 가장 빠른 길이라는 것을. 비센테에 대한 위선적인 죄책감만으로는, 결코 여기까지 도달하지 못했을 것이다.

    분노는 언제나 그렇듯 좋은 동기 부여가 되어주니까.

    이벨린은 루카스가 지쳐서 나가떨어질 때까지 모든 것을 반복했다. 숙제로 주어지는 책들을 보란 듯이 낭독하고, 필사하고, 구절구절마다 질문하고, 질문에 답이 돌아오지 않으면 돌아올 때까지 루카스를 쫓아다녔다.

    그 무던하고 냉정한 사람의 얼굴이 그녀만 보면 지긋지긋하다는 듯 찡그려질 때까지.

    거의 매분 매초가 시위의 현장이었다. 내가 잠을 자지 못하니, 너도 잘 수 없다는 처절한 집착이 만들어 낸 결과였다. 곁에서 이 모든 사투를 지켜보던 단테는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으며 뒷걸음질로 도망쳤다.

    그렇게 열흘째. 결국 백기를 든 것은 루카스였다.

    “제발 그만 좀 하십시오.”

    거의 가슴께까지 쌓인 필사본을 들고 그를 졸졸 쫓아다니던 이벨린은, 루카스가 급작스럽게 멈춰서자 그의 등에 그대로 몸을 처박을 뻔했다. 가까스로 휘청거리며 멈춰서자 곧장 날 선 비난이 쏟아졌다.

    “제게 이렇게까지 하실 이유가 없습니다. 전하께서 아가씨가 적합하다고 판단하신다면, 제 평가와는 관계없이 귀하게 쓰이실 겁니다.”

    “…….”

    “그러니 제게 공들이실 게 아니라 전하께 읍소하는 게 더 나을 겁니다. 선생을 바꿔 달라는 요청쯤은 흔쾌히 들어주실 테니까요.”

    잘도 그러겠다. 이벨린은 회의적으로 들으면서도 그 삐딱한 생각을 얼굴에 드러내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루카스는 소탈한 단테와는 아예 종자부터 다른 자였다.

    성품은 강직한 기사에 가까웠고, 호오를 판단하면 쉽게 번복하지 않았다. 비센테가 루카스의 그런 성품에 대해서 몰랐을 리도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벨린에게 붙여 준 이유는 단 하나였다.

    사교계에서는 저것보다 배는 교묘한 악의를 마주해야 하니까. 그러니 루카스의 교육은, 처음부터 교육이 아니라 시험에 더 가까웠다. 제게 악의를 가진 자도 쥐고 휘두를 수 있는지에 대한 시험.

    “루카스. 전하께선 당신을 중요하게 생각하세요.”

    “…현재 그분의 곁을 지키는 부관이니 당연합니다.”

    “어떻게 생각하실지 모르지만 저는 이번 일에 정말 진심이고요.”

    진심이라는 말에 완고한 루카스의 표정이 일견 흐려졌다. 지난 열흘간 ‘진심’이라는 명목 아래 그녀가 자행한 만행들을 떠올리는 모양이었다. 이벨린은 그의 감정이 반감으로 치닫기 전에 재빨리 말을 이었다.

    “대단한 인정을 바라는 것도 아니에요. 저를 마뜩잖게 여기시는 것도 이해하고요. 저라도 믿지 못했을 테니까.”

    루카스는 기막힌 얼굴로 여자를 건너다보았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신기할 따름이었다. 저렇게나 매끄럽게 말하는 혀를 감추고, 에스페다어를 전혀 못 하는 척했던 과거가. 그가 그녀를 어떻게 보든 말든, 이벨린은 진지한 얼굴로 덧붙였다.

    “당장 모든 경계를 허물어 달라는 것도 아니에요. 그냥, 있는 그대로 평가해 주시길 바라는 거예요.”

    “…….”

    “저를 보는 것조차 정말 싫으시다면, 전하께 더는 가르칠 게 없다고 말씀해 주세요.”

    궤변이나 늘어놓고 있지만, 결국 저게 본론이었다. 비센테에게 그녀를 인정하거나 인정하는 것처럼 보이는 말 한마디나 해 주는 것.

    루카스가 그녀를 감내하는 시늉만 해도 이벨린의 승리였다. 그녀를 볼 때마다 굳어지는 표정이나마 누그러트리고, 반감을 드러내지 않게만 해도….

    “알겠습니다.”

    “…네?”

    “빠르면 빠를수록 좋으니 오늘 저녁부터 하도록 하죠.”

    급작스러운 진전에 이벨린은 얼떨떨하게 눈을 깜박였다.

    “무엇을….”

    “일과가 끝나는 9시부터 새벽 2시까지. 하루에 5시간이면 이 주면 빠듯하게 교양서들을 한 번씩 훑을 수 있겠군요.”

    이벨린의 눈매가 웃고 있던 채로 미세하게 일그러졌다.

    “그럴, 그럴 필요 없이, 그냥 전하께 제 얘길 잘해 주시면….”

    “하지도 않은 것을 했다고 말씀드릴 수는 없습니다.”

    “…….”

    “그런 걸 원하셨다면 그만두는 편이 낫겠습니다.”

    “…….”

    “싫으십니까?”

    “아뇨. 좋아요. 좋은데….”

    “그럼, 저녁에 뵙겠습니다.”

    이게, 아닌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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