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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신 책들, 다 읽었어요. 핵심 내용에 대해서 필사도 했고요.”
이벨린은 루카스의 책상 위에 책과 종이 한 무더기를 올려놓았다. 내려놓을 때 난 쿵 소리가 생각보다 컸던 터라 이벨린은 움찔했지만, 움찔하지 않은 것처럼 눈을 동그랗게 뜨고 루카스를 마주했다. 그러나 정작 루카스는 그저 그녀가 내려놓은 무더기들을 흘긋 바라볼 뿐이었다.
“…….”
벌써 몇 번째였다. 그가 넘겨준 책들은 하나같이 장장 600페이지는 족히 넘을 지경으로 두꺼웠고, 내내 놀고먹는다면 모를까 비센테의 명령으로 하녀 일을 막 다시 잡기 시작한 참이었다. 만약 그녀가 엘레나로 살던 과거 없이 평범한 여자였다면, 책을 읽을 수는 있어도 요약 필사까지는 죽었다 깨어나도 이뤄내지 못할 성취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루카스의 얼굴에선 조금의 감흥도 찾아볼 수 없었다.
그게, 묘한 오기를 불러냈다.
“그러십니까.”
몇 박자는 늦게 대답해 놓고도, 고작해야 저게 전부였다. 묘하게 딱딱하고 재수 없는 태도였다. 말만 존댓말이면 뭐 해? 사람을 풀떼기보다도 하찮게 보는데. 그녀의 떨떠름한 시선 속에서 그가 의자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러고는 비센테의 서가로 걸어가서, 능숙하게도 세 권의 책을 더 골라 냈다.
“내일 저녁까지 이것도 읽어 오십시오. 요약 필사도 잊지 마시고요.”
텅 비었던 그녀의 팔 위로 다시금 책들이 묵직하게 내려앉았다. 그녀는 기막히다는 표정을 별반 숨기지도 않은 채, 그를 위아래로 바라보았다.
“이게 몇 번째인지는 아세요?”
“모두 다 필수적인 서적입니다.”
“그 필수적인 서적들을 제가 벌써 몇 번이나 다시 읽고, 필사했는지도 아시겠고요.”
“제가 부러 트집이라도 잡고 있는 줄 아십니까?”
“그럼, 아닌가요?”
이벨린은 앞으로 잠도 제대로 못 자리라는 비센테의 말을 다소 전투적으로 떠올렸다. 다른 때에, 다른 뜻으로 저 말을 하는 남자가 그녀의 인생에 있었다면 설렜을지도 모르겠다. 이런 처지까지 몰린 마당에, 그런 가정은 어쩐지 비참하고 처참했지만. 적어도 이런 식만 아니었다면 좋았을 것이다.
세계사와 에스페다의 역사, 전쟁 군주들, 도시의 발전과 경제사…. 이미 알고 있는 것을 모르는 척 다시 읽고 필사하는 것은 상당한 고역이었다. 그냥도 지겨운 짓을, 지겹지 않은 척하는 것도. 열흘이면 많이 참았지. 이벨린은 입술을 깨물었다.
“제가 마음에 들지 않으신 거죠?”
책에 고정되어 있던 루카스가 그제야 시선을 들었다.
냉정해 보이는 회색 눈동자가 그녀를 직시했다.
“아가씨는 전하의 사람이고, 제 개인적인 선호는 중요하지 않은 문제입니다.”
그가 입매를 조금 더 굳히며 대꾸했다. 이벨린은 하마터면 대놓고 코웃음을 칠 뻔했다. 개인적 선호가 중요하지 않은 문제라고? 그녀가 그저 하녀에 불과했을 때는 상식적으로 행동하던 사람이, 하루아침에 상식이란 상식은 모조리 내다 버린 사람처럼 굴고 있는데? 그녀는 삐딱하게 팔짱을 꼈다.
“이제 와서 굳이 존댓말을 써 주실 필요는 없어요. 제가 정말로 상속녀가 된 것도 아니잖아요.”
“전하께서는 아가씨를 귀히 쓰시리라고 말씀하셨고, 저는 그것을 따를 뿐입니다.”
이벨린은 양어깨를 으쓱하며 주변을 돌아보는 시늉을 했다.
“주변에 아무도 없잖아요. 우리끼리인데 눈치 볼 필요가 있나요?”
“모두를 속이기 위해서는 자기 자신부터 속여야 하는 법입니다.”
“그런 것 치고는 태도가 불손하시고요.”
“…더 공손하기를 바라시는 겁니까?”
“그런 건 아니에요.”
“그러면 대체 원하시는 게 뭡니까?”
무의미한 말씨름을 끊어 내듯 그가 짜증스럽게 책을 덮었다. 며칠 동안 그녀를 반쯤 본체만체하던 것에 비하면 장족의 발전이었지만, 문제는 이벨린 역시 인내심의 한계에 몰린 상태였다는 것이다. 그녀는 들고 있던 책을 쌓아 두었던 책더미 위에 내팽개치듯 턱 얹었다.
“차라리 시험을 내요. 이런 시간 낭비 말고요.”
“시간 낭비는 아가씨께서 하고 계시는군요.”
“진짜, 무슨 말도 안 되는….”
“굳이 왜 제 인정을 바라십니까?”
이벨린은 어처구니없는 심정을 숨기지 않고 대답했다.
“한배를 탔으니까요?”
“그게 제가 아가씨를 인정해야 할 이유가 될 순 없습니다.”
“지금 인정하고 말고, 가깝게 지내고 말고의 문제가 아니잖아요. 서로 할 일만 하자고 말씀드리는 거예요. 전하의 앞에선 저를 가르치겠다고 말씀하셔 놓곤, 지금 수업은커녕 필사만 며칠째.”
“…….”
“내가 부족하면 어디가 부족하다고, 넘치면 넘치니까 더 공부할 필요가 없다고 전하께 아뢰세요. 그러면 더는 얼굴 붉힐 일도 없고 좋잖아요.”
이벨린은 숨을 약하게 몰아쉬며 쏘아붙였다.
“차라리 내가 마음에 안 든다고 말해요.”
루카스의 냉정한 눈은 매번 마주할 때마다 그녀의 한계가 여기까지라고 말하는 듯했다. 그래서였다. 여태껏 우는 소리조차 한번 내지 않았던 것은. 어떤 식으로든 그가 인정해 주기를 바랐으니까.
“예. 마음에 안 듭니다.”
이어지는 그녀의 생각을 툭 자르듯 루카스가 담백하게도 인정했다. 이벨린은 입술을 깨물었다가 전투적으로 되물었다.
“제가 어떻게 할까요? 뭘 해야 저를 가르칠 마음이 드시겠어요?”
“누군가를 속일 생각으로 접근한 사람을 어떻게 믿겠습니까?”
“전하의 판단은 믿으신다면서요?”
“전하께서는 판단하시고, 저는 그분의 기사 된 도리로서 따를 뿐입니다. 하지만 경계심을 갖는 것쯤은 할 수 있죠.”
“…저를 경계하신다고요?”
“처음부터 전하를 속일 생각으로 접근했고, 상황이 여의찮게 되자 배신했고, 동료의 정보를 쉽게도 넘겼고, 이제는 심지어 적극적으로 계획에 가담까지 하는 사람입니다, 당신은.”
이벨린은 적나라하게 이어지는 행적들에 씨근덕거리던 입을 다물었다. 남의 시선으로 바라보자니 확실히 수상쩍은 인물처럼 느껴지기는 했다. 루카스는 뻣뻣하게 얼어붙은 이벨린을 흘긋 바라보고는 말을 이었다.
“전하께서는 아가씨에게 이상할 정도로 집착하고 계시고, 그 이유도 짐작이 가지만.”
“…….”
“저는 아가씨를 전하의 사람으로 두고 싶지 않습니다. 제가 지금 바라는 것은 단 하나뿐입니다. 아가씨가 지쳐서, 전하께 그만두겠다는 말씀을 올리는 것 말입니다. 그러니 부디 스스로의 주제를 아시고.”
양순하게 눈을 내리깐 채 듣고 있던 그녀의 눈에 순간 독기가 스몄다. 주제를 알라고? 카스타야 영애로 살던 시절 평생을 들어 왔고, 단 한 번도 엇나가지 않았던 그 주제를 그녀가 모르리라고. 이벨린이 차갑게 코웃음을 치든 말든 루카스는 꿋꿋하게 말을 이었다.
“더 이상 제게서 인정을 바라지 마시고, 물러나시길 바랍니다. 제 손으로 불의의 사고까지 가장하고 싶지는 않으니까요.”
불의의 사고를 가장해서 너를 죽일지도 모른다고. 그렇게 말하는 루카스의 얼굴은 그런 더러운 수를 뱉었다고는 믿기 어려울 정도로 담담하기만 했다. 이벨린은 사내의 적의에 치맛자락을 구기듯 움켜쥐었다.
“주제를 모르는 것은 경이세요.”
“무슨….”
“고작해야 대위의 부관이시면서 감히 상관의 의중을 마음대로 재단한 점, 명령이 아닌 자의대로 행동한 점, 그러면서도 전하의 명령에 따르는 척 기만한 점.”
“…….”
“제 말에 사실과 다른 부분이 있나요?”
“…….”
“이대로라면 저보다 당신의 행동이 전하의 계획에 더 큰 위협이 될 것 같은데요.”
흘리듯 덧붙이는 이벨린의 말에 루카스가 눈매를 가늘게 좁혔다. 그 사이로 보이는 눈빛에 반감이 지독했다.
“제게서 대체 무슨 대답이 듣고 싶으신 겁니까?”
“저를 제대로 가르쳐 주길 원할 뿐이에요. 적어도 시도는 해 볼 수 있잖아요.”
“그거야말로 시간 낭비겠네요.”
“시간 낭비라니….”
“이미 다, 아는 내용이셨던 것 아닙니까.”
그가 신경질적인 시선을 제 책상 위로 던졌다. 정확히는 그녀가 여태 요약 필사해 온 종이 뭉치들 위로. 일부러 시간 내에 해낼 수 없는 양을 쏟아붓고 있는데도, 여자는 단 한 번의 우는 소리조차 내지 않았다. 그뿐인가. 처음 책을 접한 사람이라고는 믿기지 않는 속도로 요약과 필사를 해냈다.
누군가 도와주는 사람이 없다면 여자가 희대의 천재라는 것으로밖에는 설명이 불가능했다. 그게 아니라면 그전부터 책의 내용을 익혀 두었거나. 어느 쪽이든 찜찜했다. 전자라면 언젠가는 그 명석한 머리가 반드시 위협이 될 테고, 후자라면… 대체 평민이 변변한 교육도 없이 어떻게 익혔단 말인가?
그의 의심이 이번에는 정확한 지점을 겨냥한 듯했다. 잘만 지껄이던 여자의 입술이 딱 달라붙은 것을 보니. 루카스의 마음이 조금 더 완고한 쪽으로 굳어지려던 찰나였다. 여자가 갑자기 숙이고 있던 고개를 번뜩 들었다.
“좋아요. 알겠어요.”
루카스는 떨떠름하게 생각했다. 알겠다니? 갑자기 뭘….
“이 일에 간절하다는 것을 증명해 보이라는 경의 의견에 동의해요.”
그는 말문이 막힌 채 여자를 바라보았다. 맥락도 없이 튀어나온 말이라 순간적으로 무슨 말인지 이해하기도 힘들었다. 게다가 간절함을 증명하겠다니? ‘알아서 물러나라’는 말을 듣고도 여전히 붙어있겠다고?
그러나 여자는 무언가 단단히 결심이라도 한 것처럼 빠르게 다가와서는, 제가 내려놓았던 책들을 다시금 모조리 집어 들었다.
“모레까지 전부 다시 읽어 올게요. 요약 필사는 물론이고요.”
분명 웃고 있는데도 여자는 화가 난 것처럼 보였다. 그가 아는 사람 중 저런 식으로 화를 냈던 사람은 단 한 명뿐이었다. 잠시간 당혹스럽게 그녀를 바라보던 루카스는, 저도 모르는 새에 누군가를 떠올렸다는 사실을 깨닫고 입매를 굳혔다.
“더 읽어야 할 게 있나요?”
묘한 박력에 밀려 입을 다물자, 여자가 한 번 더 살벌하게도 웃었다.
“얼마든지 하죠. 이런 것쯤은 정말 아무것도 아니니까.”
가늘어진 눈매 사이로 보이는 눈빛이 흡사 미친 사람처럼 번뜩였다.
“나는 경에게서 그 ‘인정’이라는 것을 기어이 받아야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