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5화 (25/151)

***

다음날. 응접실의 문을 열자마자 마주친 사람은 비센테가 아니라 루카스였다. 이벨린이 당황한 것과는 다르게, 그는 그녀가 오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것처럼 보였다. 이벨린은 주저하다가 문을 닫고 안으로 들어섰다. 눈인사를 건네봤지만 돌아오는 것은 도리어 탐색하는 듯한 시선이었다.

“…….”

덩달아 경계하듯 쳐다보긴 했지만, 그가 갑작스럽게 그녀를 경계하는 까닭에 대해서는 알 수 없었다. 기실 그에 대해서는 아는 것이 많지 않았다. 오가며 눈인사나 건넸던 것이 전부였고, 그마저도 대화는 거의 없다시피 했었으니까. 그녀만 보면 쭐레쭐레 와서 시답잖은 신변잡기나 늘어놓는 단테와는 결부터 다른 사람이었다. 좋은 쪽인지, 나쁜 쪽인지를 따지자면… 그녀는 속을 알기 어려운 사람을 그다지 선호하지는 않았다.

“…….”

이벨린은 시선에서 밀리지 않으려 눈에 힘을 조금 더 주었다. 그런데, 그가 대체 왜 여기에 있을까?

“둘 다 제시간에 도착했군.”

미묘하던 대치는 비센테가 문을 열고 걸어오는 것으로 깨졌다.

“전하.”

뻣뻣했던 사내가 순식간에 돌변해 예의를 차리는 모습을 이벨린은 다소 기가 막힌 심정으로 바라보았다. 철로 만들어져 굽힐 수조차 없었던 목과 허리가 비센테에게는 간단하게도 굽혀졌다. 이벨린은 비뚜름한 심정 그대로 입매를 뒤틀었다. 그러니까 저와는 인사조차 하기 싫다는 거야, 뭐야….

“앞으로는 루카스가 네 기초 교육을 담당할 거야.”

이벨린은 비센테가 말을 걸자 재빨리 표정을 가다듬었지만, 소용은 없었던 모양이었다. 흥미로워하는 것 같은 시선을 보면 진작부터 지켜보고 있었던 것 같았다.

“신분이 평민이기는 해도 친부가 귀족이지. 레알 코르도바를 수석으로 졸업한 인재이기도 하고.”

“제가 뭘 배우게 되나요?”

“글쎄. 네 교육 수준에 따라 다르겠지만…. 에스페다 사교계에 섞여 들기 위해서는 반드시 읽어야 할 열두 권의 책과 세 권의 역사서, 한 권의 신학서가 있지. 계획대로라면 3주 안에 모두 읽고, 외우고, 적당히 발췌해 낭송할 줄 아는 수준으로 올라와야 해.”

“…….”

“기간 내에 잘 해낸다면 좀 더 심도 있는 역사서 서너 권쯤은 더 뗄 수 있겠고.”

카스트로는 시대에 뒤떨어지게도 여자의 교육이란 모자랄수록 좋다고 생각하는 남자였고, 덕분에 장차 황후가 될 고귀한 신분임에도 엘레나는 레알 코르도바의 문턱조차 밟아본 적 없었다.

카스트로가 보다 더 어리고 다루기 쉬웠을 때는 그의 수업에 데려가 달라 간청해 종종 같이 듣기도 했지만, 머리가 굵어지고 난 뒤로는 어림도 없었던 일이었다.

어쨌든 비센테가 말한 책들 대부분은 그녀가 이미 스스로 수년 전에 뗀 것들이었다. 그럼에도 레알 코르도바를 졸업한 사람의 시각으로 배울 수 있게 된 것은 조금 기뻤다.

상대가 저 남자가 아니라면 좀 더 좋았겠지만.

“물론 춤과 예법, 낭송은 내가 직접 가르쳐야겠지. 그대에게 부족한 부분이 있기나 하다면.”

현실감 없이 붕 떴던 기분은 비센테가 덧붙인 묘한 말에 순식간에 가라앉았다. 그의 말뜻을 미처 파악할 새도 없이 질문이 돌아왔다.

“피아노는 다룰 줄 아나?”

“조금쯤….”

불시의 질문에 이벨린은 얼떨결에도 진실을 토해 냈다.

“얼마나 조금이지?”

“라 뮐러의 피아노 연습곡까지는 칠 수 있어요.”

“클라바티아는?”

“그건.”

이벨린은 묘한 기시감에 말끝을 사렸다. 클라바티아는 엘 파사의 음악회 때마다 카스트로의 요청으로 몇 번 연주한 적 있는 곡이었다. 초연 때는 긴장으로 하루에도 십수 번씩 쳐 댔다 보니, 자면서도 칠 수 있는 수준에 이르렀었다.

“쳐 본 적은 없지만, 연습을 오래 하면 아마도… 칠 수 있을 것 같아요.”

“승마는?”

“해 본 적 없어요.”

“시 낭송은.”

“그것 역시, 해 본 적 없어요.”

대화의 내용은 좀처럼 종잡을 수조차 없이 휙휙 변했다. 진작 각오했음에도 그녀는 겨우 엘레나와의 접점을 피하는 것에나 급급했다.

“이리 가까이 와 봐.”

방 안은 달리 불을 켜지 않아 아침부터 어둑했고, 비센테가 서 있는 쪽은 열린 창문으로 마침 해가 쏟아지던 참이었다. 그의 부름에 햇빛 쪽으로 걸음을 내딛자마자 눈이 부셨다. 이벨린은 반사적으로 눈매를 가늘게 좁혔다.

“조금 더. 가까이.”

그의 재촉대로 몇 걸음 더 걸어가려던 이벨린은 멈칫했다. 여기서 더 가까이 오라고? 그러면 너무 가깝지 않나…. 이벨린이 머뭇거리기 무섭게, 성에 안 찬다는 듯 남은 거리를 그가 성큼 좁혔다.

“…….”

순식간에 둘 사이의 거리는 그녀의 이미가 비센테의 턱 끄트머리에 닿을 지경으로 가까워졌다. 쏟아지는 빛을 정면에서 받은 그의 눈동자는 오묘한 색으로 시선을 사로잡았다. 빛을 받는 부분은 맑은 바닷물처럼 새파랬고, 어둡게 침전한 부분은 보랏빛이었다. 이벨린은 그가 내민 손을 반사적으로 잡았다. 자세를 취하고 보니 왈츠였다.

“그전부터 느꼈지만, 자세가 아주 곧아.”

“아….”

“배운 적은 당연히 없을 테고.”

그렇지? 하듯 덧붙이는 미소가 소년처럼 청량했다. 이런 각도에서, 이런 식으로 마주하게 되어서 그러한지. 이벨린은 반쯤 넋을 놓고 있다가, 그에게 잡힌 채로 우아하게 회전했다. 다시금 그의 품으로 돌아와 안착하듯 안겼다.

“발레라면 조금… 자세를 교정하는 데 탁월하다고 해서, 기초 교양으로 잠깐 배웠어요.”

이벨린은 그의 꿰뚫는 듯한 시선을 피하며 말을 꺼냈다. 고작 그 짧은 동작을 했다고 벌써부터 숨이 찼다.

“수도원에서?”

“전하의 눈에는 아무래도 부족하게 보이겠지만… 그래 봬도 인근에서는 가장 큰 수도원이었으니까요. 윈스포드 시장님께 직접 후원도 받았고… 1년에 두 번씩, 봄과 가을마다 학업 성취를 발표해야 했었거든요.”

그녀의 것이 아닌 것을, 그녀의 기억인 것처럼 말하는 것만큼은 날로 익숙해져 갔다. 어쨌든 ‘이벨린’이 발레를 배웠다는 것만큼은 거짓이 아닌 사실이었다. 그가 조사한다고 해도 거짓으로 밝혀질 일이 없다는 것만으로도 든든한 보호막을 얻은 기분이었다.

“어쩐지. 교육을 잘 받은 태가 나.”

“그래서 저희 수도원의 보육원에서 지냈던 아이들은 가정 교사로 인기가 좋았어요.”

“알 만하군.”

그가 이벨린을 부드럽게 놓아주었다. 고작해야 자세만 몇 번 잡고도 파악할 건 모두 알아냈다는 것처럼. 그러면서도 마치 한바탕 왈츠를 춘 것처럼 인사를 건네는 것은 조금 뻔뻔했다. 다소 서툴게 인사를 받은 이벨린은 그에게서 조심스럽게 물러섰다.

“왈츠는 몇 번만 추면 금방 능숙해지겠군.”

그가 태연하게 평했다. 여태껏 그녀가 떠들었던 말은 절반도 채 믿지도 않는다는 얼굴로. 없는 교양을 있는 척하는 것보다, 이미 몸에 밴 교양과 태도를 없는 척하는 것은… 어쩌면 처음부터 불가능한 일이었을지도 모른다. 의식하고 천박함을 가장하면 어색하고, 의식하지 않으면 자연스럽게 몸에 밴 것이 튀어나오기 마련이니까.

“오늘 남은 일정이 어떻게 되지?”

“차 시중을 들라고 하셨으니…. 달리 시키실 일이 없다면 그것만 끝내면 돼요.”

“루카스.”

비센테의 부름에 정물처럼 서 있던 사내가 그제야 그녀를 향해 가까이 다가섰다. 이벨린은 그가 몇 권의 책을 들고 있다는 사실을 그제야 깨달았다. 얼결에 넘겨주는 대로 묵직한 책을 안아 들었다. 필독서 다섯 권과 역사서 한 권, 신학서 한 권…. 당혹스럽게 쳐다보자, 그 당혹이 마음에 든다는 것처럼 입술이 미미하게 움직였다.

“수업은 우선 이것들을 모두 다 읽은 후에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이걸 모두 다요?”

“모레 저녁이 될 테니, 차질 없이 준비해 오십시오.”

이벨린은 가까스로 한숨을 삼켰다. 어쩐지 단단히 잘못 걸린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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