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2화 (22/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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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끔 사람들은 제 눈으로 실체를 확인하여야만 불안을 가라앉히곤 한다.

    이를테면 죽은 황제의 장자가 얼마나 근사하게 자랐는지, 소문처럼 정신을 놓고 약과 술에 취해 살지는 않는지, 황제의 눈을 속일 배짱이 있는지, 자금과 능력은 확실한지 또는,

    얼마나 절실한지.

    유폐된 채로 반역을 준비한다는 것은, 저 모든 기대를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만족시켜야 한다는 소리와도 같았다. 조금의 틈이라도 보인다면 피 냄새를 맡은 상어 떼들은 황제가 아닌 그의 살코기를 물어뜯을 테니까.

    오늘은 하필이면 고귀한 사촌의 기분이 좋지 않은 날인 모양이었다.

    가끔 카스트로는 불시에 폰페라다 궁의 경비를 서너 배쯤 늘리곤 했다. 아무것도 모르는 주제에, 사냥당하는 피식자의 본능으로 위험만큼은 기민하게 감지하는 것인지.

    “흣….”

    환부의 감각이 점점 무뎌지고 있었다. 좋지 못한 신호였다. 칼날에 마비 독이 발려 있었다는 뜻이었으니까. 그게 아니라고 해도 그는 명료한 아픔을 느끼는 쪽을 차라리 선호했다. 특별히 기이한 취향을 가지고 있어서가 아니라, 그편이 제정신을 유지하기에 편리하기 때문이다.

    몸이든 정신이든 약해질 때면 시도 때도 없이 ‘그녀’가 보였으니까. 가끔은 눈을 떠도 꿈속 같았다. 지금처럼. 비센테는 가까스로 찬웃음을 뱉었다. 그 말간 얼굴이 유독 생생한 것을 보아하니, 오늘은 이쪽이 현실인 모양이었다.

    아, 엘레나. 그렇게 원망하듯 바라보기만 할 거라면, 애초에 내게 애원하지 말았어야지. 네가 잡은 손이 널 나락으로 떨어트릴 거라는 걸 진작에 알아봤어야지. 내가 네게 구원 같은 게 아니라는 걸, 지독한 족쇄나 다름없다는 것을….

    가까스로 입꼬리에 걸려 있던 웃음이 신음으로 일그러졌다. 그날 이후로 그는 단 하루도 약 없이 잠든 적이 없었다.

    카스트로가 수도 없이 들이미는 독을 가끔은 제 의지로 삼켰다. 그 행위에는 자기 파괴적인 목적 외에도 하나가 더 있었다. 그의 경계심을 누그러트리니까. 여기서 숨죽인 채 인생을 낭비하고 있다고 믿으면 믿을수록, 친애하는 사촌이 내린 것이라면, 무엇이든 가리지 않고 받아넘기면 넘길수록. 카스트로는 감히 그가 쥔 칼날을 예상조차 하지 못할 테니까.

    그게 마침내 제 목덜미에 박히는 그 순간까지.

    비센테는 피가 뚝뚝 흘러내리는 환부를 손으로 눌러 압박하며, 빠르게 비밀 통로를 지나 침실 문을 열어젖혔다.

    경비대 중 몇몇이 그의 정체를 의심하는 것 같았으니 들이닥칠 때를 대비해 둬야 했다. 상처를 수습하고 자신이 현장이 아닌, 이 궁 안에 있었다는 증거가 필요했다. 사람이든, 물건이든. 그는 지끈거리는 이마를 짚었다. 독이 전신으로 퍼지는 듯 두뇌가 나른했다. 사이드 테이블의 서랍을 헤집자, 각성제가 담긴 작은 약통이 굴러 나왔다.

    “읏….”

    끊어지는 신음을 삼키며 약을 입 속에 밀어 넣었을 때였다. 근처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기사들이나 경비대라고 하기엔 지나치게 가벼웠다. 머릿속에 곧장 떠오르는 인물이 있었다. 근래 그의 심상을 복잡하게 만들었던 하녀. 가까스로 몸을 숨기기 무섭게, 문이 박력 있게 열어젖혀졌다.

    […….]

    방 안을 조사하는 눈빛이 당돌했다. 그마저도, 그의 눈에는 우습다 못해 괘씸했지만.

    까득.

    비센테는 느릿하게 약을 씹어 삼키며 어둠 속에서 하녀를 살폈다. 여자는 무언가에 반쯤 정신이 팔린 것 같기는 했다. 구겨진 하녀복, 손에서 거의 흘러내리다시피 한 바구니와 안에 담긴 찢긴 침대보, 무엇인지 모를 서류….

    여자가 문을 나서기 위해 몸을 돌렸을 때, 그대로 내보내는 대신 문을 닫아 버린 것은 반쯤은 충동이었다. 침대로 이끌고 간 것은 명확한 계산이 있어서였지만…. 기실 그때까지만 해도 적당히 이용한 뒤에 보낼 생각이었다.

    어차피 여자의 거취는 그의 손에 있었고, 정체는 곧 밝혀질 터였다.

    그러나 제 아래에서 숨을 옅게 몰아쉬는 여자를 봤을 때, 제 속에서 무언가가 덜컥 비틀렸다.

    그의 침대에 누워 있는 여자. 머릿속으로 상상했을 때는 끔찍했는데, 직접 마주한 감상은 생각만큼 충격적이지는 않았다. 가만히 그를 올려다보던 이벨린은 조심스럽게 그의 가슴팍을 떠밀었다. 그 가냘픈 힘에 순순히 떠밀려 준 것은 여자의 얼굴이 지나치게 창백했기 때문이었다.

    “…….”

    서둘러 침대에서 내려온 이벨린은 바구니와 시트를 소중한 것이라도 되는 양 허둥지둥 집어 들고는 허리를 꾸벅 숙였다.

    [그럼 저는 이만….]

    “기다려.”

    잽싸게 방을 나서려던 여자의 움직임이 움찔 멈췄다. 단둘뿐인 방에서 황자께서 목소릴 냈으니, 모르는 척 물러설 수만은 없다는 판단이 선 모양이었다. 저 작은 머리로 어찌나 열심히도 계산을 굴려 대는지. 비센테는 실소했다. 그가 고작 잠깐 웃은 것만으로도 불안해하는 시선이 닿았다. 그는 침대의 끄트머리에 앉은 채로 태연하게 입을 열었다.

    “미안하지만 몸이 이래서.”

    […….]

    “치료를 좀 도와주면 고맙겠어.”

    이벨린은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여전히 피가 뚝뚝 떨어지는 그의 상처를 바라보고는 방을 나섰다. 모르는 척 의뭉을 떨기엔 상처의 깊이가 퍽 깊어 보였던 모양이었다.

    뒤이어 찬장을 뒤적거리는 작은 소음이 들렸다. 곧 여자가 쟁반에 깨끗한 붕대와 천, 물그릇을 받쳐 든 채 돌아왔다. 그녀는 이렇듯 한 번씩 무르고, 순진하게 굴 때가 있었다.

    [팔을 조금만 들어 주세요.]

    침대의 아래에 무릎을 꿇고 앉은 이벨린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비센테가 오른팔을 뒤로 뻗어 몸을 젖히자, 이벨린이 젖은 천으로 환부를 조심스럽게 닦아 냈다.

    “읏….”

    그의 신음에 여자가 잠깐 시선을 들었다. 다시금 내리뜬 여자의 눈은 미세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정말 걱정이라도 하는 것인지, 아니면 저것도 다 연기인지. 비센테는 헛웃음을 물었다. 그 바람에 복근이 움찔거리자, 이벨린이 달래듯 말했다.

    […아프시죠? 조금만 참으세요.]

    하얗고 둥근 이마와 발개진 귓가, 자그마한 콧방울, 집중할 때마다 깨무는 입술…. 어둑한 곳에서 볼 때마다 엘레나를 떠올리게 한다 싶었더니, 사소한 행동이나 습관들이 유독 닮았기 때문인 듯했다. 어둠 속에서는 이목구비가 잘 보이지 않으니까.

    “부디, 행복하길.”

    아, 또 그 환영이었다. 그는 피로한 눈매를 엄지와 검지로 꾹 눌렀다. 그사이 피딱지가 눌어붙은 부분까지 말끔하게 닦아 낸 이벨린은 납작한 연고 통에서 연고를 퍼 올렸다. 상처에 바르기 직전에 머뭇거리며 변명하듯 덧붙였다.

    [냄새를 맡아 보니까, 상처에 쓰는 연고인 것 같아서 가져왔어요.]

    그가 가지고 있는 상비약들은 모두 에스페다 황실의 제조법을 따르는 것들뿐이었다. 어지간한 귀족들조차 구별이 힘들 텐데, 평민, 그것도 브리타냐의 사람이 냄새만으로 알아냈다고? 비센테는 이벨린의 둥근 정수리를 내려다보았다. 위화감이 지독했다.

    “…대체 넌 누구지?”

    이제는 그의 말을 귓등으로 듣는 게 분명했다. 집중에 방해가 된다는 듯, 왼손을 무심코 휘휘 젓는 손동작에 기시감마저 들었다. 기실 생각해 보면 여자의 태도는 늘 평민이라기엔 지나쳤다. 지나치게 우아했고, 말씨에선 지나치게 잘 교육받은 태가 났다.

    브리타냐 수도원의 모든 교육이 저러하다면, 귀족 부인들은 제 딸들을 교육하기 위해 사교계의 명사들을 초청할 게 아니라 브리타냐의 수도원으로나 보내면 될 터였다.

    [잠시만….]

    약통의 연고를 모조리 다 바른 이벨린은 이제 붕대를 감기 시작했다. 한번 일을 시작하면, 몰두하는 성미인 듯했다. 비센테는 서서히 냉정을 되찾았다.

    [다 되었어요.]

    뿌듯하게 고개를 들던 이벨린은, 비센테의 표정에 다시금 불안한 얼굴을 했다.

    “…….”

    [이제 좀 괜찮으세요?]

    이벨린이 재차 묻자 비센테는 느릿하게 눈을 깜박였다. 그제야 알아차렸다는 듯, 제 환부를 감싼 붕대를 내려다보는 눈에는 일말의 온기도 없었다.

    [그럼 이제, 저는 그만….]

    “잠깐만.”

    그는 반사적으로 여자의 손을 붙잡았다. 저번에도 확인했지만, 훈련받은 암살자로는 절대 보이지 않는 손이었다. 굳은살이라곤 생활 노동의 흔적 외에는 없는, 잠시라도 몰락한 귀족일지도 모른다고 의심했던 게 무안해질 정도로 평범한.

    “…….”

    멀리서 울리는 종소리에 이벨린이 창문 쪽으로 시선을 던졌다. 다음 순간 느슨해진 그의 손을 뿌리치고, 발치의 바구니를 주워 들었다.

    [시간이 늦었어요. 저는 이만 가 봐야 해요.]

    “가기 전에 내게 해명해야 할 게 있을 텐데.”

    이벨린은 머뭇거리다가 조심스럽게 카드를 꺼내 들었다. 비센테는 그녀가 내민 카드는 보지도 않고 삐뚜름히 웃었다.

    “이제 와서 무슨. 제발 그 빌어먹을 카드는 치워.”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어요….]

    “그런 개소리를 정말 믿으라고.”

    이벨린은 항변하듯 바구니 속의 침대 시트를 가리켜 보였다.

    [화가 나신 것 같아요. 밤에 돌아다니지 말라고 한 것은 아는데, 시트에 더러운 것이 묻어서요.]

    여자가 가리킨 흰 천에는 불그스름한 핏자국이 선명했다. 이벨린은 거짓말에 능숙한 듯 보였지만, 그는 여자의 말이 거짓이라는 걸 전부 알 수 있었다.

    그래. 꼭 저런 눈으로 거짓을 말하던 사람을 알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알면서도 속아 넘어가 주던 그 시절들.

    “…….”

    비센테는 눈매를 가늘게 좁힌 채 이벨린을 아래에서 위로 훑었다. 피를 냈다면 직접 몸에 칼날을 가져다 댔을 텐데. 날붙이를 다뤄 본 적 없는 자라면 무식하게도 지혈되지 않는 상처를 남겼을 확률이 컸다. 그의 예리한 눈썰미에 이벨린의 하얀 종아리를 타고 말라붙은 선혈이 보였다. 실상은 아까 그의 무릎에 짓눌리듯 스치며 상처가 벌어진 탓이었지만….

    어쩐지 거슬렸다. 하나부터 열까지, 다.

    저 여자를 마주할 때면 언제나 머릿속에서 불길한 경종이 시끄럽게도 울렸다. 신뢰할 수 없고, 영악하며, 대담하다. 사랑한다는 고백마저 계산으로 내뱉을 수 있는 여자다. 뺨까지 붉히는 모습에는 깜박 속아 넘어갔지만, 끈질기게 관찰한 결과 진실에 도달할 수 있었다.

    저 여자는 저를 사랑한 적도, 마음에 담은 적도 없다고.

    지금만 해도 그랬다. 그가 시선을 오래 줄 때마다 희미하게 창백해지는 뺨과 불안에 젖어 드는 눈, 잘게 떨리는 입술.

    대체 저걸 보고 누가 사랑에 빠진 여자라고 착각하겠나.

    하지만 사랑이 아니라면 대체 무슨 동기가 남지? 여자의 의중이 알 수 없는 것에서, ‘아직’ 배신하지 못한 것이라는 생각까지 미치자마자 심사가 덜컥 뒤틀렸다.

    ‘설마.’

    정말 그렇다고? 기가 막힌 숨이 웃음으로 터졌다. 제 약점을 쥐었으면, 적어도 그렇다고 믿었으면, 다른 새끼들처럼 주인에게 의기양양하게 고해바쳤어야지. 대체 저 순진한 눈으로 어디까지 파헤쳐서, 어떤 결정적인 순간을 잡으려고, 여태.

    정말로 작정하고 홀리려는 것일지도 모르지. 어쩌면 이미 홀렸는지도 모르고. 시도 때도 없이 디딘 바닥이 가라앉는 와중에도, 저 여자가 엘레나와 겹쳐 보이는 걸 보면….

    비센테는 찬 숨을 뱉었다. 기어이 미쳐 가는 모양이었다. 적당히 집어 먹던 약들이 정말 정신까지 기어올랐는지도 모르겠다. 스스로를 향한 조소를 짓씹으면서도 눈은 여자의 사소한 움직임까지 좇았다. 목줄 잡힌 개새끼라도 된 것처럼. 그것을 알아차린 순간, 가늘게 이어지던 끈이 뚝 끊겼다.

    기어이 숨기겠다면, 네 입으로 밝히게 만드는 수밖에.

    단정한 입술이 비틀린 것은 순식간이었다. 그는 충동적으로 일어서서 여자를 향해 성큼 다가섰다.

    [전하?]

    이 여자의 가증스러운 껍데기를 벗기고 싶다.

    [그렇게 다가오시면, 제가 놀라서….]

    이벨린은 본능적으로 뒤로 물러섰으나, 몇 걸음 만에 테이블에 가로막혔다. 여자의 유순한 얼굴이 낭패감으로 젖어 들었다.

    “날 좋아한다면서, 마치 짐승 새끼라도 본 듯.”

    몇 걸음 만에 바짝 다가온 비센테는 양팔을 뻗어 테이블과 제 몸 사이에 여자를 가뒀다. 희게 질린 얼굴에 그제야 만족스러웠다. 그는 입꼬리에 웃음을 문 채 손가락 등으로 이벨린의 뺨과 입술을 쓸었다. 가냘픈 몸이 가엾게도 떨리고 있었다.

    “그러게 착한 마음씨를 베풀 때는, 상대가 누구인지 잘 살폈어야지.”

    비센테는 그대로 이벨린의 목을 한 손에 움켜쥐었다. 손바닥을 타고 여자의 헐떡이는 맥박이 느껴졌다. 그가 실소했다.

    “내가 무엇을 할 줄 알고.”

    [부디, 이러지 마세요.]

    “양께서는 모르나 본데.”

    이제 와 붙이는 경칭은 조롱에 보다 더 가까웠다.

    “내가 배운 바가 없어 브리타냐어는 한마디도 못 하는데, 이를 어쩌지.”

    비센테는 스스로에 대한 환멸감을 애써 씹어 삼켰다.

    고작해야 여자의 입에서 진실을 실토하게 만들겠다는 알량한 이유로 닳고 닳은 수를 아무렇지도 않게 쓰고, 무엇도 욕망해서는 안 되는 몸으로 감히 상대의 육체를 강제한다.

    그는 여자의 경악하는 눈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로 고개를 비스듬히 내렸다.

    “그러니 부디 그만두고 싶거든, 소리를 질러. 에스페다의 언어로.”

    아, 엘레나. 나는 죽어서도 네게 용서받지 못할 것이다.

    “내가 배운 바가 없어 브리타냐어는 한 마디도 못하는데, 이를 어쩌지.”

    이벨린은 순간적으로 상황도 잊고 불경한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에스페다의 2황자씩이나 되는 자가, 브리타냐어를 익히지 못했다고. 뻔뻔하게도 그렇게 읊어대는 낯짝은 지독히도 낯설었다.

    “그러니 부디 그만두고 싶거든, 소리를 질러. 에스페다의 언어로.”

    이 상황이 도무지 현실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비센테의 저 자포자기한 것 같은 표정 때문에라도 더.

    성큼 가까워진 그의 숨결이 제 목덜미에 닿고 나서야 퍼뜩 제정신이 돌아왔다. 그는, 어쩌면, 진심인 것 같았다. 이벨린은 그를 있는 힘껏 떠밀었다.

    [비센, 제발, 이러지 마….]

    머릿속이 새하얗게 변하자 오래된 습관처럼 반말이 튀어나왔다. 정작 그들이 평어를 주고받은 건 아주 오래전의 일인데도. 비센테는 이벨린의 저항에도 조금도 밀려나지 않았다. 오히려 거슬린다는 듯 양 손목이 틀어 잡혀 버렸다. 그가 서늘한 눈으로 웃었다.

    “먼저 나를 원한다고 했던 건 양이었지.”

    내가 언제…. 반항적으로 과거를 헤집던 이벨린의 생각이 문득 며칠 전에 미쳤다. 그의 침대 위에서 뻔뻔하게도 조잘거렸던 거짓된 고백. 브리타냐의 언어를 모른다고 주장하는 주제에 잘도 그걸…. 그가 이런 식으로 써먹을 줄 알았다면 침실로 들인 게 같은 마음이냐느니, 좋아한다느니 하는 말은 뱉지 말걸. 후회는 아무리 빨라도 늦었다.

    “정신 차려, 이벨린.”

    그의 말대로였다. 정신을 차리고, 빠져나갈 방법을, 변명을…. 그러나 등 뒤의 리본이 풀리기 시작하자 신경은 온통 그쪽으로 쏠렸다. 옷을 벗겨 내는 손길이 지나치게 능숙하게 느껴지는 것은, 그녀가 이런 일에 무지하기 때문일까? 순식간에 느슨해진 옷 사이로 찬 바람이 파고들었다.

    [흐….]

    그가 무릎으로 그녀의 허벅지 사이를 벌렸다. 이미 한 번 터졌던 상처가 재차 문질러지며 뜨겁고 아릿한 통증이 일었다. 이벨린은 튀어나오려는 신음을 간신히 삼켰다. 깨물린 입술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그가 엄지손가락으로 이벨린의 입술을 거칠게 헤집었다.

    “물어. 울든지.”

    왼쪽 허벅지가 그대로 잡아 들어 올려졌다. 예고도 없이 발이 바닥에서 떨어지자 이벨린은 놀라 반사적으로 비센테의 팔을 붙잡았다. 귓가에 짧은 비웃음이 쏟아졌다. 그는 그대로 이벨린을 테이블 위로 밀어내듯 눕혔다. 입술에 물려졌던 손이 그대로 목을 아프지 않게 짓눌렀다. 통증보다는 살짝 숨이 부족해 붕 뜬 감각이 느껴질 정도로만.

    […흐읏.]

    어둠 속에서 반들거리는 보랏빛 눈동자가 피를 본 짐승의 것처럼 잔인했다. 그가 이럴 리가 없다고, 여태껏 아무 여자와도 잠자리를 공유한 적 없다고, 사교계를 돌아다니는 알량한 가십 같은 믿음은 순식간에 깨졌다. 그는 정말로 끝까지 갈 생각이었다.

    정말 이대로 잡아먹힌다고 생각한 순간, 딱 달라붙었던 입술이 저절로 열렸다.

    “그, 그만….”

    “…….”

    양 손등으로 눈을 가린 이벨린은 헐떡이며 진실을 토해 냈다.

    “요, 용서하세요.”

    하. 고작해야 종이 한 장의 틈을 남겨놓고 가까스로 멈춘 얼굴이 찬웃음을 뱉어 냈다. 그녀의 뺨 위로 간지러운 숨결이 흩어졌다.

    다음 순간 저를 짓누르던 사내의 힘이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정말 물러난 건가? 이대로? 이벨린은 젖은 얼굴로 뜯어진 앞섶을 움켜쥐었다.

    “계속 거기 그러고 있을 건가?”

    비센테의 지적에 이벨린은 허겁지겁 테이블 위에서 내려왔다. 그는 벌써 흐트러졌던 매무새를 다 가다듬은 뒤였다. 이벨린은 테이블 뒤에 쪼그리고 앉아 비센테의 시선에서 몸을 가린 채 옷차림을 정돈했다. 어찌나 용의주도하게 풀어 두었던지 다시 꿰어 입는 것에만 제법 시간이 걸렸다.

    “…….”

    테이블 다리 아래로 그가 맞은편 의자에 앉는 게 보였다. 옷을 다 정돈할 때까지 기다리려는 게 분명했다. 이벨린은 눈을 꽉 감았다. 죽음 같은 정적 속에서 한동안 옷감이 스치는 소리만 울렸다.

    “아직 멀었나?”

    이벨린은 화들짝 놀라서 마지막 리본을 꽉 죄었다.

    “돼, 됐어요.”

    그녀가 테이블 아래에서 몸을 일으키자, 비센테가 의자를 권했다. 이벨린은 침을 꼴깍 삼키고 자리에 앉았다. 어쩐지 비참하고 지독히 피로했다.

    “계속 거기 서 있을 게 아니라면, 앉지.”

    “…….”

    몇 번을 겪어도 익숙해지기 힘든 종류의 냉대였다. 생판 낯선 남의 몸에 들어가서 모르는 사람들을 아는 척하는 것도 곤욕스러웠지만, 그녀가 알던 사람이 저렇듯 경계하는 모습을 보이는 것도 만만찮게 거북했다. 이벨린이 머뭇거리자 비센테가 한 번 더 재촉했다.

    “양은 명령이 편한가?”

    “…이름으로 부르셔도 돼요.”

    차라리 그게 편했다. 모호한 호칭은 도리어 카스타야 영애로 돌아가 버린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키니까. 조금 전까지만 해도 그녀는 비센테의 이름을 부를 뻔했다. 끝에서 간신히 삼키긴 했지만…. 불편한 침묵 끝에 이벨린이 먼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용서하세요.”

    잠깐 생각에 잠긴 듯 보였던 그가 시선을 들어 올렸다. 영혼이라도 꿰뚫어 볼 것 같은 보랏빛 눈동자가 그녀를 천천히 헤집었다.

    “무엇을.”

    그런 시선을 받고도 침착할 수 있는 여자는 없을 것이다. 그것도 조금 전까지 그와 밤을 보낼 뻔했던 여자라면 더더욱. 긴장인지 다른 무엇인지 모를 것으로 손바닥이 축축이 젖어 들었다.

    “전부, 전부 다요.”

    이벨린이 초조해하며 성급하게 대답하자, 그가 매혹적인 미소를 지었다.

    “내가 알아들을 수 있게 말해야지, 이벨린.”

    매사 단정하던 성품은 어디에 값싸게 팔아 치웠는지, 유폐된 그는 이벨린이 알던 사람과는 완전히 달랐다. 가끔은 낯설기만 한 사내를 마주하는 것 같았다. 이벨린은 간신히 입술을 뗐다.

    “처음부터 전하를 기만했어요.”

    “…….”

    “사실은 에스페다어를 할 수 있는데도, 좋은 일자리를 잃을까 무서워서….”

    “널 사주한 자가 누구지?”

    이벨린의 변명이 같잖다는 듯 비센테가 말을 툭 끊어 내며 물었다. 이벨린은 즉각 대답했다.

    “그런 건 없어요.”

    “이벨린.”

    툭. 손가락으로 테이블을 두드리는 별것 아닌 행동인데도, 그 소리가 재판정의 선고 망치처럼 무겁게 들렸다. 이벨린이 화들짝 고개를 들자, 비센테가 조금 더 부드러운 목소리로 회유했다.

    “나는 네게 기회를 주고 있는 거야.”

    “…….”

    “그쪽을 버리고, 이쪽에 붙을 기회를.”

    “…….”

    “약점이 잡혀 있어? 아니면 돈 때문인가?”

    며칠 전의 대화가 고스란히 돌아왔다. 함정일까? 아니면, 정말로 진지한 권유일까? ‘귀부인’ 측에서 코라의 안위를 두고 협박까지 하는 마당에, 비센테의 제안은 일종의 구원처럼 여겨졌다. 그러나 그녀가 망쳐 놓은 진창에서, 이번에도 그의 손을 더럽히며 제 살길을 찾겠다고. 스스로에 대한 혐오감과 해묵은 죄책감이 숨통이 죄었다.

    “4층에 폰페라다 궁 바깥으로 이어지는 비밀 출입구가 있을 거야. 그걸 찾아.”

    비밀 출입구. 여태 현실감 없이 붕 떠 있던 머릿속에서, 단 하나 선명하게 남아 있던 정보였다. 4층, 황자의 침실, 외부와 통하는 통로. 정말로 그게 존재한다면… 어쩌면 귀부인의 눈을 피해 틸리 수녀님과 접촉할 방법을 찾을 수 있을지도 몰랐다. 이제는 뻔뻔하더라도 그가 내민 손을 감히 거절할 수 없었다.

    “…….”

    비센테는 이벨린이 천천히 생각을 갈무리할 때까지 기다렸다. 이벨린은 무릎 위에 올려 두었던 손을 꽉 쥐었다. 이제는 정말 협상 테이블에 앉아야 할 때였다. 이것보다 더 늦으면 기회조차 없어질 테니까. 그녀는 긴 심호흡 끝에 입을 열었다.

    “…절 만나러 온 사람을 다들 ‘귀부인’이라고 불렀어요.”

    비센테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반색하는 기색조차 없었다. 당연한 것을 보고받은 도리어 조금쯤 무관심해 보이기까지 했다.

    “귀부인이라. 에스페다의 귀족이던가?”

    이벨린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잘 모르겠어요. 귀족인 것 같긴 한데, 가문의 문양 같은 건 철저하게 감췄거든요. 처음 봤을 때도 그저 단출한 검은 마차를 탔어요.”

    “이 일을 받아들인 이유는? 돈인가?”

    “동생이 희귀병을 앓아요. 돈과 의사를 지원해 준다기에…. 처음에는 단순히 황자 전하를 근처에서 보필하는 일쯤으로 생각했어요. 금세 그게 아니라는 걸 깨달았지만요.”

    “네 말이 진실이라는 증거는?”

    그 말은 이 모든 게 네 망상 따위가 아니냐는 소리처럼 들렸다. 그야 의심스러울 만도 했다. 그와 눈 한번 마주치겠다고 정신 나간 짓을 해 대는 여자들이 유폐되기 전부터도 끊이질 않았으니…. 이벨린은 바구니의 안쪽에서 귀부인의 시종이 건넸던 봉투를 찾아 건넸다.

    “오늘 저를 찾아온 자가 제게 건네준 거예요. 이걸 황자 전하의 침실에 숨기라고 하더군요.”

    말없이 서류를 확인한 비센테가, 이윽고 잘 접어 도로 봉투 안으로 갈무리했다. 그가 봉투를 테이블 위에 올려 두며 입술을 비스듬히 비틀었다.

    “그래서 내 침실엔 이걸 숨기러 들어온 건가?”

    “아니에요! 정말로, 절대 그런 불경한 생각을 한 적은 없어요. 그저 지나가다가 문이 열려 있기에….”

    “왜?”

    “네?”

    이벨린이 곧장 알아듣지 못하자, 비센테가 고쳐 말했다.

    “아까는 왜 협조한 거지? 네 입을 막지도 않았으니, 소리쳐도 됐을 텐데.”

    이벨린은 떨리는 입술을 꾹 깨물었다.

    “이유는 하나뿐이에요. 저는 여기서 죽을 수 없어요.”

    그가 찬웃음을 뱉었다.

    “죽고 싶지 않은 사람이 독을 마시나? 내성도 없이?”

    “저는 오로지 제 동생을 위해 움직여요.”

    유순한 듯 보였던 이벨린의 눈매에 서늘한 결의가 스몄다. 비센테는 표정을 감추기 위해 입가를 매만졌다. 여자는 제가 무슨 말을 하는지 자각조차 없는 모양이었다. 여자가 익숙한 듯 쓰고 발음하는 에스페다의 언어들, 귀족들만이 향유하는 그 섬세한 강약.

    “몰락 귀족이었나?”

    “아니에요. 뒷조사를 하셨으니 아시겠지만….”

    “에스페다의 언어는 어디서 배웠지?”

    자꾸만 끊어지는 대화에 이벨린이 불안한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사전을 보고 조금.”

    “천재라는 소리를 자주 듣는 편인가? 아니면, 정말 시대라도 역행했나?”

    “네? 저어,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이벨린.”

    고작해야 그 이름을 불렀을 뿐인데도 초조했다. 어쩐지 무언가가 조금씩 비틀리고 있는 것 같은 직감이 들었다.

    “네가 진짜 이벨린 베네딕트가 맞기는 한가?”

    이벨린은 저도 모르게 치맛자락을 구겨 쥐었다가, 비센테가 바라보고 있으리란 생각에 가까스로 놓았다. 아무것도 모르면서 그는 이렇게 한 번씩 정곡을 찌를 때가 있었다. 그녀는 늦지 않게 부정했다.

    “무슨 뜻으로 하시는 말씀이신지 모르겠어요.”

    “어쩌면 네가 이벨린 베네딕트가 아니라, 다른 사람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지.”

    “…….”

    “에스페다의 언어를 능숙하게 하는 브리타냐인을 찾아서, 이벨린 베네딕트의 신분을 뒤집어씌웠을지도 모른다고. 서류마저 누구도 눈치채지 못하도록 아주 교묘한 수법으로 조작했다고.”

    “…….”

    “그런 생각을 했어. 네가 희대의 천재라는 설명보단 그게 더 자연스러우니까.”

    이벨린은 드물게도 말문이 막힌 채로 얼어붙었다. 그녀는 비센테의 콧등에 간신히 걸쳐져 있던 시선을 턱 언저리로 조금 더 내렸다.

    “…그래서 내리신 결론은요.”

    여유로운 척 되물었지만, 끝에 가서는 목소리가 조금 떨렸다. 비센테는 의미 모를 미소를 지었다.

    “아쉽게도 윈스포드를 뒤져서 네 초상을 찾아냈어.”

    “초상…, 초상이요?”

    그의 말끝이나 따라 읊는 게 어지간히도 멍청해 보이리라고 생각했지만, 정말로 당황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 그만큼 뜬구름 같은 이야기였다. ‘이벨린 베네딕트’의 초상이라니.

    그녀가 머물던 수도원의 재정이야 뻔했고, 머릿속을 아무리 헤집어 봐도 초상화가를 고용할 이유도 기억도 없었다. 이벨린은 비센테를 따라 테이블 위로 시선을 옮겼다.

    가장자리에 물 먹은 흔적이 있는 종이가 그보다 갑절은 비싸 보이는 실크에 감싸여 있었다.

    “확인해 봐.”

    이벨린은 불길함을 삼키며 실크를 젖혔다. 꺼끌거리는 질 낮은 종이에, 그만큼이나 질 낮은 목탄으로 그린 여자의 초상이 드러났다. 엉망인 종이의 상태와 달리 그림은 번진 곳 하나 없이 온전했다. 무엇을 보았는지 천진하게 웃고 있는 얼굴은 지금의 그녀보다 대여섯 살은 어려 보였다.

    “이건….”

    “거리의 화가가 널 보고 그린 그림이라던데.”

    “…….”

    “이걸로 의심은 접어 두기로 했지. 그 얼굴이 둘이 아닌 이상에야, 달리 이벨린 베네딕트가 있을 리 없으니까.”

    이벨린은 가까스로 그림에서 시선을 뗐다. 종이를 내려놓는 손끝이 조금 떨렸다.

    “그럼 이제 의심은 다 풀리신 건가요?”

    “네가 이벨린이라는 것은 믿어.”

    “제게 제안하신다는 ‘기회’가 뭐죠?”

    그의 눈매가 시건방진 것을 볼 때처럼 가늘어졌다.

    “널 사는 값에 대해서 먼저 말해 봐, 이벨린.”

    사는 값. 그가 의도적으로 그 단어를 골랐는지는 모르겠지만, 묘하게 느껴지는 말이었다. 이벨린은 뺨에 스미는 열기를 애써 무시하며 무뚝뚝하게 입을 열었다.

    “말씀드렸듯 동생이 희귀병을 앓아요. 의사와 생활비를 지원해 주시면 좋겠어요. 일이 끝날 때까지 안전히 머물 장소도요.”

    “그리고?”

    “틸리 수녀님에 대해서도 알아봐 주세요. 어쩌다 저들에게 말려든 것인지, 아니면 처음부터 한패였는지….”

    생각하기도 끔찍한 가정에 목소리가 조금 떨렸다. 이벨린은 입술을 꾹 깨물고는, 조금 더 창백해진 얼굴을 들었다.

    “그것만 보장해 주신다면 무엇이든 할게요.”

    “‘무엇이든’이라….”

    얼마간의 불편한 여운 끝에 그가 툭 내뱉듯 물었다.

    “겨우 그거로 되겠어?”

    “물론, 당연히….”

    “네 처우에 대한 계산은 하나도 없이, 고작 그것들로?”

    “주신다면 좋지만, 주지 않으셔도 괜찮아요. 말씀드렸듯 코라만 안전하다면 저는 어찌 되든 상관없어요.”

    “욕망이 없는 인간은 없어. 나는 그런 식으로 말하는 자를 신뢰하지 않아.”

    “…….”

    “너는 꼭 죽을 날을 받아 둔 사람처럼 말하는군.”

    혹은 이미 죽어 있거나. 그가 덧붙인 말이 귓가에 이명처럼 달라붙었다. 이벨린은 제 발 저린 도둑처럼 시선을 조금 더 아래로 피했다. 정말로 그가 그런 말을 한 것인지, 혹은 그런 말을 들었다고 망상한 것인지… 확신하기 어려웠다. 이벨린은 입술을 짓씹었다.

    “어떻게 하면 저를 신뢰하시겠어요?”

    “네 주인을 배신하려는 이유가 뭐지?”

    질문에 대한 답으로 질문이 되돌아왔다. 이벨린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네?”

    “값을 비싸게 불렀다면 도리어 안심이 됐겠어. 하지만 달리 원하는 것도 없다고 하고, 네 전 주인의 제안과 내 제안은 별반 차이도 없지.”

    “…….”

    “그렇게 동생의 안위에 대해 예민하게 굴더니, 대체 내가 그자와는 뭐가 달라서.”

    그야, 비센테는 고작 아홉 살짜리 아이를 해치지 않을 테니까…. 길 잃은 어린아이를 위해 흔쾌히 진창에 무릎을 꿇는 남자, 적어도 ‘엘레나 카스타야’가 멀리서 지켜보았던 2황자는 그런 남자였다.

    물론 폰페라다 궁에서 지내는 동안 대외적으로 알려져 있던 것과는 다른 모습을 보기도 했지만, 이벨린은 사람의 본질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는 오래된 격언을 믿는 편이었다.

    “‘귀부인’은 제 동생을 두고 저를 협박했어요.”

    이벨린은 진실 대신, 적당히 솔직하게 들릴 법한 대답을 내놓았다.

    “달리 선택의 여지가 없었어요.”

    “내가 만약 네 동생을 놓친다면, 넌 또 다른 사람에게 가서 충성을 맹세할 건가?”

    “놓치실 건가요?”

    되바라진 물음에 비센테의 시선이 비스듬히 기울었다. 턱을 괸 그가 느긋하게 입술을 움직여 웃었다.

    “아니.”

    자신감인지 오만함인지 모를 미소는 비센테와 퍽 잘 어울렸다. 이벨린은 재빨리 시선을 아래로 떨어트렸다. 그의 눈길이 닿을 때마다 얇은 낯짝은 쉽게도 달아올랐다.

    “그러면 저는 전하께 충성할 거예요.”

    “쉽게도 맹세하는군.”

    그가 고개를 느슨하게 뒤로 젖히며 목덜미를 주물렀다. 언뜻 듣기엔 그녀의 얄팍한 충성심을 비난하는 것 같았지만, 그저 흥미로워하는 것처럼 들리기도 했다. 어쩌면 애초부터 그런 것쯤은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 것 같기도 했고.

    이벨린은 금세 초조해져서 손을 맞잡았다. 그녀에게 선택의 기회가 있기라도 한 것처럼 진행되는 대화는 고작해야 눈가림이었다. 애초부터 모든 선택지는 비센테가 쥐고 있었다. 그녀를 거둘지, 혹은 이대로 첩자로 잡아넣을지조차….

    “당분간은 지금처럼 지내도록 해. 단테가 당분간 네 주변을 살필 테니까, 안전은 걱정하지 말고.”

    이벨린은 너무 반색하는 표정을 짓지 않도록 노력했다.

    “지금처럼이라고 하시면….”

    “4층 아래로는 되도록 내려가지 말고, 내려갈 일이 있으면 단테와 동행해. 나머지는 네 동생을 무사히 확보하고 난 뒤에 이야기하도록 하지.”

    이벨린은 그가 조금 창백해 보인다는 것을 깨달았다. 멀쩡히 앉아 있기에 금방 잊었지만 그는 환자였다. 그것도 간신히 지혈이나 했을 뿐, 상처는 퍽 깊은 편이었으니까.

    그녀는 눈치 빠르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알겠습니다. 더 말씀하실 게 있으시면 언제든 불러 주세요.”

    “그리고, 이벨린.”

    허리를 꾸벅 굽히고 방을 나서려는 찰나 그가 입을 열었다. 비센테는 피로와 통증으로 일그러진 눈가를 손으로 짚고 있었다. 그는 이벨린을 보고 있지도 않았다. 마치, 귀족들이 으레 하듯, 손쉽게 부리는 하인을 대할 때처럼.

    “황족의 이름을 부를 수 있는 건 같은 황족이거나, 개인적인 친분으로 특별히 허락받은 자뿐이다. 적어도 에스페다에서는.”

    “…아.”

    “모르는 듯하여서.”

    [비센, 제발, 이러지 마….]

    당황한 나머지 입에 올렸지만, 미처 끝까지 다 뱉지도 못했던 이름이었다. 에스페다의 발음과 브리타냐의 발음이 다르고, 들은 척도 않기에 알아차리지 못한 줄로만 알았는데.

    “처음이니 넘기겠지만, 두 번 다시 같은 실수는 하지 않았으면 좋겠군.”

    가끔은, 한낱 인간인지라 고작 서운함 때문에 쉽게도 은혜를 잊는다. 과거에 그가 얼마나 제게 단정히 굴었든 겉치레에 지나지 않았을 터였고, 이제는 그마저도 허상일 뿐인데. 이벨린은 떨리는 입술을 깨무는 것으로 감췄다.

    “…명심할게요. 다시는 전하의 존함을 입에 담지 않겠습니다.”

    이벨린은 늦지 않게 허리를 숙였다. 죄책감과 함께 삼킨 한숨이 껄끄럽게도 목에 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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