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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과를 전부 마치고 나자 온몸의 진이 다 빠졌다. 몸도 힘들었지만, 그보다는 정신이 배로 피로했다.
이벨린은 드물게도 옷도 갈아입지 않고 침대에 지친 몸을 묻었다. 식사 시중을 들면서 앞치마를 새것으로 갈아입었던 덕에 그나마 시트를 더럽히지 않을 수 있어 다행이었다.
갈아입어 봐야 새벽에 다시 나가야 하니까….
“으음.”
이벨린은 잠결에 잘게 신음하며 뒤척이다가, 본능처럼 불길함을 감지하고 화들짝 침대를 박차고 일어났다. 잠깐 눈을 감았다 뜬 것 같은데 시간이 훌쩍 지났다.
‘설마. 약속 시간에 늦은 건 아니겠지.’
가정만으로도 등줄기를 타고 서늘한 소름이 돋았다. 허둥거리려던 찰나에 멀리서 두 번 종을 울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녀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침착하게.’
그녀는 사이드 테이블 위에 올려 두었던 페이퍼 나이프를 단단히 잡았다. 깊게 심호흡을 하는 것과 동시에 날카로운 칼날로 허벅지의 안쪽을 그었다.
“흣….”
얇게 베인 상처에서 순식간에 핏방울이 터졌다. 그녀는 미리 걷어 두었던 침대 시트로 상처를 꾹 눌렀다. 더 이상 피가 배어나지 않자, 허벅지에는 손수건을 단단히 덧대 맸다.
피가 묻은 시트는 빨래 바구니에 쑤셔 넣었다. 문고리를 잡자마자 떠오른 건 우습게도 단테의 목소리였다.
“낮에는 어디든 가도 괜찮지만, 저녁에는 돌아다니지 말도록 해. 함부로 방 밖으로 나왔다가 암살자로 의심받아도 난 모르니까.”
그 우스꽝스러운 경고가 이제는 선득한 칼날처럼 되살아났다. 이벨린은 지긋지긋하게 따라붙는 불길한 예감을 애써 무시하며 문고리를 조심스럽게 잡아당겼다.
다행스럽게도 복도는 텅 비어 있었다. 단테도, 루카스의 모습도 보이지 않았다.
잠깐 자리를 비운 걸까? 아니면, 이 시간쯤에는 그들도 4층을 비우는 걸까?
이벨린은 서둘러 서쪽 테라스를 향해 발걸음을 재촉했다. 그녀가 있던 방에서 서쪽 테라스까지 가려면, 필연적으로 중앙 계단을 지나쳐야 한다.
이벨린은 최대한 복도의 끄트머리에 붙은 채로 움직였다. 단테나 루카스가 3층에서 올라오는 곳을 지키고 있다면, 괜히 계단 근처로 갔다가 목격당할지도 몰랐으니까.
아침에는 멀쩡히 돌아다녔던 곳인데, 어둠이 드리운 복도는 어딘지 모르게 낯설었다. 정찬실, 집무실, 서재, 그리고 침실…. 발걸음이 조급해질 때마다 복도에 잘게 울리는 제 발소리에도 그녀는 깜짝깜짝 놀랐다. 영원히 이어질 것 같은 복도가 끝이 나고, 반쯤 폐쇄된 테라스의 문이 보였다.
녹슨 문고리는 잘 돌아가지도 않았다. 몇 번의 헛손질 끝에 잠금쇠를 열고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다리의 힘이 풀렸다. 얼마나 긴장했는지 등이 온통 땀범벅이었다.
그녀는 겨우 숨을 고르고 테라스를 둘러보았다. 잔뜩 긴장한 게 무색하게도 인기척은 어디에서도 느껴지지 않았다. 아직 오지 않은 걸까? 약속한 새벽까지는 아직 시간이 좀 남아 있긴 했다. 종이 울리는 소리를 두 번밖에 듣지 못했으니까. 이벨린은 속삭이듯 목소리를 냈다.
[누구 있어요?]
때마침 불어온 세찬 바람에 나뭇가지들이 부딪히며 스산한 소리를 냈다. 이벨린은 그 사이에 이질적인 소리가 섞여 있다는 것을 눈치챘다. 그녀가 화들짝 놀라서 뒷걸음을 치자마자 소리는 조금 더 분명해졌다.
“큼, 흠.”
희미한 헛기침 소리는 아래층에서부터 들려오고 있었다. 이벨린은 난간을 꽉 붙잡은 채로 고개를 내밀어 아래층을 살폈다. 바로 아래에도 테라스가 있으리라고 생각했는데, 3층에는 튀어나온 골조조차 없었고 곧바로 2층 테라스가 보였다. 거기에, 사람이 있었다.
‘밧줄.’
어둑한 가운데에서도 입술의 움직임만큼은 선명하게 보였다. 이벨린은 들고 온 바구니에서 피 묻은 침대보를 꺼내 들었다. 4층에 갇힌 상태로는 밧줄을 구할 수도 없고, 변명거리로 쓰기에 좋을 것 같아 들고 오기는 했는데…. 이대로는 길이가 부족했다. 방법은 하나뿐이었다.
침대보를 바닥에 내려놓고 페이퍼 나이프를 치켜들었다. 천을 자르기엔 칼날이 날카롭지 않았지만, 구멍을 뚫으면 충분히 손으로 찢을 수 있을 터였다.
침대보가 찢기며 내는 소리는 조용한 비명 같았다. 그녀는 반으로 나뉜 침대보를 다시 매듭으로 엮고, 한쪽 끄트머리는 난간에 단단히 엮었다. 나머지를 아래로 내려 보내자 천이 팡, 하는 소리를 내며 두어 차례 당겨졌다. 내구도라도 확인하는 모양이었다. 이윽고 조금 전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팽팽하게 당겨졌다. 이윽고 웬 손이 난간을 짚었다.
“물러서.”
이벨린이 뒤로 물러나자마자, 밧줄을 타고 온 남자는 난간을 휙 넘어왔다. 입고 있는 옷과 인상을 보니… 낮에 트롤리를 밀고 온 시종이었다. 그는 누가 볼 새라 늘어트린 침대보를 서둘러 난간 위로 끌어당겼다. 이벨린은 조심스럽게 물었다.
[당신은… 누구죠?]
[내숭 떨 것 없어. 그 여자가 보냈으니까.]
[그 여자요?]
[널 이곳으로 보낸 여자. 귀부인.]
[…….]
[조심성 많은 성격인 건 알겠는데, 적당히 해. 시간 없으니까.]
일부러 두루뭉술하게 대응했는데도 시종의 반응은 정확하다 못해 성가셔 보였다. 간혹 마주칠 때마다 웃고 있어서 몰랐는데, 무표정한 얼굴은 퍽 잔인해 보였다. 그가 인상을 찡그리며 윽박지르듯 속삭였다.
[왜 이야기하고 싶다고 한 거야? 이런 식으로 서로가 드러나서 좋을 게 없다고.]
[마리아가 배신했어요.]
[…마리아가?]
[귀부인께서 숨기라고 했던 증거를 찢더군요. 아마 제가 그랬다고 보고가 올라갔을 거예요.]
[네가 독을 마셔서 쓰러졌다는 것만 알았지…. 근데 걔한테 그럴 만한 동기가 있나?]
[황자 전하를 사랑한다더군요.]
시종은 잠깐 침묵했다.
“…시발, 몇 번짼지.”
허탈한 듯 터트린 웃음과 욕설에 이벨린이 흠칫 놀라자, 그가 어깨를 으쓱했다.
[그쪽은 알아서 처리하지. 용건은 그게 다인가?]
[나는 상황이 이렇게 복잡하게 꼬일 줄은 몰랐어요. 그냥 곁에서 감시하라고만 들었지.]
[뭐, 상황 자체는 나쁘지 않아. 그 여자, 그러니까 귀부인이 네 충성심을 의심하고 있긴 하지만.]
[충성심을 의심한다뇨.]
[귀부인의 전언이 있어.]
그는 자세히 설명하기 성가시다는 양 화제를 돌렸다. 그가 품속에서 저번보다 두툼해진 서류 뭉치를 꺼내 들었다.
[둘 중 하나를 해. 이걸 황자의 침실에 숨기던지….]
[잠깐만요. 저는 황자 전하의 침실에 출입할 권한이 없어요. 집무실이나 서재라면 모를까.]
이벨린이 성급하게 말을 끊자, 그가 한숨을 푹 내쉬며 짝다리를 짚었다. 그 불량스러움에 뒤로 움찔 물러서자 시종이 표정을 누그러뜨리며 설명했다.
[널 여기 가뒀다는 건, 네가 어떤 식으로든 마음에 들었단 소리겠지. 이걸 제대로 숨겼다는 확신이 들면 빈 봉투를 트롤리 하단에 숨겨.]
[트롤리라면… 황자 전하의 식사 때 올라오는 거요?]
[맞아.]
[둘 중 하나를 하라고 하셨으니, 그럼 두 번째는요?]
[그게 싫다면 비밀 출입구를 찾든지.]
[비밀 출입구라니. 그게 대체 무슨….]
[여기서 역사 수업이나 하고 있을 생각은 없어. 어쨌든, 4층에 폰페라다 궁 바깥으로 이어지는 비밀 출입구가 있을 거야. 그 출입구가 어딘지 확인해. 사람들이 드나드는 정찬실이나 집무실은 아닐 테니…. 어느 쪽이든 황자의 침실부터 확인해야겠네.]
비센테의 침실이라니. 조건부터 어려웠지만, 점점 더 그들의 계획에 적극적으로 가담하는 방향으로 몰아가는 것도 문제였다.
[동생을 생각해야지. 그 수녀만 믿을 게 아니라.]
실질적 협박에 숨이 콱 틀어막혔다. 눈앞이 새카맣게 가라앉았다.
[…틸리 수녀님에게 무슨 짓을 한 거야?]
[글쎄.]
처음부터 함정이었다. 그것을 늦게야 알았다. 별것 아닌 척, 어려운 일이 아닌 척 첫발을 내딛게 만들고, 정신을 차려 보니 어느새 벗어날 수 없는 늪이었다. 이미 숨골까지 빠진 꼴이다. 이벨린은 아프도록 입술을 짓씹었다.
문득, 시종이 먼 곳을 향해 시선을 던졌다.
[가 봐야겠다. 왠지 소란스럽네.]
사람들의 소란스러운 목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오기 시작했다. 성의 외곽 철창을 따라 불빛이 하나둘 켜지는 걸 보니, 이 새벽에 기이하게도 무슨 소동이 일어난 모양이었다.
대체 무슨 일일까? 불안감에 젖은 이벨린의 얼굴에 시종이 픽 웃으며 난간에 걸터앉았다.
[침대보는 잘 숨겨. 아예 태우던가.]
그 말을 마지막으로 시종은 난간을 잡은 손을 훅 놓아 버렸다. 마치 깜박 실수라도 한 듯이.
이벨린은 반사적으로 튀어나오려던 비명을 가까스로 삼켰다. 난간으로 달려가 아래를 내려다보니, 시종은 유연하게도 2층 테라스의 안쪽으로 착지한 모양이었다. 잘 보이진 않았지만, 미리 쿠션을 깔아 둔 듯 착지할 때 아주 작은 소리만 났다.
이벨린은 손등이 새하얗게 질릴 때까지 난간을 꽉 붙잡았다. 혼자 남겨지게 되자, 습관처럼 초조함이 밀려들었다. 어디까지 그들이 예상했을까, 어디까지….
비센테를 구하고 말겠다는 자신감은 사라진 지 오래였다. 그 빈 자리로 뼈 아픈 자책이 밀려들었다. 처음부터 예상했어야 했다. 아무리 10년 넘게 돌봐 준 틸리 수녀님이라고 해도 믿어선 안 됐다. 코라를 남겨두고 와서는 안 됐다.
이벨린은 가까스로 현실로 돌아왔다. 어쩔 수 없이 당분간 몸을 낮추고 그들의 지시를 따르는 척해야 했다. 적어도 코라의 안전을 다시 장담할 수 있을 때까지는….
이벨린은 바구니와 침대보, 시종이 던져 주고 간 서류를 차례로 챙겨 들고 테라스를 나섰다. 세찬 바람을 너무 오래 맞은 탓인지, 생각이 둔하게 흘렀다. 온몸이 차갑다 못해 시렸다. 멀쩡한 척 걷던 걸음이 멈춘 것은 복도를 절반쯤 걸어왔을 때였다.
처음 지나갈 때만 해도 굳건히 닫혀 있던 침실의 문이, 열려 있었다.
“둘 중 하나를 해. 이걸 황자의 침실에 숨기던지, 그게 싫다면 비밀 출입구를 찾든지.”
조금 전 들었던 시종의 목소리가 귓가를 웅웅 울렸다. 아무리 상황이 이렇게까지 몰렸다고 해도 그 뜻에 따를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오가는 편지가 모조리 감시당하는 실정이니, 황자의 침실에 정말 비밀 출입구가 있다면 귀부인의 눈을 피해 궁을 나갔다 올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잠깐 하기는 했지만. 하지만 지금은.
“읏….”
안쪽에서 들려오는 작은 신음 소리, 공기 중에 떠도는 희미한 쇠 냄새. 매사에 철저한 그가, 미처 문이 다 닫히지도 않았다는 것을 놓칠 정도로…. 이벨린은 홀린 듯 걸음을 빨리했다. 문고리를 잡은 손이 조금 떨렸다. 그녀는 심호흡과 함께 거세게 문을 열어젖혔다. 예상했던 것보다도 조금 더 과격하게.
[…….]
침실은 고요하기만 했다. 예상했던 광경과는 동떨어지게도, 정말 아무 인기척조차 없이. 이벨린은 반쯤 넋이 나간 채로 침실 안으로 들어갔다. 시선이 천천히 방 안의 정물들을 스쳤다. 티 테이블, 카우치, 창문과 커튼…. 침실의 중간 문 너머로 보이는 침대에는 누군가가 잠깐 머물렀던 흔적조차 없었다.
정말 무언가에라도 홀린 것 같았다.
어쩌면, 요 며칠 한계까지 몰린 탓일지도 몰랐다. 그녀는 피로한 눈두덩이를 꾹 눌렀다. 지금은 아무 생각도 하지 않고 쉬고 싶었다. 당장 비센테의 침실을 뒤지는 것보다는, 돌아가서 눈을 좀 붙이고, 좀 더 철저한 계획을 세운 뒤에….
가까스로 정신을 추스른 이벨린이 다시 문 쪽으로 몸을 돌렸을 때였다.
인기척조차 없이 등 뒤에서 뻗어온 비센테의 팔이, 그녀의 얼굴 옆을 지나 문을 닫았다. 머리 위로 그늘진 포식자의 그림자에 남김없이 잡아먹혔다.
“베네딕트 양. 미리 경고했던 것으로 아는데.”
끊어지는 신음을 참는 나직한 목소리가 느릿하게 귓가에 박혔다.
“밤에는 돌아다니지 말라고.”
들이쉬고 내쉬는 공기가 따갑다. 모든 감각이 등 뒤로 예민하게 쏠렸다. 등줄기를 타고 흘러내린 땀이 식어가는 것조차 선명하게 느껴졌다. 목덜미를 간질이는 밭은 숨결, 끓는 듯한 체온, 그 위를 엷게 덮은 쇠 냄새. 이제야 알겠다. 처음 맡았던 순간부터 그건 혈향이었다. 그걸 깨닫는 순간 엷은 소름이 돋았다.
‘대체 언제부터 있었던 거지?’
분명 아무도 없었는데. 어쨌든 지금은 그걸 따질 때가 아니었다. 그럴듯한 변명을 생각해야 하는데…. 초조하게 입술을 짓씹고 있는 도중 희미하게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려왔다. 그건 투박한 군화로 복도를 마구잡이로 짓밟는 소리였다. 처음에는 잘못 들었다고 생각했으나 시시각각 가까워지고 있었다.
“잠깐 협조 좀 해.”
짧은 한숨을 내뱉은 비센테가 그녀의 손목을 붙잡았다. 그대로 얼떨결에 침대까지 끌려갔다. 그가 짧게 명령했다.
“누워.”
그 말에 아연해진 이벨린은 뻣뻣하게 고개를 돌렸다. 지금 대체, 무슨 소리를…. 그러나 비센테를 제대로 마주하자 그런 건 사소한 문제쯤으로 느껴졌다. 그의 셔츠가 온통 피로 얼룩진 것을 보고 나서는. 이벨린의 얼굴이 순식간에 해쓱하게 질렸다.
“한밤중에 경고조차 무시하고 들이닥쳤을 땐, 적어도 이 정도는 책임질 각오쯤은 했겠지.”
그가 제 셔츠의 커프스단추를 이로 뜯듯이 풀며 말했다. 헐거워진 셔츠를 벗어 던지자, 어둠 속에 매끄러운 근육으로 꽉 짜인 단단한 상체가 드러났다. 십 수년간 군 생활로 단련된 완벽한 모양새에 감탄할 새조차 없었다.
가까스로 치명상은 피한 듯, 크게 찢긴 상처가 끔찍한 모양새로 나 있었다. 저만한 상처를 입고도 여태 멀쩡히 움직였다는 게 신기할 지경이었다. 옆구리에서 배꼽 아래로 길게 헤집어진 살갗, 뚝뚝 떨어지는 피, 그리고….
“그렇게 가만히 있다가 날 찌른 암살자로 넘겨지는 선택지도 있으니, 천천히 고민해 봐.”
이벨린은 그의 빈정거림에 다시금 현실로 돌아왔다. 이제 발걸음 소리는 4층의 복도에 접어든 듯 가까웠다. 그녀가 서둘러 침대 위로 기어 올라가자, 그가 그녀의 위로 그늘을 만들며 올라왔다. 큼직한 손이 그녀의 얼굴 옆을 짚었다.
“읏….”
힘겨운 듯 그녀의 목덜미에 고개를 묻은 비센테가 아주 짧게 숨을 몰아쉬었다. 이벨린은 그제야 겨우 그가 생각만큼 멀쩡하지 않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죽어도 약한 모습을 보이려 들지 않는 언젠가의 그를, 알았으니까.
한번 눈치채기 시작하자 모든 것이 보였다. 새하얗게 질린 얼굴, 턱에 송골송골 맺힌 땀, 일그러진 미간, 악문 잇새로 새어 나오는 숨, 핏줄이 툭 불거진 팔뚝.
그때였다.
“황자 전하! 들어가겠습니다!”
얇은 시트를 그녀와 제 허리 위로 덮자마자, 예고도 없이 문이 벌컥 열렸다. 철걱거리는 쇳소리가 이벨린의 귀에도 선명하게 들렸다. 그녀는 놀란 눈으로 비센테를 올려다보았다. 황족의 침실을 한밤중에 무장한 경비대가 침범하는 것은 대단한 무례였다.
“…무슨 일이지?”
놀란 연인을 달래듯 그녀의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쓸어 넘긴 비센테가 사납게 물었다. 문을 박차고 들어온 사내 대여섯 명의 눈에는, 비센테의 헐벗은 등이나 겨우 보였을 터였다. 그 외에는, 비센테의 아래에 깔린 것이 여자라는 것 정도밖에는.
“소, 송구합니다. 궁의 보안 문제로 여쭈어볼 사안이 있어 부득이하게 알현을 요청드립니다.”
“이 밤중에.”
고통을 참아 내는 그의 나직한 목소리는 어쩐지 묘하게 들렸다. 상황을 다 아는 이벨린조차 일순 뺨이 화끈 달아오를 정도로.
“온갖 절차도 무시한 채.”
“…….”
“굳이, 지금.”
그가 체중을 분산하듯, 그녀의 허벅지 사이로 제 왼쪽 다리를 밀어 넣었다. 이벨린은 입술을 깨물었다. 하필이면 그가 스친 곳이 제 손으로 직접 상처를 낸 허벅지였다. 한밤중 돌아다닌 것이 발각되면, 시트에 생리혈이 묻었다는 핑계나 대려고….
그녀는 아주 살짝 흐느꼈다.
“시, 실례했습니다!”
우르르 몰려들었던 경비대들은 문을 닫고 나설 때도 우르르 몰려 나갔다. 하나같이 황자가 제 얼굴을 기억하지 못하기를 간절히 바라는 얼굴들이었다. 발소리는 가까워졌던 것처럼, 금세 멀어졌다. 이벨린은 비센테가 제 위에서 비키자마자 침대에서 내려섰다.
인정하고 싶진 않았지만, 그의 재빠른 판단 덕에 산 것이나 다름없었다.
황자가 다쳤고, 그 방에서 웬 사람이 발각되었고, 때마침 경비대가 몰려들었다. 십중팔구는 암살자로 몰려 지하 감옥에나 투옥되었을 것이다.
“…….”
이벨린은 비센테의 눈치를 슬쩍 살피며 떨어트렸던 바구니를 주섬주섬 주워 들었다. 여기서 지체하다가 붙잡히면 이 밤중에 무얼 하고 있었냐고 추궁이나 당할 게 분명했다. 물론 그가 원한다면 언제고 다시 불려올 테지만, 오늘 밤만큼은 제발 조용히 넘어가고 싶었다.
[그럼, 저는 이만….]
그녀가 방문을 나서기 위해 문고리를 막 잡았을 때였다.
“기다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