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0화 (20/151)

***

[…돌아가는 상황이 좋지 못해. 상상했던 것과는 많이 달라서 당황스러워. 추천서를 써 주신 수녀님과 상단주님을 봐서 버티고는 있지만. 사실 언제까지 이럴 수 있는지는 잘 모르겠어. 코라, 너와 잠깐이라도 직접 이야기할 수 있다면 좋을 텐데.]

시답지 않은 신변잡기로 시작했던 편지의 내용은, 점점 불만을 직접적인 형태로 언급하고 있었다. 비센테는 피로한 미간을 내리누르며 편지를 테이블에 올렸다.

“이 편지를 부쳐 달라고 했다고?”

“예. 별것 아닌 것 같긴 한데, 혹시나 해서요.”

봉투 안에 돈이 조금 붙어 있는 것을 제외하면, 단테의 말대로 편지의 내용은 별것 없었다. 궁에서 일하는 시종들이라면 으레 해 대는 구구절절한 비관이야 새로울 것 없이 심상했고, 편지를 받는 주소도 브리타냐의 베네딕트 수도원이었다.

그를 사주한 배후가 수녀원에 상주하는 게 아니라면, 수상쩍을 이유는 조금도 없었다.

‘직접 이야기하고 싶다는 표현이 다섯 번쯤 적혀 있는 것만 아니라면….’

어떤 암시일 수도 있고, 어쩌면 별것 아닌 말버릇쯤일 수도 있었다. 그렇다고 해도 여전한 위화감은 있지만…. 이벨린을 생각하자 머리에 습관 같은 통증이 일었다. 처음 4층을 폐쇄하고, 하녀를 뽑을 때까지만 해도 적들의 시선이나 붙잡아 둘 계획이었다.

어차피 ‘진짜’ 그의 약점은, 이곳에 존재하지도 않으니까.

“부쳐 줘.”

비센테는 내려놓은 편지를 곱게 접어, 단테에게 돌려주었다.

“이 편지를 받는 사람을 직접 만나 보면 이게 무슨 뜻인지 좀 분명해질 것도 같은데요.”

단테와 루카스는 황자의 수하를 자처하며 스스로 폰페라다 궁의 유폐를 선택한 자들이었다.

비센테의 세력을 극도로 경계하는 황태자가 그들을 내버려 둔 것은, 그들이 평민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유폐된 자들의 공통점은 하나였다. 거취의 자유가 없다는 것. 황제의 기사들로 사방이 둘러싸였다는 것.

“혹시 모르니 제가 브리타냐까지 다녀올까요?”

“아니.”

단테의 말에 비센테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황태자가 눈에 불을 켜고 찾는, 경비의 ‘구멍’. 그 중요한 걸 고작해야 여자 하나 때문에 드러낼 수는 없었다.

“여기. 시종장이 네게 전해 주라더라.”

이벨린은 단테가 내민 세 개의 열쇠를 보자마자, 시종장이 따로 관리하던 4층의 열쇠들이라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각 열쇠에는 친절하게도 브리타냐의 언어로 쓰인 쪽지가 꿰어져 있었다. [서재], [집무실], [정찬실]. 쪽지를 펼치자 단정히 눌러 쓴 글자가 보였다.

[전하의 집무실과 서재를 정돈하고, 정확히 12시와 6시에 정찬실에 식사를 준비하도록.]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모르겠다. 그녀의 혐의는 아직 풀리지도 않은 시점이었다. 물론 4층에 감금되어 있고, 앞으로 반입되는 물건들은 모조리 철저한 검사를 거친 뒤일 테니. 비센테를 죽이고 싶어도 죽일 방도조차 없는 게 지금 그녀의 실정이긴 했다.

하지만 독살은 그렇다 쳐도, 첩자 혐의는 아직 받고 있는 게 아니었나? 아직도 모종의 시험 중인 걸까? 이벨린은 앞치마에서 카드를 꺼내 들었다.

[황자 전하], [알다], [이번], [일], [?]

카드에 적힌 낱말은 고작해야 백 개 남짓이었고, 그마저도 하녀의 일에 한정된 단어들이 대부분이었다. 뜻을 전하는 것에는 답답할 정도로 한계가 있었다. 단테가 한 번에 알아듣지 못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그는 미간을 찡그린 채 카드와 이벨린을 바라보고는, 뒤통수를 긁적였다.

“전하께서도 이번 일을 승인하셨냐고? 아니면, 전하께서도 알고 계시냐고?”

고개라도 끄덕일 수 있다면 좋을 텐데. 에스페다의 말은 한마디도 못 알아들어야 하는 상황이니 어쩔 수 없었다.

그녀의 간절한 눈초리를 저 좋을 대로 알아들은 단테는 그녀의 손에서 카드를 받아 들었다. 몇 개를 뽑아 테이블 위에 올렸다.

[황자 전하], [알다], [일], [열심히], [필요 없다]

황자 전하께서도 이번 일에 대해서 알고 있으며, 일을 열심히 할 필요까지는 없다는 뜻으로 해석하면 될 것 같았다. 단테는 고심하더니 그 뒤로 네 장의 카드를 더 붙였다.

[휴식], [저녁], [이동], [아침]

저건 또 무슨 뜻이지? 당혹한 표정으로 단테를 바라보자, 그가 부산스럽게 손짓 발짓으로 뜻을 설명했다.

“낮에는 어디든 가도 괜찮지만, 저녁에는 돌아다니지 말도록 해. 함부로 방 밖으로 나왔다가 암살자로 의심받아도 난 모르니까.”

두 다리를 표현하듯 교차로 움직이던 손가락이 뚝 멎더니, 엄지손가락이 살벌하게도 목을 그었다.

“알겠지?”

언어를 알아들을 수 있어 새삼 다행이었다. 몰랐다면, 돌아다니기만 해도 죽여 버릴 거라고 알아들을 수밖에는 없었을 테니까.

이상한 오해를 하게 할 뻔했으면서 저 혼자 뿌듯한 표정을 짓는 게 딱 해밀턴네 둘째 같았다.

갓 열 살 된 그 천진한 얼굴이 저 우락부락한 생김새와 겹쳐 보일 수도 있다니.

[식사] [하녀] [시간] [맞추다] [올리다]

이제는 카드로 소통하는 것에 재미라도 들린 듯, 연이어 그럴듯한 문장까지 만들었다. 식사는 시간에 맞춰 올리겠다는 소리인 모양이었다. 이번만큼은 알아듣는 게 어렵지 않아서 고개를 끄덕이자 또 한 번 뿌듯한 표정이 돌아왔다.

“이건 또 이거 나름대로 재미가…. 아, 경.”

반쯤 열려 있던 문으로 인기척도 없이 궁의가 쑥 들어왔다. 그가 가까이 오고 나서야 눈치챈 이벨린과 달리, 단테는 진작부터 알고 있었던 듯했다. 별반 놀라지도 않은 태도로 그가 눈썹을 장난스럽게 찡그렸다.

“왜 안 올라오시나 했습니다.”

궁의는 방 안의 분위기를 감지하듯 둘러보고는 입을 열었다.

“해독제가 다 떨어져서 새로 조제해 오느라 늦었습니다.”

“해독제요? 지금은 멀쩡해 보이는데요.”

“겉으로야 멀쩡해도 속은 알 수 없죠. 독이 작용하는 방식도요.”

“…….”

“저래 봬도 브리타냐인이니까.”

뼛속 깊은 차별적 발언이었다. 국경을 맞대고 있는 국가끼리 감정선이 좋기는 쉽지 않기도 하거니와, 에스페다가 강대한 해군력을 바탕으로 제국의 반열에 올라선 후부터는 브리타냐에 대한 공공연한 무시가 사회적으로 만연했다.

그렇다고 한들 대놓고 드러내는 경우는 교양이 없거나 무례하다고 여겨지기 마련인데, 이벨린이 알아듣지 못한다고 판단한 뒤라 거리낌조차 없었던 모양이었다.

“경. 언행을 조심하셔야 할 겁니다.”

괜시리 당황한 단테가 이벨린의 눈치를 살피며 끼어들었다. 그녀가 알아듣지 못한다는 것조차 일순 잊어버린 것처럼. 궁의는 그의 반응에 어깨를 으쓱하며 대꾸했다.

“어차피 저 여자는 알아듣지도 못할 텐데요.”

“…전하께서 그 언행을 아신다면 좋아하진 않으실 겁니다.”

“뭐, 만약 에스페다인이었다고 해도 약은 먹었어야 할 겁니다. 적어도 일주일은 더요.”

단테야 안절부절못했지만, 궁의의 퉁명스러운 태도는 이벨린에게 적잖은 안심을 주었다. 황자의 부관 앞에서도 공공연히 반감을 드러내는 작자였다.

그 말인즉, 그녀가 독살을 당한다면 가장 유력한 용의자로 지목될 확률이 높다는 뜻이었다. 그럼에도 제 속내를 숨기지 않는 걸 보면 적어도 해독제엔 장난치지 않은 모양이었다.

‘차라리 대놓고 이빨을 드러내는 사람은 귀엽지.’

이벨린은 궁의가 알면 기함할 생각을 태연하게 해 대며 웃었다. 그러자마자 별스러운 것을 보는 것 같은 눈초리가 곧바로 날아들었지만.

“자.”

이벨린은 그의 지시대로 혀를 내밀고, 체온을 재고, 이상한 나무 조각을 물고, 심장의 박동을 청진했다. 한차례의 진료가 마무리되자 그가 해독제가 담긴 그릇을 내밀었다.

몇 번을 마셔도 익숙해지기 힘든 끔찍한 맛이었다. 그녀가 오만상을 찡그리며 약 그릇을 비우자, 궁의가 대뜸 사과가 담긴 바구니를 내밀었다.

“아, 그리고 이 사과. 웬 하녀가 부탁하더군.”

“…하녀가요?”

“브리타냐어를 할 줄 알아서 그런지 이 애와 친분이 있었던 모양입니다.”

하녀 중 브리타냐어를 할 수 있다고 공공연히 알려진 사람은 몇 되지 않았다. 할 줄 알아도 감추고 있는 사람을 제외한다면 고작해야 서너 명쯤….

이벨린이 그들 중 누구와도 이렇다 할 친분이 없는 것을 고려하면, 단순히 그녀의 회복을 바라는 선물은 아닐 터였다. 그렇다면 답은 하나뿐이었다.

귀부인.

[…….]

바구니의 가장 밑에는 모르긴 몰라도 귀부인이 제게 전하는 말이 숨겨져 있을 확률이 컸다. 우체부가 다녀간 게 엊저녁이었으니, 고작해야 하루도 지나지 않아 답신을 보내온 것이다. 빨라도 지나치게 빨랐다. 혹시 ‘귀부인’이 현재 폰페라다 궁의 근방에 머무는 걸까?

“사과라니. 이거야말로 횡령의 정황이 아닙니까?”

궁의로부터 바구니를 건네받은 단테는, 가장 위에 올려진 사과 몇 알을 들춰 보았다. 그녀는 저도 모르게 힘이 들어가기 시작한 손을 가까스로 폈다.

“궁에 물자를 조달하는 상인에게 개인적으로 부탁하는 경우가 있는 모양이더군요.”

“알 만하군요.”

단테는 이윽고 흥미를 잃은 것처럼 바구니를 그대로 테이블 위에 올려 두었다. 챙겨 온 짐 가방을 모조리 갈무리한 궁의는 금방이라도 나갈 것처럼 일어서더니, 문가 근처에서 쭈뼛거리며 단테를 돌아보았다.

“아. 그러고 보니….”

“예. 말씀하십쇼.”

“전하께서는 어디 계십니까? 안 그래도 저번에 처방해 드렸던 약이 떨어지셨을 참이라.”

말을 끝낸 궁의가 몸을 돌렸던 터라, 이벨린은 단테의 일그러진 얼굴을 가감 없이 마주할 수 있었다.

찰나의 순간 머물렀던 그 강렬한 감정은… 놀랍게도 혐오감이었다.

그녀가 눈만 깜박이는 사이에, 평소처럼 웃음을 되찾은 단테가 앞장서서 문고리를 잡으며 말했다.

“제가 전하께 모셔다드리죠.”

그는 문을 닫는 그 순간까지도 이벨린과 문밖을 번갈아 가리키며 목 앞에서 손을 긋는 시늉을 해 보였다. 다른 건 몰라도 지금 이 순간부터 방 밖으로 나서지 말라는 소리라는 것쯤은 알겠다.

이벨린은 그들의 발소리가 멀어질 때까지 기다렸다가 사과 바구니를 침대 위에서 뒤집었다.

우르르 쏟아진 사과들이 흰 침대보 위에 아무렇게나 쏟아졌다.

그러나 기대했던 쪽지는 어디에도 없었다. 손으로 직접 사과들을 하나씩 눌러 봤지만, 흠이 나 있거나 속이 빈 사과도 없었다.

이벨린은 양손으로 머리를 짚었다. 착각이라고? 하지만 이 성안에서 누군가 굳이 제게 사과를 보낼 이유가 없는데?

정말 친분을 쌓기 위해서였다면, 누가 주었다는 말이라도 전해야 했다.

문득, 그녀의 시선이 바닥에 나동그라진 바구니에 닿았다. 홀린 듯 바구니를 뒤집자, 바닥에 깔아 두었던 손수건이 한 장 떨어졌다.

처음에는 그저 그런 손수건인 줄 알았는데 자세히 살펴보니 얇은 재질 두 장을 겹쳐놓은 듯했다.

이벨린은 천들 사이에 버석거리는 작은 무언가가 들어있다는 것을 눈치챘다. 페이퍼 나이프로 손수건을 찍듯이 찢자, 종잇조각이 만져졌다.

그녀는 서둘러 쪽지를 펼쳤다.

이틀 뒤. 새벽 3시. 서쪽 테라스. 밧줄을 가져올 것.

쪽지를 읽자마자 떠오른 건 단테의 얼굴이었다. 목 앞에서 손가락을 긋던 그 우스꽝스럽기까지 했던 순간의 얼굴이. 장난스럽게 느껴졌던 그 눈초리가 기억 속에서 조금 더 살벌한 형태로 변질되었다.

황족 시해, 그리고 첩자 혐의.

둘 중 하나의 혐의만 받아도 당장에 지하 감옥으로 끌려가야 할 상황이라는 걸 고려하면, 지금 그녀가 받는 대우는 너그럽다 못해 파격적이었다.

물론 독살 혐의로 정작 몸이 상한 건 이벨린 자신이었고, 첩자 혐의도 말 그대로 혐의일 뿐이기는 했지만.

수년간 접촉했던 사람이나 과거를 탈탈 뒤집어 털어도 마땅한 증거조차 찾아내지 못했을 테니 애매한 감시로나 만족하는 수밖에 없었을 터였다.

‘아무리 찾아봐도 별다른 혐의점을 찾아낼 순 없었을 테니까.’

인쇄소 사장은 귀부인이 큰돈을 주며 잠적시켰고, 수도원에서는 그녀가 번역 일을 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이 없었다.

에스페다의 언어를 배운 정황도, 흔적도 찾지 못할 테니 거기서부터 막히는 것이다. 언어를 모르는 첩자라니, 그 얼마나 허무맹랑한지.

어쨌든 이런 상황에는 숨죽인 채 따르는 모습을 보이는 게 최선이었다. 황자와 시종장에게는 순순한 하녀의 모습을, 귀부인 쪽에는 잃었던 신뢰를 되찾으려고 노력하는 시늉이라도 해야 했다.

어차피 이제 그녀에게 필요한 건 코라가 안전해질 조금의 시간이었다.

이벨린이 양손 가득 청소 도구를 들고 다가서자 단테가 집무실의 문을 잡아 주었다. 이제 황자의 부관들은 보다 더 적극적으로 이벨린을 감시했다.

“들어가 봐.”

이벨린은 대충 고개를 끄덕이곤 집무실로 들어섰다. 워낙 깔끔하게 관리되었던 터라 손이 많이 가지는 않았지만, 일이 능숙하지 않았던 탓에 시간은 오래 걸렸다.

창문을 활짝 열어 환기를 하고, 커튼의 먼지를 털고, 벽난로의 재를 치우는 일만으로도 반나절이 훌쩍 지나갔다.

곧 점심을 준비할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이벨린은 서둘러 집무실의 책상을 젖은 행주와 마른행주로 번갈아 닦았다. 정원사가 아침에 꺾어 올려 둔 꽃을 화병에 담아 올리는 것으로 정리는 얼추 끝이 났다.

그녀는 재투성이가 된 의복을 정돈하고, 앞치마를 깨끗한 것으로 바꿔 맸다. 계단까지 가는 발걸음이 초조했다.

“아, 저기 오는군요.”

곤란한 얼굴로 4층의 초입에 붙들려 있던 시종의 얼굴이 그녀를 발견하고 곧장 환하게 펴졌다. 트롤리를 끌고 왔다가 출입이 통제되어 붙잡혀 있었던 모양이었다.

허리를 숙인 채 트롤리에 담긴 내용물들을 꼼꼼히 살피던 루카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때마침 확인이 끝난 모양이었다. 이벨린은 시종으로부터 트롤리를 넘겨받았다.

원체 묵직하기 때문인지 밀 때마다 몸이 다 휘청거리는 느낌이었다. 고작 열 걸음 남짓 걷는 동안에도 벽에 서너 번은 박을 뻔했다. 그나마 정찬실이 가까워서 망정이지….

거의 문을 들이박을 기세였던지라, 기겁하며 다가온 루카스가 정찬실의 문을 붙잡아 주었다. 고마운 일이었지만, 감사의 인사를 할 정신조차 없었다. 이벨린은 트롤리를 정찬실의 거대한 테이블 옆에 붙였다.

시종장이 당부했던 12시까지는 고작해야 몇 분밖에 남지 않았다. 그녀는 서둘러 트롤리에서 빈 접시와 포크, 나이프를 순서대로 꺼내 내려놓았다.

위화감은 첫 번째 접시의 덮개를 열었을 때부터 들었다.

“…….”

그녀는 서둘러 다른 접시들도 확인했다.

오리 간 파테, 시큼한 냄새가 날 정도로 진한 토마토 소스를 곁들인 에스토파도 데 바카, 고추가 들어간 매콤한 엔살라다와 피가 뚝뚝 떨어지는 송아지 요리.

준비된 음식들은 하나같이 오찬으로 즐기기엔 과했다.

아무리 비센테가 황족이라고는 하지만, 평생을 전선에서 보낸 사람이었다.

입맛이 까다롭다면 군대에서 버틸 수 있을 리가 없었던 데다가 믿을 만한 소문에 따르면 그의 입맛은 검소한 편이었다.

아니, 애초부터 이렇게까지 조리가 과할 필요가 있나.

에스페다인들이 브리타냐인들보다 짜고, 매운 것을 즐기기는 하지만, 오찬까지는 간소한 음식들을 즐기는 편이었다.

이건 마치 맛이나 향을 의도적으로 감출 필요라도 있는 것처럼….

묵직한 정찬실의 목문이 부드럽게 열리는 소리에 이벨린은 이어지던 생각에서 깨어났다.

정찬실 안으로 들어선 비센테는 이벨린이 보이지도 않는 것처럼 지나쳐 자리에 앉았다. 그녀는 시종장의 주의대로 얌전히 고개를 숙이며 벽 쪽으로 몇 걸음 물러섰다.

시중을 드는 하녀의 본분은 주인이 식사를 마칠 때까지 정물처럼 서 있는 것이 전부였다.

“저, 전하. 들어가겠습니다.”

열린 문이 닫히기 직전에 궁의가 허둥지둥 뛰어들 듯 방 안으로 들어섰다. 비센테는 느릿하게 물잔의 물을 한 모금 마셨다.

“늦었군.”

“아무래도 제조법이 바뀌다 보니 까다로워서… 늦어 송구합니다.”

“그래서, 가져온다는 것은?”

비센테가 접시 위의 요리들을 나이프로 자르며 부드럽게 물었다.

“아.”

곁눈으로 비센테가 손댄 접시들을 흘긋거리던 궁의가 그제야 생각났다는 듯 제 가죽 가방을 열었다. 그가 작은 유리병을 꺼내 비센테에게 공손히 내밀었다.

이벨린은 병에 담긴 것이 무엇인지 확인하고 싶었으나, 고개를 숙인 상태에서 볼 수 있는 시야는 한정되어 있었다.

궁의가 한껏 목소리를 낮춘 채 말했다.

“매번 드시던 것에서 조금 더 함량을 높여 준비했습니다. 씹어 삼키는 종류고, 효과는 전보다 빠를 겁니다.”

“얼마나.”

“드신 후 20분이면 충분합니다.”

“카스트로가 이번에도 어지간히 노력했겠어. 에스페다에선 구할 수도 없는 것을, 매번 이렇게.”

“…….”

“그런 표정 할 것 없어. 적어도 이것만큼은 사촌에게 감사하고 있으니까.”

이벨린은 그가 모든 접시의 음식들을 딱 한 입씩만 먹고 있다는 것을 눈치챘다. 이윽고 식기를 내려놓은 그가 냅킨으로 입술을 닦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의자가 바닥을 부드럽게 긁는 소리가 들렸다. 궁의가 눈을 둥그렇게 뜨며 곧장 참견했다.

“벌써 다 드셨다고요?”

“입맛이 없어서.”

“다음부터는 주방장에게 전하의 입맛에 좀 더 맞추라고 주의라도 줘야겠군요. 이렇게 드시다간 몸이 버티시질 못할 겁니다.”

그가 낮게 웃는 소리가 들렸다.

“그럴 필요 없이 편히 살피도록 해.”

이어 말하는 목소리는 다소 냉랭했다.

“매번 식당에서 내가 무엇을 얼마나 주워 먹었는지 확인하는 것도 번거로웠을 테니까.”

“전하! 대체 무, 무슨 말씀을!”

“…….”

“그건, 정말 저를 매도하시는 겁니다. 오해십니다!”

“오해가 아니라고 해도 내가 어쩔 수 있는 것도 아니지. 안 그런가?”

그의 목소리는 일견 다정하게까지 들렸다. 가까워지는 구두 소리에 이벨린은 반사적으로 고개를 들었다.

어느새 그녀의 앞까지 다가온 비센테가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아.”

그제야 이벨린은 제가 문을 가로막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정찬실에서 만난 이래로 그와 처음 시선이 마주쳤다는 것도.

“…….”

그리고 그는 그대로 이벨린을 지나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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