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9화 (19/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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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독제를 마신 지 세 시간쯤 지나자 부은 성대가 돌아왔고, 차갑던 손발에도 온기가 돌았다. 주치의로부터 운신하는 데 무리가 없으리란 확답을 받자마자 이벨린은 비센테의 침실에서 빠져나왔다.

    딱히 그녀를 저지하는 사람이 없는 것을 보면, 비센테로부터 별다른 언질은 없었던 모양이었다.

    그녀의 예상보다도 변명이 잘 먹힌 것 같았다. 그러고 보면 비센테는 유독 여자와 얽히는 것을 경계했던 것 같다. 사내들과는 곧잘 어울리면서도, 여자들은 가까이하지도, 그들에게 무엇도 함부로 약속하지 않았다.

    심지어 고작해야 사교 철의 춤 한 번, 에스코트 한 번조차.

    그런 사내이니 제 침대에 누워서 좋다고 얼굴을 붉히는 여자는 끔찍하겠지. 당분간 얼굴조차 맞대기 싫을 것이다. 이제 카드를 미리 준비해 두었던 것에 대한 변명만 잘 생각하면, 어떻게든 이 상황을 무사히 넘길 수 있을 것이다.

    “아, 그쪽이 아니야.”

    희망차게 계단으로 향하는 이벨린의 팔을 단테가 붙잡아 당겼다.

    ‘그쪽이 아니’라니? 4층으로 이어지는 계단은 하나뿐이었고, 당연하게도 하인들의 숙소로 가려면 저곳을 지나야 했다. 의아하게 바라보는데 단테가 어깨를 으쓱하며 말을 이었다.

    “오늘부터 하인들 숙소에는 갈 필요 없어.”

    희망에 부풀었던 마음이 급작스럽게 쪼그라들었다. 그런 말을 듣고도 설마 그녀를 침실에 들이겠다는 정신 나간 계획을 시행하겠다고? 나가는 걸 막지 않을 땐 언제고?

    얼떨떨하게 눈을 깜박이고만 있자, 단테가 뒷머리를 벅벅 긁었다.

    “아. 듣자 하니, 말을 못 한다고 했던가?”

    […….]

    에스페다의 말을 모른다는 것에서, 말을 못 하는 것으로 어느새 처지가 변질된 모양이었다. 아니면 제 주인처럼 상황을 좋을 대로 해석해서 받아들이는 종자이거나.

    예측 범위를 벗어난 상황 탓에 이벨린의 눈이 어느새 날카로워졌다. 그 표정조차 제멋대로 해석한 단테가 씩 웃으며 말을 이었다.

    “그렇게 볼 거 없어. 전하께서 네게 새로운 거처를 마련해 주셨으니까.”

    […….]

    “뭐, 네 입장에선 아쉬운 일일 수도 있겠지만.”

    …저런 걸 농담이라고 한다. 한심하다는 눈초리에도 단테는 조금도 기죽지 않았다. 비센테가 가장 가까이에 두는 평민 부관이라더니, 귀족들에게 눈칫밥을 먹다 못해 있던 눈치마저 아예 사라진 모양이었다.

    “따라와.”

    단테는 오른쪽 팔을 앞으로 휘저으며 따라오라는 시늉을 했다. 그의 얄미운 등을 노려보던 이벨린은 터덜터덜 그의 뒤를 따라갔다.

    독을 먹은 후유증인지, 정신이 지나치게 피로했다. 그냥 아무 생각도 하지 않고 쉬고 싶었다. 쉬면서 앞으로의 계획도 점검하고, 마리아나 귀부인에게 어떻게 둘러댈지도 생각하고….

    물론, 그 전에 수녀님으로부터 편지를 받는다면 더 좋겠지만.

    ‘저번에 보냈던 돈에, 이번에 받은 돈까지 보내면 얼추 마련될 테니까.’

    못내 아쉬운 건, 귀부인이 붙여 준 의사의 실력이 제법 좋다는 점이었다. 욕심대로라면 코라의 상황이 조금 더 나아질 때까지 이대로 유지하고 싶었지만, 애초부터 비센테의 의심을 산 제 잘못이었다.

    차라리, 처음 계획대로 시종장의 눈에나 들었으면 모든 게 편했으리라.

    “여기야.”

    단테는 금방 멈춰 섰다. 계단과 바짝 붙은 문 앞이었다. 황족들이 머무는 공간답게 방 하나조차 일개 하녀가 쓰기엔 지나칠 정도로 컸다.

    이벨린은 응접실에 개인 욕실까지 달린 공간을 감흥 없는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래 봐야 결국 겉만 그럴듯해진 감옥이나 다름없었으니까.

    “자, 네 짐은 여기.”

    침실 안으로 쑥 들어갔던 단테가 가죽 가방을 가지고 나오며 말했다. 언제 또 제 숙소에 다녀왔던 모양이었다.

    “이거 말고 더 가져올 짐은 딱히 없어 보이던데. 다 가져온 게 맞는지 확인해 봐.”

    이벨린은 슬쩍 가방을 열고 안의 내용물을 살폈다. 어차피 꼬투리가 잡힐 만한 물건들은 애초부터 들고 오지도 않았다. 단출한 옷가지 몇 벌이 전부였는데, 접힌 방향이 미세하게 다른 걸 보니 이미 수색을 끝낸 모양이었다. 이벨린은 내색 없이 고개를 들었다.

    “계단 바로 아래로 내려오면, 나랑 루카스가 머무는 숙소가 있어. 당분간 필요한 게 있으면 우리에게 말해.”

    그녀는 알아듣지 못하는 것처럼 미간을 찡그리고, 앞치마에서 카드를 꺼내 들었다.

    [4층] [왜] [머물다] [?]

    “네가 왜 4층에 머물러야 하냐고?”

    단테의 주근깨 박힌 천진한 콧대가 곤란한 듯 씰룩거렸다.

    “일단은 네 혐의에 대해 조사 중인 것으로 알려져 있어. 어쨌든 전하께 독을 가져다 바친 건 너니까…. 알아듣긴 하는 건가?”

    이벨린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그의 손에 카드 더미를 떠밀었다. 앞으로도 계속 얼굴을 마주할 모양이니, 적당히 연막을 쳐 두는 편이 좋을 것이다. 그는 한참 동안 카드들을 이리저리 살펴보고는 이내 적당한 단어를 조합해 내밀었다.

    [우선] [여기] [기다리다]

    단테는 조금 머뭇거리다가 한 장을 더 빼 들었다.

    [휴식]

    “알겠지? 일단 지금은 처리해야 할 일이 좀 있어서. 잠깐 기다리고 있어.”

    그러고는 곧장 방을 나섰다. 단테의 인기척이 멀어지자마자 이벨린은 가장 먼저 문부터 확인했다. 잠가 두었을 것이라는 예상과 달리 문고리는 부드럽게 돌아갔다. 나서서 복도를 몇 걸음 돌아다니는 동안에도 제지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도대체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 건지.

    의사소통을 제대로 할 수 없는 척하는 건 생각보다 큰 제약이었다. 캐물을 수 없으니, 상황에 대해서 일방적으로 주어지는 정보로 짐작하는 수밖에는 없었다.

    이벨린은 방 안으로 돌아와 티 테이블에 앉았다. 가방 속에서 종이와 깃펜, 그리고 잉크를 꺼내 들었다. 머리가 복잡할 때 써서 정리하는 건 그녀의 오래된 습관이었다.

    브리타냐어와 에스페다어를 제외하고, 그녀가 읽고 쓸 수 있는 언어 중엔 상스의 고대어도 있었다. 어차피 쓴 즉시 태워 버릴 테니, 무슨 언어로 써도 상관없었다.

    이벨린은 벽난로를 흘끗 바라보고는 깃펜에 잉크를 듬뿍 묻혔다.

    첫 번째, 비센테. 그에게 솔직해서 얻을 이득이 없다. 코라의 안위는 그가 해결해 줄 수 있는 부분도 아니고, 그의 성품대로라면 그녀까지 지키려 들 가능성이 있었다.

    최선은 지금처럼 머리 나쁜 하녀 연기를 계속하는 것. 사적인 동기에 의해 충동적으로 움직이는 모습을 보고 의심을 좀 거둬 주면 좋을 텐데.

    두 번째, 마리아. 단검과 독 사태의 주범. 이것만 아니었어도 그녀가 비센테의 눈에 드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짜증스러운 것과는 별개로 이제는 정말 내버려 둘 수 없었다. 그녀가 의식을 잃고 쓰러진 사이에 얼마나 더 미친 짓을 벌였을지는 가늠조차 안 되었다.

    세 번째, 귀부인. 가장 최악은 귀부인이 마리아의 말과 판단을 맹신하는 상황이었다. 그녀가 가져다준 정보가 쓸모없다고, 분별없이 2황자에게 홀렸다고 생각한다면….

    어쩌면 그녀를 잘라 내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화풀이까지 고려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이제 그녀가 살 방법은 하나뿐이었다. 어떻게든 마리아를 거치지 않고 귀부인과 연락할 방도를 찾아내는 것.

    하지만 어떻게 그게 가능하단 말인가. 그녀는 귀부인의 주소는커녕, 이름조차 모르는데. 편지라도 보낼 수 있다면 좋겠지만…. 망연히 뻗어 나가던 공상이, 가까스로 어떤 생각에 미쳤다. 이벨린은 의자에 느슨히 기댔던 등을 곧추세웠다. 다시금 펜을 잡는 손끝이 떨렸다.

    ‘잠깐만….’

    어쩌면 있을 것도 같았다. 귀부인에게 연락할 방법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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