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8화 (18/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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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흣….”

    그녀는 느릿하게 신음했다. 흐릿했던 의식이 선명해지자마자, 낯선 풍경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어딘지 모르게 스산한 공간이었다. 공기 중에 부유하는 냄새마저 서늘했다. 지끈거리는 두통에 그녀는 머리부터 짚었다. 대체 이곳에 어디인지 가늠이 어려웠다. 조금 전까지 화려한 연회장이며, 정원에 있었는데.

    기억은 조금 느릿하게 돌아왔다. 마리아와 독, 비센테, 그리고 그녀의 몸인 이벨린…. 살았다. 모든 것이 기억나자마자 가장 먼저 든 생각은 그것이었다. 뒤이어 목과 식도에 불타는 것 같은 통증이 느껴졌다. 화상이라도 입어 짓무른 것처럼. 후유증은… 장담할 순 없겠지만 영구적이진 않을 것이다.

    치사량에 이르지 않도록 독의 양을 세심하게 조절했으니까.

    마리아가 원한 것은 내일 중으로 비센테에게 차를 가져다 바치는 것이었고, 두 번의 기회 중에서 기사단장이 있는 시간을 고른 것은 이벨린의 선택이었다.

    비센테만을 믿기에는 위험 부담이 컸다. 눈앞에서 사람 한둘이 죽어 나가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을 사람이라는 것을 이젠 알았으니까. 그러니 증인이라도 있다면 완전히 외면하지는 못하리라는 계산이었다.

    그리고 그 계산이 맞았다는 것은, 그녀가 여태 살아 있다는 것으로 증명했다.

    “아….”

    쉬고 부르튼 목은, 침을 삼킬 때마다 칼날을 삼키는 것 같았다. 그녀는 통증에 익숙해지기 위해 일부러 더 침을 삼켰다. 정신이 조금쯤 돌아오자마자 고개를 가누었다. 창문을 통해 새파란 빛이 들어오는 것을 보니 새벽인 모양이었다.

    그런데 정말로 대체 여기는 어딜까?

    폰페라다 궁에 한 달가량을 머물면서 어지간한 장소엔 익숙해졌다고 생각했는데, 이곳은 조금도 짐작 가지 않았다. 독을 마실 때는 그녀의 하인실이나, 병실로 옮겨질 것을 예상했는데. 여기는 둘 중 어느 곳도 아니었다.

    이벨린은 시선을 조금 더 멀리로 옮겼다. 불길하게도 방 안에 고풍스러운 가구들이 배치되어 있는 게 보였다.

    깔고 누운 침대와 이불조차 범상치 않다고. 마치, 대귀족이나 황족들이 쓰는 것 같다고 생각한 순간, 등줄기에 선득한 소름이 돋았다.

    거기까지 생각이 닿은 이벨린이 파드득 떨쳐 일어나려던 찰나였다.

    “누워 있어.”

    갑자기 들려온 목소리에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그녀가 엉거주춤한 채로 멈추자, 비센테가 그녀의 어깨를 붙잡아 침대로 내리눌렀다.

    “이틀간 꼬박 잠들어 있었어. 그렇게 움직였다간 몸에 무리가 가.”

    푹신한 침대에 등이 다시금 처박히기 무섭게, 그가 어깨를 잡아 누르던 손을 풀었다. 잠깐 맞닿았던 것조차 큰 인내가 필요하다는 양, 다소 급하게.

    가만히 올려다보는 시야에 그의 냉막한 얼굴이 보였다. 어둠 속에서도 새파랗게 빛나는 보랏빛 눈동자. 비스듬히 기울어지는 입매.

    조금 전까지 그의 꿈을 꾸었던 탓인 걸까? 어쩐지 그와 얼굴을 마주하고 있다는 것부터가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그녀는 조금쯤 얼떨떨하게 비센테를 마주했다. 그나마의 현실감이라면, 머리부터 발끝까지 완벽하게 차려입었던 꿈속과는 달리 그가 조금 더 느슨한 차림새를 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여전히 얼굴만은 조각처럼 대단히 근사하기는 하지만….

    “차라리 이쯤 되었으니, 서로 속 터놓고 이야기해 보는 게 어때?”

    그의 목소리에 순식간에 날이 섰다.

    속을 터놓고 이야기해 보자니, 대체 무엇을?

    내가 사실 죽은 엘레나고, 모종의 이유로 이 여자의 몸속에서 깨어났어. 동생이 있는데 친혈육은 아니지만 아껴. 그 애의 목숨이 인질로 잡혀 있어서 함부로 행동할 수 없어. 나는 너에게 받은 은혜를 갚기 위해 여기까지 온 거야. 널, 지키려고.

    …진실은 가끔 거짓보다도 더 허무맹랑했다.

    비센테 앞에서 저 말을 순진하게도 입에 올리는 순간, 곧바로 미친 여자로 몰릴 게 분명했다. 정신 병원에 끌려가지나 않으면 다행일 것이다. 어쩌면 수도원에 감금될지도 모르지. 마녀로 몰려 화형대에 세워지거나. 그녀는 에스페다 사람들의 신실한 신앙심과 보수적인 면면을 누구보다도 잘 알았다.

    더구나 비센테. 장성한 그와 대화를 나눈 적은 드물었지만, 그 한결같은 성품만은 사교계에서 소문으로 들어 익숙했다. 그의 신실함이나, 군법을 황명처럼 준수하는 엄격함, 원칙주의자, 절제된 기사도, 담백한 성품…. 모르긴 몰라도 그녀의 진실에 유연한 반응이 나오지 않으리란 것쯤은 본능적으로 알았다.

    게다가, 죽은 엘레나의 망령을, 그가 기꺼워나 할까….

    “널 사주한 자가 누구지?”

    그녀의 거듭된 침묵에 비센테가 다시금 입을 열었다.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는 손길에서 성가셔하는 짜증이 묻어났다.

    “네게 독을 건넨 사람의 이름을 말해. 어쭙잖은 연극은 집어치우고.”

    이벨린은 고집스럽게 입을 다물었다. 어디까지 눈치챘을까. 혹은, 어디까지 짐작했을까…. 서로를 탐색하는 시선이 아닌 척 맞부딪쳤다. 짧은 대치 끝에 그 눈을 버티지 못하고 먼저 피한 것은 이벨린이었다. 긴 침묵 후에 툭, 툭 무언가를 규칙적으로 두드리는 소리가 울렸다.

    “기사단장 앞에서 보여 준 쪽지는 기발했지. 마치 늘, 나를 위해 그랬던 것처럼.”

    굳이 고개를 돌려 확인하지 않아도 상황은 머릿속에 훤히 그려졌다. 근래 그와 마주할 일이 잦아지며 비센테에 대한 일방적인 이해가 어느새 부쩍 깊어진 탓이었다. 고민이 길어질 때면, 손가락으로 무언가를 두드리는 게 그의 버릇이라는 걸 알 만큼은.

    “정작 네가 우린 차를 내가 마신 적 없다는 걸, 네가 모를 리는 없고.”

    툭.

    “그러니 날 살리기 위해서라는 건 말이 안 되지.”

    툭.

    “나 대신 차를 마시는 게 불가피했다는 걸, 대체 누구에게 보여 주려던 걸까….”

    혼잣말처럼 읊조리고 있지만, 실상은 다 저 들으라는 말이나 다름없었다.

    “협박을 받고 있나?”

    놀라울 정도로 핵심을 짚는 말에, 이벨린은 저도 모르게 이불 속에서 손을 꽉 맞잡았다. 고집스럽게 시선을 피하자 문득, 의자를 끄는 소리가 들렸다. 발걸음이 가까워지더니 그의 체중만큼 침대의 끄트머리가 주저앉는 게 느껴졌다.

    “그런 거라면 쉽지.”

    감히 시선을 피하는 게 괘씸하다는 듯, 그의 손가락이 그녀의 턱을 받쳐 들었다. 닿은 것이라곤 고작 손가락 한 마디인데, 밀려드는 긴장감에 온몸이 순식간에 뻣뻣하게 경직되었다. 초조한 손끝에서 값비싼 원단의 이불이 뭉그러졌다.

    차라리 황실의 그 악명 높은 취조실이 나았을 것이다. 이렇게 내밀한 공간보다는.

    “네 배후에 대해 아는 대로 말한다면, 무엇이든 해결해 줄 수 있어.”

    길어진 그림자가 그녀를 뒤덮었다. 잡아먹히는 것 같은 느낌에 이벨린은 덜컥 눈을 감았다. 심장이 감당하기 힘들 정도로 빠르게 뛰었다.

    “네가 충성할 상대를 바꾸기만 한다면, 정말 무엇이든.”

    거짓말. 저건 거짓일 수밖에 없었다.

    제가 조금만 황궁의 생리에 대해서 몰랐다면 그의 제안에 아마도 분별없이 홀렸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좋든 싫든 평생을 카스트로와 가까이 지냈고, 황궁의 유폐를 직접 겪어본 바 있었다.

    황제와 황태자의 기사들이 얼마나 집요한지. 그들의 감시가 얼마나 숨 쉴 구멍조차 없는지.

    그의 능력이 아무리 출중하다고 해도, 전 제국을 상대로는 어림없는 일이었다.

    […….]

    게다가 진실을 말한들 그가 믿기나 할까. 도박에 ‘이벨린’의 목숨을 걸었던 것도 죄스러운데, 코라의 목숨까지 걸 수는 없었다. 아직은 무엇도 안 되었다.

    적어도 틸리 수녀가 안전한 거처를 마련하고, 코라의 안전이 확보될 때까지는.

    “고민해 봐. 하지만 서두르는 게 좋을 거야. 네가 좋든 싫든, 이미 넌….”

    드물게도 말끝을 흐린 그가 진지하게 권유했다.

    “내가 직접 알아내기 전에 그 입으로 밝히는 게 좋을 거야. 그편이 협상에서 좋은 위치를 선점할 테니까.”

    […….]

    “그러니 부디 현명한 선택을 해, 베네딕트 양.”

    똑똑.

    “전하. 단테입니다.”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문 바깥에서 인기척이 났다. 비센테의 체중으로 기울었던 침대가 원상태로 돌아오는 것이 느껴졌다. 꼭 감았던 눈을 뜨자, 열린 문으로 비센테의 부관과 주치의가 함께 들어오는 것이 보였다.

    “무슨 일이지?”

    “의사 양반이 해독제를 완성했다기에 데려왔습니다. 지금쯤 하녀가 의식을 차렸을 거라고 하더군요.”

    “몇 분 전 의식을 차렸다. 살펴봐.”

    “…….”

    “부디 후유증은 남지 않았으면 좋겠군.”

    제법 애틋해 보이는 눈빛에 기가 막혔다. 태도를 손바닥처럼 뒤집는 게 아주 익숙해 보였다. 그녀의 귓가엔 배신을 종용하던 그의 목소리가 아직도 선명한데.

    독의 후유증으로 멍한 머리로도 대충 상황을 짐작할 수 있었다. 이제야 하인들의 숙소가 아닌, 그의 침대 위에 보란 듯이 전시해 둔 이유를 알겠다. 그녀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배신자의 낙인을 뒤집어씌울 작정인 것이다.

    ‘이벨린의 배후’에게 보여 주기 위해.

    “고민해 봐. 하지만 서두르는 게 좋을 거야. 네가 좋든 싫든, 이미 넌….”

    사교계에서 도는 소문들의 태반은 틀렸거나, 그를 잘 알지도 못하는 자들이 낸 소문이 분명했다. 그는 교활하고, 영리했으며, 제가 사람을 매혹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는 자였다. 눈빛과 목소리, 오만하게 느껴질 정도로 자신만만한 태도…. 분별없이 사람을 홀리고, 그렇게 홀린 사람을 제 뜻대로 움직여 본 자만이 가지는 저 여유.

    “그럼, 쉬도록 해.”

    그 말에 이벨린은 고개를 번쩍 들었다. 이대로 대화를 끝내서는 안 되었다. 이 대화의 흐름대로라면 비센테는 이벨린을 제 여자인 양 공표할 것이다. 그가 그리는 계획대로 이용해 먹기 위해서. 그 생각만은 어떻게든 깨야 했다.

    그게 전혀 좋은 선택이 아니라고, 그녀에겐 그가 짐작했던 것과 같은 대단한 동기가 없고, 독을 알아차린 건 우연이었고, 전혀 쓸모가 없다고….

    [전하.]

    이벨린은 서둘러 몸을 일으켰다. 비센테가 방문을 나서기 직전, 가까스로 입술을 뗐다.

    [하시는 말씀을, 조금도 이해하지 못해 송구해요. 저는 머리가 나빠서 에스페다어는 한마디도 하지 못해요. 그저 제게 말을 걸어 주시는 게 듣기 좋아서, 결례라는 생각을 미처 하지도 못했어요.]

    “…….”

    [하지만 전하께선, 브리타냐어를 아실 테니까….]

    잔뜩 부은 성대 탓에 목소리는 예상보다도 더 형편없게 들렸다. 이벨린은 가까스로 목소리를 돋웠다.

    [좋아해요. 제가 전하를, 아주 많이요.]

    독을 마신 후유증 때문인지 미열이 돌았다. 그게, 그녀의 뺨을 상기된 것처럼 보이게 만들었다.

    [차라리 전하 대신 제가 죽어야겠다고, 그렇게 생각할 정도로요.]

    “…….”

    [절 침실로 들이셨다는 건 같은 마음이라고 생각해도 될까요?]

    언제나 거짓은 한 줌의 진실로 가리는 것이 더 그럴듯하게 들린다. 이벨린은 간절한 눈으로 비센테를 바라보았다.

    그래, 아직은 일렀다. 모든 것을 털어놓기에도, 배신자가 되기에도. 코라가 안전해진 뒤라면 어떤 비난이든 얼마든지 짊어질 테니.

    “…….”

    매혹적으로 가늘게 접힌 눈매, 그 사이로 보이는 청보랏빛 눈동자. 그 기저에 분노인지, 흥미인지 모를 불티가 자글거렸다. 황자는 사람을 홀린다는 전설 속 마물의 피라도 뒤집어쓴 모양이었다. 그와 눈이 마주칠 때마다 숨이 막히고 뱃속이 꽉 조여드는 걸 보면.

    비센테는 대답 없이 문을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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