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엘레나.”
깜박 잠이 들었던 모양이었다. 감았던 눈을 뜨자 곧장 흔들리는 마차 안이었다. 엘레나는 얼떨떨하게 주변을 둘러보았다. 내려진 휘장에는 금사로 카스타야의 매 문양이 수놓아져 있었고, 그녀의 발치까지 늘어진 망토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대로 시선을 돌리자 흐릿한 창문에 그녀의 모습이 비쳤다. 하얀 드레스와 손목을 뒤덮는 레이스 장갑, 다이아몬드 목걸이와 티아라, 그리고… 어쩐지 한참은 어려진 것 같은 앳된 얼굴. 엘레나는 반쯤은 꿈을 꾸는 기분으로 손을 뻗어 제 뺨을 매만졌다. 어쩐지 매일 보던 얼굴인데도, 지독하게도 낯설게 느껴졌다.
좀처럼 이 상황이 현실이라고 믿기지 않았다. 시선이 닿는 모든 것들이 그녀의 사교계 첫 데뷔를 떠올리게 했다. 하지만 그럴 리가. 조금 전까지만 해도…. 가만, 조금 전에 뭘 하고 있었지?
“엘레나 데 카스타야!”
그녀는 재차 불린 이름에 놀라 흠칫 허리를 곧추세웠다. 그제야 가까스로 맞은편 좌석에 사람이 앉아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눈가의 미세한 주름을 제외하면 좀처럼 나이를 짐작하기 어려운 남자였다. 그녀를 타오르는 듯한 눈으로 쏘아보던 그가, 발을 쿵 구르며 윽박질렀다.
“정신머리하고는. 네가 진정 아비가 낯부끄러워 고개조차 못 드는 꼴을 보고야 말 작정인 게지.”
“죄송해요. 잠시 다른 생각을….”
“폐하의 앞에서도 그렇게 얼빠지게 행동할 테냐?”
“…아니에요, 아버지.”
카랑카랑한 비난에 엘레나는 서둘러 자세를 바로 했다. 조금 전 품었던 의문은 이미 까맣게 잊은 뒤였다. 금세 완벽해진 그녀의 몸가짐에도 후작은 좀처럼 표정을 풀지 않았다. 영 미덥지 않다는 시선이 머리에서부터 발끝까지 훑어 내렸다.
그가 딱딱한 목소리로 재차 그녀를 몰아붙였다.
“오늘을 위해 네게 들인 금이 수십만 장이라는 것을 잊지 마라. 무엇을 위해 내가 너를 여태껏 거두었는지도.”
“…….”
“오늘 연회장에서 네가 가장 돋보여야만 해. 황태자 전하는 물론이고, 기회만 된다면 3황자 전하의 마음까지 반드시 사로잡도록 해라.”
그녀는 얼떨떨하게 눈을 깜박였다.
“3황자 전하라 하시면, 올해로 겨우 아홉 살 되시지 않았나요?”
엘레나는 채 젖살조차 빠지지 않은 어린 황자의 얼굴을 떠올렸다. 그녀의 아비가 말대꾸를 성가셔하다 못해 증오한다는 것조차 순간적으로 잊고. 덕분에 곧장 후려치는 듯한 날카로운 시선이 날아들었다.
“아버지께서 뜻하신 바를 따르겠으나, 조금… 의외여서요.”
위축된 마음을 내색하지 않으려고 했지만, 어깨가 움츠러드는 것만큼은 막기 힘들었다. 그때 마차가 서서히 멈춰 서기 시작했다. 창문 너머로 황궁의 하인들이 서둘러 달려오는 것이 보였다. 후작은 눈에 띄지 않게 그녀를 훈육할 방법이 없다는 것을 깨닫고는 혀를 찼다.
“폐하께서는 3황자를 후계자로 세우고 싶어 하신다. 그 의중이 진정이라면, 곧 황가의 권력 구도가 변하게 될 거다.”
얌전히 마차의 문이 열리기를 기다리던 엘레나는, 후작의 발언에 흠칫 고개를 들었다.
가문에서 황태자비를, 훗날 황좌에 앉을 손자를 보고야 말겠다는 카스타야 후작의 야심은 해가 갈수록 점점 더 집요해지고, 맹렬해졌다.
지금은 2황자가 된 비센테와의 약혼조차 깨고 엘레나를 새롭게 즉위한 황태자와 약혼시켰던 것은, 기실 후작의 강력한 의지가 없었다면 처음부터 불가능한 일이기도 했다. 그때부터 엘레나는 제 결혼이 아비의 야심을 위한 한낱 수단에 불과하다는 것을 절절히 깨달았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3황자라니. 고작 아홉 살인 어린아이를 상대로 무엇을 하라고.
“이대로 황태자만 믿고 있다간 다 어그러질 판이야. 늙은 황제는 제 애첩의 말이라면 브리타냐와 전면전이라도 감수할 것처럼 넋이 빠져 있어. 우리는 우리의 살길을 도모해야지.”
살길. 불과 9년 전이었다. 후작이 그렇게 말하면서 비센테와의 약혼을 깨고 그녀를 카스트로에게 쥐여 준 것이.
이번에도 그때처럼 황태자와의 약속을 깨고 그녀를 채 열 살도 안 된 3황자의 손에 쥐여 주려는 것일까? 복잡한 심상 속에서 이윽고 마차의 문이 열렸다.
엘레나는 시종의 손을 붙잡고 조심스럽게 마차에서 내려섰다.
“정신 바짝 차리고, 계속 웃어라.”
후작이 그녀에게 손을 내밀며 속삭였다. 엘레나는 엷은 구역질을 참아 삼키며 후작의 손을 맞잡았다. 평생을 참아 왔는데, 이제 와서 참지 못할 이유가 없었으므로.
황실의 연회장으로 통하는 드높은 계단의 끝에 서자마자 시종이 그들의 얼굴을 알아보고는 홀이 쩌렁쩌렁하게 울리도록 가문의 이름을 외쳐 댔다.
“카스타야 후작과 그 영애께서 드십니다!”
노련한 후작은 쏟아지는 시선을 여유롭게 넘기면서도 그녀가 돋보이도록 이끌었다. 연회장 안의 눈 부신 빛에 적응하기 무섭게, 황제의 곁에 선 황태자와 눈이 정면으로 마주쳤다.
엘레나가 의식적으로 웃고 있던 입꼬리를 조금 더 올리자, 카스트로의 눈빛이 조금 더 맹렬해졌다.
“전하께서 제법 몸이 다셨군.”
그녀의 시선을 따라 황태자를 바라본 후작이 애매한 웃음을 흘렸다.
“만약 오늘 전하께서 관계를 요구하시거든, 무슨 수를 써서든 거부해라. 어디 갈 때면 항상 파울리나를 대동하고.”
엘레나의 망토 자락을 정리해 주려는 것처럼 허리를 굽힌 후작이, 그녀의 귓가에 뱀 같은 목소리를 흘려 넣었다.
“너는 장차 황후가 될 몸이니 몸가짐에 사소한 의혹조차 있어선 안 돼.”
특히나 형과 파혼하고 동생과 다시 약혼할 마당에는 더더욱 그렇겠지. 엘레나는 냉소적으로 뇌까렸다.
만약 그녀가 정말로 황태자와 파혼하고 3황자와 결혼하게 된다면 비센테와 파혼했을 때와는 비할 수 없는 추문에 휩싸일 터였다. 황제의 이복 아들들을 사이에 두고 저울질을 한 셈이 될 테니까.
그럼에도 그 무수한 가십 중 단 하나도 그녀의 발치에 닿지 못할 터였다.
작금 사교계에서 그녀의 아비가, 카스타야가 가진 위치는 그런 것이었다.
문득, 까마득한 벼랑 위에 선 것처럼 초조했다.
“사내들이란 다 똑같기 마련이야. 어리든, 나이가 들었든 저를 보듬어 줄 여자를 원하기 마련이지. 적당히 얼굴을 비추다가 황실 서고 쪽으로 가 봐. 3황자 전하께서 요즘 거기서 시간을 많이 보내신다고 하니.”
엘레나는 그제야 제 아버지의 참모가 며칠 동안 열을 올리던 상대가 3황자의 유모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분명한 공모가 있지 않고서는 후작이 그녀를 움직일 리 없었다.
“당장 지나치게 친밀해지란 소리가 아니야. 처음에는 그저 형수 된 도리로 어린 동생을 챙기는 것처럼, 알겠느냐?”
…이런 식으로는 길거리의 천한 창녀들보다 나을 것이 단 하나도 없었다. 스스로의 처지에 대한 환멸을 짓씹으면서도 엘레나는 얌전히 고개를 숙였다.
“…알겠습니다.”
“그래. 그래야지.”
후작이 그제야 흐뭇한 듯 웃으며 덧붙였다.
“기회는 올 때 잡아야 하는 거야. 그렇지 않으면 저놈처럼 되는 거다.”
저놈. 엘레나는 후작이 바라보는 방향 쪽으로 시선을 돌리지 않고도, 그 끝에 누가 있는지를 짐작했다.
후작의 눈빛이 세상에서 가장 비천한 자를 볼 때처럼 엷은 혐오로 물들어 있었기 때문이다. 한때는 엘레나의 약혼자였고, 에스페다의 황태자였으나, 지금은 황자의 자리나 간신히 보전하고 있는….
“카스타야 후작.”
“아, 안드라데 공작 각하.”
때마침 후작이 몇몇 사람들에게 인사를 받기 시작했으므로, 엘레나는 자연스럽게 후작과 멀어질 수 있었다. 그녀는 갓 데뷔한 미혼 귀족들이 있는 방향 쪽으로 얼마간 걷다가 몸을 틀었다.
도저히 숨이 역해서 참을 수가 없었다. 답답한 공기 때문인지, 아니면 내내 집요하게도 붙어 오는 황태자의 시선 때문인지.
엘레나는 제 하녀의 팔을 붙잡아 기둥 뒤로 이끌었다.
“파울리나. 나 조금만 숨 좀 돌리고 올게.”
어차피 그녀의 아비는 그녀가 연회장에 없다면, 황실의 서고에나 갔으리라 생각할 터였다.
“아가씨….”
어린 하녀의 얼굴이 금세 곤란한 기색으로 물들었다. 엘레나를 걱정하는 것이 아니라, 엘레나를 잃어버렸을 때의 제 처지를 걱정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도저히, 숨이 답답해서 못 참겠어.”
엘레나는 사납게 웃었다.
“내가 여기서 꼴사납게 기절하는 것보다는 낫잖아. 잠깐만 숨 좀 돌리고, 아버지 말씀대로 황실 서고로 갈게.”
“제가 모실게요.”
“따라오지 마. 사람들 눈 피해서 조심히 다닐 테니까.”
“…….”
“30분 뒤에 서고 앞에서 봐.”
충동적인 결정이었지만, 결과적으로는 좋은 선택이었다. 연회가 조금 더 무르익으면 황태자가 황제의 곁에서 떨어져 자유롭게 나다닐 테니까.
그즈음이면 그녀와 황태자가 동시에 연회장에 없다는 것을 눈치채는 사람이 나올지도 몰랐다.
물론, 그녀가 정말 피하고 싶은 것은 추문이 아니라 황태자 자체였지만.
엘레나는 반사적으로 시종이 내민 샴페인을 받아 들고는, 빠른 걸음으로 연회장을 가로질렀다. 이 시각이라면 정원도 깨끗할 터였다. 술 취한 예비 밀회자들이 아직은 멀쩡한 척 연회장 안에서 고상이나 떨고 있을 시간이었으니까.
황궁의 지리는 어린 시절부터 질리도록 드나들었던 탓에 익숙했다. 가장 빠른 샛길을 택해 걷는 걸음이 점점 더 조급해졌다.
엘레나는 불편한 구두에 뒤꿈치가 짓무르는 것도 모르고 서둘러 계단을 내려갔다. 둥근 아치를 통과하자마자 정원이 보였다. 흙과 잔디를 밟고 서자 그제야 숨통이 트였다.
평소라면 어둑했을 정원은 연회를 위해 등불로 제법 환하게 밝혀져 있었다. 열대야의 뜨거운 밤공기와는 달리, 분수에서부터 튀겨 오는 물기 묻은 바람은 제법 선선했다. 엘레나는 그제야 제가 여태껏 샴페인 잔을 들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무심코 시종이 권하는 것을 그대로 받아 든 채 여기까지 왔다는 것도.
“…….”
첫 데뷔 연회에서부터 술이나 마셔 댄 여자로 낙인찍힐 수는 없었지만, 어차피 주변에는 아무도 없었다. 조금쯤 마셔 두는 편이 오늘 밤을 보내는 것에 도움이 될지도 몰랐다. 잠시 망설이던 그녀가 막 샴페인 잔에 입술을 대려던 찰나였다.
“카스타야 영애.”
갑자기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엘레나는 화들짝 놀라서 하마터면 잔을 놓칠 뻔했다. 가까스로 손에 힘을 준 그녀는 뒤를 돌아보았다. 목소리를 들었을 때부터 반쯤은 예상했지만, 그였다.
비센테 오스티나토 시모라 데 에스페다.
엘레나는 그의 금발이 이마 위로 조금 흐트러져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마치, 서둘러 달려온 사람처럼.
“2황자 전하.”
엘레나는 불편한 기색을 애써 삼키며 무릎을 굽혀 인사를 올렸다. 대체 그가 어떻게 여기에 있을 수 있는 걸까? 분명히 연회장을 나올 때만 해도 그 안에 있는 것을 봤는데….
물론 황궁의 지리나 샛길이라면 그가 그녀보다 더 잘 알기도 알겠지만. 이렇게까지 급하게 따라올 이유가 없다는 점에서 수상했다.
그는 잠시 말문이 막히기라도 한 것처럼, 혹은 아주 끔찍한 일을 겪고 난 뒤의 사람처럼 엘레나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
그녀는 조금 더 당혹스러워졌다. 이제 와서 그가 저런 식으로 저를 바라볼 만한 이유는 조금도 짐작 가지 않았다. 기실 그들의 접점은 뚜렷한 관계조차 없었던 열 살 시절에 끝났다.
그것도 카스타야 측에서 일방적으로 파혼을 통보하는 방식으로….
그 뒤로는 얼굴을 마주한 적조차 드물었다. 그 무렵부터 전 황후의 아비였던 시모라 백작이, 제 손자를 데리고 시모라의 영지에 틀어박혔으니까.
그나마 그가 군에 입대한 뒤로는 수도에 계절에 한 번꼴로 모습을 내비치기는 했었다. 데뷔하지 않았던 탓에 직접 만날 수는 없었지만, 그가 온다는 소식이 돌면 제도의 온 귀족 영애들이 들끓어 댔으니까. 엘레나는 불편한 침묵 끝에 먼저 입을 열었다.
“수도로 귀환하셨다는 이야기는 들었어요. 이번에 엘 로그로네스 전투에서 대단한 전공을 세우셨다고요.”
“…아.”
그는 그녀의 목소리에 그제야 정신이 돌아온 사람처럼 눈을 깜박였다.
“감사합니다.”
“혹시 제게 별달리 하실 말씀이 없으시다면….”
“성년이 되신 것, 축하드립니다.”
이어지는 그녀의 말을 툭 자르며 그가 말했다. 일반적으로 상대방의 성년을 축하할 때는 간소한 선물을 주는 것이 관례였다.
사소하게는 향수부터, 꽃 한 송이나, 손수건 따위의…. 성년을 축하해 주기 위해 급하게 쫓아 나왔다고 생각하기에는, 비센테의 손에 들린 것은 그녀처럼 샴페인 한 잔이 전부였다.
그 서투름에 그제야 조금쯤 미소가 지어졌다.
“선물도 없이요?”
비센테는 그녀의 손에 들린 샴페인 잔을 혐오스러운 것을 보듯 쳐다봤다가, 다시금 반듯한 눈을 했다. 그 간극이 워낙 컸기 때문에 엘레나는 순간적으로 그녀가 착각했다고 생각했다.
그가 단정한 미소를 지으며 제 손에 들고 있던 샴페인 잔을 살짝 흔들어 보였다.
“선물이라면 이것으로 하겠습니다.”
“하지만 샴페인은 이미 저도 한 잔 가지고 있는걸요.”
“이렇게 하면….”
그가 그녀의 손에서 샴페인 잔을 부드럽게 빼앗아 들고는, 반대로 제 손에 들린 샴페인 잔을 넘겨주었다.
“영애에게 제 것을 드리는 셈이 되겠군요”
엘레나는 입술을 벌렸다가 참지 못하고 옅은 웃음을 터트렸다.
“궤변이세요. 주신 것과 동시에 제 것을 가져가셨잖아요.”
“그러면 선물을 교환한 것으로 치죠.”
그렇게 말하는 비센테의 미소는 무척이나 근사했다. 엘레나는 저도 모르게 무심하게 뺨을 붉히다가, 제가 뺨을 붉혔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았다. 주제도 잊고 여느 영애라도 된 것 같은 감정에 휩싸였던 것이다.
그녀는 샴페인 잔을 쥔 손을 감추듯, 반대쪽 손으로 감싸 쥐며 비센테의 시선을 피했다.
“부디 말씀 낮춰 주세요. 황자 전하께 공대를 받으니 몸 둘 바를 모르겠어요.”
“장차 황후까지 되실 분께서요.”
“…아직은 일개 후작 영애에 불과해요.”
“영애의 아비가 무슨 수를 써서든 그대를 황후의 자리에 올리고 말리라는 것을, 온 에스페다가 다 아는데.”
그의 목소리는 무심했다. 달리 무슨 의도가 있는 게 아니라, 그저 사실만을 읊듯 담담했다. 엘레나가 황망하게 시선을 들자, 그가 엷은 청보라색 눈동자를 마주해 왔다. 그는 그녀가 순식간에 창백하게 질린 것을 보고 당황한 듯 입가를 짚었다.
“상처를 드리려는 의도는 아니었습니다.”
“…괜찮아요.”
사실은 조금도 괜찮지 않았다. 순간은, 그가 예전의 파혼을 여태 마음 쓰고 있는 줄로 착각했다. 가문의 잘못이 개인의 잘못으로 치부되기도 하는 세상이었다. 더구나 그와의 파혼은 일방적으로 카스타야 가문에서 진행한 바로, 그에겐 다소 굴욕적인 과거였을 터다.
특히나 지금처럼 온 사교계의 여성들이 그와 한 번이라도 말을 붙여 보려고 전전긍긍하는 마당에는.
하지만 그녀를 바라보는 비센테의 눈에선 부정한 욕망이나 감정은 한 줌도 읽히지 않았다. 엘레나는 그저 그가 조금쯤 지쳐 보인다는 인상을 받았다.
눈빛이 수십의 세월이라도 거쳐 온 듯 공허했다. 전쟁을 직접 겪었던 사람들은 다 저런 걸까? 말없이 샴페인을 홀짝이던 그녀는, 가까스로 제 하녀와 약속한 시각이 다 되어 간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시간이 벌써…. 이제 가 봐야겠어요.”
“연회장까지 바래다 드리겠습니다.”
“괜찮아요. 길은 다 아니까. 그런데, 샴페인은 별로 즐기지 않으시나 봐요.”
그게 무슨 소리냐는 듯 비센테의 한쪽 눈썹이 슬쩍 올라갔다. 엘레나는 손바닥을 펼쳐 그가 쥐고 있던 잔을 가리켰다.
“애써 가져오셔 놓고, 조금도 마시질 않으셔서요.”
“아.”
그는 제 손에 샴페인 잔이 들려 있다는 것을 그때야 인식한 것 같았다. 혹은, 그것이 마실 만한 것이라곤 애초부터 생각하지도 않았거나.
“이건….”
그의 단정한 미간이 곤란한 듯 찌푸려졌다. 무어라 말을 고르는 것 같던 비센테는, 마땅한 대답을 찾지 못한 듯 한숨과 함께 고개를 저었다.
“글쎄요. 지금은 별로 내키지 않는군요.”
“그러신가요.”
“바쁜 용무가 있다면 먼저 가십시오. 저는 조금 더 산책을 즐기겠습니다.”
마시지도 않을 샴페인 잔을 굳이 가져와서 그녀의 것과 바꾸었다고. 납득이라고는 조금도 가지 않는 대답이었지만, 그는 어쩐지 이 주제에 대해서는 별로 이야기하고 싶어하는 것 같지 않은 눈치였다.
엘레나는 조금 망설이다가 황족에게 으레 올리는 예법대로 우아하게 무릎을 굽혔다.
“그러면 전하. 송구하지만 먼저 실례하겠어요.”
“조심히 들어가시길.”
뒤로 돌아서서 그에게서 몇 걸음 멀어지기 무섭게, 그녀는 걸음을 멈춰 섰다. 어쩐지 정원에서 그를 만났을 때부터 느껴지던 묘한 기시감의 정체. 그 정체를 어렴풋이 알 것도 같았다. 멈춰 서서 몸을 돌리자, 그녀의 뒷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던 듯 곧장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쳤다.
“혹시….”
그녀는 숨을 조심스럽게 삼키며 말을 골랐다.
“혹시, 예전에도 우리 이런 대화를 나눴던 적이 있지 않나요?”
엘레나는 그녀는 제가 미친 사람처럼 보이리라고 확신했다. 적어도, 제정신처럼 보이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이 기묘한 기시감을 도저히 그대로 두고 모른 척 지나칠 수는 없었다.
“…….”
그리고 엘레나는, 그녀가 무엇인지 모를 진실을 건드렸다는 사실을 멍한 머리로 깨달았다. 비센테의 정물 같은 눈매가 당혹으로 일그러져 있었다. 표정을 가다듬어야 한다는 것조차 순간적으로 잊은 것처럼.
“지금, 무슨….”
“분명히, 제게 예전에도 이러셨던 적이 있었던 것 같아서요.”
“…….”
“아니, 예전이 아니라….”
그녀는 순간적으로 두통이 확 올라오는 것을 느꼈다. 흐릿한 시야로 그가 무어라 대답하는 것이 보였다. 무슨 말이었을까? 분간이 어려웠다. 머리가, 정말 깨질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