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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이다.
이벨린이 찻주전자에 찻잎을 옮겨 담는 그 순간부터 비센테는 확신했다. 금방이라도 쟁반을 엎지를 듯 손을 덜덜 떨어 대는 건 차치하고서라도, 툭 치기만 해도 기절할 것처럼 하얗게 질린 낯빛은 아무리 좋게 봐줘도 딱 범죄를 저지르기 직전의 사람처럼 수상쩍었다.
저런 얼굴을 하고도 잘도 나타날 생각을 했군. 그는 입 속으로 혀를 찼다.
기대가 너무 컸던 걸까?
적당히 교육하면 쓸 만하지 않겠느냐고 생각했던 게 불과 며칠 전의 일이었다. 처음엔 그만한 외모와 배짱을 지녔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고작 찻잔에 독을 섞는 일로도 벌벌 떤다면 이중 첩자는커녕, 에스페다의 사교계에서 10분도 버텨 내지 못할 터였다.
비센테는 턱을 괸 채 긴 다리를 포개듯 꼬았다.
게다가 큐라린 잎이라니. 귀한 독이었지만, 에스페다의 황족이라면 으레 내성을 쌓는 스무 가지 독 중 하나였다. 애써 얻은 독살의 기회를 고작 저깟 것으로 날린다고? 이거야말로 둘 중 하나였다.
정보력이 형편없거나, 아니면 여자가 배후로부터 버림받았거나.
차라리 전자라면 귀여웠으나 후자라면 골치 아팠다. 대놓고 자른 꼬리의 처분을 그에게 떠넘길 정도로 대담한 놈이라면, 더더욱.
여자를 붙잡아 추궁해도 뒷배에 대한 정보를 얻기란 힘들 것이다. 여자가 결정적 정보를 안다면, 보다 직접적으로 처리했을 테니까.
그래서 죽일까, 아니면 살려서 거둘까….
어차피 큐라린 독이야 몇 잔을 마신들 타격조차 없을 테고, 여태껏 감시한 노고는 아까웠다. 게다가 여자는 아직 이용 가치가 있었다.
흑갈색 머리카락에 회푸른 눈동자, 곧장 엘레나를 떠올리게 하는 저 분위기. 하나하나 뜯어보자면 생김이야 다르지만, 가끔 짓는 표정은 간혹 그조차 놀라게 하곤 했다.
정말로 그녀가 무덤에서 되살아 난 것처럼 느껴질 만큼.
요 몇 년간 카스트로가 엘레나를 닮은 여자들을 침대로 끌어들인다는 사실은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비센테는 눈을 내리뜬 채 얌전히 찻주전자를 기울이는 여자를 바라보았다.
저 하녀가 순진하게도 내미는 독 차를 마시는 순간, 여자의 거취는 그의 손아귀로 굴러떨어진다.
살리든 죽이든 그의 소관이 될 것이다. 하지만 배신당할 정도로 정치적 감각이 없는 자를, 손해를 감수하면서까지 주울 이유는, 글쎄…. 외모가 아깝긴 해도 대체할 인물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다.
생각을 거듭할수록 머릿속은 점점 더 냉정하게 가라앉았다.
여자를 주워 얻을 이득은 적었고, 감수해야 할 위험은 컸다. 그와 계획을 함께할 인물은 스스로 생각하는 자여야 했다.
적어도 어느 정도의 교양과 눈치, 대범한 판단력과 감각이 있는. 제가 버림받았다는 상황조차 눈치채지 못하는 여자라면, 손을 내민들 그가 원하는 위치까진 올라오지도 못할 것이다. 그가 결심을 굳히려는 찰나에 여자가 카드를 내밀었다.
[항상] [같다] [먼저] [먹다] ?
그 카드에 담긴 뜻이 무엇인지 파악하기도 전에, 여자가 찻잔을 잡았다. 말릴 새도 없이 우아하게 들이켰다. 하도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비센테는 여자가 독을 삼켰다는 사실조차 한 박자 늦게 인지했다.
설마, 저 독을 제 입에 털어 넣는 미친 인간이 있을 줄이야.
“대체 무슨 짓을.”
가까스로 정신을 차린 그는 여자의 팔목을 거세게 잡아챘다. 그 바람에 여자가 놓친 빈 찻잔이 카펫 위로 나동그라지며, 희미한 궤적을 그렸다. 저걸 전부 마신 것이다. 기어이, 전부.
평민이 큐라린에 내성이 있을 수도 있나?
당혹감에 말문이 막혀 있는 사이, 여자의 파랗게 질린 입술을 비집고 왈칵 핏물이 배어났다.
“맙소사!”
기사단장의 외마디 비명은 들리지도 않았다. 몇 번 울컥거리며 피를 뱉어 낸 여자가 파르르 떨리는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여린 몸이 위태롭게 휘청거리다 훅 꺼지듯 무너졌다. 비센테는 여자의 몸이 바닥에 부딪히기 직전에 가까스로 받아 들었다. 환청, 어쩌면, 환각.
“비센테.”
어둑한 방, 피 흘리며 쓰러지는 여자, 흑갈색 머리카락과 창백한 피부…. 지독한 기시감. 과거의 어느 순간이 다시금 되풀이되는 것만 같았다.
“이건 큐라린 독이 아닙니까?”
찻주전자를 확인한 기사단장이 뒤늦게야 사태를 파악하고 입을 뗐다. 그 멍청함에 비센테는 가까스로 과거에서 빠져나왔다. 숨이, 찼다.
“주치의를 불러.”
“예?”
“문제 있나?”
“하, 하지만 전하. 궁의 주치의는 황족만을 진찰하는 것이 원칙….”
“눈앞에서 사람이 쓰러졌다. 그것도 내가 마실 독을 대신 마시고.”
“…….”
“사람의 목숨보다 잘난 원칙이 중요하다고 말하려는 것은 아니겠지.”
“그, 그건…. 아, 아닙니다.”
“이 여자를 죽이고 싶은 게 아니면 서두르지.”
곁눈으로 기사단장이 허리를 굽히는 게 보였다. 낡은 마루가 삐걱거리는 소음을 냈고, 뒤이어 다급하게 계단을 내려가는 발소리가 들렸다.
비센테는 고개조차 돌리지 않은 채로 제 품에서 의식을 잃고 쓰러진 여자를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여자의 표정은 한없이 평온해 보였다. 조금 전 무모하게 독이나 들이마신 사람처럼은 보이지 않았다. 그게 못내 기가 막혔다.
그는 여자에 대한 평가를 조금 상향했다. 독을 마실 이유가 조금도 없다는 것을 제외하면, 그의 예상을 완전히 비껴간 셈이었다. 협상의 기본은 상대의 허를 찌르는 것에 있었다. 기민한 눈치, 배짱 그리고 원하지 않던 상대를 기어이 협상 테이블에 앉히는 잔머리, 그 표정.
기절하기 직전의 이벨린의 얼굴을 떠올린 비센테는 저도 모르게 짧은 웃음을 터트렸다. 그제야 그 시건방지고, 절박하던 표정이 이해가 되었다.
그건, 제발 살려 달라는 뜻이었을 것이다.
“정황상 독살을 사주한 사람과 접촉했을 겁니다. 주요 참고인으로 대우하셔야 합니다.”
“그 참고인이 내 목숨을 살렸지. 여기서 더 타협이 필요한가?”
“그 공로는… 인정합니다. 하지만 극독을 지니고 있던 여잡니다.”
“내성이 있는 독이었고, 저 아이는 그걸 몰랐어.”
“하지만 전하….”
아무리 그래도 침실이라뇨. 시종장이 차마 끝맺지 못한 말은, 그 공간 안에 있는 모두의 귀에 잘 들렸다. 감히 황자의 침대를 차지하고 기절한 여자만 제외한다면.
꼬박 하루였다. 저 여자가 그의 앞에서 독을 먹고 쓰러진 이후로 흐른 시간이.
그 말인즉, 이만큼이나 소모적인 언쟁을 반나절이나 거듭했다는 소리였다.
“애초에 독을 들고 전하의 앞까지 간 게 수상쩍습니다.”
도돌이표처럼 돌아온 의문에 비센테는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
“뒤늦게 알았겠지. 경고하기엔 언어를 몰랐을 테고.”
저 또한 여자의 말이라곤 조금도 믿지 않았던 주제에, 거짓을 이야기할 때는 편리한 핑계가 된다.
“어쩌면 끝까지 눈치채지 못 했을지도 모르고. 독이란 걸 알고서도 제 입에 털어 넣는 천치가 아니라면야.”
이 와중에도 못마땅한 심사를 그대로 드러내고 만 것은, 여자가 그려 놓은 의도대로 움직일 수밖에 없는 상황에 대한 괘씸함 때문이다. 제가 의식을 잃은 뒤로 상황이 어떻게 흘러갈지 훤히 들여다보기라도 한 것처럼.
“그래도 침실은 과합니다. 지금이라도 감옥이나, 하녀들의 방으로 옮겨서….”
“날 독살하겠다고 설치는 작자가 궁 안에 돌아다닌다. 저 여자를 이보다 보안이 덜한 장소로 옮겼다가 죽기라도 하면?”
“…….”
“이 문제에 대해서는 그만 거론하지.”
그가 지겹다는 듯 손을 내젓는 것과 동시에 청진을 마무리한 주치의가 기구를 갈무리했다. 숨결을 확인하고, 눈을 까뒤집고, 혓바닥의 색을 확인하는 손길은 조심스러웠다. 주의 깊은 진찰 끝에 주치의가 피로한 낯을 들었다.
“위험한 고비는 넘긴 것 같군요. 애초부터 그리 많은 양의 독도 아니었던 모양입니다.”
“의식은.”
“운이 좋다면 며칠, 어쩌면 몇 시간 내로 돌아올 겁니다. 독에 전혀 내성이 없는 몸이라 확답은 어렵겠습니다만….”
주치의는 주저하며 덧붙였다.
“아침과 저녁으로 드나들며 예후를 살피겠습니다. 의식을 차리는 즉시 해독제를 먹이면 후유증은 남지 않을 겁니다.”
의식을 잃은 여자의 안색은 여전히 창백했으나, 몇 차례의 사혈을 거친 덕에 희미한 생기가 돌고 있었다. 황궁에서 일하는 의사들이란 환자의 증상에 대해 보수적인 입장을 고수하는 편이니, 몇 시간 내로 수월히 의식을 차린다는 소리로 들어도 무방했다.
그제야 굳은 표정으로 응접실의 한쪽 의자를 차지하고 있던 기사단장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곧 정신을 차린다니 다행이군요. 전하. 저는 이만 돌아가 폐하께 이번 일에 대해 보고하고, 조속히 관련 사건에 대해 후속 조사가 진행될 수 있도록 조치하겠습니다.”
“경.”
비센테의 부름에 기사가 고개를 돌렸다. 황자는 짤막하게 명령했다.
“이번 일은 함구해.”
“…하지만 전하. 이번 일은 황족의 안위에 위해를 가한 사건입니다. 아무리 황자 전하 본인의 안위와 관련되었다고 한들, 제 독단으로 함구할 수는 없습니다.”
고지식한 대답이었다. 누가 황실 기사단장 아니랄까 봐. 비센테는 짧게 혀를 찼다.
“폐하께서 내게 약조하신 게 있다.”
“…….”
“앞으로 몇 달 후면 군 복직을 명령하실 텐데, 괜히 불미스러운 상황을 만들고 싶지 않아.”
실상은 관심조차 없다. 함구하든 말든, 소문을 내든 말든. 그러나 그가 무언가를 감출수록, 그것을 진실이라고 생각하기 마련이다. 조금의 의심조차 하지 않고.
본래도 일부 소수를 제외하고는 막아 두었던 4층의 출입을 극도로 제한해 둔 것도 같은 이유에서였다. 그날부터 세간의 시선은 감추어 두었을 허상의 진실을 캐낸다는 목적으로, 그가 아닌 4층에 쏠렸으니까.
대단한 신비주의인 척했지만, 그래, 고작해야 사람들의 시선이나 흐트러트리는 게 목적이었다.
이 여자가 제 품 안에 스스로 굴러들어 오기 직전까지는.
기껏 잘 써먹으라 던졌으니, 그걸 어떻게 써먹을지는 온전히 그의 재량이었다. 비센테는 상념을 갈무리하며 부드럽게 덧붙였다.
“정 어렵다면 당분간만이라도 함구를 부탁하지. 적어도 이벨린이 회복될 때까지는.”
이벨린이라는 이름은 그의 생각보다도 더 다정하게 들렸다. 황자의 입에서 ‘부탁’씩이나 나온 마당이니, 일개 기사단장으로서 감히 면전에서 거절하긴 어려울 것이다. 기사단장의 표정이 일순 흐려졌다.
“하지만.”
“건강한 몸으로도 버티기 힘든 것이 황실의 심문 아니던가. 하물며, 저렇게 약해진 몸으로는.”
“…알겠습니다.”
“좋아. 나가들 봐.”
비센테의 명령에 시종장과 기사단장, 주치의가 일사불란하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발걸음이 멀어지는 소리가 들렸고, 뒤이어 문이 닫혔다. 부산스럽던 숨소리들이 사라지자 지나친 고요가 찾아들었다.
해가 저물고 있었다. 그가 지켜보는 잠깐 사이에 여자의 입술 부근에 머물렀던 황혼은 턱 끝을 지나, 저 지저로 사라졌다.
비센테는 의자에 몸을 묻은 채로 이벨린을 바라보았다. 모든 풍경이 비현실적이었지만, 그중에서도 압도적인 것은 제 침대에 누워 있는 저 여자였다.
거슬린다.
어둑한 어둠 속에 잠겨 있을 때마다 여자는 그에게 엘레나를 떠올리게끔 강제하는 것만 같았다. 고작 그 정도의 흔적만으로도 끝내 외면할 수 없게 만든다. 지친 숨이 밀려 나왔다.
“도대체 무슨 생각인지.”
잠든 여자의 말간 얼굴에선 어떤 속셈조차 읽을 수 없었다. 근래 이벨린의 행동은 동기를 짐작할 수 없는 수수께끼였다.
“애써 빼돌린 서류는 태워 버리질 않나, 보란 듯이 던져 놓은 증거는 숨겨 버리질 않나, 독을 마셔 버리지 않나….”
목적이 무엇인지 모르겠다. 배후에 누가 있다는 것만은 분명한데, 여자는 가끔 그를 지키려고 작정한 것처럼 굴었다. 사방이 적들로 가득한 이 폰페라다 궁 안에서 그 같은 행보는 홀로 유일했다.
그런데, 대체 왜? 그들 사이에 이럴 만한 감정적 유대가 있었던가? 애정? 충성?
적어도 비센테가 기억하는 한, 이벨린이 제게 이렇게 행동할 만한 사건은 조금도 짐작 가지 않았다.
그래. 처음부터 그것이 문제였다. 여자의 동기를 알 수 없다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