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5화 (15/151)

***

“…이번에도 빈틈없는 정비를 확인하였습니다. 수도로 돌아가는 대로 황태자 전하를 뵙고 보고드릴 계획입니다.”

“사촌께서 퍽이나 실망하겠군.”

비센테의 비아냥에 황실 기사단장은 뺨을 붉혔다. 까라니 까고 있긴 하지만 그가 보기에도 이건 생트집에 가까웠다. 석 달에 한 번씩 온 폰페라다 궁을 뒤집어엎으며, 있지도 않은 비밀 통로를 찾아 대는 것은. 기실 반쯤 편집증에 가까운 의심이었다.

“그러면 이만 물러가 보도록 하겠습니다.”

“유폐된 몸이기는 해도, 기사단장씩이나 되는 분께 차도 안 내어 드릴 수는 없지.”

“…….”

“곧 하녀가 올라올 테니 기다리도록 해.”

말이 끝나는 것과 엇비슷하게 문을 노크하는 소리가 들렸다. 묵직한 문이 힘겹게 열리고 그 틈으로 여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짙은 흑갈색 머리카락을 하나로 그러모은 여자는 오늘따라 유독 창백해 보였다. 비센테는 턱을 괸 손으로 입가를 가린 채 여자가 테이블 위로 쟁반을 내려놓는 것을 지켜보았다.

일주일 전, 여자가 제 서랍에서 무언가를 빼돌리는 것을 보았다. 그게 무엇이든 간에, 그 증거를 이용해 그를 고발하는 자는 아직 없었고. 이 하녀가 생각만큼이나 영리해서 몸을 잘 사린 걸까, 아니면 그 뒤의 배후가 묵인한 걸까….

어느 쪽이든 흥미로웠다.

“이분….”

이벨린을 느긋하게 관찰하던 비센테는, 기사단장의 떨리는 목소리에 시선을 옮겼다. 흔치 않은 경악이 기사의 무던한 얼굴 위로 번져 있었다. 그는 제가 한낱 하녀에게 존칭을 썼다는 것조차 모르는 눈치였다.

“네가 보기에도 제법 비슷한가?”

“…….”

“이 하녀와 엘레나가.”

바쁘게 움직이던 여자의 손이 순간적으로 멈췄다. 놀란 표정을 감추려 고개를 조금 더 공손히 숙이는 게 보였다.

입술 새로 짧은 실소가 새어 나왔다. 저러고도, 에스페다의 언어를 모른단 소리를 믿으라고. 그러나 찰나의 순간이었던 터라, 그만큼 여자를 의심스럽게 보고 있던 자가 아니면 모를 만도 했다.

비센테는 여자의 손끝이 떨리는 것을 놓치지 않았다.

오늘따라 유독 동요하는 모습이 거슬렸다.

엘레나. 죽은 황태자의 약혼녀나 반역자의 딸이나 카스타야 영애가 아닌, 엘레나. 다른 몸에서 깨어난 이래로 누군가가 제 이름을 직접적으로 언급한 것은 이번이 최초였다. 그것만으로도 당혹스러운데, 둘이 비슷하다고?

“…놀랍긴 하군요.”

기사단장의 대답은 그야말로 의외였다. 머리칼과 눈동자 색을 제외하면 기실 ‘엘레나’와 ‘이벨린’의 외형은 결이 완전히 달랐다. 엘레나가 섬세하고 예민해 보이는 미인이라면, 이벨린은 전반적으로 유순한 인상이었다. 비슷하다고 느꼈다면 이목구비가 아닌 분위기 때문일 것이다. 시선을 처리하는 방식이나 표정, 눈썹을 찡그리는 사소한 습관들이 모여서 만드는.

게다가 둘 사이엔 어떤 접점조차 없었다. 신분, 혈통, 하물며 태어난 국가와 살아온 배경조차 달랐다.

어지간히 미친 사람이 아니고서야, 죽은 사람이 다른 육체를 뒤집어쓰고 나타났다는 생각을 할까….

그것만 믿고 안일하게 굴었던 건 실책이었지만, 설령 눈치챘다고 해도 증명할 방도조차 없다는 건 여전히 유리한 정황이었다. 누구라도 완벽하게 증명하긴 어려울 것이다. 설령, 엘레나 자신이라고 해도.

머리로는 명확하게 알고 있음에도 찻잎을 계량하는 손이 떨렸다. 부주의하게 찻잔과 금속이 부딪치는 소리에 집무실 안의 시선이 한 번에 쏠렸다. 그녀는 입술을 짓씹었다. 침착해, 이벨린. 이 순간을 고른 건 너야.

“그렇게 긴장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아가씨.”

기사단장이 곧장 부드러운 어조로 배려했다. 그러나 이벨린은 정작 제게 말을 건 것에 놀라 흠칫 어깨를 움츠렸다. 사람은 당황하면 익숙한 것을 찾기 마련이다. 비센테 쪽을 건너다보기 무섭게 곧장 무심한 얼굴과 마주했다. 내내 지켜보고 있었던 듯, 시선이 마주치자마자 우아한 눈매가 매끄럽게 접혔다. 그가 입을 열었다. 시선은 여전히 이벨린에게 고정한 채로.

“경이야말로 쓸데없는 노력이군.”

“…예?”

“에스페다어를 못 알아듣거든, 베네딕트 양은.”

“예?”

“적어도 아직은.”

말이 주는 여운이 묘했다. 비센테가 그녀를 조금도 믿지 않는다는 것은 어렴풋이 짐작했지만, 이런 식으로 알게 된 것만은 유감이었다. 애써 다짐했던 용기가 푹 꺾여 나갔다.

이벨린은 긴 심호흡을 했다. 해야 할 일만 생각해. 지금은 괜한 생각을 할 여유조차 사치였다.

찻잎을 계량해 찻주전자에 넣고 뜨거운 물을 부었다. 오래 지나지 않아 홍차의 향긋한 향이 서서히 번졌다.

절반은 독초지만, 절반은 진짜 홍차를 섞었기 때문에 이 단계에서 구별은 쉽지 않았다. 회중시계로 시간을 정확히 잰 이벨린은 찻주전자를 기울여 찻잔을 채웠다. 모래시계의 모래가 다 쏟아지자 그녀는 미리 준비해 온 카드를 순서대로 내밀었다.

[항상] [같다] [먼저] [먹다]

그리고 누가 말릴 새도 없이 앞에 놓인 찻잔을 곧장 입술에 가져다 댔다.

“무슨….”

첫 모금을 머금은 순간부터 징그러운 소름이 돋았다. 이벨린은 본능적인 혐오감을 억누르며 꾸역꾸역 잔을 끝까지 비워 냈다. 소서에 찻잔을 내려놓으려는 순간, 비센테가 그녀의 손목을 아프도록 잡아챘다.

“대체 무슨 짓을.”

비릿하고 역한 숨이 잇새 사이로 샜다. 뒤이어 왈칵 치민 것은 피였다. 이벨린은 반쯤은 미심쩍고, 반쯤은 절박한 눈으로 비센테를 바라보았다. 이제는 정말로 도박의 영역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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