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3화 (13/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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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신없는 일정을 보내고 나자 7시가 가까워지고 있었다. 이벨린은 쟁반에 찻잔과 뜨거운 물이 담긴 주전자, 각종 차제구를 받쳐 든 채 조심스럽게 계단을 올랐다. 본관의 4층으로 이어지는 계단은 다른 층과는 달리 하나뿐이었다. 그 초입은 들었던 대로 군인들이 지키고 서 있었다.

    어쩐지 낯이 익은 것으로 미루어 짐작건대, 저들이 ‘2황자’와 함께 자처해서 유폐되었다는 평민 부관들인 모양이었다.

    전생에서는 승전 연회에서 간혹 마주친 적 있었다. 황태자의 약혼녀로서 카스트로 대신 참석해야만 했던 온갖 자리에서…. 카스트로는 비센테가 빛나는 자리라면 온갖 핑계를 대며 기피해 왔고, 그나마 불화설을 가라앉히기 위해 승전 연회에 참석하는 것은 언제나 엘레나의 몫이었다.

    고작해야 대위에 그쳤던, 진급 연회를 제외하곤.

    이벨린이 계단 가까이 다가서자, 경계를 서고 있던 두 명의 군인이 자세를 바로 하며 그녀를 훑었다.

    “이 아가씬가?”

    “인상착의는 맞는 것 같은데? 그런데 들여보내도 돼?”

    “되겠지. 우리 대위님께서 괜찮으시다고 했다며.”

    “루카스. 난 그분께서 무슨 생각이신지 도저히 모르겠다.”

    “난들 알겠어.”

    제국의 황족을 두고 하는 소리라고 치기엔 지나치게 격의 없는 태도였다. 군인들은 다 저런 걸까? 아니면 궁의 예절에 익숙하지 않은 평민이라서? 어쨌든 지금은 호기심을 채우기에 적당한 시기는 아니었다. 데운 물은 점점 식고 있었고, 쟁반을 받쳐 든 손의 힘도 빠지고 있었다. 떨리는 팔을 눈치챈 군인 하나가 다른 군인의 옆구리를 슬쩍 찔렀다.

    “단테. 좀 비켜 드려. 네 덩치 때문에 못 지나가고 계시잖냐.”

    “아, 그렇지.”

    곰처럼 생긴 우직한 청년이 계단 쪽으로 바짝 붙자, 간신히 지나갈 틈이 생겼다. 이벨린은 고개를 살짝 숙여 인사하고 그들을 지나쳤다.

    방치된 황량함이 폰페라다 궁 전반에 깔린 분위기라면, 4층은 그야말로 버려진 감옥 같았다. 흔하게 보이던 복도의 초상화 하나, 양탄자 하나조차 없이….

    오로지 우아한 것은 궁의 골조뿐이었다. 방 안도 이 지경이라면 차라리 하인들의 숙소가 더 포근하게 느껴질 처지였다.

    이윽고 집무실의 거대한 목문이 보였다. 이벨린은 쟁반을 한쪽 팔로 받쳐 든 채, 반대편 손으로 열쇠를 꽂아 넣었다. 몇 번의 헛손질 끝에 잠금쇠가 돌아가는 소리가 들렸다. 문은 마치 안쪽에서 누가 잡아당긴 것처럼 열렸다.

    한낮이라 제법 빛이 들어오는 집무실 안은 황량한 복도보다는 생활감이 묻어났다. 마호가니로 된 커다란 책상이 놓여 있었고, 벽마다 높은 천장까지 책들로 빈틈없이 채워져 있었다. 재가 깔끔하게 치워진 벽난로나 잘게 팬 장작을 보아하니, 최근까지도 누군가의 손길이 직접 닿았던 듯했다.

    황족이 제 손으로 직접 방을 관리해 왔다니. 하녀들이 떠드는 것을 몇 번 듣기야 했지만, 그걸 직접 목격하는 것은 또 다른 기분이었다.

    새삼스레 그에 대해서 잘 알지 못했다는 기분이 든다.

    기실 먼 과거를 헤집어 봐도 그들은 표면상의 인사나 주고받던 사이였고, 그마저도 멀리서 눈인사로나 그친 게 태반이었다.

    언제나 단정하고 반듯하던 태도. 누구에게나 깍듯한 예의. 호사가들의 입에 숱하게 오르내리던 조각 같은 외모. 사교계의 여자들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열망해 본 사내였으나, 제 핏줄을 제외하곤 공식적인 행사에서조차 여자를 수행한 적 없는 황자.

    그가 그런 사람이었던 데다가, 카스트로는 발작적으로 의심이나 해 대니… 있던 관심조차 끊어 내던 것도 당연했다. 그가 그녀를 구원해 준 이래로, 일방적으로 그녀가 친밀감을 느끼기 전까지는.

    ‘시간이 언제 벌써.’

    이벨린은 서둘러 쟁반을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물이 식고 있었다.

    비센테의 집무실에 그녀가 자주 드나들면 드나들수록 적들의 시선은 ‘이벨린’에게 집중될 것이다. 언제 제 세력을 되찾을지 모르는 황자와 척을 지는 것보다 하녀를 회유하는 것이 배는 쉬운 일일 테니까. 그리고 이벨린의 예상은 정확히 맞아떨어졌다.

    그의 집무실에 드나들게 된 지 열흘 만에, 하녀와 하인들의 절반이 본색을 드러냈다.

    [이벨린. 뭐 필요한 건 없어?]

    처음부터 브리타냐어를 능숙하게 하던 라켈은, 이제는 공개적인 장소에서도 거리낌 없이 말을 걸었다. 주변에서 눈치만 보고 겉돌던 몇몇 하녀들도 마찬가지였다. 새삼스러운 태도의 변화가 기껍지 않긴 해도 놀라운 일은 아니었다.

    황족의 곁에서 시중을 드는 하녀들의 우수함은 잘 교육된 태도뿐 아니라, 외국어를 수준급으로 구사하는 것에도 있었으니까.

    마리아의 말마따나, 궁 내에서는 제국어만 사용하는 암묵적 규율이 있을 뿐이었다. 물론 제국어가 공용어로 통용되기 시작한 몇십 년 전부터는 서서히 빛을 잃어 가는 소양이긴 했지만. 이벨린은 생각을 갈무리하며 생긋 웃었다.

    [괜찮아. 지금은 별달리 필요한 것도 없고.]

    [오늘 차 준비는 내가 도와줄까? 주전자가 좀 무거워 보이긴 하던데.]

    [말은 고맙지만, 혼자서 올라가 봐야 해. 알잖아.]

    […솔직히 말해 봐. 정말 황자 전하께서 4층에서 괴물을 키우셔?]

    이벨린은 곤란한 듯 웃으며 슬쩍 방 안을 둘러보았다. 저마다의 일감을 가지고 모여 앉아 있던 라운지 안의 시선 절반이 노골적으로 이쪽을 향해 쏠렸다. 두셋은 그저 호기심이었지만, 대다수는 명백한 의도가 보였다.

    이벨린은 이제 폰페라다 궁의 누구도 그녀의 편이 될 수 없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가 봐야겠다.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네.]

    이벨린은 바느질감을 정리하며 일어섰다. 쟁반에 차제구를 담고, 서둘러 집무실로 향했다. 비센테의 부관들은 이제 익숙한 듯 그녀를 막아서는 시늉조차 하지 않았다. 처음에는 고생했던 열쇠의 사용에도 요령이 붙었다.

    언제나처럼 따듯한 찻잔을 집무실의 책상에 내려놓은 이벨린은 흠칫 놀랐다. 책상의 서랍 중 하나가 미세하게 열려 있었다. 마치 급히 생긴 용무 때문에, 깜박 걸어 잠그는 걸 잊어버리기라도 한 것처럼…. 열린 모양새는 지극히 자연스러웠고, 얼핏 보기에도 빼곡히 들어 있는 서류들은 하나같이 중요해 보였다.

    ‘그 안에서 무슨 일이라도 일어난다면 다 네 책임이다’라는 시종장의 말이, 그제야 온전한 협박처럼 느껴졌다. 한 톨의 정보라도 새어 나가는 순간, 그것이 진실이든 아니든 그녀가 뒤집어쓰게 된다.

    이벨린은 차갑게 식은 머리로 서랍을 내려다보았다.

    애초에 저것 중 진실된 서류가 얼마나 될까…. 그녀는 비센테에 대해서는 잘 몰랐지만, 카스트로에게 ‘전략’을 교육하던 학자는 알았다. 그리고 같은 학자에게 비센테가 열 살 무렵까지는 똑같은 과목을 배웠다는 것과 고작 그 나이에도 학자의 수제자로 불렸던 것도.

    언젠가의 과거에 흘려들었던 노인의 목소리가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도저히 신뢰할 수 없는 자를 반드시 계획에 끌어들일 필요가 있을 땐 두 가지의 방법이 있습니다. 하나는 거부할 수 없는 약점을 잡는 것이고, 두 번째는 같은 운명으로 묶는 것입니다.”

    당장 이 서류 중 하나만 바깥으로 새어 나가도 비센테는 반역으로 몰릴 터였다. 그녀가 거짓 정보를 쥐고 그야말로 천치처럼 제 주인에게 보고한다면?

    당장에 재판이 열릴 테고, 제 손으로 넘긴 정보들이니 비센테는 하나같이 무고하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을 터다. 그 과정에서 그녀와 그녀를 사주한 주인이나 수면 위로 드러나겠지.

    그리고 비센테가 손쉽게 상황을 빠져나가면 빠져나갈수록, 이벨린의 처지는 2황자에게 분별없이 홀린 배신자로 낙인찍힐 터다.

    사방이 막힌 상황에서도 이럴 일인가. 이벨린은 기가 찬 숨을 삼켰다. 그의 스승을 몰랐다면 감히 짐작하기도 힘든 속내였다. 유폐된 궁 안에서, 어떻게 그런 처신이 가능한지는 아직 모르겠지만.

    이벨린은 서랍을 갈무리해 닫다가, 무언가를 발견하고 손을 멈칫했다.

    대체, 이게 왜 여기에….

    “뭘 보고 있지?”

    등 뒤에서 갑자기 들려온 목소리에 이벨린은 화들짝 놀랐다. 무심코 집어 들었던 것을 앞치마 아래로 숨긴 것은 본능이었다. 고개를 들자 문간에 기대어 서 있는 그가 보였다.

    탐색하는 듯한 보랏빛 눈동자가 그녀를 직시했다. 때마침 지나가던 구름이 햇빛을 가려, 얼굴이 절반이 암흑에 먹힌 순간.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것 같았다.

    그것이 그저, 과거의 마지막 순간이 떠올랐기 때문인지. 그게 아니면 온전히 그 때문인지.

    비센테는 막 씻고 나온 것처럼 보였다. 살짝 젖은 앞머리와 물을 머금은 피부가 유독 시선을 끌었다. 한 겹짜리 헐거운 셔츠 사이로 매끄럽고 단단한 가슴팍이 보였다.

    그저 숨만 쉬어도 신의 걸작으로 불리는 사내였다. 이렇듯, 작정하고 유혹하지 않아도.

    귀족의 혼맥이란 흔히 최고의 핏줄들로 이어지기 마련이었다. 어느 시기에, 어느 장소의 어디를 봐도 잘생겼거나, 적당히 생겼거나, 혹은 생기다 만 사람들이 즐비했다.

    개중 눈에 띌 정도로 괜찮았던 극소수가 없던 것은 아니지만, 누구도 비센테 에스페다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흰 이마 위로 흐트러진 금발, 깊고 시원한 눈매, 짙은 보라색 눈동자, 우아한 콧날과 보기 좋은 입술과 뺨. 어릴 때도 아름다웠던 얼굴은, 매해 자라날 때마다 더없이 근사한 형태로 완성되어 갔다.

    특유의 반듯한 눈빛마저 어둑하게 가라앉은 작금에는, 여자들을 미치게 만드는 묘한 분위기마저 풍겼다. 무덤덤한 자들조차 일순 숨이 막히게 할 정도로. 그가 눈매를 가늘게 좁혔다. 웃음기라고는 전혀 없으면서, 미소처럼 보이도록.

    “베네딕트 양. 설마 그대로 죽은 건 아니겠지?”

    …그것이 못내 괘씸했다. 제 외모를 어떻게 써먹어야 효과적인지 누구보다도 잘 아는 게 분명했다. 그야 그렇겠지. 매일같이 거울을 볼 때마다 저런 얼굴을 마주한다면.

    심지어 그는 제 불순한 의도를 숨기려 들지도 않았다.

    네깟 것이 함정을 눈치챈들 어쩌겠느냐는 듯. 이래도 제 주인을 버리지 않고 버틸 재간이나 있겠냐는 듯.

    […….]

    이벨린은 덜덜 떨리는 손을 꽉 맞잡듯 쥐었다. 인간의 감정이란 가변적이다. 바다에 이는 풍랑보다도 변덕스럽기 마련이었다. 그러나 어떻게 저를 구원해 준 신, 최초로 불의 따스함을 전해 준 거인을, 어찌 한낱 인간이 미워할 수 있을까.

    “차가 식었어.”

    그는 그녀가 에스페다의 언어를 모른다는 것을 조금도 믿지 않는 것처럼 행동했다. 가까이 다가온 그가 김이 올라오지 않는 찻잔을 거침없이 집어 들었다. 비센테는 그녀의 입술을 미지근한 찻잔으로 살짝 눌렀다.

    “마셔.”

    강요를 강요처럼 느끼지 않게 하는 것도 재주였다. 분별없이 홀리는 열 살 꼬마가 된 것 같기는 했지만.

    이벨린이 입을 꾹 다문 채로 열지 않자, 심술처럼 찻잔이 기울었다. 이벨린은 반사적으로 잔에 입술을 가져다 댔다. 위태롭게 기울어지던 찻잔은 그녀가 한 모금을 간신히 머금기 무섭게 제자리로 돌아갔다.

    “감상은?”

    […….]

    원망하는 이벨린의 눈초리에도 그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물기 묻은 붉은 입술을 그가 엄지손가락으로 가볍게 눌렀다가 뗐다. 들리지 않는 목소리를 기어이 들으려는 듯, 비센테의 고개가 비스듬히 기울어졌다. 그의 호흡에선 알싸한 브랜디 향이 났다.

    “아, 그렇지…. 말을 아직 못 한다고 했던가.”

    이벨린은 그의 손을 쳐 내고, 찻물이 묻은 입술을 손등으로 쓱 닦아 냈다. 차갑다 못해 감정조차 없는 표정으로 그를 지켜보던 비센테는, 이벨린이 눈을 마주하자 그제야 조금쯤 웃었다. 메마르다 못해 버석거리는 미소. 인형도 저보단 감정적인 표정을 지을 것이다.

    […….]

    그저 가여웠다. 저 메마른 얼굴 위로, 과거의 단정한 웃음이 겹칠 때마다. 그가 어디까지 망가져 있는지, 그 심연은 감히 짐작하기도 어려웠다. 문득, 궁의와 시종장이 나누던 대화가 떠올랐다.

    아직도 약과 술 없이는 잠드시지도 못한다고….

    그녀는 가까스로 비센테에게서 시선을 떼었다. 쟁반을 집어 드는 손길이 조금 떨렸다.

    [찻물이 식은 듯하니, 다시금 준비해 올리겠습니다.]

    이벨린은 빠르게 읊조리며 그를 지나쳤다. 어깨로 있는 힘껏 목문을 밀치자, 찻잔에 담겨 있던 찻물이 왈칵 쏟아졌다. 멀쩡한 척 걷던 걸음이 무너진 것은, 앞치마 아래 숨겼던 손수건 한 장이 바닥으로 떨어졌을 때였다. 이벨린은 그것을 줍기 위해 몸을 굽혔다. 서럽게 움켜쥔 손가락 사이로 엘레나의 피 묻은 손수건이 구겨졌다.

    그가 아직도 이것을 가지고 있을 줄은 몰랐다. 그가, 여태껏 그 일을 잊지 않았다는 것도. 도대체 무슨 심정으로 이것을 간직했을까? 저주스러운 여자의 흔적? 아니면 아주 어릴 적 어울렸던 소꿉친구로서의 우정? 뭐가 됐든 죄책감이 끔찍했다. 과거의 망령에 그가 아직 사로잡혀 있다는 소리였으니까.

    ‘비센테. 나는… 네가 나를 죽여도 괜찮을 줄 알았어.’

    그가 사람을 죽이는 군인이기에 제 목숨 하나쯤 더 얹는 것은 괜찮을 것이라 짐작했다. 심지어 그는 그저 그녀의 부탁에 독을 건네준 것뿐이었으니까.

    그런 호의에 기대 기껏 도망쳐 놓고도, 여태 죽지도 못한 채 연명해 온 제 삶은 얼마나 끔찍한가.

    그가 여전히 악몽을 꾼다는 소리는 저주처럼 귓가를 맴돌았다.

    저 같은 여자 때문에 이렇게까지 망가진 비센테가, 그저 안쓰러웠다.

    “어땠어요? 뭐 좀 건진 거라도 있어요?”

    창고의 문을 닫자마자 먼저 와 있던 마리아가 새침한 표정으로 말을 붙였다. 단검 사건 이후로 마리아는 우호적인 척하던 가면을 집어던졌다. 겉으로는 웃으면서 등 뒤로는 칼을 꽂으려는 것보다는 이게 편했다. 차라리, 이렇게 적의를 이렇게 오롯이 드러내는 쪽이….

    이벨린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없었어요.”

    “벌써 차 시중을 든 지 3주가 넘어가는 것을 기억해요. 귀부인께서 독촉 중이세요.”

    “황자 전하께서 꼼꼼한 성격이셔서…. 모든 서류를 서랍에 잠가 두고 보관하고 계세요. 사소한 쪽지를 흘리실 분도 아니고요.”

    실상은 어디 가지고 나가 보라는 듯, 온 집무실 책상 위에 펼쳐 두지만. 어차피 마리아가 직접 집무실에 들어가지 않는 이상에는 평생 모를 일이었다.

    “드나드는 사람도 보지 못했어요. 적어도 차 시중을 드는 동안에는요.”

    “…….”

    “아직, 저를 믿을 만하다고 판단하진 않으신 것 같아요.”

    이벨린은 태연한 낯으로 거짓에 진실을 적당히 섞었다. 마리아는 입술을 짓씹었다. 이벨린은 그녀가 감정을 갈무리할 때까지 얌전히 기다렸다. 처음에는 그저 해맑다고 생각했던 얼굴이 표정을 달리하는 것만으로도 사나워 보인다는 건 조금 신기했다.

    “그러면 여태 진척이라곤 하나도 없었던 거네요.”

    “말했듯 조심스러운 성품이셔서….”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아요.”

    마리아가 단호하게 대답했다.

    “서랍을 잠갔다면 자물쇠를 열어서라도 정보를 빼냈어야죠.”

    “그렇게 하면 전하께선 저부터 곧장 의심을….”

    “그때 당신이 전하를 유혹했다는 소문을 낸 거, 미안하게 생각하지 않아요.”

    이벨린은 갑자기 샌 화제에 입술을 오므렸다. 대화의 흐름을 종잡을 수 없었다. 그녀가 당혹스럽게 눈만 깜박이는 사이에, 어딘지 멍해 보이는 마리아가 차분히 덧붙였다.

    “여기 있는 사람들은 제 나름대로 절박한 이유가 있어요. 빚이나 아픈 가족은 흔한 사정이고요. 나 같은 경우엔… 정말, 처음부터 이런 건 아니었어요. 어쩌다 보니 속절없이.”

    “…….”

    “어떻게 그러지 않을 수 있겠어요. 전하께서 그렇게 생겨 먹으셨는데…. 가끔은 머릿속에 악마라도 깃든 것 같아요.”

    웃는 듯, 우는 듯 마리아의 목소리가 간헐적으로 떨렸다. 이벨린은 서서히 침착함을 되찾았다. 엘레나로 살던 시절을 되짚어 보면 새삼스러운 광경도 아니었다.

    외모에 무덤덤한 엘레나의 눈에도 그는 신께서 작정하고 빚은 조각 같았다.

    황제였던 아비를 잃고, 황태자에서 한낱 황자로 전락했다는 불우한 과거는 그의 찬란한 외모를 더 빛나게 하는 장신구였다. 여자들은 비센테의 반듯한 태도에서 존재하지도 않는 결핍을 찾고, 모두에게 긋는 선을 저는 쉽게도 넘을 수 있으리라 착각하곤 했다.

    그러다 가끔은, 조심스럽던 귀족 영애들조차 미쳐서 비센테의 발치에서 앞다투어 혼절하는 시늉까지 하는 것이다.

    “내일, 폰페라다 궁에 손님이 올 거예요.”

    허공을 배회하던 마리아의 시선이 이벨린의 얼굴에서 정확히 멎었다. 이제 보니 차분한 게 아니라, 반쯤 돌아 버린 눈빛이었다. 등줄기에 소름이 오싹 돋는 것 같았다. 이벨린은 조심스럽게 되물었다.

    “손님이요? 하지만 어떻게…. 전하께선 유폐된 상태잖아요.”

    “전하의 죄를 잊었어요? 황태자의 여자를 시해한 죄로 유폐되었잖아요…. 가끔은 그 여자가 부러워요. 그분께 그만한 생채기를 남겼다는 사실이.”

    이벨린은 기막힌 헛웃음을 간신히 삼켰다. 이 자리에 버티고 서 있는 것이 참을 수 없이 역겨워지기 시작했다. 그녀의 표정을 어떻게 해석했는지, 마리아가 픽 웃으며 품속에서 얇은 봉투를 꺼내 이벨린에게 건넸다.

    “어쨌든 내일 손님이 오기 전에 이걸 집무실에 숨겨 두라고 하셨어요.”

    “이게… 뭔데요?”

    “알 게 뭐예요. 무슨 반역의 증거품쯤 되겠지.”

    이벨린은 입술을 짓씹었다. 그들의 인내심이 이렇게까지 짧을 줄은 예상하지 못했는데.

    비센테가 조작한 증거를 밖으로 빼돌리는 것과 저들이 조작한 증거를 숨기는 것.

    비슷한 듯 보이지만 예상되는 결과는 완전히 달랐다. 전자는 조사한들 어떤 것도 나오지 않겠지만, 후자는 계획된 조작으로 비센테가 반역자로 몰리게 될 가능성이 컸다.

    반드시 막아야겠지만, 어떻게 그런단 말인가?

    자칫하면 양쪽 모두에게서 신뢰를 잃을 수도 있었다. 적어도 코라의 안전이 완전하게 확보되었을 때가 아니면….

    초조하게 생각을 거듭하는 사이, 이벨린의 손에서 마리아가 봉투를 빼앗아 들었다. 꾸며진 증거품은 마리아의 손에서 힘없이 두 조각으로 찢어졌다.

    “무슨 짓이에요?”

    이벨린의 경악에도 마리아는 태연했다. 마치, 애초부터 이러려고 했던 것처럼.

    “내가 제안하는 건 이거예요. 이런 거짓 증거 따위는 잊어버리고….”

    마리아는 이벨린의 손바닥이 위로 오도록 잡고, 작은 주머니를 올려놓았다. 반쯤 묶인 주머니 사이로 말린 잎사귀가 보였다. 익숙한 독초였다.

    “내일 올라갈 찻잎에 이 독초를 섞어요.”

    차디찬 얼음장 같은 손아귀는, 사람이 아니라 뱀의 껍질이라도 만지고 있는 것처럼 섬뜩했다. 마리아의 목소리가 비정상적인 희열로 갈라졌다.

    “그렇지 않으면 네가 황자와 붙어먹었다고 귀부인에게 전할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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