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화 (12/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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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일부터 2황자 전하의 차를 준비해라.]

    이벨린은 뜻밖의 명령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차라고 하시면….]

    [1시와 7시. 하루에 두 번씩 황자 전하의 집무실 책상 위에 준비해 둬.]

    이벨린은 초조함을 감추기 위해 앞치마 아래에서 양손을 꽉 그러쥐었다. 최악에 가까운 첫인상을 남겼는데도 차 시중을 들라니. 그 의미는 명백했다.

    노골적인 감시. 심지어 그 의도를 감출 생각조차 없어 보였다.

    당혹스러운 감정과는 별개로 상황은 지나칠 정도로 순조로웠다. 마치 이벨린에게 작정하고 정보를 빼돌리라고 떠미는 것처럼….

    [네가 에스페다어는 한마디도 못 한다고 하니, 이제부터라도 곁에 두고 자질구레한 심부름이라도 시키실 모양이지.]

    그녀의 의문을 읽기라도 한 듯 시종장이 말을 보탰다.

    [찻잎은 식재료 창고의 안쪽에 보관되어 있다. 드나들 때는 꺼내 쓴 찻잎의 양을 장부에 기록하면 되고. 설마, 차를 우려 본 적이 없진 않겠지?]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과거에 여러 종류의 찻잎을 다뤄 본 경험이 있었다. 차 예절은 귀족 영애들의 필수 교양 중 하나였다.

    [네. 맡겨 주세요.]

    그녀의 명료한 대답에도 시종장은 못마땅하다는 듯 입매를 굳혔다. 이벨린은 별다른 타격조차 없이 그 시선을 받아넘겼다. 근래 들어 드문 시선도 아니었다. 그날, 비센테와 그녀가 붙어 있던 장면을 마리아가 떠벌리고 다닌 탓에 이벨린은 이제 공공의 적이나 다름없었다.

    ‘면전에 대고 브리타냐에서 온 창녀라는 소리까지 들었으니까.’

    언어를 모른다는 것이, 얼마나 저열한 괴롭힘의 수단이 되는지.

    그보다 더 우스운 것은 마리아의 눈빛에 담긴 적의였다. 적과 붙어먹은 배신자를 보는 눈이라기보다는… 조금 더 감상적인 이유. 그건 연적을 바라보는 눈이었다.

    ‘단검을 지니라는 조언을 조금 더 경계해서 들었어야 했어.’

    아마도 그녀를 어떤 방식으로든 밀고해, 비센테의 신뢰를 얻어 내려던 작전이었던 듯했다. ‘귀부인’과 연락할 수단은 오로지 마리아밖에 몰랐고, 그 말인즉 일이 이런 식으로 뒤에서 틀어진다고 해도 이벨린으로서는 항의할 수단이 없다는 뜻이었다.

    물론 마리아 말고도 ‘귀부인’과 연결되는 소식통이 두셋은 더 있겠지만, 나서서 찾기엔 위험 부담이 지나치게 컸다.

    에스페다어라곤 조금도 할 줄 모르는 외국인이라는 게, 지금 그녀의 처지였으니까.

    어쨌든 이벨린은 지금쯤 ‘귀부인’이 그녀의 가치를 상향 조정했으리라고 생각했다. 그들이 예상했던 것보다 두 배는 빠르게 4층의 집무실에 입성한 셈이었으니까.

    더구나 하녀들 사이에 도는 풍문을 생각하면, 2황자가 그녀에게 육체적으로 접근했다고 오해해도 이상하지 않았다.

    ‘오해하면 할수록 좋아. 내 정보에 대한 신뢰도가 올라갈 테니까.’

    여동생인 코라를 잡고 있다는 것 하나만으로, 안일하게 그녀의 충성심을 믿을 터다. 그녀가 내미는 족족 독인 줄조차 모르고 집어삼키겠지. 비센테와의 추문이 여기서 더 심해지지만 않는다면….

    [듣고 있나?]

    시종장의 이벨린은 퍼뜩 상념에서 벗어났다.

    [아. 죄송해요. 잠시 놓쳤어요. 뭐라고 하셨죠?]

    몇 마디의 잔소리라도 더 덧붙일 듯 일그러졌던 안토니오의 입술은 곧 반듯하게 가라앉았다. 그는 했던 말을 되풀이하는 대신 책상 서랍을 열었다. 열쇠 꾸러미에서 납작한 놋 열쇠 하나를 빼내 테이블 위에 반쯤 던지듯 내려놓았다.

    [받아. 집무실을 여는 열쇠다.]

    이벨린은 열쇠를 조심스럽게 앞주머니에 넣었다. 떠보는 말은 쉽게도 나왔다.

    [이런 귀중한 걸 제가 가지고 있어도 되나요?]

    [열쇠는 셋뿐이야. 하나는 내가, 하나는 황자 전하께서 들고 계시지. 그리고 나머지 하나는 바로 네가 쥔 그것이다.]

    […….]

    [4층에서 사소한 무언가라도 일어난다면 그게 모두 네 죄가 될 거다. 그러니 부디 처신을 주의하는 게 좋을 거야.]

    [알겠습니다.]

    [나가 봐.]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서서 공손히 허리를 굽혔다. 문고리를 잡기 직전 시종장이 그녀를 다시금 불러 세웠다.

    [이벨린.]

    [말씀하세요.]

    이벨린은 다시금 양손을 모은 채 몸을 돌렸다. 햇빛을 받은 낯빛은 유독 유순해 보였다. 대뜸 의심부터 하는 쪽이 면구해질 정도로. 그럼에도 안토니오는 굳은 표정으로 한동안 그녀를 뜯어보더니 불쑥 물었다.

    [혹시, 그간 내게 거짓으로 고한 게 있진 않겠지?]

    [예? 그게 무슨….]

    [됐다. 나가 봐.]

    미간을 찡그린 시종장은 제가 불러 놓고도 성가시다는 듯 오른손을 휘휘 내저었다. 그녀는 공손히 인사하고 방문을 닫았다. 멀쩡하게 걸을 수 있던 것은 고작해야 서너 걸음뿐이었다. 그녀는 비틀거리며 벽을 짚었다. 서늘한 기운이 피부에 닿자, 내내 쿵쿵거리던 심장이 그제야 조금쯤 진정되었다.

    “이벨린?”

    오가며 얼굴이나 몇 번 보았던 하녀가 지나가다 말고 걱정스러운 듯 멈춰 섰다. 손등을 붙잡고 톡톡 치기에 카드를 꺼내 주자, 그녀보다도 능숙하게 몇 가지를 골라냈다.

    [무슨] [일] [?]

    하녀의 얼굴은 정말로 걱정스러워 보였다. 브리타냐의 창녀라며 조롱하던 과거가 불과 며칠 전인데도. 그때와 지금, 다른 것은 이벨린의 위치였다.

    그전까지야 황자 전하에게 몸을 던져 보는 무수히 많은 하녀 중 하나였다면, 지금의 이벨린은 그들 중 유일하게 4층의 출입까지 가능해진 사람이었다. 시종장에게 불려들어간 것이 고작해야 5분 전이니 정보를 어디에서 얻었을지는 분명해 보였다.

    ‘창문이 조금 열려 있었어.’

    시선을 돌리자 시종장 집무실 옆 창고의 문이 빼꼼히 열려 있는 게 눈에 들어왔다. 서둘러 나온 탓에 미처 뒤처리를 못 한 모양이었다. 이제야 조금씩 모든 것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온 벽과 바닥에 수십 개의 눈과 귀가 달려 있다는 것…. 고작 2년 만에 그 감각들을 잊었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이벨린의 침묵이 길어지자, 하녀가 부드럽게 대답을 재촉했다.

    “응?”

    [괜찮다] [일] [없다]

    그녀가 내민 카드에 하녀는 안쓰럽다는 듯 손등을 다시금 붙잡아 도닥였다. 카드로 의사소통이 되겠느냐며 조롱하던 모습은 이미 온데간데없었다. 다시금 카드를 골라 내는 여자의 손은 빠르고 정확했다.

    [돕다] [일] [항상] [말하다]

    ‘도울 일이 있다면 언제든 말하라고.’

    [그럴게요. 말만으로도 고마워요.]

    이벨린은 순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여자는 무심코 고개를 끄덕이다가, 뒤늦게야 제 실책을 알아차리고 입매를 굳혔다. 허둥지둥 말을 맺었다.

    “그러면, 또 다음에….”

    여자는 급작스럽게 등장한 것만큼 빠르게 멀어졌다. 이벨린은 멀어지는 하녀의 뒷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헛웃음을 터트렸다.

    이유 모를 불길함의 실체를 오늘에서야 마주한 기분이었다. 이 궁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저마다 다른 주인을 섬긴다는 것을 왜 여태 몰랐을까? 한 번 인지하기 시작하자 이제는 모든 게 훤히 들여다보였다.

    누가 첩자인지, 암살자인지, 기회주의자인지, 왕당파와 귀족파에서 심은 사람인지, 하다못해 그저 2황자의 몰락을 바라는 자인지….

    그나마 희망은 이 혼란한 상황이 오래 지속되진 않으리란 것이었다.

    황제는 곧 비센테를 수도로 불러들일 것이다. 반역으로 엮기엔 애초부터 ‘엘레나 데 카스타야’의 시해는 작은 죄목이었고, 영원히 유폐해 두기엔 비센테를 사랑하는 에스페다인들의 눈치가 보일 테니까.

    기껏해야 앞으로 서너 해쯤이나 버틸까. 아마도 다음 황위를 물려받을 후계가 공고히 정해지고 나면, 복위는 마땅한 수순이었다. 전 황제에게 아직도 충성하고 있는 왕당파 귀족들을 회유하기 위해서라도.

    그러니 그때까지만 버티면 된다. 수상한 자료는 없애고, 유출되어야만 하는 정보는 최대한 안전한 것으로 골라서, 반역으로 엮일 만한 정황은 모조리 걷어 내고….

    그녀가 그렇게 부지런히 움직이는 동안, 높은 위치에 있는 자들은 결정적인 순간까지 의심조차 못 할 터였다. 그들은 종종 하녀에게도 의지가 있다는 것을 놓치니까.

    이벨린은 단호하게 성호를 내리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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