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화 (9/151)

***

거슬린다. 그 여자가 가진 모든 게.

비센테의 보랏빛 눈동자가 섬뜩한 빛으로 가라앉았다. 잠시만 방심해도 생각은 곧바로 조금 전으로 흘렀다.

고요히 어둠에 잠긴 얼굴, 제가 누군지 알아본 양 놀란 낯빛, 금세 침착을 되찾은 눈동자, 마지막에 지른 비명까지. 하나부터 열까지 부자연스럽기 짝이 없었다.

딴에는, 제법 잘 속여 넘겼다고 생각한 모양이었지만.

괘씸하게도 엘레나를 곧장 떠올리게 만드는 외모였다. 흑갈색 머리카락, 청회색 눈동자, 제법 예쁘장한 이목구비까지도. 기억 속 엘레나의 색채는 그보다 옅었으나… 비슷한 색을 지녔다는 것만으로도 인내하기 힘든 불쾌감이 치솟았다.

역한 숨이 샜다. ‘저들’이 무엇을 바라, 그 여자를 제 앞에 들이밀었을지. 그 계산이 뻔히 읽혔다. 그는 잇새 사이로 짓씹듯 내뱉었다. 그의 분노에 시종장이 공손히 대꾸했다.

“하지만 전하. 서류를 살펴보았지만… 황태자와 연관되었을 가능성은 희박합니다. 브리타냐를 떠난 적조차 없는 아입니다.”

추천서를 받은 경위도 조작된 바 없이 깔끔했고, 자라는 동안 변변찮은 후원자조차 없었다. 브리타냐의 소도시. 그마저도 수도원에서 평생을 지낸 여자. 저 여자의 결백을 믿지 못한다면, 세상의 누구를 가져다 대도 믿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때로는, 직감이 모든 증거를 앞지르기도 한다.

“무슨…. 설마 달리 의심하시는 연유가 있으십니까?”

시종장의 목소리가 조금 더 낮아졌다.

비센테는 시종장을 향해 비스듬한 시선을 던졌다. 근 10년이었다. 제 아비가 죽고, 황태자의 지위를 빼앗긴 이래로 시종장인 안토니오 자작이 제 곁에 붙어 있던 세월이.

한때는 그것이 진심으로 기꺼웠던 적도 있었다. 그가 누구에게 진정으로 충성하는지를 알지 못하던 그 순간까지는.

비센테는 입매를 매끄럽게 올렸다.

“글쎄.”

지난해부터 잦은 두통을 호소했던 시종장 안토니오 자작은, 올봄을 거치며 급격히 예후가 나빠졌다. 3달 만에 두 번의 졸도를 겪어 낸 이후로 그는 자주 은퇴를 언급하곤 했다.

오로지, 제 건강이 주인에게 누를 끼치지 않을까 저어한다는 이유로.

애초부터 숙부인 황제가 어거지로 접붙인 사이니, 그가 섬기는 주인이란 오로지 황좌의 주인만을 의미했다. 그리고 황제는 안토니오의 은퇴를 윤허하는 대신, 이례적으로 유폐된 궁에 새로운 일손을 들이는 것을 허락했다.

그 과정에서 비센테가 내건 조건은 하나뿐이었다.

에스페다의 언어를 모를 것.

당혹스럽기는 해도 의심스러운 정황은 아니었다.

모든 것을 제 손으로 정리하는 2황자의 기벽은, 이미 유명했으니까.

비센테는 황태자만큼이나 고귀하게 태어난 태생과 달리 모든 것을 혼자 처리하는 것에 익숙한 남자였다. 서재와 집무실은 온전히 그의 관할이었고, 귀한 손으로 마구나 총기 관리도 직접 했다.

무슨 일이든 직접 해야 직성이 풀리는 것은 그것이 군인의 습성이기 때문이리라.

황자로서 고고하게 살아온 세월보단 전장의 흙먼지나 뒤집어 쓴 세월이 더 길었던 탓에. 그리고 그렇게 오랫동안 제국에 충성한 조카에게, 황제는 늘 인색했다.

하다못해, 백작의 차남이라도 한 번쯤은 받는 중령 직함조차 달지 못하고.

조카만 마주하면 무엇이든 해 줄 것처럼 구는 것과는 별개로 의도적으로 진급에서 배제하는 속내란 역겨울 만치 빤했다.

비센테의 얼굴에서 죽은 제 형을 보고, 과거의 약속을 떠올리고, 그로부터 부족한 제 황위의 정당성을 떠올리는 것이다. 애초 비센테가 장성할 때까지 섭정과 다름없이 앉은 자리였으니까.

실체도 없는 공포는 사람을 편협하게 만든다. 아무리 만인 위에 군림하는 황제라고 해도.

“전하?”

“아.”

비센테는 그제야 안토니오가 여태 제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니까, 그 여자를 의심하는 이유를 물었던가. 그는 표정을 풀며 적당히 솔직히 보일 법한 이유를 댔다.

“지나치게 깨끗해.”

“예…?”

“수도원에서 살아온 세월이나, 사소한 후원자조차 없었던 점까지, 모두.”

기실 간단한 암시였다. 언어를 모르겠다는 자를 들이겠다는 것은. 적들은 비센테에게 감추고 싶은 기밀이 생겼다는 소리쯤으로 받아들일 터였다. 그리고 그들은 무슨 수를 써서든 그 정보를 손에 넣고 싶어 하겠지.

특히나, 그의 집무실에 반역의 흔적을 직접 심고자 몸 달아있는 카스트로라면 더더욱.

그는 여자의 어깨를 붙잡았던 오른손을 천천히 그러쥐었다. 감각은 여태 생생했다.

훈련받은 암살자의 몸이라기엔 지나치게 연약하고, 근육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부드러움. 손에 힘을 풀고 나서도 아프다는 듯 눈물짓던 얼굴은 괘씸한 감정마저 불러일으켰다.

여자는 분명 그를 알아봤다.

전장에서는 단 한 순간 생과 사가 오간다. 상대방의 사소한 눈짓만으로도 어디를 방어하고, 어느 곳을 공격해야 하는지를 읽어 내는 것이 전투의 기본이었다. 그리고 그는 수많은 전투의 생존자였다.

칼 한 번 쥐어보지 않은 말랑한 낯짝으로 속이기엔, 상대가 지나치게 나빴지.

“그 하녀에게 내 차 시중을 맡기도록 해.”

“…집무실에 들이실 생각이십니까?”

비센테는 느릿하게 입가를 매만지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감시가 목적이시라면 제게 맡기시지 않고요. 집무실이라뇨.”

시종장의 목소리에 언뜻 불안감이 묻어났다. 가끔 안토니오 자작이 저런 식으로 걱정하는 듯한 낯짝을 할 때마다, 비센테는 충동적인 감정에 휩싸이곤 했다. 자작의 바닥, 그 저열함까지 남김없이 확인했다는 것조차 모른 채 태연히 연극을 이어 나가는 모습을 볼 때는.

사소한 심상을 삼키며 비센테는 느른하게 웃었다.

“자작조차 쉽게 들지 못하는 공간에 하녀를 들이는 것이 불쾌한가?”

“그 뜻이 아니오라….”

“반역의 증거를 심으려다가 잡힌 시종들의 숫자만 열 가까이 되어 가. 출입을 통제한 것은 자작을 의심해서가 아니라, 지키기 위해서라는 것쯤은 알 테지.”

“…송구합니다.”

“그대는 내게 하나 남은 가족이야. 걱정시키지 말도록 해.”

안토니오 자작이 황공하다는 듯 읍하자마자, 비센테의 눈빛이 서늘하게 일변했다. 고작해야 이런 입발림으로도 눈에 띄게 안도하는 꼴이라니.

한때는 진정이었던 애정이 자작의 오만한 눈을 가린 것이다. 그는 죽어도 모를 것이다. 제가 어린 시절부터 돌보던 황자가 어디까지 자라났는지.

“게다가… 사소히 몇 가지 확인해 볼 것이 있거든. 내가 직접.”

여자의 배경에서 이해되지 않는 부분은 아직 남아 있었다. 분명 말을 알아듣는 것 같은데, 과거의 어디를 뒤져도 에스페다의 언어를 배웠다는 흔적은 한 톨도 없었다. 달리 말하자면, 어디서 무슨 수를 써서 에스페다의 언어만 배웠다면.

‘누구에게도 의심받지 않는 첩자가 되겠지.’

엘레나가 비센테의 약점이라면, 카스트로에게도 마찬가지였다.

하녀는 죽은 예비 황태자비를 빼닮았다. 그저 비슷한 색채가 아니라, 입매와 속눈썹을 쓰는 방식이, 풍기는 분위기가, 사소한 말투가, 억양이….

그는 과거에 엘레나가 브리타냐어를 하는 모습을 본 적 있었다.

한 가지 확신할 수 있는 것은 카스트로는 아직 저 하녀를 마주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랬더라면 저 여자는 고작해야 2황자의 유배지가 아닌, 에스페다 황태자의 침실로 끌려 들어갔을 테니까.

그는 느른히 웃었다.

“이번에는 내게 운이 따라 주는군.”

알고서도 저를 맹랑하게도 괴한으로 몰아가던 그 판단력, 실행력. 심증만 있되 물증이 없으니 추궁하기 애매하리라는 것조차 계산한 잔머리까지.

그는 여자를 무슨 수를 쓰더라도 손에 넣을 작정이었다.

뒷배가 있다면 배신자가 되도록 상황을 만들고, 없다면 원하는 재물은 얼마든지 안겨 줄 작정이었다. 필요하다면 저열한 수단까지 동원해서라도.

그렇게 천천히, 주변에 저밖에 남지 않도록, 제가 그 여자에게 최선의 선택지가 되도록, 여자가 그의 손을 구원이라고 마침내 착각할 때까지, 서서히.

비센테의 보랏빛 눈동자가 서늘하게 빛났다.

원하든 원치 않든 저 하녀는 결국 그의 패가 될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그 손으로 황제마저 고꾸라트릴 것이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