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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벨린은 몇 개째인지도 모를 유리창에서 먼지와 거미줄을 걷어 냈다. 이 짓도 오전 내내 했더니 벌써 손에 익기 시작했다. 물론 한 번 빗자루를 흔들 때마다 머리 위로 뿌옇게 떨어지는 먼지만큼은 조금도 익숙해지기 힘들었지만.
그녀는 젖은 손으로 파들거리는 팔을 꾹 눌렀다. 물이 가득 든 양동이를 들고 다니느라 혹사당한 팔이 비명을 지르는 것 같았다.
무엇보다 자꾸만 화가 치미는 것은, 이 모든 수고가 애초부터 쓸모없는 종류이기 때문이리라.
폰페라다 궁은 고전적인 궁정 양식을 충실히 따른 구조로, 본관을 중심으로 서관과 동관이 이어진 구조였다.
이런 구조일 경우 보편적으로 황족은 본관, 서관은 귀족, 하인은 동관의 머무는 것이 관례였다. 문제라면 폰페라다 궁이 공식적으로 방문객조차 허용되지 않는 유배지라는 것.
드나드는 귀족이라고는 단 한 명도 없는 곳에서, 이제 와서 서관을 정돈하는 것에 무슨 의미가 있으리라고.
‘정말 잘 관리할 작정이었으면, 지난 몇 년간 방치하지도 않았겠지.’
속에서 치받는 감정을 이벨린은 가까스로 억눌렀다. 고작해야 이런 것에 힘들다고, 벌써부터 약해져서는….
“이벨린.”
마리아의 부름에 이벨린은 앞치마에 손을 닦고 호주머니에서 카드를 꺼냈다. 인적이 드문 장소였지만 어디에서건 시종장의 눈이 지켜보고 있을지 몰랐다. 마리아는 이벨린의 손에서 몇 개의 카드를 골라냈다.
[2층/3층], [복도/복도], [먼저/먼저], [이동/이동], [청소/청소].
“올라가서, 청소, 하고 있어. 알겠지?”
그러고는 마른걸레가 수북하게 쌓인 바구니가 쥐어졌다. 오전 내내 청소한 끝에 1층의 복도는 얼추 마무리되어 가던 참이니, 이제는 위층으로 이동하라는 말이었다. 이벨린은 왼손에는 바구니를, 오른손에는 비눗물이 든 양동이를 꼭 쥔 채로 힘겹게 계단을 올랐다.
2층과 3층을 바꾸어 써놓은 시종장의 의도란 뻔했고, 이 정도의 고난은 예상하던 범주였다. 신뢰를 얻을 때까지 몇 주, 몇 달은 정원이든 부엌이든 내돌려질 각오쯤은 진작 했다.
이벨린은 무거운 양동이를 계단의 끄트머리에 내려 둔 채 숨을 골랐다. 턱에 송골송골 맺힌 땀을 닦다 문득 위화감을 느꼈다.
‘…….’
굳건히 닫혀 있어야 할 3층의 방문 중 하나가 빠끔히 열려 있었다.
‘무슨….’
일반적인 경우 궁에서는 사용하지 않는 방의 문을 잠가 두기 마련이었다. 하물며 유폐자가 머무는, 규모에 맞지 않는 거대한 궁임에야. 불현듯 수도원에서 지내던 기억이 떠올랐다.
간혹 부랑자들이 피정자들의 빈 숙소에 숨어 지내다 발각된 적이 있었다. 어쩌면, 이곳도 마찬가지일지 몰랐다. 궁의 외곽을 군인들이 철저하게 지키고 있다곤 하지만 사람이 하는 일에는 어디든 빈틈이 생기기 마련이니까.
“2황자가 누굴 만나는지, 누구와 편지를 주고받는지.”
귀부인의 그 어조와 억양, 폰페라다 궁에 드나드는 사람이 있다는 걸 확신하는 것 같은 말투. 그게 진실이라면 큰 문제였다. 특히 귀족이 드나들었다는 흔적이라도 발견되면 사소한 것일지라도 반역으로 몰릴 수 있는 여지가 있었다.
‘혹시라도 누군가 머물렀던 흔적이 남아 있다면, 차라리 지금 없애야 해.’
그녀는 결연한 눈으로 등 뒤를 살폈다. 복도는 고요했고, 마리아가 계단을 올라오는 기척은 여전히 느껴지지 않았다. 이벨린은 잠시 고민하다가 문고리를 잡았다.
촛불 하나 켜 두지 않은 내부는 한낮인데도 어둑했다. 창문이 조금 열려 있었고, 딱 그만큼만 젖혀진 커튼 사이로 햇빛이 한 줄기 내렸다.
가구를 덮은 흰 천들은 틈새로 불어오는 바람에도 나부꼈다. 기대했던 인기척은 전혀 없고 어쩐지 으스스한 방이었다.
‘하기야 그 보안 철저하다는 층도 아닌데. 과민하게 반응했나.’
서둘러 한 바퀴 돌아보고 별일 없으면 문단속이나 하면 그만이었다. 이벨린은 옅은 어둠 속에서 성급하게 움직이다가 사이드 테이블에 허벅지를 박았다.
금속 재질의 테이블과 허벅지에 매단 단검의 손잡이가 부딪쳐 깡, 하는 소리가 났다.
“아야야….”
살갗이 세게 짓눌리는 바람에 눈물이 찔끔 났다. 무심코 테이블을 짚은 이벨린은, 그 위에 언뜻 보기에도 심상찮은 서류들이 놓여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큰돈을 빌려주고 받은 차용 증서였다. 이 정도 규모라면 목적은 하나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군사 자금.’
등 뒤로 식은땀이 흘렀다. 그녀가 아는 비센테는 언제고 황제에게 충성하는 자였고, 그를 눈엣가시처럼 여기는 황태자의 의심을 잠재우기 위해 최전방을 전전하던 군인이었다. 그런 그가, 정말 반역을 준비하고 있는 걸까….
“처음 보는 하녀군.”
이벨린은 바로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화들짝 놀라 들고 있던 바구니를 놓쳤다. 그러기 무섭게 팔이 붙잡혔고, 뒤로 꺾인 채 벽으로 몸이 처박혔다. 숨이 잠깐은 쉬어지지도 않았다. 아프다기보다는 지독하게 놀랐다. 등 뒤로 그늘진 사내의 그림자.
“양은 관할도 아닌 공간에 드나드는 것을 즐기는 모양이야.”
그 목소리, 그 우아한 억양. 비센테였다. 몰라볼 수조차 없이. 낮은 곳에서부터 그윽하게 울리는 목소리는 언뜻 조롱처럼 들렸다.
“대답해라. 누구의 지시를 받았지?”
[흣….]
지나친 긴장으로 떨리는 호흡이 가쁘게도 귓가를 메웠다. 조금이라도 진정하기 위해 그녀는 입술을 깨물었다. 폰페라다 궁에 들어온 이상 언제고 비센테와 마주치게 될 줄은 알았지만, 이런 방식은 상상조차 해 본 적 없었다.
이렇게 사냥당한 짐승처럼 벽에 처박힌 채로 마주하게 되리라곤….
물론 잘못은 전적으로 그녀에게 있었다. 근무지를 이탈하지 말았어야 했다는 반성을 하기엔, 이미 심하게 늦은 뒤였고.
초조하게 머리를 굴려 봐도 마땅한 변명이 없었다. 에스페다어를 한마디라도 내뱉는 순간 시종장을 기만한 죄로 목이 달아날 것이다. 운이 나쁘다면 배후를 토설하라며 온갖 고문을 당할 테고.
엘레나라고 정체를 밝히고, 무슨 일이든 돕겠다는 속내를 드러낸다면? 에스페다는 국교를 믿는 신실한 신자들이 전체 인구의 8할을 차지하는 국가였고, 그만큼이나 사특한 풍조를 경계하는 자들이 많았다. 옛 마도 시대의 유물만 지니고 있어도 마녀로 몰리는 마당에야….
그녀의 바쁜 머릿속을 들여다보이기라도 한 듯 그가 차갑게 말했다.
“침묵이 능사가 아닐 텐데.”
벽과 그의 몸 사이에 짓눌려 있던 몸이 우악스럽게 잡아 돌려졌다. 그제야 힘을 준 듯, 잡힌 팔목에서 눈물이 핑 고일 정도의 통증이 일었다.
[조금….]
이 와중에도 브리타냐어를 내뱉고야 만 것은, 앞선 계산보다도 순전히 이기적인 욕심이었다. 도저히 엘레나로서는 그를 마주할 자신이 없었다. 그를 이 궁으로 처박은 원흉이나 다름없는 제가, 뭐라고 감히 그에게 동정심을 보이나.
더구나 산 자에게는 산 자의 인생이 있는 법이다. 그의 복위를 돕고 나면 흔적도 없이 사라져 일생을 평민으로 살아갈 텐데, 굳이 정체를 밝힐 이유가 있을까? 이벨린은 눈물이 고인 눈을 깜박였다.
[일단 조금만, 놓아주시면….]
달달 떠는 턱을 붙잡은 비센테가 강제로 그녀의 고개를 들어 올렸다. 이벨린은 놀라서 터져 나온 숨을 가까스로 삼켰다. 2년 만에 마주한 그의 얼굴이란. 사나운, 비틀린, 메마른, 수척해진, 형형한….
과거 여자들을 애끓게 만들던 아름다운 이목구비와 체격은 그대로였지만, 그를 제외한 모든 분위기가 달라 기묘했다.
같은 것은 숨을 쉬고, 뱉을 때마다 느껴지는 서늘한 시더의 향. 깊은 저지에서 울리는 것 같은 목소리.
“이젠, 아주 별의별 수작을 다.”
그의 매혹적인 눈매가 가늘어졌다. 미려한 웃음처럼 보이지만, 기실 화가 머리끝까지 날 때나 간혹 짓던 표정이었다.
[아….]
잠시 넋을 잃고 바라보는 사이에 왼쪽 허벅지가 잡히듯 들어 올려졌다. 이벨린은 아연한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흘러가는 상황과 머릿속 인식이 아주 달라 판단조차 느렸다.
그녀의 머릿속에 박혀 있는 비센테란 언제나 절제를 아는 기사였고, 신분 고하를 막론하고 여성에게 함부로 손을 올리지 않는….
[무, 무슨!]
이벨린의 비명에도 아랑곳하지 않은 그가, 그녀의 치맛자락을 허벅지까지 걷어 올렸다. 훤히 노출된 살갗에 당황한 것도 찰나였다. 성적인 함의라곤 조금도 느껴지지 않은 손이, 그녀의 허벅지에서 가죽 홀스터를 잡아챘다. 눈 깜짝할 새에 단검이 그의 손에 들려 있었다.
“날붙이라.”
조금 전, 테이블과 부딪치며 부자연스러운 소리가 났던 것을 기민하게 알아차렸던 모양이었다. 그는 단검을 버리듯 바닥에 떨어트리고 구둣발로 밀어 치웠다. 바닥에서 핑그르르 도는 칼날은 어둠 속에서 더욱 흉흉해 보였다. 새파래진 이벨린의 얼굴에 대고 조롱이 쏟아졌다.
“내 목에 칼을 쑤셔 박을 순간에도 그리 순진한 표정을 지었을지 궁금하군.”
[…….]
“그래, 어디 계속 지껄여 봐. 근육이라곤 하나도 없는 몸으로 어찌 해할 작정이었는지 듣고 싶거든.”
아. 그녀는 달달 떨리는 입술을 깨물었다. 이제는 다른 방법이 없었다. 이렇게까지 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결심을 굳힌 이벨린은 눈을 꽉 감고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그러고는 배에 잔뜩 힘을 주고 대뜸 소리를 질렀다.
[마리아! 여기예요!]
“무슨….”
이벨린은 그가 당황하는 사이에 한 번 더 소리를 빽 내질렀다.
[당장 와 줘요! 괴한이야! 치한이야!]
헛웃음을 내뱉던 비센테의 얼굴이, 뒤이어 기막히다는 듯 일그러졌다. 다행스럽게도 곧바로 문이 활짝 젖혀졌다. 마리아였다. 어찌나 간절했던지, 마리아가 등진 복도의 햇살이 마치 후광처럼 보일 지경이었다.
“어디 갔나 한참 찾았더니, 여기 있었어요? 무슨 소리를 그렇게….”
짜증스럽게 일그러졌던 마리아의 눈이 순식간에 동그래졌다. 그녀의 갈색 눈동자가 벽에 밀쳐진 이벨린과, 훤히 드러난 허벅지와, 그것을 잡고 있는 비센테에게로 천천히 옮겨갔다.
마리아의 얼굴이 순식간에 창백하리만치 새하얗게 질렸다가, 붉게 달아올랐다. 뒤늦게야 허겁지겁 허리를 굽히고 떨리는 목소리로 예를 갖췄다.
“저, 저, 전하를 뵙습니다.”
그가 이벨린을 놓아주며 건조하게 되물었다.
“누구지?”
“마, 마리아 몬테스입니다, 전하.”
“이 하녀를 본 적 있나?”
마리아에게 건네는 질문이었지만, 시선만은 여전히 이벨린에게 못박인 채였다. 마리아는 눈에 띄게 불안해하는 얼굴을 하면서도 착실하게 대답했다.
“오늘부로 서궁에서 근무하는 하녀입니다. 이름은 이벨린….”
“오늘? 시종장이 새로운 하녀를 뽑았던가?”
“4층의 일손이 빠듯해, 브리타냐에서 입국시킨 것으로 알아요.”
그제야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겠다는 듯 그가 혀를 찼다. 이벨린은 서둘러 흐트러진 옷가지를 정돈하고, 냉큼 마리아의 등 뒤에 가서 숨었다. 불한당을 마주친 것처럼 억울한 눈으로 비센테를 잔뜩 흘기는 것도 잊지 않았다. 겉으로는 태연한 척 굴었지만, 비센테의 서늘한 눈과 마주할 때마다 등 뒤로 식은땀이 주르륵 흘렀다.
‘이, 이렇게까지 할 생각까진 아니었지만….’
이대로라면 어찌저찌 넘어갈 수 있을 것 같았다. 첫인상이야 최악으로 기억되겠지만…. 이게 최선이었다. 모든 것을 실토하느니, 일이 서툴러 ‘실수로’ 황자의 개인적인 공간에까지 침범한 하녀가 되는 게 백 배는 나았으니까.
이벨린은 바닥에 나동그라진 걸레 바구니를 수습하는 척 허리를 숙이며, 앞주머니 속의 카드 몇 장을 일부러 떨어트렸다. 그 소리에 마리아와 비센테의 이목이 잠깐 그녀 쪽으로 쏠렸다. 그의 발치에 떨어진 카드를 비센테가 구두코로 툭 건드려 뒤집었다.
유아들이나 쓸 법한 내용에 그가 실소했다.
“브리타냐라.”
“보시다시피… 에스페다어는 한마디도 못 하는 것으로 압니다.”
“이걸 직접 준비했다던가?”
“시종장께서 아침에 건네셨어요.”
그의 시선이 카드에 얼마간 머물렀다. 이벨린은 그가 어느 정도 설득당했으리라고 확신했다. 게다가 유폐된 몸인 이상 하녀를 심증만으로 처단할 수는 없다. 특히나 평민들에게 유독 큰 지지를 받고 있는 2황자로서는, 더더욱.
그녀는 비센테의 시선을 피하지 않고 정면으로 마주했다. 그 뻣뻣한 태도에 놀란 마리아가, 대경하며 그녀의 허리를 억지로 잡아 굽힐 때까지.
숙인 시야의 끄트머리에 카드를 밟고 선 그의 구두코가 보였다. 천천히 가까워졌다. 이벨린은 눈을 꽉 감았다. 침묵은 아주 느리게 흘렀다.
그러다 문득 고개를 들었을 땐, 그는 어디에도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