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화 (7/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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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린. 이벨린. 일어났어요?”

새벽녘. 누군가가 방문을 세차게 두드리고 있었다. 이벨린은 허겁지겁 침대에서 일어났다. 잠깐만 눈을 붙인다는 게 그대로 기절하듯 잠들어 버린 모양이었다.

[자, 잠깐만 기다려요.]

기다리라는 외침이 무색하게도, 그 말과 동시에 문이 벌컥 열렸다. 간밤에 문단속을 해야 한다는 것도 잊은 탓이었다. 황당한 눈으로 바라보는 사이에 마리아가 문틈으로 고개를 쏙 들이밀었다. 그녀는 이벨린을 아래에서 위로 훑고는 알 만하다는 얼굴을 했다.

“이거 받아요. 빨리 갈아입고 나와야 해요.”

얼떨결에 받아든 것은 다소 허름하지만 말끔하게 다려진 하녀복이었다. 마리아는 입는 시늉까지 해 가며 한 단어씩 또박또박 끊어 말했다.

“알아 듣겠어요? 이걸로, 갈아입고, 나오라고요.”

[알겠어요.]

“뭐라는지 알 수가 있어야지.”

마리아는 큰 소리로 투덜거리고는 방문을 닫았다. 이벨린은 서둘러 원피스를 벗고 하녀복으로 갈아입었다. 머리는 한 갈래로 묶고, 제대로 씻을 시간이 없어 얼굴은 손수건에 물을 조금 묻혀 닦았다. 거울을 볼 수 있으면 좋겠지만… 서둘러 할 수 있는 준비는 모두 마친 셈이었다.

이벨린은 마지막으로 옷매무새를 점검하고 서둘러 문으로 걸어갔다. 방문을 나서기 직전에야 불현듯 단검에 생각이 미쳤다. 마리아의 경고하는 듯한 음성이 희미한 불안감 위로 내려앉았다.

“필요할지도 모르니 항상 몸에 지니고 있어요. 꼭이요.”

황궁의 하녀들이라면 매일 엄격하게 몸수색을 받는 데다가, 윗사람을 가까이에서 모시니 저런 걸 지녀서도 안 되고 지닐 수도 없었다. 그러나 이곳은 유배지였다. 무슨 일이 일어나도 이상하지 않은.

잠깐 머뭇거리는 찰나에도 재촉하듯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요란했다.

“왜 이렇게 늦었어요?”

방문을 열자마자 마리아가 무시무시한 얼굴로 추궁했다. 이벨린은 주변을 둘러보고, 사람이 없다는 확신이 들자 조심스럽게 속삭였다.

“미안해요. 단검의 끈을 어떻게 묶는지 몰라서.”

“그거 가져왔어요?”

마리아의 갈색 눈동자에 순간적으로 기묘한 이채가 어렸다. 그 의미를 미처 깊게 판단하기도 전에 손목이 덥석 붙잡혔다.

“일단 서둘러요. 이미 시작했을 거라고요.”

마리아가 잡아끄는 손목이 아팠지만, 워낙 단호한 태도라 붙잡아 뺄 수도 없었다. 이끌려 걷는 내내 허벅지에 닿는 섬뜩한 감촉 때문에라도 바짝 긴장이 들었다.

“어딜 가는 거예요?”

이벨린이 불안한 표정을 짓자, 마리아가 주변을 둘러보곤 조심스럽게 속삭였다.

“조회에 참석하느라 가는 거예요. 시종장님께서 아침마다 근무 일정표를 나눠 주시거든요. 쉿. 거의 다 도착했으니까 이제부턴 말하지 말아요.”

긴 회랑을 가로지르자 시종장의 집무실이 보였다. 푸르스름한 새벽빛에 잠긴 복도에 열 서넛 남짓한 사람들이 도열해 있는 것이 보였다. 쭈뼛거리며 끄트머리에 서기 무섭게 시종장으로부터 질책이 날아들었다.

“늦었군.”

마리아가 무릎을 살짝 굽히며 대답했다.

“죄송해요. 이 애가 늦잠을 자는 바람에….”

“변명은 됐다.”

마리아의 변명에 시종장은 불쾌한 듯 한쪽 눈썹을 치켜올렸다. 그러고는 곧바로 날카롭게 캐물었다.

“한데, 왜 네가 이 아이를 데리고 왔지?”

“하녀장께서 어제 급한 일로 라켈을 찾으셔서, 제가 대신 하겠다고 자원하였어요.”

“자원했다고? 네가?”

마리아를 살펴보는 눈매가 매서웠다. 이벨린은 어깨를 움츠렸다. 제게 보내는 시선이 아닌데도 어쩐지 심장이 죄어드는 기분이었다. 알쏭달쏭한 표정으로 무언가를 생각한 시종장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그렇다면 앞으로도 네가 책임지고 일을 가르치도록 해라.”

“…예? 제가요?”

마리아의 낯빛이 순식간에 새파랗게 질렸다. 시종장은 무엇을 결정함에 있어서든 충동적이지 않은 사람이었고, 사소한 계획이라도 틀어지는 것을 기피하는 사람이었다.

그런 시종장이 기존의 결정까지 깨고 그녀에게 이벨린을 떠넘겼다는 것은 기실 하나만을 의미했다.

의심. 마리아는 재빨리 머리를 굴려 거절할 명분을 쥐어짜 냈다.

“하지만 저는 브리타냐어는 한마디도 모르는걸요. 차라리 안나가….”

“그런데도 저 애를 이곳까지 데리고 올 능력이라면 충분하지.”

시종장이 단호하게 대꾸했다. 마리아는 입술을 깨물었다. 낭패였다. 이 지경까지 몰렸는데도 거부한다면 도리어 더 큰 의심만 살 것이다. 그녀는 애써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그리고 너.]

그가 마리아의 뒤에 얌전히 서 있던 이벨린을 향해 손을 까닥였다. 이벨린이 한 걸음 다가서자 시종장이 두툼한 카드 더미를 내밀었다.

[기본적인 의사소통은 이것으로.]

‘이것’은 손바닥만 한 크기의 빳빳한 카드들이었다. 한 장마다 기초적인 단어들이 제국어와 브리타냐어로 나란히 적혀 있었다. ‘정리’, ‘부름’ , ‘동쪽’ , ‘계단’ , ‘방’ , ‘정원’ , ‘휴식’ , ‘식사’…. 뜻은 대체로 맞았지만, 틀리게 적힌 것도 있었다.

‘층수와 방향이 다른 카드가… 세 개쯤.’

실수일 리는 없을 테니 이것 역시 시험의 연장선인 모양이었다.

성가시기는 해도 어차피 한 번은 거쳐야 할 일이었고, 이마저도 오래 걸리진 않을 터였다. 아무리 언어를 모른다고 해도 실수가 반복되면 수상쩍게 생각할 테고, 의심받으며 충성하는 인간은 없으니까.

정말 쓸모 있게 쓰려거든 며칠 떠보고나 말겠지.

이벨린은 내색 없이 카드를 갈무리했다.

[배려에 감사드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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