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화 (3/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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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리고 엘레나는 다시 눈을 떴다.

    이번에는 어느 외국인 고아 소녀의 몸속에서.

    “어때? 생각은 좀 해 봤니?”

    이벨린은 제 앞에 멈춰 선 마차를 당혹스럽게 바라보았다. 사흘의 말미를 준다는 것에서 고작해야 하루가 지난 시점이었다.

    내장까지 온통 검은 마차와 한낮에도 커튼을 내린 어둑한 내부, 가면으로 얼굴을 가린 귀부인에게서는 마치 인간을 홀리기 위해 튀어나온 악령 같은 분위기가 흘렀다.

    “짐이 무거워 보이는데. 우선 타렴.”

    귀부인이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명령했다. 이벨린은 식료품이 담긴 종이봉투를 방어적으로 꽉 쥐었다.

    “괜찮아요. 마차를 타야 할 정도로 먼 거리도 아니고요.”

    “저런. 권유가 아닌데.”

    “…….”

    저렇게까지 말한다면 다른 방도가 없었다. 이벨린은 옅은 한숨을 내쉬며 마차에 올라탔다. 마차의 쿠션은 놀랍도록 부드러웠다. 자리에 앉자마자 문이 닫혔고, 잠시 뒤에 마부가 출발하는 진동이 느껴졌다.

    귀부인이 매혹적인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조금 일렀나? 네가 무슨 결심을 했을지 도저히 참을 수가 없어서.”

    “송구하지만 제대로 생각할 시간도 없었어요.”

    “그럼 지금 생각해 봐.”

    유폐된 비센테를 지근거리에서 수행하라고. 그 말은, ‘엘레나 데 카스타야’ 의 끔찍한 과거와 대면하라는 소리와도 같았다.

    이벨린의 몸으로 다시 눈을 뜬 이래로 그녀는 의도적으로 제국의 소식에는 눈과 귀를 닫고 살았다. 그녀는 더 이상 ‘엘레나’가 아니었으니까.

    그러나 그렇게 외면만 했던 탓에, 비센테가 유폐당하는 줄조차 몰랐다는 것만은… 큰 실책이었다.

    ‘그것도 나를 죽였다는 죄목으로.’

    이벨린은 죄책감으로 파르르 떨리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에스페다의 현 황제인 로드리고는, 제 형의 장자인 비센테로부터 황좌를 빼앗았다는 부채감에 평생을 얽매인 자였다. 황제의 그 어중간한 양심을 믿어 비센테에게 죽여달라고 감히 애원이나마 할 수 있었던 것인데. 황제가 비센테만은 건드리지 못할 것이라는 알량한 계산으로.

    처음부터 잘못된 계산이었다고, 그녀가 그의 고귀한 인생을 망쳐 버렸다고.

    그런 생각이 든 뒤로는 죄책감에 멀쩡히 숨을 쉴 수조차 없었다.

    이벨린은 가쁜 숨을 간신히 삼켰다. 무심코 느껴지는 시선에 고개를 들자, 귀부인이 흥미로워하는 얼굴로 그녀를 지켜보고 있었다. 사소한 움직임까지 낱낱이 관찰하는 것 같은 눈빛에 등줄기에 소름이 오소소 돋았다.

    “그래서. 생각해 본 결론은?”

    “그 전에… 정확히 제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요?”

    “저번에 말해 주었을 텐데. 2황자를 가까이에서 보필하라고.”

    “부인.”

    이벨린은 가만히 귀부인과 시선을 마주했다.

    “부인께서 이미 제 약점이 무엇인지 아시고, 더불어 제 목숨까지 좌지우지하실 수 있는 분이라는 건 잘 알아요.”

    “…그런데.”

    “하지만 저도 제가 무슨 일에 가담하는지는 확실히 알고 싶어요.”

    “…….”

    “제 고용 조건에 대해서도요.”

    귀부인은 잠깐 말문이 막힌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웃음을 터트렸다.

    “그랬지…. 너희들이 대의보다는 한두 푼짜리 동전에 더 목숨을 거는 것을, 내가 잊고 있었다.”

    귀부인은 어디 보자, 라고 말하는 것처럼 입술을 톡톡 건드리더니 말을 이었다

    “네가 일하는 동안 동생의 치료비를 우리 측에서 전액 부담하지. 최고의 시설과 의료진을 붙여 주마. 네게는 따로 주마다 10페세타가 지급될 거야. 괜찮게 일한 주에는, 추가적으로 5페세타를 더 지불하고.”

    10페세타가 평민들의 한 달 치 식비쯤 된다는 걸 생각하면 파격적인 제안이었다. 황태자의 약혼녀이던 시절에는 하찮은 금액이었겠지만, ‘이벨린’의 삶에서는 무엇보다도 큰 금액이었다. 귀부인에게서 내내 느끼던 위화감이… 어쩐지 조금 더 선명해졌다.

    “이것으로 어떠니?”

    “제가 만약 일을 수락하게 된다면…. 동생은 수도원을 떠나고 싶어 하지 않을 거예요. 이제 고작 아홉 살이고, 친구들이나 수녀님들과 헤어지기 싫어할 거고요. 의사만 지원해 주실 수 있을까요?”

    치료한다는 명목으로 코라를 데려가 버리면, 그 애의 신변이 곧 그녀의 약점이 된다. 앞으로의 행동에 큰 제약이 생긴다는 소리였다. 그 속내까지는 미처 파악하지 못한 듯, 귀부인은 선뜻 고개를 끄덕였다.

    “그쪽이 편하다면 그러도록 해. 조건은 공증하여 변호사를 통해 네게 보내도록 하지.”

    변호사. 귀부인의 말과 행동에서는 ‘귀족’이라는 암시가 지속적으로 묻어났지만, 이벨린은 여자가 정말 에스페다의 귀족이 맞기는 한 것인지 의심스러웠다.

    사교계에서 한 번도 마주한 적 없던 용모가 그러했고, 생각보다 평민의 물가를 자세히 파악하고 있는 점이 그러했다.

    귀족이라기보다는 사실….

    “물론, 네가 일을 수락한다는 가정하에.”

    귀부인의 말에 이벨린은 제멋대로 뻗어 나가던 생각에서 빠져나왔다.

    “만약 제가 일을 수락한다면, 정확히 뭘 해야 하나요?”

    “폰페라다의 궁에서 제국어를 단 한마디도 못 하는 일손을 찾고 있어. 나는 너를 그 자리에 추천해 줄 만한 사람을 알아.”

    “…….”

    “처음 몇 주, 어쩌면 몇 달간은 하녀로서의 본분에 충실히 지내면 돼. 쓸모 있는 모습을 보이면 시종장의 눈에 들겠지. 그 뒤엔, 무슨 수를 쓰든 2황자의 집무실에 출입할 권한을 얻어 내렴.”

    “무슨 수를 쓰든…. 제가 거기서 찾아야 할 게 있나요?”

    “모든 것.”

    지루한 듯 비스듬히 창문을 바라보고 있던 귀부인의 눈이, 그만큼의 시간을 두고 천천히 돌아왔다. 이윽고 한 번 더 마주쳤다.

    “혹은, 불온하거나 그렇게 보일 만한 것.”

    에스페다에서 ‘불온’이 의미하는 바는 하나뿐이었다. 반역. 불현듯 토기가 치밀었다. 이벨린은 혀를 짓씹는 것으로 역한 속내를 삼켰다.

    “저보다는 그런 일에 능숙한 자가 있을 텐데요.”

    “네가 최선이란다.”

    “어떻게 확신하시죠?”

    “황자의 집무실은 4층에 있고 드나들 수 있는 인원은 극히 한정되어 있어. 계단 앞은 함께 유폐된 황자의 부관들이 철통처럼 지켜. 굳이 에스페다어를 모르는 외국인 일손을 구한다는 걸 보면 뻔하지. 넌 그곳에 올라가게 될 거야.”

    “…….”

    “그 4층에서 네가 보고, 듣고, 접촉할 수 있는 모든 정보. 오가는 서류 하나, 편지 한 장에 이르기까지 낱낱이 확인해서 내게 보고하면 돼. 직접 필사해 온다면 더 좋고.”

    “…….”

    “나는 네가 부디 살아남기를 바라. 그리고 그저 살아남는 것보다는, 조금 더 멀리 갈 수 있기를 바란다.”

    이벨린은 가늘게 떨리는 손을 다시금 꽉 쥐었다. 비센테의 유폐에 대해 들은 이후로 그녀는 매분 매초마다 엘레나로서 죽던 순간으로 돌아왔다.

    단 한순간조차 제정신이었던 적이 있을까? 가만히 있다가도 진저리 치며 비명을 내질렀다. 아무것도 모른 채 속 편하게 지내 왔던 세월이, 숨통을 서서히 졸랐다.

    “다 왔구나.”

    귀부인의 말에 이벨린은 퍼뜩 정신을 차렸다. 어느새 베네딕트 수도원의 정문이었다. 마차는 당혹스러울 정도로 급작스럽게 멈춰 섰다. 이벨린이 마차의 문을 열기 직전, 귀부인이 거미 같은 손을 뻗었다. 흙 묻은 감자와 사과, 양파 따위를 담은 종이봉투 위로 두툼한 지폐 뭉치가 올려졌다.

    “네 고민에 긍정적인 쪽으로 보탬이 되길 바라.”

    고작 고민에나 보태라고 이런 금액을 선뜻 건네는 사람은 없었다. 단칼에 거절하고 이런 일에는 두 번 다시 얽히지 않는 쪽을 선택하는 게 백 배는 현명한 판단일 것이다. 하지만…. 이벨린은 입술을 깨물며 지폐를 코트 자락에 욱여넣었다.

    “그럼 긍정적인 회신 기다리마.”

    귀부인의 목소리는 조롱 같았다. 수도원의 정문을 지나, 방으로 올라오는 동안까지 무슨 생각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코트를 벗는 인기척에 침대에 누워 있던 아이가 부스스 눈을 떴다.

    “언니?”

    “코라.”

    이벨린은 자그마한 아이의 침대 곁에 무릎을 꿇었다. 아이가 작은 손을 뻗어 그녀의 손을 맞잡았다. 내내 밖에 있었던 것은 이벨린인데도 얽혀 오는 손가락은 차디찼다. 이벨린은 안타까운 듯 아이의 이마를 쓸었다.

    “오늘 기침은 어땠어?”

    “오늘은 괜찮았어. 약도 다 먹었고. 베드로 수사님도 내 예후가 좋다고 했어.”

    또박또박 말하는 아이는 사랑스러웠다. 이벨린은 코라의 둥근 이마에 입술을 살짝 맞췄다.

    “언니는 오늘 하루 어땠어?”

    “좋았어. 이거 봐. 네가 좋아하는 사과도 잔뜩 사 왔어.”

    “로렌 아주머니께 사과파이로 해 달라고 할 거야?”

    “그럼.”

    “신난다. 아, 이것 봐. 엘렌이 가져다줬어.”

    고작해야 작은 도토리를 가지고도 기쁜 듯 눈을 빛내던 아이는 피로한 듯 기침 두어 번을 하더니, 금세 잠에 빠져들었다. 이벨린은 바닥에 무릎을 꿇은 채로 기도하듯 양손을 맞잡았다.

    안식을 기대했던 순간에 다시금 생으로 내던져진 기분은 돌이켜 생각해도 처참했다. 처음 사흘 동안은 정말 제가 미친 줄로만 알았다.

    머릿속에는 두 여자의 기억이 동시에 공존했고… 그녀는 때때로 밀물과 썰물처럼 몰려드는 수많은 감정에 휩쓸렸다. 대체로 엘레나였지만, 코라를 보고 있을 때면 가끔은 이벨린도 되었다.

    제가 누구인지 혼란스러운 시기에도 코라에게 느끼는 애정과 의무감만큼은 언제나 한결같았다. ‘엘레나’에게는 가족으로부터 받지 못했던 사랑을 느끼게 해 주는 존재로서, ‘이벨린’에게는 몸에 각인된 책무로서.

    코라 덕분에 그녀는 차츰 새로운 삶과 사람들을 받아들일 수 있었다. 낮에는 수도원에서 허드렛일을 돕고, 밤에는 번역 일로 푼돈이나 버는 삶. 고달픔은 있을지언정 큰 고통도, 슬픔도 없는 삶은 그럭저럭 괜찮았다.

    온갖 영광과 보석에 둘러싸인 채로도, 말라 죽어가던 때와 비교하면.

    귀부인의 제안을 거절하기만 한다면. 평생을 이런 소소한 안온함 속에서 살 수 있을 것이다. 코라를 돌보고, 번역 일을 하고, 운이 좋다면 결혼을 해 제 아이를 가질 수도 있겠지.

    그러나 기쁘다가도, 행복하다가도, 울다가도, 슬프다가도… 한 번씩 깊숙한 바늘로 심장이 쿡 찔릴 것이다. 영원한 가시로 남을 터였다.

    비센테 에스페다는, 그 남자는, 적어도 그녀에게는 그런 존재로 남아서는 안 되었다. 그는 제 인생을 걸어 그녀를 구원했다. 그렇다면 이번에는.

    그녀가 그를 구원할 차례였다.

    “에스페다로 떠난다며.”

    갑자기 들려온 목소리였다. 낡은 가방에 바쁘게 짐을 챙기던 이벨린은 순간 멈칫했다. 고개를 들자 문간에 익숙한 얼굴의 남자가 기대어 서 있는 것이 보였다.

    이벨린은 달갑지 않게 그의 이름을 불렀다.

    “카터.”

    카터 에일레이 윈스포드. 윈스포드 시장의 막내아들이자, 오래도록 이벨린을 원해 온 남자. 기억 속에서 둘은 한때 연인이기도 했다. 윈스포드 시장의 협박에 ‘이벨린’이 일방적으로 이별을 통보하기 전까지는.

    진짜 이벨린이었다면 한없이 애틋한 사람일 테지만, 지금은 매번 불편한 감정에 휩싸이게 만드는 사내일 뿐이었다. 이벨린은 방어적인 낯으로 재차 물었다.

    “여기까진 어떻게 들어왔어?”

    조금도 달가워하지 않는 이벨린의 표정에 카터의 준수한 미간이 구겨졌다. 그가 방 안으로 성큼 들어서며 말했다.

    “틸리 수녀님께서 들여보내 주셨어. 허튼짓하지 않겠다고 맹세를 수십 번은 해야 했지만.”

    “…….”

    “우리 사이를 아시는 분이잖아. 내가 널 얼마나 소중히 여기는지도 아시는 분이고.”

    카터는 침대 위에 늘어진 옷가지와 절반쯤 꾸려진 짐가방을 보며 서늘하게 뇌까렸다.

    “네가 이렇게 갑자기 모든 걸 결정할 줄은 몰랐어. 그것도 나한테는 단 한마디의 상의도 없이.”

    “…아예 가는 것은 아니야.”

    “그래. 그것도 들었어. 1년쯤 에스페다 수녀원에 봉사자로 다녀온다고. 그게 아니었다면 죽어도 보내지 않았을 거야.”

    대외적으로 알려진 이벨린의 행보는 일손이 부족한 수녀원으로의 파견이었다. 그녀는 준비해 뒀던 변명을 내뱉었다.

    “너도 알다시피 코라의 약값이 만만치 않잖아. 파견비를 넉넉히 받았어. 미리 상의하지 못한 건 미안해.”

    “그렇게 번거로운 일까지 할 필요가 있을까? 나와 결혼하면 모든 게 해결될 텐데.”

    “어떻게 너와 내가 그래.”

    그것만은 오롯한 진심이었다. 고작해야 고아일 뿐인 이벨린의 신분과, 시장의 막내아들이라는 그의 신분까지 상기할 필요조차 없이.

    그러나 카터는 온전히 신분에 대한 이야기로 받아들인 모양이었다. 그가 찡그린 이마를 손으로 문지르며 말했다.

    “아버지는 내가 설득할 수 있어.”

    이벨린은 가까스로 그의 열렬한 시선을 피했다. 마주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가끔은 죄를 짓는 것 같았다. 남의 인생을, 가족을, 친구들까지 모자라, 이제는 남자까지 훔치는 기분이라는 건. 이벨린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시장님께선 죽어도 허락하지 않으실 거야.”

    “그러면 아버지께선 아들의 고집이 어느 정도인지 아시게 되겠지.”

    “…….”

    “그러니까 돌아오면 곧장 결혼하자.”

    “…그건.”

    그 순간, 그녀는 그가 내내 불편했던 이유를 깨달았다. 단순히 ‘이벨린’의 연인이어서가 아니라, 미래에 대해서 생각하게 만드니까. 그녀는 본능적으로 거절하려던 입술을 짓씹어 깨물었다.

    이걸 거절하는 게 맞는 걸까? 아니, 거절한 권리가 있기나 한 걸까….

    객관적으로 생각해 보면, 카터는 ‘이벨린 베네딕트’에겐 과분한 연인이었다. 그녀가 얼마나 잘났든 고아 계집이었고, 상대는 시장이 아끼는 막내아들이었다.

    성격적으로도 모난 곳 없이 다정했고, 외모도 객관적으로 잘생긴 축에 속했다. 카터가 ‘이벨린’이 받을 수 있는 청혼 중 최상이라는 것쯤은 확실했다.

    ‘이벨린’에게는 마땅히 그녀가 누려야 할 삶이 존재했다. 코라에게 느끼는 애정이 크면 클수록, 그녀는 이벨린의 몸을 빌려 쓰고 있다는 생각에서 좀처럼 벗어나기 힘들었다. 급작스레 깨어났던 것처럼 언제고 급작스레 사라질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몇십 년 뒤든, 어쩌면 며칠 뒤든.

    그때 가서 ‘이벨린’이 아무리 후회한들 카터 같은 남자를 만날 수는 없을 것이다.

    ‘이벨린’의 인생에서 몇 년을 제 욕심대로 사용할 계획인 이상, 보험이 필요하기는 했다. 언제까지고 수도원에 얹혀살 수는 없었으니까. 그리고… ‘이벨린’이 끝내 돌아오지 않는다고 해도 카터와의 결혼이 카스트로와의 정략혼과 다를 것도 없었다.

    그러니, 지금으로서는 이게 최선이었다.

    “…그래, 생각해 볼게.”

    “정말이야?”

    믿기지 않는다는 듯 카터가 그녀의 양 손목을 덥썩 잡았다. 이벨린은 창백한 얼굴로 살며시 고개를 끄덕였다.

    “네가 아버지를 설득한다면.”

    “맙소사, 이벨린. 넌 내가 얼마나 기쁜지 짐작도 못 할 거야.”

    사내의 얼굴이 세상을 다 가진 듯 환해졌다. 이벨린은 그가 붙잡은 손을 뿌리치지 않았다. 여전히 조금쯤 불편했지만, 청혼까지 수락한 마당에는 다른 사람만큼 거리낄 이유는 사라진 셈이었다. 그리고….

    ‘영혼이 달라졌다는 것조차 몰라보는 게 사랑이라면.’

    이벨린은 안도의 미소를 지었다.

    사랑이라는 건, 어쩌면 별것도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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