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화 (2/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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낡은 철문이 바닥을 긁는 소리를 내며 천천히 열렸다. 엘레나는 죽음과도 같은 침묵 속에서 고개를 들었다. 지난 몇 개월간 이 탑의 문을 열고, 그녀가 갇힌 감옥 너머로 드나들 수 있는 사람은 넷뿐이었다.

그녀의 약혼자이자 에스페다의 황태자인 카스트로, 시중을 드는 하녀, 황궁의 그리고… 그녀의 ‘정숙함’을 보장할 신관 하나.

그러나 오늘은 그들 중 누구도 아니었다. 열린 철문으로 들어온 것은 비센테였다. 제국의 2황자이자, 이런 곳에서 이런 식으로 마주하게 되리라곤 상상조차 해 본 적 없던 사내. 잠깐의 침묵 후에 먼저 입을 연 것은 엘레나였다.

“황태자 전하이실 줄 알았는데.”

“사촌이 아니라서 실망하셨습니까?”

“아뇨. 그저, 다른 사람을 볼 수 있으리라곤 생각조차 못 했어요. 이 탑에 유폐된 이래로 제가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사람은 그분뿐이었잖아요.”

엘레나는 웃음 비슷한 것을 지어 보였다.

“어떻게 들어왔어요? 아무리 2황자 전하라도 신관을 대동하지 않고는 허가가 나지 않았을 텐데.”

“…몸은?”

“좋아요.”

때마침 다 타오른 촛불이 희미한 연기를 남긴 채 사그라들었다. 사내의 얼굴은 반절 이상이 어둠에 가려져 있어서, 엘레나가 확인할 수 있는 건 금방이라도 비틀릴 듯 얕게 다물린 입술뿐이었다.

엘레나는 어둠 속에서도 그가 주변을 천천히 둘러보고 있는 것 같다는 인상을 받았다. 기실 살풍경한 광경이었다. 멍들고 여윈 몸, 폭행의 흔적들, 부러진 채 방치된 발목, 쇄골 위로 낙인찍힌 반역자의 표식….

그녀의 친정인 카스타야 가문이 반역에 연루된 이래로, 그녀가 겪었던 일들이란 대개 이런 식이었다. 귀하게 자란 몸으로는 감당하기 힘들 수치과 모욕들. 엘레나는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입을 열었다.

“날 조롱하러 왔나요? 여태 죽지 않고 살아 있어서?”

“그럴 리가.”

비센테의 목소리는 어쩐지 조금 성말랐다. 평소의 거리감은 찾아볼 수조차 없이.

엘레나는 그것이 웃겨서 짧은 웃음을 터트렸다.

“농담이에요. 그대는 그럴 사람이 아니죠.”

“…카스타야 영애.”

엘레나는 짧게 침묵했다가, 다시금 차게 웃었다.

“아직도 날, 그렇게 부르네요.”

“…….”

“차라리 이름으로 불러, 비센테.”

10년도 넘는 세월이었다.

여덟 살, 그 철없던 시절을 제외하곤 단 한 번도 무너진 적 없던 견고한 벽이었다. 엘레나는 머리가 굵어질수록 잔인한 친부가 권하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혐오했고, 그것은 상대를 가리지 않았다.

황궁, 수도, 사교계, 제 약혼자인 황태자를 비롯한 여타의 황족들에 이르기까지….

물론, 비센테도 그 일방적인 감정에서 예외는 아니었다.

그 깊은 골을 아무것도 아닌 양 돌려놓으며 엘레나는 말갛게 웃었다. 그 웃음에 비센테는 잠시간 망연한 얼굴을 했다가 눈매를 왈칵 구겼다.

“지금 웃음이 나와?”

“웃지 못할 건 또 뭐기에.”

“그대가… 자해를 시도했다고 들었어.”

“아.”

자해라니. 황궁의가 드나드는 것을 카스트로는 그런 식으로 포장해 왔던 걸까? 몸에 남은 흉터들도? 그녀는 파르르 떨리는 입술을 꾹 깨물었다. 차라리, 이 모든 게 황제의 분노였다면 견디기 쉬웠을 것이다. 지아비가 되리라고 믿었던 사내에게 당하는 폭행보다야.

기실 황제는 별반 노여워하지도 않았다. 황태자 대신, 다른 아드님을 황위에 올리는 것이 어떻게 반역이 되겠느냐는 속살거림이 그럴듯했으니까.

그러니, 그녀에게 쏟아지는 폭력들은 오로지 황태자의 분노였다.

하지만 구태여 이 남자 앞에서 비참해질 필요는 없다. 엘레나는 건조하게 웃었다.

“그래 봐야 죽지도 못하는걸. 황궁의들이 번갈아 지키고 있거든.”

“…너.”

“알잖아. 초대 황제로부터 내려온 여섯 가문에 대한 금언.”

개국 공신인 여섯 가문의 핏줄을 말살해서는 안 된다는 맹세. 초대 황제로부터 내려온 서약은 제국 400년의 역사에서 불변의 법칙이었다.

그리고 카스타야의 이름을 지닌 자들이 모조리 사형당한 오늘에 이르러서는, 그 성을 달 자격은 이제 엘레나만이 유일했다. 황제는 그런 엘레나를 탑에 가두며 단 하나만을 명령했다.

“목숨은 보존하되, 후사는 낳지 말라. 맹약으로 정해 놓았다고 하나 스스로 아이를 거부해 가문이 끊어지는 것은 신도 어쩌지 못하리라.”

굴욕적인 전시였으나, 차라리 행운이었다. 그녀에게 집착하는 황태자조차 감히 ‘그런’ 쪽으로는 손을 댈 수 없는 위치라는 건. 부지런히도 태를 망치는 약을 강요하는 걸 보면 이 알량한 핑계조차 얼마 못 갈 테지만….

엘레나의 유순한 눈매가 문득 날카로워졌다.

“그런데… 정말 여긴 어떻게 왔어?”

돌이켜 생각해 보면 이상했다. 그녀의 약혼자인 카스트로는 집착과 의심이 남다른 자였고, 기나긴 약혼 기간 동안 엘레나에게 다른 남자가 붙는 것을 지나칠 정도로 경계해 왔었다.

그 질 나쁜 의심의 1할은 우연히 스친 수많은 사내였고, 나머지 9할의 지분은 모조리 눈앞의 사내의 차지였다. 비센테 오스티나토 시모라 데 에스페다.

승하하신 선황제 폐하의 유일한 아들이자, 현 황제의 조카. 정당성으로만 따지자면 카스트로보다 더 황태자에 가까운 사내. 선황제께서 살아 계시던 언젠가의 과거에는 분명 그가 엘레나의 약혼자였던 적도 있었다. ‘엘레나 데 카스타야’는 언제고 황태자비로 내정되었던 여자였으니까.

그리고 카스트로는 어쩌다 그녀가 비센테에게 눈길 한 번만 주어도, 아직도 그가 네 약혼자인 것 같냐며 화를 내곤 했다. 그 흉포한 얼굴이 여전히 눈앞에 선했다. 만약 카스트로가 누군가 탑에 드나드는 것을 허락했다면, 죽어도 그게 비센테는 아닐 터였다.

“하지만 허가받은 게 아니라면, 어떻게…. 탑의 계단마다 감시가 지독했을 텐데.”

엘레나는 더듬더듬 의심을 토해 냈다. 문득, 무언가를 떠올린 듯 고개를 번뜩 들었다.

“설마, 황태자 전하께서 드디어 나를 내치셨니?”

목소리에 기묘한 희열이 깃들었다. 그 기막힌 꼴에 비센테가 침묵하자, 엘레나의 조막만 한 얼굴에 순식간에 실망감이 그득 들어찼다.

“아니야? 그러면 어떡하지. 이젠 시간이 별로 없는데….”

매 끼니마다 강제로 약을 받아 삼킨 기간이 벌써 몇 달을 넘어간다. 그녀의 태가 기어이 망가진다면, 그 뒤에 따라올 것은 지독한 치욕일 터였다. 죽음이 간절했다.

그녀의 목숨에 시녀들의 목이 죄다 걸려 있지만 않았어도, 혀를 깨물어도 골백번은 더 깨물었을 것이다.

광기 어린 회색 눈동자가 느릿하게 시선을 맞춰 왔다.

“…아, 그렇지.”

“…….”

“내 손으로는 죽을 수 없지만, 너는 나를 죽일 수 있지.”

“엘레나, 그대, 지금….”

“그래, 비센테. 난 당신에게 애원하고 있는 거야.”

“…….”

“날 죽여 달라고.”

시종일관 태연하게 웃던 얼굴이 그대로 일그러졌다. 꼿꼿하던 무릎이 꺾이는 건 순식간이었다. 버석하게 마른 여자의 입술 사이로 애원이 두서없이 튀어나왔다.

죽고 싶어, 비센테, 제발, 구해 줘, 아니, 죽여 줘….

엘레나의 눈빛은 분별의 힘을 모조리 잃은 것처럼 보였다. 조금 전까지 멀쩡하게 말하고, 심지어 웃기까지 하던 게 모조리 거짓이었던 것처럼. 처음부터 멀쩡한 것이라곤 어떤 것도 없었던 것처럼.

엘레나가 힘을 잃고 휘청이자, 비센테가 손을 뻗어 그녀의 팔을 단단히 붙잡았다. 한 줌도 채 안 되는 야윈 팔뚝에 비센테가 욕설을 짓씹었다. 뒤이어 그녀의 머리 위로 생경한 분노가 쏟아졌다.

“내게 널 죽이라고.”

잇새 사이로 짓씹듯 내뱉은 목소리는, 그녀가 한 번도 목도한 적 없는 감정으로 요동치고 있었다. 늘 냉담한 거리를 유지하던 것이 무색하게도.

“제발, 엘레나.”

“…….”

“너는 그게 얼마나 우스운 소리인지조차 모르겠지.”

그러나 황망히 올려다본 비센테의 얼굴은 정작 평소와 다르지 않았다. 조금 더 지쳐 보이는 것 외에는. 정말 그녀가 미쳐서, 저 혼자 착각이라도 한 것처럼….

그가 그녀의 손목을 고쳐 잡았다.

“선택지는 두 가지야.”

“무슨….”

말을 채 끝맺기도 전에, 무겁게도 손목을 짓누르던 족쇄가 풀렸다. 묵직한 소리를 내며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 뒤엔 차례로 왼손과 양발까지 모조리 자유로워졌다.

엘레나는 얼떨떨하게 눈을 깜박였다. 비센테가 제가 가로막고 있던 문간에서 살짝 비키며 말했다.

“도망가.”

그가 담담하게 속삭였다.

“아래에서 내 기사들이 기다리고 있어. 안전한 곳까지 그대 하나 못 지킬까.”

그녀는 믿기지 않는다는 듯 숨을 들이쉬었다. 문, 그 너머의 계단. 홀린 듯이 한 걸음 앞으로 내딛기 무섭게, 엘레나는 엉망으로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그대로 주저앉았다.

“…그럴 수 없어.”

“…….”

“내 발로 나간다면 카스트로가 내 시녀들을 모조리 죽일 거야. 내가 여기서 자결한다고 해도 마찬가지고.”

그가 표정 없이 덧붙였다.

“그 여자들에게 얼마나 대단한 의리를 지키려고.”

“지나치게 오래 알아 왔어. 살아남기를 바라는 것조차 죄일까?”

“…….”

“선택지가 두 가지라고 했지. 나머지 하나는 말하지 않아도 알겠어. 날 죽여, 비센테.”

“…….”

“그게 모두에게 최선이야.”

모두. 그녀도, 시녀이자 친구였던 레베카와 아멜리아도, 숨죽인 채 가문을 버린 친척들도, 어쩌면 지긋지긋한 카스트로에게도….

이기적인 계산으로 엘레나는 비센테의 처우도 약삭빠르게도 셈했다. 황제는 감히, 제 죽은 형의 장자에게까지는 손대지 못할 테니까. 그러니 비센테만이 죽을 길이고, 유일한 구원이었다.

“제발….”

애원하는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그가 그녀의 손을 붙잡아 올렸다. 차가운 손바닥에 체온으로 따듯하게 달궈진 유리병이 닿았다. 내내, 힘주어 쥐고 있었던 듯.

“독이야. 마시면 통각부터 마비될 거다. 그 뒤에 천천히 심장이 멎고, 숨이 멎지. 사소한 통증조차 없이.”

“…뒤는.”

“세간은 내가 너를 죽였다고 믿겠지.”

“아.”

엘레나는 잠시 숨을 들이쉬었다가, 환하게 웃었다.

“고마워, 정말, 정말 고마워….”

그녀는 벌벌 떨리는 손으로 울면서, 웃으면서 독을 소중하게 받아 마셨다. 독의 효능은 독사의 이빨만큼이나 빨랐다.

눈을 몇 번 깜박이는 사이에 온몸이 나른하게 늘어졌고, 뱃속이 잠깐 홧홧했다가, 이윽고 모든 감각이 마비된 듯 사라졌다. 울컥거리는 피를 몇 차례나 토해 내도 그저 남의 몸 같았다.

엘레나는 희미하게 웃었다.

“너는 내가 지금 얼마나 기쁜지 모를 거야.”

“…….”

“네가 나의 구원이야, 비센테. 너만이 나를 살렸어. 수백 번을 다시 태어나도 이 빚을 다 갚진 못할 거야.”

“…….”

“그러니 부디, 행복하길.”

손수건을 움켜쥔 손등 위로 후드득 뜨거운 물방울이 떨어졌다. 숨이 가빠졌다가, 서서히 사그라들었다. 시야가 검은 물에 빠지듯 먹먹하게 차올랐다.

마지막 순간 본 비센테의 얼굴은 좀처럼 읽기 어려웠다. 울고 있는 걸까? 아니다, 그냥 미간을 찡그리는 것 같았다. 어쩐지… 화가 난 것도 같았고.

뭐가 됐든 하나만은 확실했다. 비센테는 신께서 그녀에게 내린 단 하나의 빛이자, 구원이었다. 마지막 순간까지 엘레나는 신께 그의 행복을 빌었다. 이윽고 다디단 환희가 그녀를 집어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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