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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장 (18/19)

5장

벗어났다 생각한 순간은 그야말로 꿈결 같은 환상이었을 뿐이었다.

헤레브를 앞에 두고 차마 제 세상으로 가지도, 그렇다고 칸에게로 돌아가지도 못하고 있을 때였다. 어디선가 나타난 검은 그림자들이 무력하게 무너진 그녀의 팔과 다리를 휘휘 붙잡아 힘겹게 건너온 암석 길을 되돌아왔다.

레니에가 한 발 한 발 어렵게 내디딘 길목을 아주 손쉽게 지난 그림자들은 그녀를 다시 지옥으로 끌고 왔다. 아가리를 쩍 벌린 뱀의 입속처럼, 한없이 어두컴컴한 침실로 말이다.

“어서 와.”

귀를 찌르는 음성과 함께 그녀를 지탱해 주던 어둠이 빠르게 자취를 감추었다. 레니에는 그대로 주르륵 주저앉았다. 바닥에 꽂혀 있던 시선을 더듬더듬 올리니 침대에 걸터앉은 칸이 보였다. 그의 손에는 끊어진 사슬이 밧줄처럼 들려 있었다.

“산책은 즐거웠나?”

산책.

그녀로서는 목숨을 걸었을 그 결연한 도주가 그에겐 그 정도의 의미밖에 되지 않았다. 명백히 도발이나 다름없는 질문에도 레니에는 아무런 반응을 할 수 없었다.

지금 막 가슴으로 받아들이게 된 현실이 그녀의 정신을 멍멍하게 만들었다. 오감이 아주 깊은 심해에 빠져 버린 것처럼 흐리멍덩했다. 분명 눈을 뜨고 있는데도 수면에 빠진 것처럼 분별력이 흐렸다.

천천히 몸을 일으킨 칸은 주저앉은 레니에에게로 걸어왔다. 그는 그녀의 갸름한 턱을 붙잡아 메마른 입술 위에 제 입술을 꾹 눌렀다. 쪽, 하고 맞닿았다가 떨어지는 마찰음과 함께 그가 넌지시 물었다.

“재밌는 걸 보여 줄까?”

꿍꿍이를 짐작할 수 없어 두려운 제안이었다. 레니에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으나 그는 처음부터 대답을 들을 생각이 없었는지 그녀의 어깨 너머로 눈짓을 해 보였다.

곧 검은 천으로 가려진 무언가가 침실 한편에 대령되었다. 칸이 손을 한 번 휘젓자 천이 저절로 흘러내렸다.

드러난 그것은 다름 아닌 케이지였다. 그 안에는 무어라 정의를 내릴 수 없는 새까만 생명체가 있었다. 머리는 뿔 달린 양이었고, 몸통은 털로 뒤덮인 고양이와 같았다. 그 몸체의 등에는 새의 것처럼 한 쌍의 날개가 접힌 채로 돋아나 있었다. 마치 여러 동물의 몸통에서 하나씩의 부위를 떼어 붙여 놓은 듯한 외양이었다.

그러나 괴생명체를 제대로 살펴볼 겨를도 없었다. 그것의 사지육체가 죄 분리된 채 처참한 꼴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맥을 잃은 사체 아래로는 검은 피가 웅덩이처럼 고여 있었고, 그 위로는 아마도 머리통에서 빠져 버린 듯한 동그란 눈알 두 개가 난잡하게 구르고 있었다.

“욱…….”

예기치 못한 참혹상의 등장에 레니에는 입술을 틀어막으며 고개를 돌렸다. 칸은 무자비한 손길로 그녀의 턱을 휙 잡아채 억지로 케이지를 보게끔 만들었다.

“똑바로 봐야지, 레니에. 사랑해 마지않는 네 자식이 저지른 짓을.”

그가 귓속으로 꽂아 넣는 음성은 서슬 퍼런 빛깔을 띠고 있었다. 올라오는 욕지기를 참지 못하고 눈살을 찌푸리던 레니에는 그가 뱉은 말에 쩍 얼어붙을 수밖에 없었다.

네 자식이 저지른 짓을.

그러니까…… 헤레브가 저지른 짓이라고, 저게?

“무슨, 무…….”

격랑처럼 쏟아지는 혼란에 본능적으로 부정부터 치솟으려는 찰나였다.

<헤레브, 오늘은 무얼 하며 놀았니?>

<친우와 놀았어요.>

<친우……?>

<새까만 친우요.>

그 말을 하며 환하게 웃던 아이의 얼굴이 눈앞에서 어른거렸다. 그리고 그녀를 섬찟함 속에 푹 담갔던 옷깃의 흔적까지. 검은색. 피는 아니리라 자부했던 그 검은색. 그것이 케이지 내 괴생명체 아래에 즐비했다. 소름 끼치는 악취가 풍겼다. 언젠가 보았던 마차 속 동물들의 참혹상이 뇌리를 스쳐 지나갔다.

레니에는 기도 속에 아주 커다란 돌멩이가 박힌 것만 같았다. 폐부가 움푹 오므라들어 숨을 제대로 내쉴 수가 없어졌기 때문이었다.

가슴팍을 움켜쥔 그녀의 호흡이 차츰 거칠어졌다.

“흐, 으…….”

“잘 봐. 저게 헤레브의 본성이야.”

“하지 마, 하지 말라고……!”

“너도 이제는 다 알면서 왜 그래?”

칸의 낄낄대는 음성이 악몽처럼 그녀를 덮쳤다.

레니에는 두 귀를 손으로 틀어막으며 고개를 저었다. 여태껏 자신을 버티게 한 그 미소 속에, 저런 잔혹함이 담겨 있었다는 게 끔찍하기 짝이 없었다. 고작 머리로 인지하는 것과 그 증거물을 눈으로 보는 건 천지 차이였다.

그 방증처럼, 그녀에게 있어 유일한 버팀목이자 구심점이 점점이 흩어지고 있었다. 헤레브로 인하여 되찾았던 기력과 활기마저 안개처럼 뿌옇게 흐려졌다. 벌겋게 변한 아이의 동공이 흉몽처럼 뇌리에서 떠나가지를 않았다.

“한 번쯤은 이런 일이 일어날 거라고 예상하고 있었어. 헤레브는 어미인 널 좋아해 자신의 본성을 최대한 숨기려고 했고, 넌 오로지 그 꾸며 낸 가능성에만 매달렸으니까.”

칸은 저를 밀쳐 내려고 혈안이 된 레니에의 어깨를 붙잡아 넘어뜨렸다. 그 방향이 케이지와 가까워 피비린내가 더욱 진하게 풍겼다. 레니에가 얼굴을 와락 일그러뜨리며 벗어나려고 발버둥을 쳤다.

칸은 그 몸짓을 간단히 제압하며 그녀의 발목을 움켜쥐었다.

“그래……. 예상하고는 있었는데.”

“놔, 놓으라고……!”

“막상 그 꼴을 보니 곱게 눈감아 줄 마음이 안 들어.”

그의 농홍한 동공이 실내에 풍기는 피비린내보다 더욱 선득하게 번뜩였다.

“아직도 감히 내게서 도망칠 생각을 해?”

그의 입가에 매달린 미소가 음산하기 짝이 없었다. 고개를 젓다가 우연히 그 웃음을 발견한 레니에는 척추 하나하나를 타고 올라오는 뼈저린 공포심을 느꼈다. 그것이 단순히 기우가 아님을 깨달은 건, 그가 감싸 쥔 제 발목을 뚜둑, 하고 꺾어 부러뜨렸을 때였다.

“아악!”

성대가 찢어질 듯한 단말마의 비명이 터져 나왔다. 멀쩡하던 뼈가 조각으로 어긋나는 소리와 함께 견딜 수 없는 통증이 몰아쳤다. 그녀는 씨근덕대며 잔기침을 터뜨렸다.

“허, 허으, 으, 으으…….”

어찌할 겨를도 없이 왈칵 터진 눈물로 시야가 번들거렸다. 레니에는 그에게 붙잡히지 않은 상체로 바닥을 구르며 꺽꺽거렸다. 침도 제대로 삼키지 못한 잇새로 죽어 가는 사람이 낼 법한 신음이 가늘게 흘러나왔다.

만약 그녀가 족쇄를 제대로 차고 있었다면, 발목 부상은 눈 깜짝할 새에 나았으리라. 그러나 족쇄가 끊긴 지금은 마법으로 인한 치료를 기대할 수도 없었다.

“다정히 인사라고 해 주지. 오늘이 헤레브를 만날 수 있는 마지막 날이 될 텐데.”

그가 지껄였으나 격렬한 통증에 허덕대는 레니에에게는 닿지 못할 목소리였다. 말한 대로였다. 칸은 더 이상 모자의 만남을 허락할 생각이 없었다. 가면처럼 꾸며 낸 평화가 깨졌으니 어쭙잖은 아량을 베푸는 것도 끝이었다.

그는 제가 비틀어 기괴한 모양새로 꺾인 발목을 천천히 놓아주었다. 레니에는 그 자세 그대로 웅크려 헐떡거렸다. 그러다가 이대로 있으면 안 된다는 두려움이 들었다. 고통은 이제 시작일지도 몰라. 그 생각에 칼로 난도질하는 듯한 통증을 참아 내며 그녀는 엉금엉금 기어가기 시작했다.

귓가에 천둥소리가 환청처럼 스쳤다. 모든 일의 시초, 지난했던 예배당에서의 순간이 떠올랐다. 레니에는 그때처럼 그에게서 벗어나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에게 드리운 악은 그 정도의 버둥질로는 어림도 없다는 양 거침없이 등 뒤를 엄습해 왔다. 칸이 무릎을 바닥에 댄 채 그녀의 위로 엎드려 온 것이다.

“흑……!”

턱을 단단히 그러쥐는 손길에 레니에의 입에서 억눌린 신음이 터졌다.

눈에서는 눈물이 끝없이 나고 발목은 견딜 수 없이 시큰거렸다. 그렇게 고통스러운 와중에도 레니에는 제 턱을 움킨 악력을 어떻게든 떨쳐 내려고 고개를 마구 흔들었다. 그 때문에 두 사람의 자세는 한차례 엎치락뒤치락했다.

그러나 칸은 몸이 흔들릴지언정 결코 그녀의 턱을 놓아주지 않았다. 오히려 보란 듯 단단히 고정한 채 그 앞으로 제 얼굴을 바짝 가져다 댔다.

“사랑한다며.”

“…….”

“날 사랑한다고 했으면서 왜 도망을 가.”

그 말이 내용물 따위 없이 텅 비었던 건 그도, 그녀도 익히 잘 아는 바였다. 그럼에도 칸은 현실을 부정하는 이처럼 무의미한 고백을 거푸 거론했다. 발목을 가차 없이 부러트릴 때와 같이 그 눈동자는 첨예한 광기로 반질거렸다.

레니에는 왈칵 젖어 든 시선으로 그를 사납게 노려보았다. 물기로 흐려졌으나 그 사이로 깃든 원망 어린 기색은 가히 숨겨지지 않았다.

“사랑?”

“…….”

“너, 흐으, 너 같은 거…… 사랑한 적도 없어!”

처절한 그녀의 외침이 넓으나 그래서 공허한 침실을 쩍 갈랐다. 그 말은 퍼지는 즉시 허공으로 사라졌지만, 이상하게도 칸의 귓가에는 메아리처럼 울렸다. 그의 안면이 견딜 수 없는 모멸을 겪은 것처럼 딱딱하게 굳어졌다.

“당장 죽여 버리고 싶을 만큼 끔찍해……. 역겨워, 증오스럽다고!”

“…….”

“왜 나야. 왜 나한테 이래. 왜 하필 나냐고. 왜……!”

칸은 서러운 오열을 가감 없이 터뜨리는 레니에를 지그시 내려다보았다. 상대방을 흠칫하게 만들 만큼 경직되어 있던 그는 천천히 표정을 풀었다. 그러나 오히려 표백된 양 무슨 감정을 띠고 있는지 알 수 없어진 무표정이 서릿발처럼 한층 더 냉하게 느껴졌다.

그는 그 서느런 낯빛을 한 채로 고개를 숙였다. 레니에는 물기로 축축하게 젖은 뺨을 비비는 입술의 감촉에 흠칫했다. 그녀가 흘린 눈물로 번드르르하게 젖은 그의 입매가 서서히 비틀렸다.

“참모들은 헤레브가 걷기 시작할 즘부터 널 녀석에게서 떼어 놓아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난 그를 반대했어. 왜 그랬는지 알아?”

칸의 음성에 담긴 온도가 훅 낮아진 걸 인지한 그녀의 턱이 바르르 떨렸다.

“네가 녀석과 함께 있으면 적어도 살아 있는 것처럼 굴었으니까.”

레니에는 순간 제 귀를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지금 뭐라고 한 거지. 내가, 살아 있는 것처럼 굴어서……?

몇 년간 헤레브를 아무런 제지 없이 만나게 해 준 게 그런 이유였다고? 그러니까…… 내내 무기력하던 자신이 헤레브와 함께 있을 때만큼은 활력을 되찾아서?

생각이 거기까지 다다랐을 때 그녀는 불현듯 떠오르는 기억이 있었다.

헤레브를 품에 안고 아이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날이면, 간혹 노골적인 시선이 느껴지고는 했다. 그때마다 고개를 들면 언제 나타난 건지 모를 칸이 문가에 서서 저를 지그시 지켜보고 있었다. 아이를 본다고 단정 짓기엔, 붉은 두 눈은 매번 레니에의 얼굴에 정확히 꽂혀 있었다.

그럼 레니에는 헤레브를 향해 띠던 미소도, 온화한 표정도 깡그리 지운 채로 그를 마주했다. 꼭 행복이라는 마법 속에서 벗어나 불행한 현실을 맞닥뜨린 사람처럼.

한두 번이 아니던 그 기억을 떠올린 레니에는 곧 속에서부터 치미는 분노를 느꼈다. 그녀에게로 몸집째 던져진 절망인 주제에 그런 알량한 아량을 베풀었다고. 제 모든 걸 쑥대밭으로 만들고 침실 속에 가둬 버린 그가 보였다기에는 실로 모순적인 태도였다.

분통을 견디지 못하고 그리 따져 물으려는데, 그보다 한발 앞서 칸의 손이 레니에의 눈가를 틈 없이 가렸다.

“속아 주겠다고 했잖아.”

“…….”

“기꺼이 속아 주겠다고 했는데도…….”

저를 책망하는 그의 어조가 참 묘하게도, 씁쓸하고 처연하게 다가왔다. 그러니까 마치 상처라도 받은 것처럼……. 레니에는 자신이 한 생각에 스스로 소름이 끼쳤다. 상처라고? 이 피도 눈물도 없는 악한이? 일순 든 말도 안 되는 생각을 애써 떨쳐 내며 다급히 그의 팔을 뿌리치려는 순간이었다.

다가올 때처럼 그의 손길은 알아서 떨어져 나갔다.

“……!”

하나 이상했다.

그의 손은 이미 치워졌는데 아직도 무언가에 가려진 양 시야가 까맸다. 꼭 시각이라는 게 고통 없이 도려내진 것처럼.

레니에는 자신이 지금 눈을 뜨고 있는지 감고 있는지 분간할 수가 없어서 몇 번이나 눈망울을 깜박거렸다. 그럴수록, 서글프게 매달린 눈물이 뺨을 타고 주르륵 흘러내렸다. 갸름한 턱선을 타고 흐른 물방울이 바닥으로 뚝뚝 떨어졌다. 그건 그녀의 속에 맺힌 피눈물과도 같았다.

“안, 보여.”

급히 손을 뻗어, 다소 부산스럽게 아무 곳이나 짚어 보았다.

“안 보여…… 안 보여…….”

피비린내를 맡는 후각, 짭짤한 눈물 맛이 느껴지는 미각, 손바닥 아래에 닿는 촉각. 하물며 비틀린 발목에서부터 느껴지는 통각까지.

시각을 제외한 모든 감각은 멀쩡했다.

“안 보여, 안, 왜, 안 보여. 이, 이게 왜…….”

그러나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눈앞은 여전히 빛 한 줄기 들지 않는 암흑으로 물들어 있었다. 섬찟한 직감이 그녀의 이성을 짓뭉갰다. 부러진 발목은 시간이 지나면 나을지 몰라도, 한순간 가로채인 시력은 영영 돌아오지 않으리라는 직감이.

“무, 무슨 짓을 한 거야…….”

그래서일까, 레니에는 영원히 벗어날 수 없는 나락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느낌이 들었다.

“나한테 무슨 짓을 한 거냐고! 아아아악!”

싫어도, 거부하고 밀어내도, 결국 그녀는 제게 들이닥친 현실을 인지할 수밖에 없었다. 그토록 소름 끼쳐 하는 악이 마침내 그녀의 시야마저 덮어 버렸다는 처절한 현실을.

“더 이상 다른 희망 품지 말고 나에게만 의지해.”

그는 머리를 감싸 쥔 채 오열하는 레니에를 억지로 끌어당겨 안아 올렸다.

“흑, 흐으…….”

“나를 네 세상의 기둥으로 세워. 다른 건 필요 없으니.”

이렇게 바닥까지 끌고 왔음에도 그녀의 눈길은 여전히 희망을 찾아 헤매는 게 마뜩잖았다. 어여쁜 한 쌍의 눈은 칸, 그만 바라볼 게 아니라면 기능할 필요가 없는 것이었다. 무용하게 존재하느니 아예 멀게 만드는 편이 나았다.

오직 제 품속에 갇혀서, 저만 의존하는 생을 살아가도록.

“내게서 벗어날 생각을 할 바에야, 그냥 죽은 듯이 살아.”

제게로 축 늘어져 헐떡이는 가녀린 몸을 쓰다듬어 주는 손길이 부드러웠다. 그러나 입술 사이로 떨어지는 선고는 심장이 움츠러들 만큼 냉혹하기 짝이 없었다.

그가 침대로 한 발 한 발 나아가는 걸음에 맞춰서 걷어져 있던 침대의 휘장이 차츰차츰 처졌다. 레니에의 구슬픈 울음소리가 그 자취를 따라 진흙처럼 질척질척하게 묻어났다.

이윽고 까만 휘장이 그와 그녀의 인영를 꿀꺽 삼켰다.

* * *

만찬장에 삿된 기운이 물씬 차올라 있었다.

어스름한 달이 미약하게 모습을 드러내고 있으나 평소와 같은 난교는 벌어지지 않았다. 오늘은 인간과 비슷한 형상마저 해체한 채로 허공을 떠도는 검은 연기가 가득했다. 연기 사이로 둥둥 떠다니는 시뻘건 두 개의 빛이, 그들이 악마라는 사실을 증명했다.

그 안개 속에서, 칸은 금빛으로 번쩍이는 왕좌에 앉아 있었다. 그의 시선은 못 박힌 양 오로지 만찬장의 입구에만 꽂혀 있었다.

눈길이 향하는 행방의 답처럼 만찬장의 입구 바깥에는 레니에가 서 있었다. 그녀의 의지로 서 있다기보다는 양쪽으로 선 시종들이 억지로 붙들고 있는 쪽에 가까웠다.

이 세상에서는 두드러질 만큼 영롱한 녹안이 검은 베일로 가려져 있었다. 그러나 굳이 들춰 볼 필요가 없는 건 이미 그 눈동자는 빛도, 초점도 잃은 지 오래였기 때문이었다.

시종들의 독촉에 억지로 발걸음을 내디디는 그녀의 앞으로 만찬장 입구가 활짝 열렸다. 실내에 거뭇한 아지랑이가 잔뜩 일렁여서 그럴까, 그곳은 한 번 빠지면 나올 수 없는 구덩이 같았다.

물론 눈이 멀어 버린 레니에에게는 하루하루가 그 구덩이 속을 헤매는 것과 진배없었다.

“…….”

자의가 아닌 무력에 의해 이동되던 레니에는 별안간 움찔했다. 시각을 잃었다. 그럼에도 이상하게 전방으로 펼쳐진 새빨간 눈초리들이 제게로 쏠리는 것만은 똑똑히 느껴졌다. 오스스한 소름이 발끝부터 기어올라 정수리를 쭈뼛하게 만들었다.

“시, 싫어.”

어둡고 빨간 그곳을 향한 거부감이 치밀었다. 산송장처럼 시종들에게 얌전히 기대어 있던 레니에가 몸을 비틀었다. 한순간 붙잡힌 팔이 자유로워지고 그녀는 다급히 뒤로 돌았다.

하지만 이곳에서 벗어나기도 전에 철퍼덕 고꾸라졌다. 붕대가 감긴 발목의 부상 때문이었다. 저를 사랑한다는 악마가 단지 골이 난다는 이유로 부러뜨려 버린, 그 처참한 상처.

“싫어, 싫어, 싫어…….”

본능이 터뜨리는 소리가 그녀의 입술 새로 피를 토하는 것처럼 샜다. 바닥을 더듬더듬 짚는 그녀의 손등이 애처롭게 떨렸다. 그러던 순간이었다. 레니에는 제 허리와 다리 밑으로 쑥 들어와 몸을 쑥 들어 올리는 손길을 느끼고 파르르 떨었다.

볼 수 없었지만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그럼에도 그녀는 몸을 떠는 것 외에 아무런 저항도 하지 않았다. 이제 그런 건 무의미하다는 걸 깨달은 체념의 태도였다.

그녀에게로 기꺼이 걸음한 칸은 제게 기댄 신부를 끌어안고 왕좌로 향했다. 그곳에 다시 착석하며 그녀를 제 무릎 위로 앉혔다. 그는 하얀 얼굴을 희미하게 가리는 검은 베일을 걷어 올렸다.

진녹빛 눈동자.

예전엔 사람의 동공이라는 걸 알 수 있었지만 이젠 그저 정교하게 공예된 보석 같았다. 그의 힘에 의해 가려진 채 굳어 버린 동공이 그리 보이도록 만들었다. 미동 없는 시선이 오로지 칸의 얼굴에만 꽂혀 있었다. 악마는 그게 참 마음에 들었다.

칸이 그녀의 턱을 살짝 들어 올리고는, 옆에 있던 잔을 가져다 댔다. 자신의 피를 섞어 둔 적흑빛의 술이 그녀의 입술을 질척하게 적시며 기도로 넘어갔다. 그녀가 간신히 꼴깍 삼키는 걸 지켜보며 칸은 입꼬리를 부드러이 휘었다.

악마의 피를 마신 자는 불멸이 된다. 정확히는, 몸속에 삿된 것이 스며 들어가 생체의 리듬이 그대로 멈추어 버린다. 그에 따라 레니에는 더 이상 늙지도, 죽지도 않고 영원히 이 모습으로 칸의 곁에서 살아가리라.

아기를 출산한 이후 바로 먹여도 되었으나, 칸은 그녀가 왕비가 될 이 순간만을 기다려 왔다. 끝끝내 그 욕심을 달성한 그의 입가에 흡족한 미소가 감돌았다.

어느새 다가온 비론의 손에는 커다란 상자가 들려 있었다. 그 안에는 흑요석 빛깔의 몸체에 루비가 촘촘히 박힌 왕관이 들어 있었다. 그는 그것을 들어 레니에의 머리 위로 씌웠다.

“내가 이 순간을 얼마나 고대했는지 너는 모를 테지.”

칸이 그녀의 손을 그러쥐어 손등 위로 입을 맞췄다.

이제껏 조금의 죄책감도 없이 그녀의 모든 걸 깨부수고 파괴한 주범이 건네기에는 너무도 다정한 어투였다. 예전 같았으면 어떤 식으로든 질색을 표했겠으나, 지금의 레니에는 달랐다. 먹이면 먹이는 대로, 씌우면 씌우는 대로 칸의 품에 안겨 있기만 했다.

정말로 영혼 따위 사라진 인형처럼.

“이제 우린 영원히 함께할 거야.”

나의 사랑.

희열에 찬 그의 음성이 가려진 그녀의 베일 안으로 선명하고 또렷하게 스며들었다. 레니에는 여전히 얌전했다. 다만, 그녀가 쓴 베일은 소리도 없이 젖어 들어 가고 있었다.

그간 허울 좋게 전시되어만 있던 왕비의 관이 드디어 주인을 찾았다. 그에 따라 만찬장 내 악의 기운이 한층 더 요란하게 날뛰었다. 칸 또한 웃음을 그치지 못했다. 그 분위기 속에서 철저히 유리된 양 그녀만이 고요한 눈물을 흘렸다.

예배당에서 맞이하던 폭우처럼 하염없이, 끝없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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